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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8 주일설교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을까요?
마태복음 15:29~39
두 주간이 지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을까요?
1981년, 총신대학교 신학과 1학년 학생들이 토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죽었을까요? 아니면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해 죽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당시 우리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고 의지도 완전하시다. 그런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않으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10년 후에 저는 목사가 되고 나중에는 신학박사도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이 기특한 생각을 했다 싶습니다. 지금 제 친구들은 목사가 되고 그 가운데 여러 명이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여기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한다고 하시는데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면 또 헷갈리지요. 과연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을까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답을 확인하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속으로)
29절을 보면 예수님이 거기를 떠나셨는데 거기는 지중해의 도시 시돈입니다(21절). 예수님은 시돈에서 남쪽으로 100km를 걸어 갈릴리 호수 옆에 있는 데가볼리로 오셨습니다.(지도 참고) 여기는 유대인 구역이 아니라 이방인 구역입니다. 예수님이 이방인 지역에 들어가신 것을 나타내는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 증거는 29절에서 갈릴리를 호수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물이 모여있는 곳을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창세기 1:10에서 하나님은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보기에 갈릴리는 호수입니다. 마태는 다른 곳에서는 갈릴리를 바다라고 했지만 여기서만 호수라고 표현함으로 이방인 지역에 있음을 암시했습니다.
둘째 증거는 37절의 광주리라는 말입니다. 바구니와 광주리는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말에서 소쿠리, 바구니, 광주리가 모두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마 14:20>의 오병이어 사건 때는 바구니(코피노스 κόφινος)를 사용했는데 코피노스는 버들가지로 엮었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휴대용 바구니입니다. 하지만 <마 15:37>에는 광주리(스퓌리스 σπυρίς)를 사용했는데 이는 갈대로 엮어서 이방인이 생선이나 과일을 담는 큰 광주리입니다. <마 14:20>에서는 코피노스(κόφινος)를 사용했으나 <마 15:37>에서는 스퓌리스(σπυρίς)를 사용함으로 지금은 이방인 세계에 와 있음을 암시했습니다.
셋째 증거는 31절에서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라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는데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쳐 주시자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θεός)’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이스라엘 신에게 영광을 돌린 그 사람들은 이방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2년 반 동안 갈릴리바다 주변에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마지막으로 저 북쪽 두로와 시돈에 가서 전도하시며 가나안 여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데가볼리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데가볼리에서 하신 일을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 14:13>에도 예수님이 몸과 마음이 지치고 제자들도 많이 지쳤기에 벳새다에 좀 쉬러 가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리가 모여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맞아 복음을 전해 주시고 각종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29절에서 예수님이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앉으셨다는 것은 자리에 앉았다는 뜻도 되지만 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식사한다는 말을 식탁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었다 등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모여 왔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의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시고 또 천국의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치료가 안 되는 병자들이 낫는 것도 보고 천국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치료하신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당시 이방인들도 예수님 소문을 들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22절에서 시돈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아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시돈 여인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처럼 데가볼리의 사람들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문을 듣고 어렴풋이 알던 예수님이 직접 병자 치료를 보고 그 전하는 말씀을 들은 후에는 참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영광을 돌렸다(δοξάζω)는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을 칭송했다는 말입니다. 비록 성전 제사와 같은 형식은 갖추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들에게 빵을 먹여 주셨습니다.
32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그러자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을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하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남자가 무려 4000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떡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자 제자들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이 조금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34절에서 작은 생선(ἰχθύδιον)은 <마 14:17>의 물고기(ἰχθύς)보다 작은 것입니다. 또 두어 마리는 원문에서 올리고스(ὀλίγος)인데 아주 조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밥은 일곱 그릇이 있는데 반찬은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이들은 얼마 전 벳새다에서 있었던 오병이어의 사건을 잊어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사람의 한계는 전에 경험한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 나오던 고등학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시험 문제를 가르쳐 주고 시험날 숫자를 바꿔 출제하면 안 배운 문제라고 하는 학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이없는 사람이 그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도 같은 문제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나면 처음 당하는 것처럼 당황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신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신 예수님은 얼마나 한심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나 오늘날의 신자들을 보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그들을 성숙하게 하시고 제자로 성공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속히 믿음과 인격이 자라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마세요. 또 주변 신자가 믿음과 인격이 더디게 성숙해도 실망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계획과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바닥에 앉히고 그 떡과 생선을 축복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σπυρίς)에 가득 찼습니다.
벳새다에서 있었던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 기적과 마찬가지로 데가볼리에서 예수님이 4000명을 먹인 것은 모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배고픈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필요를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빵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온갖 복을 누릴 때는 받은 복만 기뻐하지 말고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과 복락을 주신 것을 믿고 기뻐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며 다스리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죽어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고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며 믿는 우리를 그 영원한 나라로 데려가시는 분이십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이방인들의 병을 고쳐 주시며 4000명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 확인해 봅시다.
마태복음 14장에서는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의 영지 벳새다로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15:1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여기까지 와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을 가서 시돈 여인을 만나셨고 또 데가볼리에서 이방인들을 만나셨습니다.
16:1에서 예수님이 갈릴리로 돌아오시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는데 그들은 또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 사건들 사이에 있는 15장의 두 사건에서 시돈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했고 데가볼리의 이방인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즉 유대인이 배척한 메시아를 이방인들이 영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1세기의 유대인 신자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첫째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아가 맞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그 메시아가 맞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둘째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으로 이방인을 경멸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방인도 구원의 대열에서 결코 예외가 아님을 설명했습니다. 15장의 두 사건은 하나님은 이방인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가 서두에서 궁금해하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을까요?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해 죽었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구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민족이나 국민은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방인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 전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믿는 우리에게 특권의식과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런 사람이 천국갈 수 있겠어? 저런 사람에게는 전도할 필요가 없을거야.”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을까요?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유대인 가운데도 구원받을 사람이 있고 이방인 가운데도 구원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천국의 백성이 되고 백인과 흑인이 같은 교회에서 예배할 수 있다면 중국인아너 일본인이나 우리가 전도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사람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을 찾아가셨다면 우리가 찾아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인정하기 싫은 사람이 누구인지 잠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처럼 이방인 같은 사람을 찾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https://youtu.be/2Yt1F1AYKEU?si=E-fi-3pBJEKMtq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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