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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세계 ㉚-1
제6장 대승불교와 굽타기 이후의 불교 – 인도 불교의 성숙과 쇠퇴
제2절 굽타 시대의 불교 – 승원 내의 부파와 대승
▶고유명사와 그밖의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표기
1. 굽타 왕조의 문화와 불교
종교 신앙이나 종교 생활의 형태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번영의 길을 걷든 쇠퇴의 길을 치닫든, 종교의 외적 표현은 그 시대의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기 마련이다. 4세기 초에 시작되는 굽타 왕조시대와 그 이후의 불교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대체로 4~8세기경에 이르게 되면, 불교 사원은 더욱더 풍요로워지고 기구도 잘 정비된다. 숭배의 대상이 되는 부처와 보살들의 수도 늘어나고, 각종 예배 의식이 확립되어 갔다. 학문 연구도 크게 진전되어 대승 철학자와 소승 논사(論師) 사이에서나 또는 불교 사상가와 힌두교 사상가들 사이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불교는 종래의 전승을 이어받으면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이루어진 불교의 발전은 불교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던 힌두교 – 더욱 정확하게 말한다면 힌두 세계 –와의 관계를 종전보다 한층 더 강화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힌두화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동시에 힌두화된 불교는 차츰 독자성을 상실한 채, 힌두 세계로 흡수되어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결구 이 시대의 인도 불교는 원숙과 쇠퇴라는 두 가지 국면을 한꺼번에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1) 굽타 왕조의 왕들
굽타 왕조의 성립은 서기 320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앞서서 북서인도에서 중부 일대에까지 위력을 떨치던 쿠샨 왕조는 3세기 중엽에 그 세력을 잃고 말았다. 또 데칸 지방에서는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던 사타바하나 왕조가 분열되어 데칸의 북부와 서북부 일대는 3세기 후반에 이르러 바카타가 왕조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 안드라 지방에서는 이크쉬바쿠 왕조가 일어났으며, 그 남방에서는 팔라바 왕조가 대두했다. 갠지스 강 중류 지역으로부터 그 동쪽에 위치한 동부 인도는 혼돈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마가다의 찬드라굽타가 나타나서 갠지스 강의 중류와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다음, 서기 320년에 왕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굽타 왕조가 시작된다. 제2대 삼드라굽타(335~375)와 제3대 찬드라굽타 2세(375~414)에 걸쳐 세력이 크게 신장되어 서인도의 사카 크샤트라파 왕조를 멸망시키니, 동쪽으로는 벵갈만, 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 북쪽으로는 현재의 네팔 영토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대국으로 발전했다. 서부 데칸의 여러 항구 도시도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동시에 바카타가 왕조와 혼인관계를 맺어서 서방 무역에도 참가하게 된다. 찬드라굽타 2세는 그 밖의 여러 왕조들과도 혼인을 통한 우호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점차 세력을 신장시켜 나갔다.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은 무인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기호도 겸비하며 있었다. 제2대인 삼드라굽타왕은 문학과 음악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알라하바드에 남아 있는 왕의 송덕비문도 그를 가리켜 ‘시인의 왕’이라 찬양하고 있다. 또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비파를 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아들인 찬드라굽타 2세도 역시 문화의 애호자여서,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학사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칼리다사는 궁중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안정과 풍요를 누리던 사회 속에서는 문인들이 속속 배출되고 학문 연구도 더욱 진전되었다. 힌두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으며, 외국에서도 많은 학자∙종교인∙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중국 승려 법현이 인도에 와서 405~411년 사이에 불교를 공부한 것도 바로 이 왕의 시대였다.
찬드라굽타 2세의 아들 쿠마라굽타왕(415~454)시대에도 번영이 계속되었던 바, 그는 날란다 사원을 창건했다. 그러나 다음 스칸다굽타왕(455~467) 시대에 이르면 그렇게도 번영을 자랑하던 굽타 왕조에 정치적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는 훈족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의 북서쪽에 침입했으며, 또한 내란도 빈발했다. 475년에는 로마 제국이 멸망하여 서방과의 무역도 점차 쇠퇴해 갔다. 반면에 동남아시아 각국과의 무역이 성해지기는 했지만, 이 왕 때부터 금화의 질이 급격히 저하된 점으로 미루어 전반적인 경제 상태는 매우 곤란한 형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왕의 사후, 굽타 왕조는 급속도로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그 후로도 물론 몇몇 왕의 이름이 더 있긴 하지만, 굽타의 조정에서는 이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부인도는 결국 여러 소왕국들로 나뉘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2) 굽타 왕조 이후
훈족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으로서 그 트라마나왕은 5~6세기에 걸쳐 북부인도 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다. 그 아들 미히라쿠라(6세기 전반)는 매우 포악한 인간으로서 불교를 적대시하여 서인도의 불상을 파괴하고 불교도들에게 박해를 가했다. 7세기에 인도를 방문했던 현장은 그와 같은 파괴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으며, 대승경전인 「연화면경」도 미히라쿠라의 불교 파괴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미히라쿠라는 최후에 캐시미르 지방으로 쫓겨나서 6세기 중엽에 죽고 만다. 그러나 훈족의 침입은 다른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인도 침입을 유발시켰으며, 그 때문에 인도의 정치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7세기 초엽에는 카냐쿠브자(지금의 카나우지)에 하르샤왕이 나타나서 한때 광대한 북인도 일대를 지배했다. 현장은 이 왕의 궁전에 머무르면서 보호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현장에 의하면 그 나라는 정치가 안정된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고 있어서 문화가 번창하고 불교도 널리 신봉되고 있었다고 한다. 하르샤왕은 문필가적 소양도 뛰어나서 스스로 불교적 세계관에 의한 산스크리트 희곡을 짓기도 했다.
그의 사후, 정치 상황은 또다시 혼미를 거듭하여 북인도는 여러 개의 소왕국들로 분립되는 국면을 맞게 된다. 5세기 후반에 이르러 데칸 지방의 바카타카 왕조는 북인도의 코살라 지방까지도 수중에 넣게 되는데, 6세기 전반의 하리세나왕은 동인도의 칼링가로부터 남인도 지역에까지 그 지배권을 넓혀 갔다. 그는 아잔타 16굴, 17굴의 비하라를 기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에 바카타카 왕조는 점차 쇠퇴하게 되어 차르캬 왕조에게 길을 양보하고 만다.
이러한 여러 왕조들의 흥망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불교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모아들이게 되지만, 그 실정은 굽타 왕조 이후에 점차 현저해진 힌두교적 가치관의 중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3) 굽타 왕조와 힌두 전통의 부흥
굽타 왕조가 출현하기 이전인 기원전 1세기경부터의 북인도나 북서인도는 이민족 지배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카족, 쿠샨족, 그리이스 세력, 그 밖에 서아시아의 여러 세력들이 정치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분명히 인도화(힌두화) 되었ㄷ. 오히려 힌두교가 갖가지 이질적 요소들을 섭취하고 변용시켜서 자신의 내면에 축적함으로써 스스로의 내용을 살찌우면서 발전해 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굽타 왕가는 마가다에서 일어났으므로 고대로부터의 부족적 흐름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전통적인 힌두 문화를 중시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굽타 왕조는 일종의 복고 왕조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경향은 생활문화사적 측면에서도 현저하여 굽타의 역대 왕들은 거의가 열렬한 힌구교도, 그것도 비쉬누파의 신도들이었다. 베다 성전에 대한 가치관이 재인식되고 바라문적 색채가 짙은 힌두 의례라 부활되었다. 제2대의 삼드라굽타왕은 아쉬바메다(마사제, 馬祀祭)를 성대히 거행했으며, 관정 의례를 포함한 전통적인 힌두 의식들을 부활시켰다.
일반 서민들 사이에도 힌두의 종교 의례가 침투되어 의례 양식으로 확립되어 갔다. 쉬바, 비쉬누 같은 힌두교의 주요한 신들은 각지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그 기능과 성격을 높여 갔으며, 이에 따라 신화도 정비되기 시작했다. 또 각 지방과 각 촌락 고유의 신들에게 대한 의례가 정착되었으며, 각 방위신과 여러 귀령들에 대한 숭배도 성행하게 되었다. 「마누 법전」을 비롯한 제반 법전들이 정비되고, 새로운 저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힌두적 세계관과 인생관은 새롭고 확실한 모습으로 정착되었으며, 힌두교의 고전적 양식이 확립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신분과 직업도 고정되어 갔는데, 이에 따라 토지의 매매나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출생한 고향에 고정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집권적 봉건국가 성립과 함께 인도의 사회는 일단 안정을 보이게 되지만, 이와 함께 안일과 침체의 기풍도 빚어내게 되었다.
4) 산스크리트어와 산스크리트 문학
이처럼 힌두적 가치관이 강조됨에 따라서 바라문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가 빈번히 쓰이게 되었다.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역대 왕들이 비문에 새기에 한 글은 ‘비문 프라크리트어’에 의하여 기록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언어는 대체로 2~3세기경부터 산스크리트어로 바뀌게 되었고, 4세기 특히 굽타 왕조의 성립 이후에는 거의 완전할 정도로 산스크리트어로 바뀌어졌다.
이 시대에 이르게 되면 동일한 아리아 계통의 언어들도 이미 방언의 차이를 넘어 다른 언어라 할 정도의 큰 차이를 나타냈으며, 따라서 서로 다른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물며 드라비다계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는 전혀 의사를 소통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산스크리트어는 인도 전역에셔의 공통어로서 그 가치를 높여 갔다. 산스크리트어는 단지 공통어로서 뿐만 아니라 힌두 세계의 엘리트 층을 대변하는 언어로서 힌두 문화를 대표하게 되었다.
산스크리트어에 의한 문학은 수사학을 포함한 시문학이나 논리학의 전개와 함께 그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그 선구는 쿠샨 왕조 시대의 불교 시인인 아쉬바고샤(마명, 馬鳴)가 지은 「붓다차리타」(한역의 불소행찬(佛所行讚)와 「사운다라난다 카뱌」 혹은 3세기의 서인도를 무대로 삼을 슈드라카의 「무릿차 카티가카」(흙의 작은 손수레) 등인데 산스크리트 문학의 황금기는 역시 칼리다사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칼리다사는 인도 최대의 시인으로 칭송되는데 멀리 괴에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만고에 뛰어난 그의 문재는 서사시∙서정시∙희곡 등의 분야에서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샤쿤탈라」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다. 선녀와 신선 사이에서 태어난 샤쿤탈라와 하스티나프라(델리 근처)에 도읍을 정했던 드후샨타왕의 사랑이 아름다운 자연 묘사와 함께 전개된다. 어부나 하급 경찰 등이 등장하는가 하면, 천신∙신선∙선녀 등이 자유롭게 나타나서 인간에게 말을 걸곤 한다. 작자는 현실 세계와 신화, 전설 세계가 혼연일체로 융합된 그의 특이한 문학 세계를 펼쳐 나간다.
칼리다사나 그 후의 시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산스크리트 문학 세계에서는 신과 인간이 자유롭게 교류하는데, 맥락의 흐름은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소재로 다룬 것은 신화나 전설 종류가 압도적이며, 따라서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엄밀한 의미로서의 사회극도 없으며, 비극도 드물다.
이러한 현상은 산스크리트 문학을 지탱해준 사회계층과 관련이 있다. 당시에는 서방 교역이나 기타의 사업으로 거부가 된 상류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3세기경에 제작된 「카마 수트라」는 나가라카(도시의 인사)로 대표되는 왕족∙호족∙신사들의 화려한 생활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살롱 같은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시인들은 독특한 미(美) 의식과 시문의 기교를 세련시켜 나갔다. 시를 듣고 음미하여 문학적 비판을 행하는 마당에 생생한 현실에 대한 관심이 생겨날 여지도 없었을 뿐더러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러한 순수 문학과는 별도로 종래의 서사시도 거의 완성된 형태로 전승되어 「푸라나」(고담, 古譚)라는 일군의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이것은 역사서에 유사(類似)한 것으로서 역대 왕조의 왕통과 역사가 반(半) 신화적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힌두교의 신관념, 신화, 민간신앙, 각종 의례, 인생관, 다르마의 참모습 등 힌두교의 기본 관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힌두교의 침투와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5) 육파 철학과 바크티(박티)
한편 철학적 사고는 이른바 육파철학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냐야, 바이셰쉬카, 상캬, 요가, 미망사, 베단타의 여섯 학파이다. 이 가운데 중요한 학파는 나중의 둘, 특히 베단타 학파이다. 이 학파는 명칭 그대로 베다에 근거를 두고서 비(非)바라문적 교설을 꺾는데 힘쓰고 있다.
한편 「바가바드 기타」 이래로 급속하게 일반화된 바크티 신앙, 즉 자신을 공(空)으로 하고 절대자 앞에 귀의하여 오로지 신애(信愛)을 바치는 곳에서 해탈을 구하는 신앙은 서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그 실천과 함께 형이상학도 발전되어, 이른바 힌두교 여러 파들을 배출해 냈다. 힌두교가 비교적 분명한 형태의 종교로 부각되기는 이 시대가 처음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를 ‘힌두교’의 성립 기점으로 보는 설도 있다. 여하튼 굽타 왕조 시대에 이루어진 힌두교적 세계관의 정착은 힌두 문화의 고전적 전승을 확립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불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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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찬드라 굽타 = 찬다라 굽타 = 찬달아 굽타 = 대월지국= 백제지국
바가바드 기타 = bhagavat gita
바가 = 박아 , 박가 = 땅에 박다 , (못을) 박다 , 성교 ,
밭 vat 농사짓는 땅
기타 = 악기 , 其他 , 여러가지 , 송가 , 노래
바가밭 기타 , 박아 밭 기타 , 바가바드 기타
밭에 씨를 뿌리는 성자에 말씀 , 세상에 생명에 씨앗을 뿌리는 성자 이야기
빨리어 발음 (박까 , 바까 등)
석가무니 십호명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