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감리교회 제12대 김창희 감독과 마경일 총회장
1974년 10월 23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감리교 제12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지금까지 감독선거로 인해 총회는 파행에 이른 적이 많았다. 제12회 총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각 계파에서는 감독 후보를 냈으며 성화파 홍현설 목사와 호헌파 김창희 목사가 대립하는 바람에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12월 10일에 2차 총회를 개최하여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2차 총회에서도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3일 동안 24차 투표했지만 감독이 선임되지 못했다. 각 계파는 감독선거 수습특별위원회를 선임하여 대화를 시도했지만 타결되지 못하였다. 결국 홍현설 목사를 지지하던 성화파 조피득 목사가 퇴장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목사 24명, 평신도 16명의 총회원을 데리고 총회를 퇴장하였다. 성화파가 빠진 상태에서 제25차 감독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호헌파 김창희 목사가 총투표수 108표 중에 82표를 얻어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12대 감독으로 당선되었다.
회원 40명과 총회를 퇴장한 조피득 목사는 그날 밤 9시에 종교교회에서 집합하여 별도로 제12회 총회를 속개했다. 썩어가는 교단의 모습을 그냥 볼 수 없어 새로이 갱신하여 새로운 감리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기치 아래 다음 날 갱신총회는 성명서를 발표하고는 감독에 마경일 목사, 중부연회장에 박용익 목사, 동부연회장에 조피득 목사, 남부연회장에 김재황 목사, 선교국장에 유증서 목사, 총무국장에 조여상 목사, 교육국장에 김선도 목사를 선임하고 총회를 조직했다. 감리교회는 또 다시 분열되어 두 개의 감리교회가 생겨난 것이다.
감리교 총회의 분열로 주한 선교사회와 미국 세계선교부에서는 어느 쪽을 지원할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1974년 12월 17일 주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중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감리교 모체인 정동제일교회도 공식 입장을 밝혔는데 양측 총회의 통합을 위하여 엄정 중립을 선언하고 통합추진 위원회를 선정하였다. 그리고 통합될 때까지 정동제일교회는 양측 총회의 지시를 받지 않으며 모든 의무와 회의 대표를 파송하지 않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당시 한영선 담임목사의 입장에 동조하는 교회가 많아지면서 ‘중부중립측’이란 새로운 파가 형성되었다. 감리교회는 갱신총회와 경기연회로 시작된 연합총회와 중부중립이 생겨 한 지붕 세 가족 체제가 되고 말았다.
이들 세 단체는 1975년 11월 17일 통합선언문을 발표하고 12월 2일 서울 광림교회에서 통합 총회를 개최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갱신총회 마경일 감독, 중부중립의 한영선 목사, 연합총회의 김정구 총회장의 이름으로 통합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통합총회는 그간의 감독 제도를 1년 임기의 총회장 제도로 개정한 후 제1대 총회장으로 마경일 목사를 선출했다. 부회장에는 한영선 목사, 서기에는 박정오 목사를 선출하여 총회를 조직했다. 그 이후 제2대 총회장으로 피선된 한영선 목사는 기독교 대한감리회(갱신측) 특별총회를 1977년 10월 31일에 서울 광림교회에서 개최하였고 제4회 정기총회는 1978년 5월 2일부터 4일까지 인천숭의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한영선 목사의 사회로 시작하였다. 제3회 총회에서 조피득 목사가 제3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4회 정기총회에서 한영선 목사가 은퇴하여 그 이후의 회무는 조피득 총회장이 취임을 하고 회무를 주관하였다. 이로써 감리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두 개의 상태로 남게 되었다.
김창희(金昌熙, 호 隅石) 감독은 1923년 3월 4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증조모 때부터 정동제일교회의 입교인으로 조부모, 부모를 이어 4대째 기독교 가정이었다. 경기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감리교신학교 재학 중에는 황민화 교육반대 시위 사건으로 퇴학당하여 3년을 수료했다. 1953년 연희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기독교대한 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서울 장사동교회를 시작으로 연지동교회, 용산교회, 종로교회를 담임하였고 1964년 정동제일교회 부담임목사로 일했다. 중부연회 총무를 거쳐 1970년부터 총리원 총무국장으로 시무해 오던 중 1974년 12월 10일 제12회 총회 제2차 회의에서 감독에 당선되었다. 또한 1970년에는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 서울중앙YMCA이사, 원주 기독교병원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창희 감독이 처음 목회 시작했던 장사동교회는 감리교 2차 분열 시기로서 호헌연회가 생겨날 때였다. 그 때 김창희 목사는 호헌연회에서 장사동교회로 파송하였는데 동부연회에서 불법적인 호헌연회 파송 제명처분을 당하여 감리교 분열의 현장에서 목회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분열 속에 시작한 목회 20년 만에 감독이 되면서 또 분열의 악몽 속에서 감독에 취임하게 되었다. 김창희 감독은 재임기간동안 특별총회를 통하여 복수 감독제를 도입하였고 분열되어 떨어져 나간 모든 감리교회 계파들을 하나로 모이게 했으며 5천 교회, 100만 신도 운동을 일으켰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혜명교회를 담임하고 영명학원 재단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창희 감독은 제12회 총회 제1차 특별총회(1975년 10월 28일, 아현교회 개최), 제12회 총회 제2차 특별총회(1976년 3월 18일~19일, 4월 6일, 아현교회 개최), 제12회 총회 제3차 특별총회(1977년 12월 2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3회 합동총회(1978년 10월 26일~28일, 11월 30일~12월 1일)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제34회 중부연회(1975년 3월 12일~14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35회 중부연회(1976년 3월 31일~4월 2일, 배화강당 개최), 제34회 동부연회(1975년 3월 5일~7일, 원주제일교회 개최), 제21회 남부연회(1975년 3월 19일~21일, 대전제일교회 개최)를 개최하였다.
마경일(馬慶一) 총회장은 1912년 경기도 개풍군 북면 용현리에서 부친 마종혁(馬鍾赫) 씨와 모친 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한학자였던 조부 밑에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1917년 당시 고향 가토미(加土尾)교회가 경영하던 학교에서 국민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 1930년 송도고보, 1936년에 감리교신학교를 각각 졸업하였다. 개성지방 풍덕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해주지방 연안교회와 동해주교회, 남본정교회를 담임했다. 1939년 서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해방을 맞고 해주 남본정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48년 월남하여 백천교회와 인천중앙교회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전쟁을 겪었다. 1951년부터 총리원 교육국간사로 재직했다가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북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에 있는 듀크(Duck University)에서 신학부에서 기독교교육과 설교학을 공부하고 종교교육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55년 귀국하여 동대문교회를 담임했고 1958년 총리원 전도국총무로 일했다. 1960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목실장, 1963년부터는 6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교목실장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자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자교교회에서 목회 하던 중 그는 1974년 제12회 총회에서 갱신 측 감독으로 추대되었고 반(反) 총리원 측 통합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마경일 총회장이 이끄는 총회 측 감리교회는 웨슬리 총서를 간행하는 일과 총회신학교를 개설하는 일을 했다. 마경일 총회장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갱신 측) 제2회 정기총회(1976년 5월 24일~27일, 수표교교회 개최), 제3회 정기총회(1977년 5월 24일 ~27일, 서울금란교회 개최)를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