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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주의
이스트번 메자로스 지음,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2.
실질적 평등: 지속 가능성의 절대적 조건
실질적 평등은 앞서의 논점인 참여의 필연적인 귀결임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대안적 사회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우리의 진정한 참여 전략의 성패를 평가할 때, 단순히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 평등 문제를 논외로 하는 것은 지극히 부질없기 때문이다. 전 인류의 3분의 1은 하루에 1달러 조금 넘거나 실제로 그 이하로 살아가야 하는 반면 산업 자본가나 경영자들은 역겹게도 수억 달러의 연봉을 보상으로 받는 세상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해 말하면서 (필요하다면 대량학살 전쟁 감행이라는 가장 폭력적인 군사적 수단을 포함해) 체제가 가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배질서의 착취 관행을 계속 강요하는 것은 그야말로 도덕적으로 분노할 일이다.
실질적 불평등이라는 해묵은 문제와 의식적으로 대결하지 않고는 현재 우리 사회적 소우주들의 적대적인 내부 규정을 제거하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자본의 사회질서는 뿌리 깊게 부정不正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어서, 생각건대 다른 방식으로는 작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은 그 본성상 시스템의 가장 작은 구성세포로부터 전반적인 사회 통제의 최상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항상 스스로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른바 개발도상국 사회−즉 자본의 지구적 위계질서에 완전히 통합되고 구조적으로 예속된 부분들−뿐만 아니라 현재 지배적인 사회신진대사 재생산 시스템의 특권적 지위에 있는 나라에도 해당된다.47-48
자본 시스템의 구조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변경하는 역사적인 과제를 그처럼 훨씬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 사회질서가 매우 오랜 세월 동안 구축된 실질적 불평등 문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실질적 불평등 문화의 형성에는 과거에 부르주아지의 가장 위대하고 진보적인 인물들까지도 깊이 연루되었다. 물론 그에 대해 놀랄 것도 없다. 애덤 스미스, 괴테, 헤겔과 같은 지적 거장을 포함해서 부르주아지 가운데 가장 선견지명이 있고 계몽된 인물들조차도 세계와 세상 문제들을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정될 필요가 있는 것을 진단할 때, 또한 확인된 난제들과 모순들에 대한 해법 모두를 자본의 시야視野로 구조적으로 제약된 매개변수와 전제를 가지고 정식화했다. 그들은 모든 사회 계급의 구성원을 완전히 포괄하는 진정한 평등이라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대혼란기에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기본 과제가 수면 위에 떠올랐고, 그러한 사회질서의 주요한 규정적 특징이 정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천명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규정적 특징은 자본의 완강한 내부 규정의 압력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곧바로 위반되었다. 계몽 개념은 실질적 평등 제도를 쟁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자유’까지 용인할 정도로 확장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아 바뵈프가 자신이 펴낸 《인민의 호민관Tribune du Peuple》이라는 잡지에서 혁명이 진행되는 경로를 비판하고 ‘평등자단團’Society of Equals을 조직하려 했을 때, 그가 재판절차를 밟지 않은 채 단두대로 끌려가서 1797년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처형당해야 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48-49
그러므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그 이후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의 세 가지 위대한 슬로건 가운데 두 가지인 ‘평등과 우애’가 사야에서 조용히 사라졌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그나마 ‘자유’조차도, 머지않아 자유의 본질을 매우 악랄하게 침해하는 것과 양립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러한 침해를 정당화해주는 것으로 위장하도록 만들기 위해, 공허한 정치적 수사修辭의 흔히 쓰는 수법으로 변질되어야 했다.
평등이 기껏해야 형식적이고 법적인 요건이고 의례적으로 반복되는 형식적인 요건일 뿐인 현재의 사회관계들 대신에 평등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고서는, 대안적 사회질서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실제로, 엄숙하게 선언된 ‘법 앞의 평등’조차도 굉장한 형식적 규칙을 실질적 조롱거리로 만드는 비용을 쉽게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대체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식적 법률은 얼마든지 매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주). 이 점에서 루소는 비록 확인된 모순들에 대한 실행 가능한 해법을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시대에 몇 가지 적절한 질문을 서슴없이 제기했다. 다음은 그가 외쳤던 비판이다.
“부자와 권력자에게 모든 사회적 이득이 돌아가지 않는가? 돈이 되는 자리는 모두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아니한가? 모든 특권과 면제가 그들에게만 부여되지 아니한가? …… 가난한 사람의 경우는 얼마나 다른가! 그가 인간적일수록 사회는 그를 더욱 부정한다. …… 이들 두 계급의 사람들 사이에 맺은 사회계약의 조건은 다음과 같이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나는 부자이고, 너는 가난하기 때문에, 너는 나를 필요로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약을 맺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명령하는 수고로움을 무릅쓰는 대가로, 네가 가진 얼마 안 되는 것을 나에게 넘겨준다는 조건하에, 나는 네가 나에게 봉사하는 영광을 갖도록 허락할 것이다.“50-51
부르주아 질서의 역사적 주도권이 끝나가게 됨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에 관해 난처한 질문을 하는 것은 자본의 관점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평등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평등의 극히 형식적인 요건의 몇몇 제한된 측면에 대한 관심사로 한정되어야 했고, 그것도 자본주의적으로 시행 가능한 계약의 규칙들과 관련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주로 형식화된 의미에서의 평등에 대한 담론의 주요 기능은 사회적 변호론과 신비화였다.
‘결과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배제하는 데 복무하는 냉소적인 담론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점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결과’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압박하는 것이 허용되면 기존의 권력관계에 일부 불편한 간섭이 일어나게 되고, 사회적 개인이 사회의 의사결정의 실질적 과정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능력이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회의 평등’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상태를 약속하는 전적으로 공허한 공식公式을 위해 ‘결과의 평등’을 옹호하는 생각 자체가 범주적으로 사라져야 하는 이유이다. 쟁점 자체가 정의되는 방식, 즉 ‘기회의 평등’의 선포는 결국 텅빈 형식적인 껍데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공식 자체가 ‘결과의 평등’을 냉담하게 그리고 냉소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명백히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결과’에 대한 희망이 정의定義상 애초부터 배제된다면 ‘기회’라는 것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51
실질적 평등을 온전히 실현한다는 것은 확실히 너무나 어려운 역사적 과업이다. 사실 어쩌면 그것은 사회질서 전체의 변혁을 포함하고 있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진실로 공평한사회의 건설은 그 자본주의적 변종變種은 물론이고 수천 년간 구축된 착취의 구조적 위계제를 발본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수많은 세월의 인간 역사와 관련해서 구조적으로 정착된 불평등은 기본적인 확대재생산 조건들이 계급사회의 명령구조를 통해 가장 잘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일정한 합법성을 가지고 정당화되었다. 왜냐하면 불평등은 모든 것이 ‘하루살이로’ 즉시 소비되는 대신에, 잠재적인 생산적 발전을 위해 잉여노동의 과실을−매우 부정不正한 방식일지라도−상당 정도 따로 떼어내 축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정당화는 물론 우리 시대의 거대한 생산력과 생산적 잠재력하에서는 전혀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당연히 사회의 확대재생산 조건들에서−비교할 수 없이 더 나은 쪽으로−인류가 역사적으로 성취한 이 같은 변혁은 모든 사람의 실질적 평등의 기초 위에 사회신진대사 통제양식을 조정하는 질적으로 다른 방식을 구축할 가능성을 원론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거대한 역사적 가능성이 우리시대에 열려 있다는 사실은 그런 역사적 가능성이 가까운 미래에 또는 먼 미래에라도 현실이 될 것임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특히 현재의 발전단계에서는 자본의 사회신진대사 통제의 조건들하에서 모든 생산적 잠재력은 동시에 또한 파괴적 잠재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후자는 우리 시대에 점차 증가하는 빈도와 커져 가는 규모로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유한한 지구 위의 생명체 전체까지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크게 선전된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온전한 의미이다.52-53
필연적으로,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러한 역사적 곤경은 우리의 도전 순서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문제인 진정한 평등 문제를 포함한 수많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규정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실행 가능한 사회주의적 재생산 질서의 형성은 갈수록 더 파괴적으로 되어가는 자본의 사회신진대사 통제 방식의 단순한 부정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주의적 재생산 질서가 자본의 통제 방식에 대한 부정과 동시에 현재의 지배적인 조건들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으로 명료하게 천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실질적 평등은 대안적 사회재생산 질서의 긍정적인 규정의 필수적인 특징이다. 왜냐하면 실질적 평등의 기초 위에서 재구조화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사회적 소우주의 구성 세포들의 적대적이고 갈등적인 내적 규정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 시스템의 기본적인 규정적 특징인 구조적으로 정착된 위계제 사회는 그 본성상 자신을 구성하는 소우주들에서나 그 적대적으로 결합된 총체에서나 모두 언제나 적대적이고 갈등적일 것임에 틀림없다. 자본 시스템의 구조적 위기가 깊어감에 따라, 적대적인 내적 규정들은 결국 폭발에 이르게 될 때까지 심화될 뿐이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조차 권위주의적 국가입법 조치들을 점점 더 많이 도입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것과, ‘자유와 민주’라는 철저히 거짓된 핑계를 대고 참혹한 전쟁에 적극 개입하는 것이 목격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53-54
그러나 폭발적인 모순들의 축적을 점점 더 폭력적인 수단으로 통제하려고 하는, 현재 분명히 관찰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경향은 반드시 통제 불가능하게 될뿐더러 역효과를 낳게 된다. 그런 식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이르게 될 곳은 인류의 파멸이다.
이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이치에 맞는 유일한 대안은 연합한 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존조건들을 재생산한다는 목적과 이를 위해 인간적으로 보상하는 작업 요건들에 전적으로 일체감을 갖는 사회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오직 실질적 평등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달리 말하자면, 무한정 억압될 수만은 없는 폭발적인 적대들에 대한 해법은 다음과 같은 사회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즉 한편으로 노동 자체가 보편화되어 모든 개별적 개인을 의식적으로 참여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각자의 생산 목표에 대해 개인이 적극적으로 노력해 얻을 수 있는 잠재적으로 매우 풍성한 성과가 그들 모두에게 형평성 있게 분배되는 사회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생산자들이 실질적 평등의 분리될 수 없는 이 두 차원이 결여된 (내부에서 파열된 소련형型 사회에서 널리 일어났던) ‘마지못해하는 노동력’과 유사하게 행동해야 할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포괄적인 실질적 평등의 실현이 역사적으로 지속 가능한 대안 질서를 창출하는 데 절대적 조건인 이유이다. 그리고 실질적 평등의 실현이 비적대적 재생산 질서를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유지하는 절대적 조건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는 것은 처음부터 사회변혁의 전반적 전략에 필수적인 요소로 설정되어야 한다. 실질적 평등의 실현을 변혁의 필수적 목표−여정을 위한 나침반뿐만 아니라 선정된 목적지에 이르는 도정道程에서의 성공을 측정하는 유형有形의 척도를 동시에 제공하는 목표−로 의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파악하기 어려운 정치적 공상空想이 되지 않을 수 없다.45-46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필수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와 같은 핵심적 문제를 비껴간다. 왜냐하면 이런 측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는 과거에 한 줌밖에 안 되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보였듯이 (사회주의적 조건들하에서는 최소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 것인) 민주주의 개념을 형식적으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해법을 찾고 있는 모든 것을 정치 영역으로 제한하려 하고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굴레 속에서 빙빙 도는 책임회피를 신비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호소가 실현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달성하기 힘든 정치적 꿈으로 전락하게 된 경위이다. 왜냐하면 상정된 ‘민주주의’가 사회적 내용이라 할 만한 것을 전혀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과거의 자본주의에서 구성되었고 그로부터 물려받은 것인 정치는 사실 인류 해방에 매우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명시적으로 국가의 사멸을 그에 따른 귀결들과 함께 비타협적으로 옹호했던 이유이다. 오직 실질적 평등 사회의 실현을 향한 가차 없는 돌진만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에 요구되는 사회적 내용을 제공해줄 수 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정치적 용어만으로는 정의될 수 없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인 정치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질적 평등은 또한 대안적 사회질서를 향한 이행移行의 정치의 기본적인 지도 원리이다. 명백하게 인정되든 그렇지 않든, 이행의 정치의 주요 사업은 의사결정권을 연합한 생산자들에게 점진적으로 넘겨줌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의사결정권을 점진적으로 넘겨받는 방식으로 자유롭게(소외된 권력으로서의 국가의 개입 없이: 역주) 연합한 생산자들이 될 수 있게 함으로써, 이행의 정치 스스로는 사업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불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역주). 그러나 실질적 평등의 대안적 사회질서를 펼치는 데에서 스스로를 넘어서는 적절한 지향 원리를 찾아내지 않고서는 정치는 스스로 손을 뗄 수 없다. 이처럼 실질적 평등을 실현한다는 핵심적인 역사적 과업에 복무하는 것은 사회주의 정치가 거대한 해방적 변혁에서 스스로를 재규정하고 재구조화하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5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