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최00(남, 74세, 2021.11.13)
- 도시재생사업, 봉사에 한계가 있어 걱정이다 -
<막장생활 이야기>
최00 씨는 올해 나이가 74세이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데 68년도에 이곳으로 이주했다. 올해로 53년차다. 20대 초반에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와 광산일에 청춘을 바쳤다.
고향에 있을 때에는 농사지을 땅도 꽤나 있었다. 그러던 것을 아버지가 광산사업을 하면서 모두 탕진했다.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
살길이 막막해서 광산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갔다. 군대 가기 전까지 소규모탄광 이른바 ‘쫄딱구뎅이’에서 일했는데 노임으로 국수를 받았다. 일당이 국수 10근이었다.
“노임을 다 주지 않고 일부를 적립해 뒀다가 연에 세 번 줬지. 단오 때 주고, 추석 때 주고, 설 때 주고 그랬지. 그것마저도 국수로 타다 먹었어.”
당시 일당이 400원 내지 500원 정도였다. 그런 생활을 1년 정도 했다. 그러다가 70년도 처음 개발한 두문동갱에 가서 일했다. 일명 ‘보구치’라고 했다. 거기서는 국수대신 쌀로 노임을 받았다. 하루에 쌀 2되 반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적립해뒀다가 명절 때 일시금으로 받았다.
“한 달 만근했을 때, 그때 두 번 놀았어요. 한 달 내내 일하면 쌀 한 가마니 벌어요.”
“그것으로 술 바꿔먹고, 반찬 사먹고, 그랬는데 그것도 ‘후려치기’로 되를 깎아서 주니 한 가마니도 안 됐지.”
쌀 2되 정도를 가지고 가야 소주나 두부를 살 수 있었다. 총각이다 보니 하숙을 했다. 하숙비가 대두로 7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돈은 구경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점심은 하숙집에서 도시락을 싸주는 것을 갖고 다녔다.
그러다가 군대를 갔다. 그때 나이 23살이었다. 군대를 마치고도 막막했다. 배운 것이 탄광일밖에 없어서 지금 강원랜드가 들어선 동원탄좌 하청업체인 성동탄광에서 13년을 일했다. 너무 힘들어서 76년도에 자격증을 따고 보안장 일을 하게 되었다.
“보안장이란 한 60여명 데리고 탄을 캐는 책임자죠. 작업지시도 하고, 위험한 곳 고치고 뭐 이런 안전책임자죠.”
탄광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마스크 없이 일을 했다. 그러다보니 진폐증환자가 많았다. 그는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건강하다. 80년대 사북사태 이후 정부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서 현물대신 노임을 돈으로 받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쌀 한 가마 정도 받았어요. 상돈이라고 적립금 받으면 준다고 전표 끊어서 할인(일명 와리깡)해서 술 사먹고 고기 사먹고 그랬어요.”
일이 힘들고 낙이 없으니까 술로 나날을 보냈다.
38년 정도 광산일에 종사하다가 정부의 폐광정책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광산생활 이후의 자영업이야기>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퇴직을 했다. 당시 퇴직금 격으로 600여만 원을 받았다. 그 돈을 가지고 대구로 내려가서 장사도 해봤지만 적응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자영업을 했다.
군대 가기 전에 만난 아내와 열심히 해서 한우구이 점포를 두 개나 차렸다. 사북은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폐광이 되다보니 살길이 막막했는데 카지노가 들어와서 그나마도 다행이다. 처음에 탄광생활 했을 때만 해도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운 것이 없다보니까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기 일쑤고, 짐승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죠. 결혼하고도 방에 깔판이 없어 가마니를 깔고 살았고, 대문은 싸리나무를 엮어서 썼어요.”
지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광산에서 나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는데 모두 잘 되지 않았다.
지인이 태백에 가서 한우구이를 배워보라고 일러줬다. 아내와 열심히 배워서 정직하게 장사를 한다. 좋은 고기 쓰고, 속이지 않고 그러니 장사도 잘 된다. 자식도 둘이나 두었는데 외지에 내보내 공부를 시켰다. 하나는 외지에 나가서 있고 하나는 같이 있는데 물려주니 뿌듯하다. 좌우명을 물으니 “양심껏 살자!”라고 한다. 음식점을 차려 돈을 벌어서 경로잔치도 여러 번 해주고 장학금도 여러 번 냈다.
<도시재생사업 이야기>
그는 33뿌리관 이사직을 맡고 있다. ‘빛의 거리’에 대해서 물으니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다만 마을 일이라면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참여한다. 참여자 모두가 고령이다. 그는 무엇을 하든 간에 도시재생사업이 끝나고 나서 잘해야 한단다. 관리 운영을 잘해야 한다. 주민들의 봉사활동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걱정도 많다. 무조건 봉사만 강요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