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삶의 방향이 예수인 자
02/21화(火) 빌 1:19-24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빌 1:20)
데마는 세상이 좋아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시험 들어 교회를 멀리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 명예에 끌려 잘못된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 가말리엘 문화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목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자행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 삶의 방향을 바로 잡게 됩니다.
삶의 방향이 예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 자신이 삶의 방향,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시민권, 공부 많이 한 것, 집안이 좋은 것들을 예수를 붙잡기 위해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 자신이 발견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빌 1:20)
우리도 삶의 방향을 예수로 잡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그 인생 전체를 책임지십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의 축복을 주십니다. 꿈꾸지 않은 것까지 이루어주십니다.
▣삶의 방향이 주님께 있으면 고민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걱정, 근심하는 것은 자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이 예수가 되면 고민이 없어집니다. 삶이 단순해져 작은 일에도 행복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예수는 포도나무, 나는 가지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 가지치기를 합니다. 가지치기를 하는 것은 영양이 분산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에 능력이 없는 것은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함이 능력입니다. 기도할 때 삶이 단순해집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은 단순합니다.
▣삶의 방향이 예수와 같은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부끄러움은 죄이고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함은 능력입니다. 사나 죽으나 삶의 방향이 예수인 사람은 담력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족함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갑니다. 도중에 풍랑이 일자 배 밑으로 숨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웠고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는 삶입니다.
And...
현대인들은 속도(speed)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빨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가는가?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삶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즉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소망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열심히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런 유다가 실패한 것은 삶의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자살로 비참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사람입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세상에서 옳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세상에서 옳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틀릴 수 있지만, 주님은 영원히 옳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아야 하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 하나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간혹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래전 미국의 기독교계에 충격적인 뉴스가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 박사가 하버드대학교를 사임하고 메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지체아 시설에 직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신학자가 하버드대라는 명예와 수입을 버리고 정신지체아들의 용변 지도와 세수, 옷 입히는 일들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의 이름’(In the name of Jesus)이란 책에서 그는 “예수는 이론으로가 아니라 희생으로 증거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 믿고 중생한 후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냄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란다”
‘예수쟁이’란 기독교인들의 별명입니다. 100년 전 한국 땅에서 서양 귀신이라 불리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비웃음과 모욕을 담아 붙여준 별명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이름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예수쟁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이 사회를 위해 헌신된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예수와 삶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예수쟁이입니다. 이 땅에 예수쟁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남은 것이 오직 예수’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예수 뿐이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 마져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 마져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게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오직 예수 뿐이네
https://youtu.be/IFh1xmrc2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