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9 (일) '해뜰날' 송대관 사망… 아내 이정심씨 '통곡 비보'
'쨍하고 햇뜰날' 가수 송대관이 2월 7일 오전 타계했다. 향년 78세. 아내 이정심씨에 따르면 송대관은 이날 오전 설사 증상으로 긴급히 서울대 응급실로 실려갔다가, 상황이 급격히 악화돼 숨졌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고인은 평소 지병이 있었으며 수술도 세 차례 진행했으나 호전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송대관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의 대표 히트곡 '해뜰날'처럼 좌절과 절망을 딛고 극적으로 꽃을 피웠다. 고난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일어서는 그의 오뚝이 인생에 팬들은 '저력의 국민가수'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가수의 삶을 살아온 지 올해로 58년째, 반세기를 훌쩍 넘겨 60년 가까이 활동했다. 1967년 정통 트로트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한 이후 '세월이 약이겠지요' '해뜰날'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정상급 가수로 부상했다.
송대관은 39년 전 돌연 처갓집이 있는 미국 이민을 결심한다. 당시는 '해뜰날' 등이 히트한 뒤 한창 인기를 누리던 시기다. 미국에서 그는 처가의 넉넉한 경제력을 등에 업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100만 달러를 투자한 초대형 슈퍼마켓에 이어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바로 인근에서 최고급 이탈리안 식당을 운영했다. 사업은 무난했지만 늘 허전했다. 송대관을 다시 무대로 돌아올 수 있게 한 건 음악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고국을 향한 짙은 그리움과 향수다.
10년 만에 귀국한 뒤 그는 '혼자랍니다' '정 때문에' '차표 한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네 박자' 등을 순차적으로 히트시키며 재기에 성공한다. 승승장구하던 송대관은 아내의 사업실패로 또다시 벼랑 끝에 내몰린다. 뒤늦게 억울함을 풀었지만 부동산개발 사건에 연루되면서 무려 145억 원의 빚을 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시련에 굴하지 않았다. 법원에서 보장한 10년 회생 기간(탕감+변제)을 불과 2년 만에 털어냈다.
그는 누구보다 롤러코스터를 많이 탄 가수다. '쨍'하고 '해'가 뜨면 고비를 맞고 다시 일어섰는가 싶으면 또다시 고비를 맞았다. 1967년 '인정많은 아저씨'이후 주목받지 못하고 무명가수로 전전하다 자신의 신세와 처지를 애절하게 담은 '세월이 약이겠지요'(1971년)를 불렀다. 직접 작사한 최초의 곡이다. 방송 출연량이 늘어날 즈음 '해뜰날'(1975년)을 불렀고 그가 "내 인생도 쨍하고 해뜰날 있다"는 심경을 담아 발표한 곡으로 오랜 무명가수에 대한 동정론과 함께 당시 사회 분위기 속 민초들의 마음에 공감대를 얻으면서 대 히트를 기록한다.
이후엔 직접 작사한 곡들은 대부분 자신의 심경을 빗댄 노래들로 채워지고, 어김없이 히트로 이어졌다. 송대관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자손이기도 하다. 그의 친할아버지 송영근 선생은 1919년 전북 태인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등사해 나눠주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2년 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송대관은 독립유공자 후손 자격으로 2006년 광복 61주년 기념 보신각 타종 행사에도 참석했다.
트로트계 대부 송대관이 향년 78세로 별세한 가운데, 그와 4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 온 매니저가 "내 인생의 멘토였다"라며 결국 오열했다. 송대관 곁에서 40년 가까이 매니저를 해 온 이대옥 대표는 7일 뉴스1과의 전화 통화에서 경황이 없는 목소리로 "오늘 돌아가신 것이 맞다"라며 "믿을 수가 없다"라고 끝내 눈물을 흘렸다. 이대옥 대표는 "형수님께 전달 받은 바로는 심장마비라고 한다"라고 알리며 "법 없이도 사시는 분이고 아버지 같은 분인데"라며 흐느꼈다.
이어 "30년 넘게 같이 했다, 오직 형님이라는 사람이 좋아서 이날까지 함께 일해왔다"라며 "나를 너무나 잘 챙겨줬고 신경써주셨던 분이다"라고 말했다. 또 "(최근) 몸이 좋지 않았지만 호전이 되고 있었고, 운동도 열심히 하셨다"라며 "공연을 하면서도 '무리하지 마시라'고 하면 '형 모르냐'라며 무대를 사랑했던 분"이라며 오열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1946년 6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송대관은 지난 1967년 발표곡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했다. 이후 1975년 발표한 곡 '해뜰날'이 대히트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았고 이후 각종 상을 휩쓸며 트로트계 레전드로 올라섰다. 이후 1980년대 돌연 미국으로 이민을 가며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가, 1989년 '혼자랍니다'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정 때문에', '차표 한 장', '큰 소리 뻥뻥', '고향이 남쪽이랬지' '네박자' '유행가' '딱 좋아' 등 히트곡을 남겼다. 특히 송대관은 고(故) 현철, 태진아, 설운도 등과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활약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박지원, 세상을 떠난 송대관에게… “이제 편히 가서 쉬어라”
2월 7일 트로트계 전설 가수 송대관이 향년 7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한 뒤, 1975년 발표한 ‘해뜰날’로 대히트를 치며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네박자’, ‘유행가’, ‘차표 한 장’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송대관은 60여년간 한국 트로트계에 전설이었다.트로트계 전설 가수 송대관의 별세 소식에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애절한 심정을 남겼다. 박지원 의원은 “‘대관아! 어떻게 이렇게 황망하게 가느냐?”라며, “‘쨍하고 해뜰 날’이 너였건만 너도 기어이 가는구나”라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어 “독립지사 후손으로 홀어머님께 그렇게 효도하고, 문화부 장관 때 어머님이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 상’을 수상하시니 내 손을 잡고 눈물 글썽이며 ‘형님 감사합니다’ 하던 너”, “가수협회장으로 6.3빌딩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선후배님들, 대중가요를 사랑해 주시는 팬들의 은덕이죠’ 하며 겸손해하던 너”, “몇번째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MBC 가수왕에 선정되었을 때 기뻐하던 너”라며, 지난날 아름다운 관계를 기억하며 우정어린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박지원 의원은 “용서를 빈다”, “내가 네 처를 야단쳤을 때 “형님 대학 무용과 출신의 부유한 집에서 하찮은 저 하나 보고 결혼, 자식들 낳고 길렀습니다. 저는 제 처를 절대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고 감싸면서 사랑을 표하던 너”라며, “뉴욕 씨씨 선물점에서 발리 구두 사 신고 좋아하던 너”, “해외동포와 금전거래로 시비 보도에 내가 갚겠다고 나섰던 나에게 형님 하며 울던 너”였다는 애절한 심정도 밝혔다.
마지막으로 “선거 때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유세 지원해주고, 나도 요즘도 네 노래 가사 인용해서 글쓰고 하는데 이렇게 가다니” 하며, “이제 편히 가라. 쉬어라.”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치 9단 박지원 의원이 트로트계 전설 가수 송대관의 마지막 가는 길에 보내는 애절한 심정이 대한민국 정치권에 ‘쨍하고 해뜰 날’로 하루빨리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삽교호 소들섬서 천연기념물 ‘흰꼬리수리’ 포착
야생생물보호구역인 충남 당진시 삽교호 소들섬에서 천연기념물 ‘흰꼬리수리’가 3년 연속 포착됐다. 2월 7일 유이계 소들섬과 우강사람들 대표는 “최근 소들섬 공원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흰꼬리수리를 관찰했다”며 “오전 9∼10시 2~4개체의 흰꼬리수리가 발견됐다”고 전했다. 흰꼬리수리(천연기념물 제234-4호)는 멸종위기종 1급의 법정보호종이며 몸길이는 84~94㎝이다.
삽교호 소들섬 인근에서는 지난 2023년부터 꾸준히 흰꼬리수리가 발견되고 있다. 유이계 대표는 “흰꼬리수리는 주로 하천 주변에 서식하면서 물고기류와 작은 조류를 잡아먹는다”며 “삽교호 주변에 먹이가 풍부해 매년 찾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삽교호 소들섬과 그 주변 지역은 지난 2022년 1월 야생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소들섬은 흰꼬리수리 외에도 가창오리와 같은 겨울 철새들의 주요 서식지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