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89) 고종 4 - 1차 몽고와의 전쟁
1231년 몽고의 칸 오고타이는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에 대해 힐책하는 내용과 함께 고려에게 항복하라는 국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동안 열심히 전쟁을 대비해온 고려가 항복을 거절하자 그해 8월 몽고군의 원수 살리타(살리타이, 살례탑)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니 드디어 고려와 몽고의 28년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 의주를 함락시키고, 이때 투항한 고려의 장수 홍복원과 그의 군사들과 함께 귀주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귀주성을 지키고 있던 고려의 장수 박서와 김경손을 비롯한 고려군이 거세게 저항하자, 살리타는 귀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포차와 누차 등 무수한 대형 병기를 이용하는 등 맹공을 가하였으나 귀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수도 개경으로 진격하여 개경을 포위해 버립니다.
몽고군이 개경을 포위하고 4대문 밖에 주둔하게 되자 백성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민심이 들끓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에 별다른 대책이 없음을
알고 몽고에 강화를 요청하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착고여의 죽음에 대하여 착고여 일행의 귀국 경로가 금나라의 관할 지역임을 내세워 고려가 아닌
금나라의 소행임을 설득하여 강화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명분이 강화이지 기실은 항복 할 테니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말아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몽고군은 정기적인 공물을 바칠 것과 태자를 포함하여 관리와 대관의 아들 딸 1천 여명씩을 몽고에 볼모로 보내라고 윽박지릅니다.
일단 살리타를 구워 삼은 고려는 조만간 그의 요구대로 시행 할 것을 약속하고 이듬해 정월에 몽고군을 철군시킵니다. 살리타는 강화의 감시와 이후 고려에 대한 간섭을 위해 개경과 평안도 일대에 다루가치(達魯花赤 : 행정감독관)를 72명과 약간의 수비군을 주둔시키고 철수하였습니다.
다루가치는 몽고어로 진압에 종사하는 사람 또는 속박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 뜻과 같이 그들은 각지에서 고려의 관리와 백성들을 억압하였으므로,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지에서 다루가치를 비밀리에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오히려 백성들 사이에서는 다루가치가 죽게 되면 자신들이 몰살당할 것을 우려하여 밀고를 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발생하였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1232년 2월 요동 지역으로 철수해 있던 살리타가 고려의 국사를 지도하기 위해 수하인 도단을 개경에 보내게 됩니다. 그는 본래 거란 사람인데 성품이 음흉하고 간사하여 전일 몽고군을 강동성으로 불러들여 거란을 전멸시킨 장본인인데, 고려에 도착한 그는 고려를 지도하기 위해 온 것인 만큼 대궐에 들어가 있겠다고 고집을 피우지만 거절되자 성을 내며 사관으로 들어갑니다. 화가 난 그는 사관의 영송판관으로 배치되어 있던 낭중 민회적이 자신을 잘 공대하지 못한다고 시비를 걸어 민회적을 때려 죽이는 만행을 보입니다.
게다가 살레타는 서찰을 보내 고려의 백성을 선발하여 개주관과 선성산 밑으로 이주시켜서 농사를 짓도록 하라고 요구를 하여 옵니다. 고종과 조정 대신들은 그들의 만행과 무리한 요구에 분노하여 몽고가 요구하는 모든 공물의 공여와 태자와 대신들의 자제를 몽고에 인질로 보내기로 한 것 등 모든 것들을 없었던 일로 거절하여버립니다.
고려왕조실록(90) 고종 5
- 강화도 천도와 2차 몽고와의 전쟁
이렇듯 고려는 몽고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또다시 이어질지도 모르는 몽고의 침략을 방어할 방법을 모색해 나갑니다.
한편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치밀대로 치민 살리타는 지의심을 포함한 고려의 사신들을 잡아 본국으로 압송하여버립니다.
이리하여 또다시 몽고와 고려 간에 전운이 감돌자 집권자 최우는 몽고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고종을 위협하여 1332년 6월 강화로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강화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몽고는 유목 민족으로 바다를 두려워하여 수전(水戰)에 취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강화에 궁궐을 짓고 대신과 관리들 그리고 일부 백성들을 이주시켜 장기전에 대비하게 됩니다.
고려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몽고는 비난을 퍼부었고, 고려에서는 누차 서찰로 다른 뜻이 없다고 변명을 하지만, 몽고는 개경으로 환도를 요구하며 다시 침입을 감행하지만 몽고군의 원수 살리타가 처인성 전투에서 사살되자 당황스러워진 몽고군은 바로 철군을 하고 맙니다.
기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은 강화로 천도한 것을 비난하며 고종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재차 고려를 침공하게 된 것인데, 몽고군은 고려 땅에 들어서자 파죽지세로 개경을 거처 한양을 함락시킨 후에 처인성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난을 피하여 처인성에 와 있던 승려 김윤후가 쏜 화살이 살리타의 심장을 정통으로 꾀뚤어 버린 것입니다.
갑작스레 총대장을 잃은 몽고군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가 수많은 몽고군이 포로가 되거나 사살되었고 전열이 급속히 와해 된 몽고군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니, 장수들 역시 전의를 상실하고 기운이 꺾여서 제각기 살기위해 도망치고 맙니다.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난 몽고는 이후 당분간은 동진과 금나라를 평정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이게 되니, 덕분에 고려는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하였다고는 하나 엄청난 재산의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이 와중에 부인사에 소장하고 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이 불타 없어지는 등 중요한 문화재가 다수 소실(燒失)되는 불상사를 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