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미주 가르멜 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모세수사
3。자전적 작품과 영성 작품
3.1. 『서간집』
에디트의 『서간집』 은 『자서전』 과 함께 성녀가 자기 자신을 직접 보여 주는 작품으로 그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원천이다. 흥미로운 것은『자서전』 의 내용이 끝난 시점부터 『서간집』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 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는 시점인 1916년 8월 3일까지만 작성 됐다. 반면,『서간집』은 그해 8월 16일 프리츠 카우프만에게 보낸 편지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서간집』 을 통해 에디트의 지적,정서적,영적인 모습을 포함한 그의 전체적인 모습에 다가설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 오는 편지는 679통이 있다. 에디트 가 일생을 통해 어느 정도의 편지를 썼는지 정확히 추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그는 어머니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곤 했으며 이는 그가 쾰른 가르멜에 입회한 다음에도 여전히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그 시절에 작성된 편지들은 전해 오지 않는다.
에디트가 쓴 편지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이는 편지를 받는 수취인만큼이나 다양하다. 다음은 편지의 주요 내용들 이다.
- 철학적인 문제들: 철학적인 개념들을 비롯해 작품들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 정보들: 에디트가 쓴 편지에는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정보가
담겨 있다.
- 하느님 그리고 진리에 대한 추구: 또한 에디트는 자신의 편지를 통해 진리이신 하느님을 향한 추구에 대해 전했으며 주위 사람들 또한 그분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했다.
- 다양한 영적 체험: 하느님에 대한 체험, 삶에서 겪는 사건들을 신앙의 빛으로 바라보는 것,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모습, 기도와 전례 등이 담겨 있다.
- 여성의 소명과 관련된 에디트의 다양한 견해
- 자신의 삶 속에서 드러난 초본성의 의미
에디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를 크게 그룹별로 나눠 보면 다음과 같다.
-가족: 에디트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중에서 에르나, 로사, 엘제, 한스 형부, 조카인 리사와 베르너 고르돈에게 보낸 편지가 몇 통씩 전해 온다. 그리고 에디트가 가족 전체를 수취인으로 해서 보낸 편지도 있다.
- 철학자들: 에디트의 편지 가운데 여러 동료 철학자들과 스승들에게 보낸 편지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아 전해져 온다. 이는 그가 자신과 학문 연구 과정에서 여러 철학자들과 교감해야 할 필요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부류의 편지에는 많은 철학 개념들을 비롯해 논란이 됐던 철학 주제들이 등장한다. 그가 편지를 보낸 철학자들 중에 눈에 띄는 사람으로는 로만 잉가르텐(162통),에드문트 후설,헤드비히 콘라드 마르티우스,프리츠 카우프만,페터 부스트,하인리히 핀케 등 이 있다.
_ 수녀들: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이후 에디트는 여러 수도회에 속한 다양한 수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 갔다. 그가 편지를 통해 다룬 내용은 개인적인 사안에서부터 수녀들을 위한 개별적인 조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그룹에 속하는 수녀로는 앙겔라 슈타트밀러,칼리스타 코프,아델 귀니스 예거슈미트,페트라 브뤄닝,칼리스타 브렌칭 등이다.
- 학생들: 에디트는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에게도 종종 편지를 썼다。이 부류에 속하는 편지는 에디트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 준다. 거기에는 그들을 지적, 영적으로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한 에디트의 영적, 실천적 조언들이 담겨 있다. 그가 교감을 나눈 학생 중에는 루스 칸토로비히,에르나 헤르만, 안넬리제 리히텐베르거 등이 있다.
- 가르멜 수녀들: 또한 에디트는 여러 가르멜 수녀들과 편지를 교환했다. 이는 주로 그가 에흐트 가르멜로 이전한 이후에 쓴 편지들이며 생의 마지막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머물 때에도 보낸 편지들이 전해져 온다. 또한 에디트는 다양한 작품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여러 가르멜 수녀원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에디트가 편지를 나눈 가르멜 수녀들 중에는 데레사 레나타 수녀,데레사 마르가리타 수녀,안토니아 엥겔만 수녀,요한나 반 베어스트 수녀 등이 있다.
- 고해신부들: 아마도 이 범주에는 상당히 많은 신부들이 속할 것으로 추정하지만,에디트가 고해신부들과 나눈 편지는 아주 조금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주로 성사를 봤던 첫 번째 고해신부는 슈빈트 신부로 그는 에디트가 살던 같은 슈파이어에 살았기 때문에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다. 반면 또 다른 고해신부이자 보이론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의 아빠스인 라파엘 발처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몇 통 전해졌다.
- 다양한 여성 운동에 속한 회원들: 에디트는 가톨릭교회 내의 다양한 여성 운동 그룹에 속한 회원들과 더불어 편지를 교환 하며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게르다 발터를 꼽을 수 있다. ‘
지금까지 살펴본 일련의 편지들은 성녀를 이해함에 있어 다른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풍요롭고 깊은 내용 을 담고 있다. 앞서 언급 했듯이, 에디트가 지인들에게 쓴 편지는 679통 전해져 온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그를 폭넓게 이해하게 해 주는 또 다른 원천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인들이 에디트에게 보낸 일련의 편지들을 말한다. 이 편지들은 총 273통 전해져 온다. 이는 늘 종이를 아끼며 활용했던 에디트의 습관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에디트와 관련된 또 다른 60여 통의 편지와 문서들이 전해 온다.
3.2. 『어느 유다 가정의 삶에 대하여』
이 작품은 소위 에디트 슈타인의 『자서전』 이라 불리는 책으로 에디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성녀의 생에와 인품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삶의 지향점 등을 이해함에 있어 핵심적인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작품이 간직한 독특한 점은 에디트가 신앙의 빛으로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고 있으며 이 선상에서 그가 전하는 이야기들 모두가, 심지어 아주 세세한 이야기까지 모두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앞서 성녀의 생애를 따라가며 잠시 살펴본 바 있다. 이는 작품을 이해하게 해 주는 주된 모티브이므로 다시 한 번 짚어 볼 필요가 있다。에디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무엇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난 후 시작된 유다인에 대한 조직적인 차별과 박해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유다인들을 말살하는 정책을 폈다. 그는 이를 위해 유다인들의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했으며 그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하고 다양한 흑색선전과 비방을 통해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히틀러는 선동을 통해 유다인들이 비인간적인 변종 이라고 몰아세웠다.
에디트는 당시의 이런 상황에 대해 깊이 우려했으며 나치가 주도하던 이 상황에 배어 있는 사악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파렴치한 거짓말이 독일인들의 사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는 퍼져 나가던 소문이 모두 거짓임을 사람들에게 확신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한 여인의 힘으로 막아내기에는 너무도 거센 물결이었지만, 에디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았으며, 그런 체제를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는 유다인들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자서전』 으로도 불리는 『어느 유다 가정의 삶에 대하여』를 쓰기 시작했다.
에디트가 이 작품을 쓴 시기는 쾰른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기 바로 전인 1933년 브레슬라우의 어머니 집에 머물 때였다„ 당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자신의 가족사와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해서 작품을 써 내려갔다. 작품 원본에는 그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정확한 날짜가 기재되어 있다. 1933년 9월 21일. 그러나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10월 14일,에디트는 쾰른 가르멜에 입회했다. 입회할 당시 그는 그간 썼던 이 작품을 갖고 들어갔다.
청원기와 수련기 시절, 에디트는 개인 휴식 시간이나 자유 시간을 활용해서 이 작품을 계속 집필했다. 그러나 수녀원 에서 맡겨진 소임을 비롯해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 집필 에 집중해야 했기에 『자서전』 을 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또한 이 작품을 끝맺는다 해도 당시 상황이 결코 출간을 허락지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 작품에 손이 덜 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작품은 에디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에흐트 가르멜 수녀원으로 이전한 지 얼마 안 된 1939년 초에 끝마치게 된다.
그리고 에디트의 사후 1964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에디트 슈타인 작품 전집의 제7권으로 출간됐다. 이 작품의 출간이 늦어진 데에는 무엇보다 에디트의 의향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형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이 작품이 출간되지 않기를 바랐다.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주를 이루고 2부는 에디트의 가정사에 대해 다퉜다. 이 가운데 2부는 에디트의 생애가 전개됨에 따라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또한 주지할 점은 여기서 에디트의 바로 손위 언니인 에르 나가 에디트와 함께 또 다른 주인공처럼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에디트는 1부를 통해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자기 가족의 기원,특히 외가 쪽의 가족사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야기는 에디트의 외증조부모로부터 시작해서 외조부모에 대해, 즉 그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또 어떤 직업에 종사 했으며 어떤 신심을 가졌는지 등에 대해 자세히 전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에디트의 어머니가 자라고 아버지를 만나 함께 가정을 차린 고향 루블리니츠에서의 가족사에 대해 전한다.
반면, 2부에서 이야기는 크게 다음의 주제들과 더불어 에디트에게 집중되어 드러난다.
-에디트와 에르나의 어린 시절
-가족의 걱정과 불화
-에디트와 에르나의 성장
-브레슬라우 대학 시절
-괴팅겐 대학 시절
-박사 학위 논문 발표와 관련된 이야기
3.3. 『어떻게 쾰른 가르멜에 이르렀는가』
에디트 슈타인이 자신에 대해 쓴 또 다른 자전적 작품으로 『어떻게 쾰른 가르멜에 이르렀는가』 라는 작품이 있다. 이는 에디트가 쾰른 가르멜 수녀원에 체류하던 거의 마지막 시기인 1938년 말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작품의 오른쪽 여백에 성녀의 친필로 ‘대림 4주일’ 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에디트는 조여오는 나치의 박해로 인해 독일을 떠나야 하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자신이 몸담고 살았던 쾰른 가르멜과의 이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에디트는 이를 통해 자신이 어떻게 가르멜 성소를 받았는지,특히 쾰른 가르멜 수도 공동체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자세히 전했다„
연대적으로 볼 때,여기서 에디트는 1933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당시 6개월이란 기간은 에디트에게 의미심장한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에디트 는 이 책을 통해 가르멜에 입회하기 전까지 있었던 모든 사건들에 대해 전하며 자신이 어떻게 이 사건들을 바라보고 해석했는 지 언급했다.
이야기는 당시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어떻게 유다인들에게 정세가 악화되어 갔는지 설명하며 시작된다. 그는 아 상황을 목도하며 유다인들이 자기 민족임을 새롭게 자각했다. 그리고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이 부조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회칙을 반포하도록 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에디트는 자기 민족을 짓누르던 십자가를 쾰른 가르멜에서 져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뭔스터에서의 활동을 더 이상 이어 갈 수 없게 되자, 성소자로서 가르멜과의 접촉을 시도하며 입회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당시 관구장 신부는 그로 하여금 기다리도록 권했다. 1933년 6월 18〜19일,에디트는 쾰른 가르멜 공동체 수녀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성소 식별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전보를 통해 입회 허락을 통보받게 된다. 그는 그해 7월 15일까지 뭔스터에 머물며 삶을 정리하고 입회 준비를 했다, 이어서 7월 16일부터 약 한 달간 쾰른 가르멜 수녀원의 외부에 머물며 시험 기간을 거쳤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15일 에디트는 정식으로 입회를 하게 된다. 이렇듯 이 작품은 에디트가 가르멜 성소를 받아 수녀원에 입회하기까지의 배경과 일련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작품의 말미에 에디트는 자기 가족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으며 어떻게 수녀원 입회 결정을 어머니에게 전해야 하는지 하는 고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리고 어머니와의 이별로 인해 겪게 될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이와 더불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는 에디트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3.4. 『영적 묵상집』
『영적 묵상집』은 에디트가 가르멜 수녀원에서 여러 기회에 작성한 일련의 영적 소품들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작품들은 가르멜 수녀원의 관례에 따라 이루어 진 행사를 위해 준비된 작품이다. 통상 수녀원에서 회원 중에 누가 수도서원을 갱신하게 될 경우, 원장 수녀는 수도 공동체 회원들을 위해 묵상할 수 있는 약간의 강의나 묵상 거리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그중에는 반드시 공적인 기회에 읽가 위해 작성 된 것만 있지 않았다. 여하튼 이 부류에 속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성경 텍스트에 준해서 또는 축일 같은 특별한 시기와 연관되어 작성됐으며, 읽는 이로 하여금 영성 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성찰하고 묵상하도록 도와주었다. 여기에는 많은 작 품들이 속하므로 제목만 소개하기로 한다.
- 『행복하여라,영이 가난한 사람들』
- 『십자가에 대한 사랑』
- 『거룩한 신중함』
- 『십자가 현양』
- 『숨겨진 삶과 공현』
一 『미리암 수녀의 서원에 즈음해서』
- 『어린양의 혼인』
_ 『공현 축일에』
- 『십자가 고양』
- 『세 명의 동방박사들』
3.5. 『교회의 기도』를 비롯해 가르멜과 관련된 여러 작품들
『교회의 기도』는 에디트 슈타인이 가르멜 수녀원에서 완성한 작품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성녀 에디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책 가운데 하나이다. 작품은 1937년에 파더본에서 처음으로 출판 됐다. 이 작품은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전례와 성찬례로서의 교회의 기도
2) 교회의 기도로서의 하느님과 단둘이서 하는 대화
3) 내적인 삶, 그 외적 형태와 활동
에디트는 늘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영성 생활이 제대로 유지되고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전례와 기도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기도하는 여인으로서의 에디트는 공적인 전례와 개인 기도를 분리하려는 잘못을 극복할 줄 알았다. 이 작품은 바로 이 둘 사이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한 에디트의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다. 에디트는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에디트는 모든 참된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령께서 친히 기도 하시는 곳에서 교회 또한 기도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가치의 범주’에 따라 기도를 구별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러 한 에디트의 전망에 있어 출발점은 성찬례적인 찬미에 있다.
3.6. 시
시를 짓는 관습은 가르멜 수도회의 오래된 전통으로 창립자인 성녀 데레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디트 역시 9년간의 가르멜 수도 생활을 통해 다양한 기회에 시를 즐겨 지었다. 예컨대 어떤 기회에 특별한 이유로 시를 짓는 다든지, 또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시를 지었다. 가르멜에 입회하기 전에도 시를 짓곤 했지만 이 역시 아주 드문 기회에 어떤 특정한 이유로 시를 지었다. 에디트의 시는 문학적,예술적이라기보다 영성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몇 편의 시를 지었는지 정확히 해아리기는 쉽자 않다. 왜냐하면 현재 보존되어 오는 시보다 훨씬 더 많은 시를 썼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현재 전해져 오는 에디트의 시는 총 28편이다.
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파스카의 새벽」,「사제직」,「어느 새 60년이 지났네」,「아버지 성 요셉께 드리는 노래」,「가르멜 의 포도밭」,「성령강림 대축일 9일기도」,「사람들과 함께 계시 는 하느님의 지성소」,「전능하신 어머니」,「십자가의 표지」,「거룩한 얼굴」,「거룩한 밤」,「1938년의 50일」,「의로운 십자가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에흐트의 오틸리아 수녀님께」,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성 요셉, 저희를 인도하소서」,「제게 말 씀하시길」,「오,지고하신 어머니」,「하느님 아버지께」,「1940년 6월의 격언」,「심장 뚫림」,「방향타」,「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예수의 마리아 로사 자매의 서원」,「오,동정 성모여」,「성령의 정배」,「예수성심」,「당신은 지고하고 영원한 주님이십니다」.
3.7. 공동 휴식
‘공동 휴식’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공동체 생활이 지닌 독특한 면을 드러내는 형태 또는 문학 장르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이미 16세기에 성녀 데레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세운 새로운 가르멜 내에서 공동체적인 휴식,오락,쉼 같은 인간적인 요소가 잘 작동됨으로써 수도 생활에서 오는 긴장을 건강하게 해소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동체 시간표에 매일 2시간의 묵상 기도와 함께 2시간의 공동 휴식을 집어넣었다. 이 시간은 통상 공동체 회원들이 함께 휴식을 보내며 오락을 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형제애를 나누는 시간이다.
또한 특별한 시기에는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축제를 거행하며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은 성녀 데레사 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가르멜 수녀원 내에서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공동체 회원 중에 어느 회원의 영명축일 또는 양성기에 있는 수녀들의 서원,연로한 수녀들의 은경축 또는 금경축이 되면 수녀들은 노래,춤,시,연극 등을 준비해서 공통의 축제를 지낸다. 이 가운데 수녀들은 ‘연극’을 ‘휴식’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왜냐하면 수녀들이 연극을 하는 목적은 결국 공동체 수녀들이 함께 휴식을 함으로써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런 선상에서 에디트 역시 자신의 새로운 수도 가족의 전통에 함께했다. 에디트는 가르멜을 알기 훨씬 이전인 1920년에 바로 손위 언니인 에르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일종의 연극 대본을 쓴 적이 있다. 이 대본은 상당히 익살맞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에디트가 쓴 이 부류와 작품들은 지극히 공동체적인 맥락을 고려해서 작성됐다. 그래서 공동체 수녀들이 이해하기 쉬운 어투와 사고방식 또는 시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에 속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이 6개 정도가 있다. 「두 아이와 유모차」,「하느님의 옥좌 앞에서」,「나는 언제나 너희 가운데 있다」,「하느님이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밤의 대화」,「대천사 성 미카엘」.
3.8. 위 디오니시오 관련 작품
1) 위 디오니시오의 작품 전집 번역
주지하다시피 위 디오니시오는 5~6세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가톨릭 신비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인물됨과 사상에 대한 에디트의 관심은 이미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 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표출된 것은 1940년 그의 가르침과 작품 에 대한 소개를 통해서였다.
1940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에흐트 가르멜에 있을 당시, 에디트는 Journal of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라는 새로운 아메리카 현상학 잡지를 위해 힘써 줄 것을 부탁받았다. 이에 부응해서 에디트는 1940〜1941년에 걸쳐 위 디오니시오의 사상과 작품을 소개하게 된다. 또한 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그의 작품 전집에 대한 번역으로 에디트를 이끌었다. 이렇게 해서 짧은 시일 만에 에디 트는 위 디오니시오 전문가로 거듭나게 된다.
에디트가 위 디오니시오의 작품 전집을 번역하게 된 기본적인 이유는 독어로 된 그의 작품 전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디트는 1940년 말부터 1941년 초에 걸쳐 작품 전집 번역 작업을 했다. 다음은 에디트가 번역한 위 디오니시오의 작품 목록이다. 『신명론』,『천상 위계론』,『교회 위계론』,『신비신학』,『서간집』. 에디트가 위 디오니시오의 작품을 번역하게 된 것은,성 토마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에 보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에디트가 번역한 위 디오니시오의 작품 전집은 2003년에 에디트 슈타인 작품 전집 제17권으로 출판됐다,
2)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길』
이 작품은 위 디오니시오의 사상을 소개하는 에디트의 소논문으로 그가 에흐트 가르멜에 머물던 1941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1941년 6월 13일자 에디트의 편지에는 이 작업을 마무리하던 당시 에디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루스가 그걸 타이핑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아티클을 출간하기 전에 전문가들의 정식 평가를 듣기 위해 두 분의 위 디오니시오 전문가가 계신 발켄부르크로 먼저 원고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에디트가 언급한 전문가란 알로이스 리스케와 에디트의 고해신부인 요한 네스 히르쉬만을 말한다. 에디트의 원고를 받아 본 두 사람 가운 데 히르쉬만은 그해 8월 21일 자로 에디트에게 회신을 보내며 몇 가지 조언과 더불어 수정할 것을 알려 주었다. 그는 로드몬트 주교에 의해 에디트의 이 작품을 평가하는 검열관으로 선임됐으 며 1941년 9월 11일 자로 ‘nihil obstat’, 즉 출판에 장애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그 후 에디트는 원고를 아메리카 현상학 잡지 편집장인 마르틴 파버에게 보내 출판하도록 조치했다.
이 소논문의 정확한 제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길. 아레오파기타의 ‘상징 신학’과 그 객관적 전제들』. 작품은 두 부분으로 나뉘며,1부는 분량으로 봤을 때 아주 적고 입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거기서 에디트는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다음의 주제들을 간략히 소개했다. 위 디오니시오의 작품들,그의 존재론과 인식 문제, 그가 신학에서 설정 한 단계들. 반면, 에디트는 작품의 2부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 ‘상징 신학’을 심도 깊게 다뤘다.
그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6개의 장을 세분화했다. 1) 아레오파기타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상징 신학에 대한 설명,2) 상징적인 이름들에 대한 직접적 의미와 중개된 의미,3) 비유로서의 상징,4) 화자(話者)와 청자(聽者)에게 있어 비유와 그 전제들 간의 관계 (여기서 에디트는 하느님에 대한 본성적인 인식과 신앙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초 자연적인 체험이 무엇인지 소개했다.),5) 신비의 장막으로서의 상징 신학,6) 숨김과 발견의 단계들.
3.9. 『십자가 학문』
『십자가 학문』은 기본적으로 에디트가 자신의 관점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사상을 종합한 책이다. 그가 성녀 데레사와의 만남을 가진 것은 1921년 6월 바트베르크차베른에서 성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였다. 반면, 십자가의 성 요한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기를 언급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에디트가 십자가의 성 요한을 접하게 된 것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지 몇 년 후인 1927년 정도로 추산된다. 그렇다 하더라도,1930년대 초반까지는 성인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강독을 하지 않았으며, 이는 쾰른 가르멜에 입회한 후 양성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졌을 공산이 크다.
『십자가 학문』은 에디트의 많은 작품 가운데 마지막 작품으로 생애의 마지막 시기인 1941~1942년에 쓰였다. 이 작품 바로 전에 작성된 위 디오니시오의 사상과 관련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길』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몇 년 전에 작성한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에서 에디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가운데 그로부터 받은 영향을 상당히 많이 드러내고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에디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1935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934〜1935년에 작성한 여러 소품 가운 데 『사랑과 함께한 사랑』 이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또한 1933년에 에디트가 십자가의 성 요한 축일에 작성한 『십자가에 대한 사랑』 이라는 소품에서도 십자가의 성 요한과의 만남을 찾아볼 수 있다.
에디트가 『십자가 학문』 을 쓰게 된 것은 1940년 네덜란드의 에흐트 가르멜에 머물 당시 그곳의 원장인 암브로시아 수녀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암브로시아 수녀는 성녀에게 십자가의 성 요한의 탄생 400주년(1542〜1942년)을 기념해서 그분 에 대한 작품을 쓰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1942년으로 예정되어 있는 성인 탄생 기념에 맞춰서 완성하기는 사실 쉽지 않았다. 에디트는 초기에 이 작품의 집필을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 했으며 이와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성인의 영성을 묵상할 수 있도록 그분의 작품에 깊이 잠겨 들었다
이 작업 과정에서 특기 할 점은 에디트가 성인의 사상을 제대로 소개하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스페인어를 배워 가면서 원어로 된 성인의 작품 텍스트를 직접 분석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십자가의 성 요한 연구뿐만 아니라 성 토마스와 위 디오니시오의 사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보여 준 에디트의 학문적 진지함과 언어적인 능력에 기인한다.
이렇게 해서 에디트는 1940년부터 1941년 10월까지 집필을 위한 자료들을 충분히 모았으며, 1941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집필 작업은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 이듬해 여름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진행됐다。1942년 초여름이 되면서 에디트는 루스 칸토로비히로 하여금 작성된 모든 원고를 타이핑하도록 부탁했다.
『십자가 학문』 은 에디트 슈타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보급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본래 이 작품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서 1942년에 출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출간되자 못했으며 에디트의 사후 1950년이 돼서야 에디트 슈타인 작품 전집 제1권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에디트는 이 작품을 통해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체험이라는 다양한 관점을 포괄하는 가운데 성인을 총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이 작품은 그 구조나 내용뿐만 아니라 성인의 작품 사본에 대한 연구 등에 있어서 확실한 권위를 갖고 성인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소개했다.
무엇보다 『십자가 학문』은 가르멜 영성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는 에디트가 이 작품을 쓰면서 고려한 근본적인 의도였다. 우리는 성녀가 남긴 작품의 서언에서 이 점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페이지들에서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그의 생애와 작품들 가운데 드러나듯이 그렇게 그의 존재의 단일함 안에서 이해하고자 함이며, 이는 이를 충만하게 이해하게 해 주는 관점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성인의 전기를 제공하거나 그의 가르침들에 대한 완벽한 해설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서언).
에디트는 여기서 언급한 ‘존재 의 단일함’에 대한 설명을 십자가의 구원적인 표징 안에서 묘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선상에서 새로운 생명의 원천인 십자가를 학문으로 제시했다. 그는 십자가를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 도 안에서 신비적인 변모를 가능하게 해 주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게 해 주는 길로 보았다. 에디트는 이를 바탕으로 영성 생활에 대한 학문적 이해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그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 줌과 동시에 그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 의 신비체험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했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는 ‘십자가의 메시지’ 라는 소제목이 붙었으며 에디트는 이를 통해 십자가의 성 요한 의 생애에서 형성된 십자가 메시지가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 살펴보았다. 반면,십자가의 가르침’으로 명명된 2부에서는 성 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를 바탕으로 그분의 작품 들을 소개했다。여기서 그가 제시한 작품 강독의 열쇠는 다름 아닌 학문으로서의 ‘십자가, 또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 하는 것이다. 에디트는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정에서 중요하게 드러나는 성인의 텍스트들과 주제들을 선별해서 제시하는 가운데 상승적인 전망 안에서 성인의 주요 작품들을 분석해 나갔다. ‘십자가를 따름’ 으로 명명된 3부에서 에디트는 작품 전체에 대한 결론을 제시하는 가운데 성인의 사상 전체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 지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III.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작품 세계 (자전적 작품과 영성 작품)
고맙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일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