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김씨 영분공파는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다
경주김씨 영분공파의 중시조는 평장사 김인경(金仁鏡(?~1235)이다.
김인경은 고려사 열전에도 등장하는 훌륭한 인물이다.
고려사열전은 1449년(세종 31)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2년 반 만에 완성을 보고, 1454년(단종 2)에 간행했다.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齊) 등의 관료들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국역 고려사열전 김인경( 金仁鏡)
김인경(金仁鏡)은 처음 이름이 김양경(金良鏡)으로 경주(慶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사람이며 평장사(平章事)·양신공(良愼公) 김의진(金義珍)의 4세손이다.
부친 김영고(金永固)는 흥교도(興郊道) 관역사(館驛使)2)로 있으면서 공정 청렴하고 인자한 행정을 베풀어 누구도 매로 다스리지 않았다. 뒤에 귀주갑장(龜州甲仗)으로 있을 때 마침 김보당(金甫當)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자 김영고도 영주(寧州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 옥에 수감되어 사형만 기다리게 되었다. 흥교도의 향리와 백성들이 처치사(處置使)를 찾아가 눈물로 용서를 청하자, 처치사가 차마 처형하지 못하고 형구를 채워 개경으로 압송했다. 승선(承宣) 이준의(李俊儀)3)가 평소 김영고와 친하게 지낸 터라 적극 힘을 써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이 이미 몰수되었기 때문에, 처자가 의탁할 곳이 없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자, 흥교도의 향리들이 곡식과 옷감을 거두어 풍족히 보내주었다. 뒤에 합문지후(閤門祗候)까지 지냈다.
김인경은 재주와 식견이 정밀하고 총명했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명종 때 을과에 2등으로 급제해 직사관(直史館)이 되고 여러 차례 승진해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 초 조충(趙?)이 거란(契丹) 군을 강동성(江東城 : 지금의 평양특별시 강동군 강동)에서 토벌5)하면서, 김인경을 불러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당시 몽고 원수 카치운[哈眞]과 동진(東眞) 원수 완안자연(完顔子淵)이 군량을 요청해오자, 조충이 사정을 염탐하려고 했으나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김인경이 가겠다고 나서자 조충은, “그대의 직책은 군막 안에서 작전을 짜는 것이지 위험을 무릅쓰고 첩자로 가는 것은 평소에 익힌 일이 아니다. 내가 어찌 감히 요청하겠는가?” 하고 반대했다. 그러자 김인경은, “제가 알기로는 몽고가 진을 칠 때 손무(孫武)·오기(吳起)의 병법7)을 취한다고 합니다. 제가 젊은 시절 육서(六書)8)를 읽어서 병법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감히 청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조충이 허락하고, 바로 김인경을 시켜 정예군 1천 명과 쌀 1천 석을 보내 주었다. 그때 카치운과 완안자연은 거란군을 대주(岱州)에서 공격하기 위해 주의 서편 독산(禿山)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인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만나자, 두 원수는 풍악을 벌이고 노고를 치하하는 잔치를 베풀어 극도로 환대해 주었다. 김인경이 주의 서문 밖에 방진(方陣)을 치는 동안, 두 원수는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았으며, 몽고 군사 마흔여섯 명이 갑옷차림에 칼을 차고 마주 서 있었다. 김인경이 광대로 하여금 군영 앞에서 열을 짓고 북을 치며 고함지르며, 여러 가지 놀이를 하게 하는 한편 스무 명의 명사수들을 시켜 한꺼번에 활을 쏘게 했다. 화살이 대주의 성안으로 날아들자 성에 올라 망을 보던 거란 군사들이 모두 도망쳐버렸다. 두 원수가 군대의 진용이 정돈되고 엄숙한 것에 감탄한 나머지 다시 김인경을 맞아 윗자리에 앉히고 위로하는 잔치를 재차 베풀었다. 그 뒤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옮겼다가 그 공으로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承宣)에 발탁되었다.
고종 14년(1227) 동진(東眞)이 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장주(長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로 쳐들어오자 김인경이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를 맡아, 의주(宜州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 덕원)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참소를 입어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좌천당했는데, 옛 친구들은 한 사람도 전송하는 자가 없고 다만 문생(門生)들만 교외에서 전송하자, 김인경이 이런 시를 지었다.
채찍 하나로 오랑캐를 다 쓸어버렸건만
이젠 만 리 먼 남쪽 땅으로 쫓겨 가는 신하라.
옥 죽순같이 준수한 제자들 많이 전송해주니
깊은 감회에 수건 적시는 눈물 멈추기 어렵구나.
또 고을의 벽(壁)에 이런 시를 써 붙였다.
감히 푸른 하늘 향해 무엇을 원망하리.
쫓겨 와도 되레 온 성을 얻었으니.
언제쯤 영각(鈴閣)을 떠나 황각(黃閣)에 오를 것이며
태수의 열을 떠나 재상 반열에 들 수 있을까.
이 시에 나온 말처럼 얼마 후 형부상서(刑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되고, 곧 이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니 당시에 이 일을 미담으로 여겼다.
고종 19년(1232) 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감수국사(監修國史)로 승진했으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가 22년에 죽으니 시호를 정숙(貞肅)이라 하였다. 김인경은 문관과 무관으로서의 행정 능력을 모두 풍부히 갖추었으며, 시사(詩詞)가 청신하고 특히 근체(近體)9)의 시부(詩賦)를 잘 지었으므로 세상에서 ‘양경(良鏡)의 시부’라 일컬었다. 아들 김연성(金鍊成)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상서좌복야·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고려사 열전의 기록을 보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김인경(金仁鏡)은 평장사(平章事)·양신공(良愼公) 김의진(金義珍)의 4세손이다.
김의진(金義珍)의 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候) 김영고(金永固)이다.
그러므로 김인경(金仁鏡)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김의진(金義珍)--( )--( )--김영고(金永固)--김인경(金仁鏡)-김연성(金鍊成)
김인경의 상계 계보와 관련된 몇 개의 고려묘지명이 있는데,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의종3년),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 김자류묘지명(金子?墓誌銘)-1146년(인종24년)다.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 의종3년)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
김자류묘지명(金子?墓誌銘)-1146년(인종24년)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 의종3년)
연대: 1149년(의종3년)
크기: 세로 26.4cm, 가로 45.5cm, 글자크기 1.2cm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찬자/서자/각자 황문통(黃文通) / 미상 / 미상
高麗國樂浪郡夫人金氏墓誌銘」
夫人姓金氏其先新羅王之裔也皇曾祖諱周鼎」
太子太保皇祖諱義?中書侍郞平章事皇考」
諱▨」
德監察御史母桂陽夫人金氏刑部侍郎左諫議大夫九鉉女也適?校右僕射守御」
史雜端皇甫」
君讓君先室有一男一女夫人母之如己出皆先夫人死夫人性忠謹凜凜有烈婦風」
至如女工尤所不懈旣孀居垂十五年撫家人以仁若有不如意者必以義斷之不能」
間言其待內外親戚無老幼賢否一皆賑拯越壬寅年封樂浪縣君至甲辰年加郡君」
又於癸丑年拜郡夫人是時大宋紹興三年大金天會十年也生二男長曰?壬戌年」
登進士第官至禮賓注簿同正次曰存癸亥年中南省試第一皆聞人及皇統九年夏」
五月十日辛卯以疾不享年六十有五是月二十一日壬寅葬朝陽山南麓姪寶文」
閣校勘南平?文通誌之銘曰嗟乎造物夫人將安歸壽宮??白雲其飛庸?知憑」
?馭氣蟬?乎塵垢之境而深造乎希微子孫千祀德其有餘輝」
판독자 : 허흥식
[출전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고려국(高麗國) 낙랑군부인 김씨(樂浪郡夫人 金氏) 묘지명
부인의 성은 김씨로, 그 선조는 신라왕(新羅王)의 후예이다. 증조부 주정(周鼎)은 태자태보(太子太保)이고, 조부 의진(義?)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이다. 아버지 후덕(侯德)은 감찰어사(監察御史)이고, 어머니 계양군부인 김씨(桂陽郡夫人 金氏)는 형부시랑 좌간의대부(刑部侍郞 左諫議大夫) 구현(九鉉)의 딸이다.
(부인은) 검교우복야 수어사잡단(檢校右僕射 守御史雜端) 황보양(皇甫讓)군에게 시집갔다.
군에게는 전처에게 1남 1녀가 있어 부인은 어머니로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길렀으나, 모두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부인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삼가며 늠름한 열부(烈婦)의 기풍이 있었으며, 여자들이 하는 일에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된 지 거의 15년 동안 집안 식구들을 인(仁)으로 어루만지고, 뜻과 같이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의(義)로써 분명하게 하니, 이러저러한 말이 없었다. 내외의 친척을 대하는 데에도 노소(老少)나 현부(賢否)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한결같이 도와주었다.
임인년(예종 17, 1122)에 낙랑현군(樂浪縣君)에 봉해지고, 갑진년(인종 2, 1124)에는 군군(郡君)의 작호가 더해졌으며, 또 계축년(인종 11, 1133)에는 군부인(郡夫人)에 봉해졌으니, 이 때는 바로 송(大宋) 소흥(紹興) 3년이고, 금(大金) 천회(天會)11년이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서(?)는 임술년(인종 20, 1142)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에 오르고, 둘째 존(存)은 계해년(인종 21, 1143)에 남성시(南省試)에 장원으로 급제하니, 모두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황통(皇統)9년(의종 3, 1149) 여름 5월 10일 신묘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65세이다. 그 달 21일 임인일에 조양산(朝陽山) 남쪽 기슭에 장례지내고, 조카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 남평(南平)황문통(黃文通)이 지(誌)를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조물주(造物主)시여,
부인은 어디로 갔습니까. 무덤[壽宮]의 숲 무성한데
흰 구름 그 위를 나네.
허공에 기대어 기운을 타서 티끌 같은 세상,
허물 벗듯 벗어나 희미한 세상으로 갈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자손은 천 년을 이을 것이니 그 덕은 길이 빛나리라.
해석자: 김용선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 의종3년)
부인의 성은 김씨로, 그 선조는 신라왕(新羅王)의 후예이다.
증조부 주정(周鼎)은 태자태보(太子太保)이고, 조부 의진(義?)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이다. 아버지 후덕(侯德)은 감찰어사(監察御史)이고, 어머니 계양군부인 김씨(桂陽郡夫人 金氏)는 형부시랑 좌간의대부(刑部侍郞 左諫議大夫) 구현(九鉉)의 딸이다.
여기서 김의진의 아버지는 태자태보(太子太保) 김주정(金周鼎), 김의진의 아들은 감찰어사 김후덕(金侯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주정(金周鼎)-김의진(金義珍)-김후덕(金侯德)-황보양처김씨(1065~1149)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
연대 1158년(의종12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君諱惟珪慶州▨▨▨卓■有奇才二十歲升 諸司馬慨然有澄淸」
天下之▨日(?)以讀▨皆(?)爲事二十七以虎學赴天場擢第爲第二人通」
判龍灣府(?)叔(?)不與民爭終三歲無纖毫過▨滿投閑有年于玆 主上欲」
修(?)好中華(?)▨人所使君爲衆所薦奉使卽入中朝踰年復 命及▨仕」
備官員兼?軍事退食▨公不重(?)啓處甫十載累遷寫經注簿越四」
載遷大官令明年出守宣城比(?)及考績諭供驛令尋遷尙食直長爲人」
耿介不?恬淡寡慾孝養老母持(?)其能負其氣不理坊▨以取過於」
世饗年六十四官止七品而卒▨亥(?)▨夫曾祖?部員外郞諱周鼎」
祖戶部侍郞諱義先考內園令諱侯伯母淸化郡夫人▨氏娶大府」
少卿田氏諱世均女君子男三人長曰利用爲樞密院別駕次曰鉉入」
大學爲春坊公子次曰▨未仕女二人長適尙衣直長同正金得器次適」
良?令同正李東天時大金正豊三年戊寅二月十一日壬寅葬于桃」
源驛▨澗西向之山麓也 銘曰 展也大儒 維志之求」
行有檢侯 不改其輪 一彼一此 克壯其猷 不事産業」
知命不▨ 忠孝兩全 寵祿未優 序行刻銘 爲識諸幽」
〔출전:『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2001)〕
군의 이름은 유규(惟珪)이며, 경주(慶州) 사람이다. ▨▨ 탁월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랐으나, 분연히 천하의 ▨를 깨끗하게 하고자 날마다 책을 읽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27세 때 무예[虎學]로써 과거[天場]에 나가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용만부통판(龍灣府通判)이 되어 끝까지 백성들과 더불어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니, 3년이 지나도록 터럭만큼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 임기가 찼으나 관직이 없이 몇 년 간 지냈다.
임금이 중국과 수호하고자 하여 ▨ 사람을 사신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군이 여러 사람들의 천거를 받아 사신으로 중국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에 돌아와 보고하니, ▨ 관원 겸 참군사(官員 兼 ?軍事)를 주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 공은 10년간 집에서 편히 쉬다가 사경주부(寫經注簿)로 옮겼다. 4년이 지나 대관령(大官令)으로 옮겼고, 다음해에는 선성(宣城)의 수령이 되어 나갔다. 근무성적에 따라 공역령(供驛令)이 되었다가 이어 상식직장(尙食直長)으로 옮겼다.
사람됨이 지조가 굳고 얽매이지 않았으며 조용하고 담백하여 욕심이 적었으며, 노모를 효성스럽게 잘 모셨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기가 바로 펴지지 못하고 막혔으며, ▨ 얻어서 세상을 보냈다. 향년 64세로, 관직은 7품에 그쳐 사망하니 ▨해(亥)▨.
증조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주정(周鼎)이고, 조부는 호부시랑(戶部侍郞) 의선(義先)이다. 아버지는 내원령(內園令) 후백(侯伯)이고, 어머니는 청화군부인(淸化郡夫人) ▨씨이다. 대부소경(大府少卿) 전세균(田世均)의 딸과 결혼하였다. 군은 자녀로 아들은 셋이 있으니, 장남 이용(利用)은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고, 차남 현(鉉)은 대학에 들어가 춘방공자(春坊公子)가 되었으며, 3남 ▨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딸은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 김득기(金得器)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양온령동정(良?令同正) 이동천(李東天)에게 시집갔다.
금(大金) 정풍(正豊) 3년 무인년(의종 12, 1158) 2월 11일 임인일에 도원역(桃源驛) ▨계곡 서쪽의 산기슭에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진실로 큰 선비[大儒]였으니 오직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가져서
행동에 법도가 있어 아름다웠고 그 모습 바꾸지 않았네.
이 때는 이렇게 저 때는 저렇게, 그 꾀를 훌륭하게 할 수 있었지만
재물을 구하는데 힘쓰지 않았고 천명(天命)을 알아서 ▨하지 않았네.
충과 효가 온전하였으나 총애와 봉록이 넉넉하지 않았으니,
공의 평생을 서(序)로 쓰고 명(銘)에 새겨 저승이 알도록 하네.
해석자: 김용선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
김유규(金惟珪 : 1095~1158)
증조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주정(周鼎)이고, 조부는 호부시랑(戶部侍郞) 의선(義先)이다. 아버지는 내원령(內園令) 후백(侯伯)이고, 어머니는 청화군부인(淸化郡夫人) ▨씨이다.
김주정-김의선-김후백-김유규-김이용(金利用)
김 현(金鉉)
김▨▨
고려사 열전 김인경
김의진(金義珍)--( )--( )--김영고(金永固)--김인경(金仁鏡)-김연성(金鍊成)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 의종3년)
김주정(金周鼎)(태자태보)-김의진(金義珍)(중서시랑평장사)-김후덕(金侯德)(감찰어사)-황보양처김씨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
김주정(예부원외랑)-김의선(金義先)(호부시랑)-김후백(金侯伯)(내원령)-김유규(金惟珪)
김의진(?-1070년 8월)
황보양 처 김씨(皇甫讓 妻 金氏 : 1065~1149)
김유규(金惟珪 : 1095~1158)
김영고(金永固 ?-?) 1173년김보당의 난에 연루됨
김인경(金仁鏡: ?~1235)
김의진(?-1070년 8월)에 관한 고려사절요의 기록
1. 문종 15년(1061년)-좌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로 삼음
○ 왕총지(王寵之)를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김원정(金元鼎)을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로, 최유선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권이부상서사로, 이유충(異惟忠)을 참지정사로, 김원황(金元晃)을 중추원사로, 김의진(金義珍)을 좌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로, 김양지(金良贄)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2. 문종 22년(1068년)-판상서병부사로 삼음
○ 최유선을 판상서이부사로, 왕무숭(王懋崇)을 판상서형부사로, 김의진(金義珍)을 판상서병부사로 삼았다.
3. 문종 24년 (1070년 )-8월 세상을 떠남.
○ 가을 8월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의진(金義珍)이 졸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나이 70세가 되면 치사(퇴임)하므로 1070년에 세상을 떠난 김의진은 최소한 1000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연성
황보양처김씨
의선(義先)-후백(侯伯)-유규(惟珪)
그렇다면, 주정(周鼎)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경주김씨족보(1934년) 영분공파 계보는 이렇게 되어 있다.
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으로 되어 있다.
고려사열전 김인경, 황보양처김씨묘지명, 김유규묘지명, 경주김씨족보를 종합하면, 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이 일치를 보이고 있으므로,
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으로 보는 것은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경주김씨족보에는 예겸(禮謙)의 이름 앞에 삼한벽상공신내사령이라는 관직이 붙어 있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940년 신흥사를 중수할 때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의 초상을 공신당 동.서 벽에 그려 넣어진 공신)으로 되어 있는데, 삼한벽상공신은 고려 태조와 동시대 인물이며 935년(을미 18년)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삼한벽상공신 김예겸(金禮謙)과 관련하여 참고할만한 고려묘지명이 하나 있다.
바로 김자류묘지명(金子?墓誌銘)-1146년(인종24년)이다.
김자류 묘지명(金子? 墓誌銘)
연대 1146년(인종24년)
(일본)동경도 문경구 동양문고(사진소장)
「金子? 묘지명」은 일본 동경 「梅原末治考古資料目錄」에 사진 자료로 소장되어 있는데, 언제 어떻게 그 자료를 입수하였고, 현재 실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진으로 볼 때 지석 상태는 양호한 편으로, 가장자리에는 얇은 두 줄의 선을 둘렀고, 그 내부에는 가로세로로 선을 그어 글씨를 썼는데, 1행 당 글자 수도 24자씩으로 일정하다.
김자류는 『고려사』에 몇 개의 단편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을 뿐인데, 이 묘지명에 의해 그의 생애를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신라왕족 출신의 그의 조상은 고려 건국 당시 공을 세우고 고려의 관리가 되었으나, 증조부 때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鄕吏가 되었고 이후 그 가문은 향리 신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김자류는 서울로 유학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리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김자류 묘지명」은, 중앙으로 진출했다가 귀향하여 향리가 되고, 다시 중앙으로 진출한 한 가문의 흔하지 않은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단행본)김용선, 『새 자료 高麗묘지명 다섯 점 반』, 『역사학보』 198, 역사학회, 서울, 2008.
金子? 墓誌銘
(1) 朝散大夫檢校尙書右僕射判將作監事金公諱子?字
(2) 叔寶新羅王之後三韓功臣大匡侍中金禮?七世孫也高
(3) 祖諱殷翼上舍奉御曾祖諱成幸祖諱公信考諱琯?以
(4) 新羅舊都風物佳勝求退爲戶長?李氏樂浪郡夫人
(5) 公咸雍元年正月戊申生于東京坊北里游學于京師擧
(6) 進士第補三陟縣尉未幾入內侍歷句覆院刪定都監判
(7) 官中尙丞金吾衛錄事??(軍)事左拾遺知制誥改左拾遺
(8) 知制誥出補東京留守判官値 睿宗西幸授尙書戶部
(9) 員外郞徵入爲侍御史兼大子司議郞吏部郎中知茶房
(10) 事秘書少監左遷郭(?)州防禦使召爲中書舍人知制誥以
(11) 廻謝宣諭奉使大金左遷知南原府羅州牧使徵爲大府
(12) 少卿三司副使兵部侍郞會國有外家之亂城闕焚蕩究
(13) 爲灰燼 公以重修都監副使率工徒經營土木一如?
(14) 貫以公拜朝散大夫判將作監事夫人崔氏中書令節義
(15) 公沆之孫女也封樂浪郡大君有一男一女男淳(?)?入內
(16) 侍內庄宅判官有子二人長曰就正良?令次曰就明戶
(17) 部主事女適殿中內給事韓中立有子二人長曰楹秘書
(18) 校書郞次尙幼 公忠儉質直歷位淸顯年六十九以老
(19) 致仕尤尙不法遍閱藏經享年八十一歲以皇統五年十
(20) 二月辛丑卒越明年二月甲寅葬于桃源館之南銘曰
(21) 公之裔祖 出自新羅 功成社稷 誓著山河
(22) ?厥祖曾 求還故國 ??朝聯 甘心郡職
(23) 惟公奮起 游學京師 三朝際會 一節險夷
(24) 仁者不壽 哲人其萎 死而不朽 略記墓碑
김자류 묘지명(金子? 墓誌銘)
조산대부 검교상서 우복야 판장작감사(朝散大夫 檢校尙書 右僕射 判將作監事) 김공(金公)의 이름은 자류(子?)이고, 자(字)는 숙보(叔寶)다.
신라왕의 후손인 삼한공신 대광 시중(三韓功臣 大匡 侍中) 김례▨(金禮?)의 7세손이고, 고조(高祖) 은익(殷翼)은 상사봉어(尙舍奉御)였으나, 증조(曾祖) 성행(成幸), 조부 공신(公信), 아버지 관(琯)은 모두 신라 옛 도읍(舊都)의 풍물(風物)과 아름다운 경치를 구하여 물러날 뜻을 밝히고 사퇴하여 호장(戶長)이 되었다. 어머니는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이씨(李氏)다.
공은 함옹(咸雍) 원년(元年, 문종 19, 1065) 정월(正月) 무신(戊申)일에 동경(東京, 慶州)의 방북리(坊北里)에서 태어났다. 서울(京師)에 유학(游學)하여 진사제(進士第)에 합격하여 삼척현위(三陟縣尉)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내시(內侍)에 들어갔으며, 구복원 산정도감판관(句覆院 刪定都監判官) 중상승(中尙丞) 금오위녹사참군사(金吾衛錄事?事) 우습유 지제고(右拾遺 知制誥)를 역임하였다. 좌습유 지제고(左拾遺 知制誥)로 바뀌었다가 <외직에> 나아가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官)에 보임되었는데, 예종(睿宗)이 서행(西幸)을 하게 되자 상서호부원위랑(尙書戶部員外郞)이 되었고, 중앙에 올라와서는 시어사 겸 대자사의랑 이부낭중 지다방사 비서소감(侍御史兼大子司議郞 吏部郎中 知茶房事 秘書少監)이 되었다가 곽주방어사(郭州防禦使)로 좌천(左遷)되었다. 중서사인 지제고(中書舍人 知制誥)로 소환되어 회사선유사(廻謝宣諭使)로 금나라(大金)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지남원부 나주목사(知南原府 羅州牧使)로 좌천(左遷)되었다가 불려와 대부소경 삼사부사 병부시랑(大府少卿 三司副使 兵部侍郞)이 되었다. 그 때 마침 국가에 외척의 난<이자겸의 난>이 발생하여 도성이 모두 불타버려 재가 되자, 공은 중수도감부사(重修都監副使)로서 기술자[工徒]들을 이끌고 토목공사를 하였는데, 한결같은 공로로 조산대부 판장작감사(朝散大夫 判將作監事)에 제배되었다.
부인 최씨(崔氏)는 중서령 절의공(中書令 節義公) 최항(崔沆)의 손녀인데, 낙랑군대군(樂浪郡大君)에 봉해졌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순▨(淳?)는 내시(內侍)로 들어가 내장택 판관(內?宅判官)이 되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취정(就正)은 양온령(良?令)이고 차남 취명(就明)은 호부주사(戶部主事)이다. 딸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한중립(韓中立)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영(楹)은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이고 차남은 아직 어리다.
공은 충성스럽고 검소하며 순박하고 곧았다. 높고 현달한 직위(淸顯)를 역임하다가 나이 69세에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뒤에는 더욱 불법을 숭상하여 장경(藏經)을 두루 열람하였다. 향년(享年) 81세인 황통(皇統) 5년 12월 신축(辛丑)일에 돌아가시니, 이듬해 2월 갑인(甲寅)일에 도원관(桃源館) 남쪽에 장례 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공의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는데
사직에 공을 이룬 것이 산하(山河)에 드러났다.
증조부에 이르러 옛 고향으로 돌아가길 구하여
조정에서의 벼슬을 헌신짝처럼 생각하고
군직(郡職)에 만족하였다.
오직 공이 분연히 일어나 서울(京師)에 유학하여
세 임금을 만나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 변함없이 절개를 지켰다.
어진 이가 장수하지 못하고, 현인<哲人>이 병들어 죽었으니
죽어서도 썩지 않게 묘비에 간략하게 기록하도다.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김자류묘지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먼저 김자류(1065-1146)는 신라왕의 후손인 삼한공신 대광 시중(三韓功臣 大匡 侍中) 김례▨(金禮?)의 7세손이다.
고조(高祖) 은익(殷翼)-
증조(曾祖) 성행(成幸)-
조부 공신(公信)-
부친 관(琯)-자류(子?)
예▨(禮▨)-( )-은익(殷翼)-성행(成幸)-공신(公信)-관(琯)-자류(子?)
김자류에 대한 고려사기록
고려사절요 제9권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병오 4년(1126)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ㆍ 금 천회(天會) 4년
○ 12월에 이자겸이 영광군에서 죽었다.
○ 위위경 김자류(金子?), 형부 낭중 유덕문(柳德文)을 금 나라에 보내어 선유에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기를, “고백숙이 와서 보주성(保州城)의 땅을 떼어 고려에 소속시킴을 허락하고 다시 회수하지 아니한다는 성지를 은밀히 전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려의 원래의 영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의 옛 땅은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는데, 여러 번 변천을 겪어서 우리 선대에 이르러 북국(北國 요(遼))에 겸병을 당하고, 삼한의 영지가 침해당하여, 비록 이웃 나라로서의 수호는 맺었으나 옛 땅을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명이 새로 내려 성스러운 왕이 이미 일어나시고 군사가 정의를 위하여 일어남을 보고, 성보(城堡)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신의 아버지인 선왕 때에 귀국의 변방 신하 사을하(沙乙何)가 와서 황제의 칙지를 전하기를, '보주(保州)는 본래 고려의 영토이니 고려에서 회수함이 옳다.' 하여, 선왕은 곧 그 성과 못을 수리하고 민가를 들여보냈습니다. 이때에 비록 우리나라가 상국에 신하로 복속하지 않았지만, 선제(先帝)가 특별히 이웃 나라를 사랑하시어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시고 우리에게 옛 땅을 주었습니다. 다음 세대가 왕위를 계승함에 이르러 천명을 받은 거룩한 덕을 만나서 덕음을 상세히 듣고 공손히 신하의 직분을 수행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동쪽의 자그마한 땅은 본래 우리나라의 변경 지역인데, 비록 일찍이 거란에게 침탈당했으나, 우리나라가 이미 선대에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여 이례적인 혜택을 베풀어 우리나라에 예속시키니, 어찌 요행으로 이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대저 특별한 황제의 은덕일 뿐입니다. 깊은 인자함과 큰 의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작은 힘과 얕은 재주로 어떻게 보답할 것입니까. 오직 철을 따라 조공하는 일을 극진히 하며 속국이 지켜야 할 상례를 지켜 온 나라가 기꺼이 정성을 다하며 자손에게 전해가면서 영원히 맹세합니다. 높은 밝으심이 위에 있는지라 진실한 정성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하였다.
고려사 제15권 - 세가 제15 인종 정미 5년(1127)
3월 계사일에 김자류와 유덕문(柳德文)이 조서를 가지고 금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조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내온 글월에 의하여 선유사(宣諭使)를 보낸 데 대하여 사례하고 물품을 보낸 사실을 잘 알았다. 당신은 나의 사신이 가기도 전에 속국이 되기를 희망하였고 예빙을 통한 뒤로는 더욱 정성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에 대한 당신의 지향을 고맙게 생각하여 귀국의 영지를 돌려주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공물을 보내면서 사례하는 뜻을 진술하는 데 그쳤다. 이 글월을 읽고 감탄하는 마음은 비록 간절하였으나 아직도 호구(戶口)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책봉에 관한 것은 별로 언급하지 아니 하였다. 그런데 매사에 업적을 나타내고 대대로 성의가 변치 않을 것은 믿을 수 있으나 나의 확실한 말이 없다면 당신이 찾은 땅을 무엇으로 증빙하겠는가.” 간관(諫官)이 아뢰기를 “김자류가 금나라에 가서 자기 부하를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수행자가 금나라 사람과 다투어 상대자에게 상처를 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금나라 사람이 책망하고 도부서(都部署)에 신석(申錫)을 잡아다가 매를 치게 하였사오니 왕의 명령을 욕되게 한 그의 죄를 추궁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김자류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김자류묘지명을 보면,
김자류(1065-1146)는 신라왕의 후손인 삼한공신 대광 시중(三韓功臣 大匡 侍中) 김례▨(金禮?)의 7세손인데,
그렇다면 신라왕의 후손인 삼한공신 대광 시중(三韓功臣 大匡 侍中) 김례▨(金禮?)가 누구일까라는 것이다.
마모되어 알 수 없는 (金禮?)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기 위해 삼한공신명단을 살펴보자.
<삼한공신명단>
박천식, 1988년-전라문화논총'-'삼한공신 일람표''(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고려 삼한공신 명단
배현경(裵玄慶) 경주인 (태조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 곡성인 (개국벽상공신)
김 락(金 樂) 賜中和 (태조통합공신)
김 철(金 哲) 本순천인(태조통합공신)
복지겸(卜知謙) 면천인 (고려개국공신)
유금필(庾黔弼) 무송인 (태조익찬공신)
박술희(朴述熙) 혜성군인(개국공신)
최 응(崔 凝) 토선인 (훈공 많음)
윤 선(尹 瑄) 염주인 (歸附北岡以安)
왕 유(王 儒) 광해주인(공훈 많음)
왕순식(王順式) 명주인 (삼한공신)
왕 렴(王 廉) 명주인 (왕순식 아들)
왕관경(王官景) 명주인 (강릉우일파시조)
박수경(朴守卿) 평주인 (삼한공신)
박연윤(朴遲胤) 又竹州人(삼한공신)
박수문(朴守文) 평주인 (삼한공신)
박승위(朴承位) 평주인 (삼한공신)
박영규(朴英規) 승주인 (개국공신)
이총언(李총言) 拜碧晉장군(삼한공신)
서 필(徐 弼) 이천인 (刀筆進.奕世大殿)
강궁진(姜弓珍) 긍주인 (삼한벽상공신)
전종회(田宗會) 영광현인(태조공신)
윤 봉(尹 逢) 수안현인(삼한공신)
김유렴(金庾廉) 閼智후손(歸태조위공신)
윤신달(尹莘達) 파평현인(삼한공신)
김인윤(金仁允) 경주인 (삼한공신)
최영휴(崔英休) 충주인 (삼한공신)
김극렴(金克廉) 강릉인 (삼한공신)
최준옹(崔俊邕) 창원군인(삼한공신)
김 길(金 吉) 광산현인(佐태조유공)
박기오(朴奇悟) 연창군인(삼한공신)
이희목(李希穆) 수주인 (벽상공신)
이능희(李能希) 청주인 (定삼한위공신)
이겸의(李謙宜) 청주인 (삼한공신)
류차달(柳車達) 유주인 (삼한공신)
왕희순(王希順) 개성인 (定삼한위공신)
함 규(咸 規) 항양인 (삼한공신)
염형명(廉邢明) 봉성현인(삼한공신)
왕만세(王萬歲) 개주인 (태조종제녕해공)
금용식(琴容式) 賜籍김포(삼한공신)
나총례(羅聰禮) 나주인 (삼한공신)
이 의(李 誼) 금마인 (개국공신)
한 란(韓 蘭) 청주인 (삼한공신)
원극유(元克猷) 원주인 (삼한공신)
권 행(權 幸) 안동인 (삼한공신)
이금서(李金書) 경주인 (삼한공신)
이 도(李 棹) 전의인 (삼한공신)
왕 예(王 乂) 강릉인 (佐태조유공)
왕 경(王 景) 명주인 (삼한공신)
홍은열(洪殷悅) 남양인 (삼한공신)
임 희(林 曦) 진천인 (벽상공신)
이견원, 안 락, 김 지, 김 래, 오금길, 김근겸, 이부율, 윤신복, ㅇ궁열, 이견웅, 장원지, 최정헌, 이길권, 조 맹, 김예겸(金禮謙), 김선평, 김훤술, 이극인, 이 서, 박 욱, 박윤웅, 장금용, 장 길, 정 예, 황보능, 전이갑, 조 정, 이능일, 이대평, 이배환, 방수홍, 최필달, 유천궁, 유긍달, 홍 규, 홍 유, 황보제공, 김억렴, 유덕용, ㅇ명필, 이 원, 왕 규, 왕 유, 김행파, 강기주, ㅇ영장, 김선궁, 평 준, 김긍율, 배은우, 최언위, 신능길, 신 보, 최지몽, 최상흔, 현 일, 왕식렴, 왕평달, 견 금, 능 식, 연 익, 흥 현, 태 평, 흥 달, 강여청(姜餘淸),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係弘), 문다성(文多省), 허선문(許宣文),
삼한공신명단을 살펴보면,
신라왕의 후손인 삼한공신 대광 시중(三韓功臣 大匡 侍中) 김예▨(金禮?)는 바로 김예겸(金禮謙)임을 알 수 있다.
<조산대부 검교상서 우복야 판장작감사(朝散大夫 檢校尙書 右僕射 判將作監事) 김공(金公)의 이름은 자류(子?)이고, 자(字)는 숙보(叔寶)다.
신라왕의 후손인 삼한공신 대광 시중(三韓功臣 大匡 侍中) 김예겸(金禮謙)의 7세손이고, 고조(高祖) 은익(殷翼)은 상사봉어(尙舍奉御)였으나, 증조(曾祖) 성행(成幸), 조부 공신(公信), 아버지 관(琯)은 모두 신라 옛 도읍(舊都)의 풍물(風物)과 아름다운 경치를 구하여 물러날 뜻을 밝히고 사퇴하여 호장(戶長)이 되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김자류의 가문은 증조(김성행) 대에 이르러 경주로 내려온 것 같다.
그리고 증조(曾祖) 성행(成幸), 조부 공신(公信), 아버지 관(琯)이 모두 호장이 되었다.
삼한공신명단을 통해 김예겸이 삼한공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김자류 묘지명을 통해 김예겸이 삼한공신 대광 시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김예겸은 고려태조, 그리고 경순왕과 동시대인물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신라삼성연원보(1934년)에 기록된 영분공파 계보---
경순왕-종(鐘) -호(浩) -억종(?宗) -계옹(季邕) -남두(南斗) -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은 명백히 오류다.
김자류묘지명(金子?墓誌銘)-1146년(인종24년)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 의종3년)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
고려사열전(김인경편)
경주김씨족보(1934)를 종합하면 다음의 계보가 나온다.
예겸(禮謙)-
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
황보양처김씨
의선(義先)-후백(侯伯)-유규(惟珪)
<김자류 묘지명>
신라왕의 후손
예겸(禮謙)-( )-은익(殷翼)-성행(成幸)-공신(公信)-관(琯)-자류(子?)-
자류(子?)-순▨(淳?-취정(就正)
취명(就明)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김인경(金仁鏡) 처음 이름은 양경(良鏡)이었다. 재주와 식견이 정밀하고 명민하여 예서(隸書)를 잘 썼다.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충을 따라 글안(契丹) 군사를 강동성(江東城)에서 토벌하여 공이 있었다.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인경은 문(文)ㆍ무(武) 재주가 모두 넉넉하였으며, 천품이 맑고 아름다워서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낭서(郞署)에서부터 상부(相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중요한 문장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왕공이나 부녀로부터 소 치는 아이와 말 모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김연성(金鍊成) 인경의 아들이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김승무(金承茂) 연성의 아들이다. 재주와 식견이 있었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한림(翰林)을 거쳐 여러 번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갑오 21년(1234), 송 단평(端平) 원년ㆍ금 천흥 3년ㆍ몽고 태종 6년
○ 여름 5월에 김연성(金鍊成) 등 31 명과 명경(明經) 2 명과 은사(恩賜) 8 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동국이상국문집 연보
갑오년(1234, 고종 21) 공(규보(奎報)의 나이 67세 5월에 춘장 지공거(春場知貢擧)로 열시(閱試)하여 김연성(金鍊成) 등 31인과 명경(明經)에 이방수(李邦秀) 등 2인을 뽑아 방방(放榜)하였다.
인경(仁鏡)아들은 연성(鍊成), 손자는 승무(承茂)기록은 확실히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계보가 나온다.
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연성(鍊成)-승무(承茂)
경주김씨족보(1934년)는 인경의 아들을 궤(軌)로 기록했는데, 그 옆에다 초휘(初諱)는 연성(鍊成)이라고 달아놓았다. 그러므로 연성=궤 동일인이다.
신라왕후손-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연성(鍊成=궤(軌))----영(瑩)
요(瑤)
효무(孝茂)-성(成)-연수(延壽)
승무(承茂)
평무(坪茂)
충무(忠茂)-자손기록 없음
영(瑩)-두계공파, 수은공파, 시어사공파, 참찬공파
요(瑤)-병판공파, 판삼사사공파, 평장사공파, 밀직부검랑공파
승무(承茂)-월성부원군파, 강릉공파, 참의공파
평무(坪茂)-부사공파, 현감공파
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황보양처김씨
의선(義先)-후백(侯伯)-유규(惟珪)-이용(利用)
현(鉉)
예겸(禮謙)-( )-은익(殷翼)-성행(成幸)-공신(公信)-관(琯)-자류(子?)
자류(子?)-순▨(淳?-취정(就正)
취명(就明)
김자류묘지명(金子?墓誌銘)-1146년(인종24년)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 의종3년)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
고려사열전(김인경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삼한공신명단(박천식, 1988년,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지금까지 위의 자료를 근거로 경주김씨 영분공파는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라는 논증을 하였다.
이 논증과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경주김씨영분공파족보>가 있다.
금요경매라는 경매사이트에 나온 1785년 목간본 경주김씨족보이다.
앞쪽에 1711년에 쓴 이웅징의 서문이 있다고 하는데, 이 족보를 보면 경주김씨 영분공파 계보를 볼 수 있다.
1711년에 쓴 이웅징의 서문이 있는 1785(정조9년)년 목간본 경주김씨족보
이 족보에 기록된 경주김씨 영분공파 계보는 이렇다.
경순왕(敬順王)--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궤(연성)--영(塋)-서인(瑞仁)-충한(沖漢)
위 족보를 자세히 보면 궤(연성)의 아들로 영(塋)과 승무(承茂)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족보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파간(波干) 억종(?宗), 파간(波干) 계옹(季邕)이라는 기록이다. 파간이란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일까?
파간(波干)이란 신라시대 관직인데,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한다. 신라 관직 17등급 중 4등급으로 진골 이상이 갖는 벼슬이다.
파간(波干)은 신라시대에만 쓰던 관직으로 고려시대엔 쓰지 않는 관직이다.
따라서 파간 억종과 파간 계옹은 신라시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예겸이 삼한공신이고, 예겸의 할아버지 계공의 관직이 파간이고, 증조부 억종의 관직이 파간이라는 것은 당시 통일신라의 관직과 일치하기 때문에 예겸의 상계 기록 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禮謙)은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왜 영분공(永芬公)을 경순왕의 아들로 붙여놨느냐는 점이다.
경주김씨족보에서 경순왕의 아들들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784년(정조8년) 대안군 은열의 묘지명이 발견되고 나서부터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황(?)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대안군 은열 묘지명에서-
1785년 대안군 은열의 묘지명이 발견된 이후 경주김씨족보에서 경순왕의 아들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명종을 영분공의 이름으로 쓰게 되었고, 이 기록이 계속 대물림되어 내려와서 영분공은 경순왕의 셋째 아들인 명종으로 굳어졌
특히, 1785(정조9년)년 발간된 이 족보를 보면 영분공의 이름이 없다.
경순왕-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禮謙-삼한벽상공신)
허백당 성현(1439-1504)이 쓴 김양경 시집이 있는데 여기에 영분공파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성현이 1479년 김양경(김인경)의 7세손 김가구(김미)가 준 계보를 가지고 쓴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禮謙) --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양경(良鏡)
1479년에 김가구(김인경의 7세손)가 준 자료를 통해 허백당 성현(1439-1504년)이 기록한 경주김씨영분공파 계보니 꽤 오래된 계보다.
여기서도 파간(波干) 억종, 파간(波干) 계옹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삼한벽상공신 김예겸(金禮謙)의 증조부 계옹과 고조부 억종은 신라관직 17등급 가운데 진골이상이 갖는 4등급 파간(波干)이란 관직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김예겸이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크게 네가지다.
첫째, 김자류묘지명(金子?墓誌銘)-1146년(인종24년)에서 김예겸(金禮謙)을 신라왕의 후손 삼한공신 대광 시중(三韓功臣 大匡 侍中)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삼한공신은 940년 신흥사를 중수하면서 공신당을 두고 동쪽과 서쪽 벽에 삼한공신을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 936-940년 사이에 제정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김예겸은 경순왕, 고려태조와 동시대의 인물이므로 경순왕의 6세손이 될 수 없다.
둘째 김예겸(金禮謙)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이 1070년(문종24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나이 70세가 되면 치사(퇴임)하므로 1070년에 세상을 떠난 김의진은 최소한 1000년 또는 그 이전에 출생하였을 것이다
1. 문종 15년(1061년)-좌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가 됨
2. 문종 22년(1068년)-판상서병부사가 됨
3. 문종 24년 (1070년 )-8월 세상을 떠남
김의진은 1000-1070년까지 활동하던 인물이므로 그의 할아버지 김예겸(삼한공신)이 경순왕의 6세손이 될 수 없다.
경순왕(敬順王)--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禮謙-삼한벽상공신)--주정(周鼎)--의진(義珍)
김예겸이 경순왕의 6세손으로 되어 있는 이 계보는 역사적 연대가 맞지 않다.
세째, 1711년에 쓴 이웅징의 서문이 있는 1785(정조9년)년 목간본 경주김씨족보에는 김예겸의 할아버지 계옹(季邕)과 증조부 억종(?宗)의 관직을 신라시대관직인 파간(波干)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김예겸이 경순왕의 6세손이 되려면 그의 할아버지 관직, 증조부 관직은 고려시대관직이라야 맞다. 하지만 파간(波干)이란 고려시대관직이 아니고 신라시대 관직이다.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관직 17등급 중 4등급으로 진골이 갖는 관직이다. 통일신라시대 관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고려에 나라를 양위한 경순왕의 3세손, 4세손이 될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네째, 1785(정조9년)년 목간본 경주김씨족보에는 영분공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경주김씨족보에 경순왕의 아들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784년(정조8년) 대안군 은열의 묘지명이 발견되고 나서부터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황(?)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대안군 은열 묘지명에서-
1785년 대안군 은열의 묘지명이 발견된 이후 경주김씨족보에서 명종(鳴鍾)이 영분공의 이름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영분공이 경순왕의 셋째 아들(명종)로 굳어졌다.
위에서도 의문을 제기했던 바이지만, 삼한공신 예겸이, 고려태조, 경순왕과 동시대인물인 예겸이 왜 경순왕의 후손으로, 그것도 6세손으로 기록되었을까?
경순왕(敬順王)--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삼한벽상공신)--주정(周鼎)--의진(義珍)
김예겸이 삼한벽상공신인데, 경순왕, 고려태조와 동시대인물인데 어째서 경순왕의 7세손으로 되어 있는 이상한 족보가 만들어졌을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이상한 족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조선왕조에서 경순왕 후손에게 내려진 특혜의 전교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에서 정종, 태종, 선조, 효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은 경순왕 후손에게는 병역과 노력동원을 면제하라는 특혜의 전교를 내렸다.
당시 경주김씨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병역과 노력동원을 면제받는 특혜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순왕의 후손임을 입증할 족보가 있어야 했다.
모든 경주김씨족보가 조선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계보에 기록된 인물의 역사연대를 살필 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족보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깔고 있다.
경순왕 후손의 군역과 부역에 관련한 조선왕실의 기록
1.국역조선왕조실록 > 숙종 36년 경인(1710,강희 49) > 9월16일 (정미)
민진후(閔鎭厚)가 을묘년에 정식(定式)한 선성(先聖)·선현(先賢)의 자손(子孫)과, 칠반 천역(七般賤役) 외에는 군역(軍役)을 탈면(?免)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을 거듭 밝히고, 왕씨(王氏)의 사람들도 또한 이 예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자, 승지 이제(李濟)가 잇달아 말하기를, “기자(箕子)·문성공(文成公)·문익점(文益漸)의 자손(子孫)은 군역(軍役)을 면제한 구규(舊規)를 빙자하여, 그 해당된 부역(賦役)까지도 여러 가지로 계책을 내어 모면하고자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은 병조(兵曹)의 하리(下吏)와 부동(符同)하여, 수교 문적(受敎文籍)을 도득(圖得)해 내고는 수령을 속여 중도에서 벗어나 빠졌으니,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국역일성록 > 정조9년 을사(1785,건륭 50) > 2월9일(기축)
함흥(咸興)의 가솔(假率) 김종옥(金宗玉)이 상언한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이니 군역(軍役)으로 침해하지 말아 달라는 일은 하교하신 대로 세파(世派)를 상고해서 수교(受敎)를 준수하고 침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도에 관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르고 하교하기를, “엄히 다스릴 필요가 없으니 모두 감죄(勘罪)하지 말라.” 하였다.
정조9년 을사(1785,건륭 50)
2월10일(경인)
또 함흥(咸興)의 가솔(假率) 김종옥(金宗玉)이 경순왕의 자손이니 군역(軍役)으로 침해하지 말라는 일을 상언한 것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군역으로 침해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열조(列朝)의 수교(受敎)가 있었으니, 세파(世派)를 즉시 상고하여 처결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정조10년 병오(1786,건륭 51) 2월26일(경자)
병조가 아뢰기를,
“양산(梁山)에 사는 황산도(黃山道) 역리(驛吏) 김중화(金重化) 등의 상언에, ‘저희들은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서 먼 지방에 유락(流落)하여 역리로 입속(入屬)되었습니다. 아비 김월태(金月泰)는 항상 저희들이 불행히 입속된 것을 원통하게 여기다가, 기해년(1779, 정조3)의 아주 심한 흉년에 집안의 재화를 다 팔아서 곡식과 바꾸어 진휼(賑恤)을 도왔습니다. 이에 본역(本驛)에서 순영에 보고하여, 삼부자의 이름자를 이안(吏案)에서 빼내고 영원히 탈급(?給)한다는 뜻으로 입안(立案)을 작성해 주었습니다. 아비가 사망한 뒤에 역리들이 입안이 없다고 우관(郵官)에게 무고하여, 저들의 역가(役價)에 대해 햇수를 계산하여 일시에 모두 독촉하니, 해도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해서 탈하(?下)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사실을 근거하여 믿기가 어려우니, 본도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해서 보고하게 한 뒤에 다시 헤아려서 처결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국역일성록 > 정조11년 정미(1787,건륭 52) > 2월6일(갑진)
예조가 또 아뢰기를,
“용천(龍川)의 유학 김처강(金處江) 등의 상언에, ‘저희들은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서 진졸(鎭卒)과 군교(軍校)의 역(役)에 억울하게 충정(充定)되었으니, 너무도 원통합니다. 다시는 잡역(雜役)에 충정하지 못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대개 경순왕의 후예를 군역에 충정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열성조(列聖朝)의 수교(受敎)가 있었는데, 지방 고을에서 어기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합니다.
다만 혹 족보(族譜)를 베껴내어 투탁(投托)해서 모탈(冒?)하는 경우도 있어 그 폐단이 없지 않으니, 등소하는 대로 탈면(?免)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을 조사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이처럼 조선시대 특히 정조 때 경순왕 후손의 병역과 노역 특혜를 받지 못함을 인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가 올라와서 왕이 직접 하교를 내려 처리해 준 사례가 여럿 있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이 정도라면 실제로 있었던 소원록이나 상소문은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관에서 병역과 노역을 면제해 주는 조사를 할 때 대문중에서 만든 경주김씨족보가 갖추어져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경순왕의 후손으로 등제된 많은 경주김씨 족보가 이러한 기막힌 배경 속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잘못된 족보를 대물림 받은 것은 영분공파 뿐만 아니라 계림군파, 예판공파도 마찬가지다.
계림군파와 예판공파의 중시조인 김순웅이 경순왕의 네째아들 대안군 은열의 6세손으로 되어 있는 그 황당한 족보가 실제로 100여종류가 넘는다.
그 엉터리 족보의 폐단으로 인해 아직도 자신이 대안군 은열의 후손인 줄 잘못 알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지금은 경순왕의 후손으로 병역과 노역의 혜택을 받는 조선시대가 아니다.
잘못된 경주김씨족보는 계보학적, 역사학적 고증을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
첫댓글 영분공 수은공 당신들 글한번 읽어 보세요?
진정으로 당신들이 영분공 후손이라면 인터넷에 올라와잇는 글
내리시고 법적으로 대응해야 되는것 아닙니까?
당신들 선조가 경순왕이 아니라고 글이 올라와 잇는데 외 가만히
잇습니까?
자신이 없으신 건가요 아니면 족보를 사들여와 그냥 잇는건가요 참이상한
문중 아닌가요?
2월10일 월요일 아침이 밝아오네요
주말과 휴일은 즐겁게 잘보내셨는지요
요즘 신종 코로나때문에 어디다니기도 조심스럽습니다
건강한 한주 좋은일 가득하시고 웃음으로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