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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O(유엔식량농업기구)의 실습선에서 실습을 마치고 2등항해사를 거처, 맨 처음으로 선장(船長)이 된 것이 같은 회사의 북양 명태잡이 300톤급 트롤선(trawler)인 ‘제55 동방호’ 였다.
그 배에서 이미 두 항차 마치고 세 번째 항차 출항준비 중에 갑작스레 퇴사(退社)하게 됐다. 상술(詳述)하면, 지금까지 내 성실과 근면을 회사가 인정했기에 승진도 빨랐고 신임도 깊었다. 그런데 이 항차를 준비 중에 박x민 기관장이 주기관(主機關) 실린더 카바(Main Eng. Head cover)에서 누수(漏水) 현상의 원인을 찾아내어 본사 공무감독인 최 부장에게 보고했다.
이 누수 현상은 본선을 일본에서 수입(輸入)해 올 때 이미 증상은 발견되었지만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운영되어 오다 나한테 넘어온 것이다.
박 기관장은 ‘동방51호’ 시절 내가 1등항해사일 때 1등기관사로 있었는데, 나보다 연상(年上)이지만 각별한 친분도 있었기에 내가 선장으로 승진할 때 기관장으로 발탁했었다.
그는 누수의 원인을 찾기 위해 지난 두 항차 동안 고전분투한 결과 주기 Head Cover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이 생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모르면 몰라도 원인을 찾아낸 이상 수리를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요청에 본사 최 부장 영감님이 “지금까지 별일 없이 유지해 왔으니 한 항차만 더 하라”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고 양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한 책임은 본선에게 없음을 인정해달라고 했으나 이를 거절한 데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사고가 나면 이상(異狀) 유무와 관계없이 본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즉, 수리비용까지 본선의 경비로 해야 한다는 얕고도 극히 이기적인 조치일뿐만 아니라, 승무원의 생명은 아예 고려의 대상으로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원인을 모른다면 모르되 알고 난 이상 이 상태로는 출항치 못하겠다는 기관장과 나의 주장은 한결같이 단호했다. 해상(海上)에서 주기(主器)의 사고는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다. 회사는 금전에 관한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전 선원의 생명이 달린 사항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출항하여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마져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 어느 미친놈이 갈거냐? 못하겠다고 버틴 것이 결국 퇴사(退社)로까지 이르게 것이다. 미련도 가책도 없었다. 책임자로서 당연히 했어야 할 요구였다.
오직 자사(自社)의 이윤만을 고집하는 그 비정함이 싫었다. 그렇게 해서 수산계(水産界)와 결별한 것이다. 그해 여름 3개월 가량의 실직상태를 겪은 후 다시 시작한 것이 상선(商船)이었다.
어느 날 FAO 동기생인 이X진 군에게 전화가 왔다. “서 형, 노느니 상선 한 번 타보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산(水産)회사의 무지막지(無知莫知)한 타성에 질려 바꾸어 봤으면 하던 때라, ‘그래 볼까’ 하고 살짝 마음이 움직였다.
그 친구는 서울에서 모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선원이 될 사람이 아닌데 어찌 바닷일에 뛰어 들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두뇌가 명석하고 영어도 잘했는데 수료하자 승선하지 않고 바로 굵직한 협성해운의 직원으로 입사했다. 후에 해운(海運) 영업부와 일본 지사장(支社長)를 거쳐, 홍콩에다 자신의 회사를 만들고 해운 브로커(중개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주위에 해운업에 관계있는 줄이 있었으나 본인이 선박에 대한 경험이 없어 최단시일에 면허를 취득할 방법으로 FAO에 입소했고, 수료와 동시에 해운회사로 영입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내가 가진 면허장이 상선이 아닌 어선면허임을 알고 있는 그는 ‘염려마소. Panama 면허장을 받아 줄테니…’ 했다.
당시 협성해운에서도 자사선(自社船) 4척은 두고, 외국선박에 선원만 송출하는 소위 매닝(Manning Co.) 부서를 만들고 그 운영을 이 군에게 맡긴 것이다. 한창 선원 인력수출로 외화벌이가 재미가 있어 너도나도 뛰어든 때였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국내선에 비해 월등이 높은 임금을 달러로 받게 된 선원들이 좋고, 회사는 인력(人力)만 보내고 앉아서 수수료를 역시 달러로 받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벌어들인 달러에는 세금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기에 부서 담당자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유능한 책임자 선발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에 나를 택한 것이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선주(船主)는 일본회사이면서도 국적만 파나마로 바꾼 「M/V Eastern Prosperity」호의 2등항해사였다. 선장 경력을 있지만 ‘상선쪽은 처음이기에 두어 항차만 참아보라’고 했다.
회사에서 구성한 선원들이 일본 시코쿠[四国]의 도쿠야마시[德山市] 카사도[笠戶] 조선소에서 인수·승선했다. 처음부터 분위기가 어색했다. 어선에서는 회사와 선장이 계약을 하고 선원은 선장의 책임과 재량으로 선발, 승선시키는 데 비해 상선은 선장부터 최말단 선원까지 회사 선원과(船員課)에서 선발했기 때문에 각자의 빽?(배경)이 달랐다.
부산을 출발할 때부터 20여 명의 전 선원들이 서로가 이름조차 모르는 생판 처음 보는 입장이라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선주(船主)는 변함없이 일본 회사였지만 껍데기만 외국국적과 외국선원으로 바꾸었으니, 기존에 승무하던 일본선원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된 셈이라 일본선원노동조합의 반발이 엄청 심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의 일이지만 내 자신도 처음으로 상선 선장으로 내정되어 지중해(地中海) 어느 항구에서 교대하기로 선원구성까지 마치고 대기 중이었는데, 일본 선원노조의 반발로 깡그리 무산된 일을 겪었다.
그런 배경이라 인계해 주는 일본 선원들이 제대로 응해 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내 상대역인 2등항해사는 나오지도 않았다. 2등항해사의 주임무는 ‘항해’ 담당이므로 해도(海圖)나 각종 항해계기 등이었다. 이것은 어선이나 상선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선장경력을 가진 나로서는 별 문제가 없었기에 순조롭게 진행이 된 셈이었다. 또 다른 임무는 선내 의무담당인데 이도 부상률이 어선쪽이 훨씬 높은 상황이라 충분히 경험한 것이므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기관부 Mr. 최가 작업중 입은 부상을 응급조치 및 치료의뢰서를 만들었다. 이것이 곧 선장을 비롯한 선내 선원들의 인정을 받게 된 첫 동기였다.
Gross Tons(총톤수) 3,000톤의 다목적 화물선이었다. 항로(航路)는 일본→태국의 방콕→인도네시아의 쟈갈타(Jakarta)→ 보르네오에서 원목(原木)을 싣고는 일본 또는 부산항으로 회항한다는 정기 항로였다.
보르네오섬에서의 일이다. 지금이야 어떻게 변했는지, 가끔 TV에서 보는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지만, 당시만 해도 세계 제3위로 큰 섬인 보르네오는 자국(自國)인 인도네시아 수도 쟈칼타에서도 선박으로 접근하기 힘든 항로였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 설치되었던 항로시설(등대, 등부표)들이 남아 있으면서도 관리가 되지 않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있으나 마나 한 상태였다. 부득이 시야(視野)가 보이지 않는 야간에는 항해를 멈추기도 했다.
겨우 찾아간 항구는 이름뿐 그냥 강 입구였다. 걸판지게 넓은 데다 우거질 대로 우거진 짙은 원시 밀림 천지였다. 위대한 자연 앞에 얼마나 인간이 왜소하고 약한가를 느끼면서도 결국은 문명의 발전이라는 미명으로 하나하나 훼손해 가고 있었다. 내 자신도 그 한 몫을 돕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입구에서 Pilot[導船士]을 태우고 강을 따라 두어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데 역시 그곳도 정식 항구는 아니었다. 그냥 널찍한 강 한 켠에 닻을 내리고 상류에서 예인선으로 끌고 오는 거대한 통나무 뗏목들을 선박에 묶어두고 본선(本船)의 양하장치로 하나씩 건져 올리는 것이었다. 이들 원목(原木:통나무)은 일본은 물론 한국의 목재 재벌 ㈜동명목재의 합판제조 원료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물에 뜨지 않는 ‘싱카’라는 나무는 야물기도 하지만 고급가구나 TV 테두리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고 했다. 무지렁이인 우리가 보아도 탐스러운 것들이었다.
그 밀림 속의 강기슭에도 띄엄띄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인간도 결국은 자연의 극히 작은 한 부분으로 대자연에 곱살이 끼어 같이 먹고 산다는 것이 옳은 표현인지도 몰랐다. 원시(原始)란 말을 떠올렸지만, 그들 손목에 걸린 누른 시계 하며 각종 요란한 포장지들을 보면 현대 물질문명이 이미 깊숙히 침투했음을 짐작했다.
교통수단이 없기에 본선의 구명정(救命艇)을 내려 타고 다녔다. 중국계 마을을 돌아보았다. 집이래야 강기슭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역시 나무로 얽기썰기 얽어 바닥을 만들고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형태의 것이다. 어느 집에서나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 둘째 애가 막 태어났으나 얼굴도 보지 못한 때라 보통으로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내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어보지 못하는 등외 아빠임은 분명했다.
그런 집에서 독한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거북이 알 1개와 게 반쪽을 먹었는데, 심한 복통으로 혼이 난 적도 있다. 주인 남자와는 말은 불통이지만 한자(漢字)로는 통했다.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의 문명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말은 변해 전혀 통하지 않은 곳이 있지만, 글자[文字]는 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것도 지금의 간체자(簡体字)가 아닌 우리가 쓰는 번체자(繁體字)였다.
이들 집에서,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소위 반려동물인 원숭이를 본 것이다. 목줄을 달아 묶어 놓긴 했지만 완전히 한 가족인 듯했다. 제법 훈련이 된 듯 낯선 사람을 보고는, 꼭 내 주먹만한 게 잇빨을 들어내고 주인한테 이상한 넘이 왔다고 일러바치는 듯했다. 그냥 숲속에 사는 것을 잡아다 기른 것이랬다. 우선은 귀엽다고 생각한 것이 결국 한 마리 사기로 했다. 나와 2등기관사가 각각 한 마리씩 샀다. 나는 반바지에 스리퍼 바람에 나온 탓에 부득이 차고 있던 시계와 바꾸기로 했다.
주인이 줄을 풀어 넘겨주자 이 녀석들이 눈치를 챘는지 따라오지 않으려고 버티며 소리조차 지른다. 수놈이었기에 이름을 ‘똘똘이’라고 짓고는 내 침실에서 동거하기로 한 것이다.
실은 이 원숭이 다루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교복차림의 중(中)학생 때였을 것이다. 읍내에 갓 공설(公設) 시장(市場)을 개설하자 시장바닥에 온갖 날고뛰는 장사꾼들이 모여들었다. 하교길에 일부러 길을 빙 둘러 시장을 구경하러 가곤 했다.
어느 날 약장수가 원숭이 한 마리를 목줄 채우고 앉혀 두고는 자그마한 회초리 한 개를 들고 한마디 하고는 책상 한 번 치자 이 놈의 원숭이가 약장수의 말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가까이서 원숭이를 처음 보지만 귀엽고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똘똘이와 넉 달 동안을 살았다. 한마디로 어릴 적 집에서 기르는 개만도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우선 아무리 훈련시켜도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것치고 먹고 똥을 누지 않은 것들이 있으랴! 이 엄연한 철칙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한 방에 같아 살아보니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겨우 알아챈 것이 시간을 잘 맞추어 문을 열어주고 목줄을 풀어주면 나가서 처리는 하는데, 그길로 다른 곳으로 줄행랑을 친다는 것이다. 눈치도 없이 아무 침실에 들락거리니 주인으로서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글에서, 동물과 벌레들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타고 났으니 그걸 서로 나쁘다거나 못하다고 나무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은 똥오줌을 가려서 특별한 시설을 만들고 사용하지만, 내가 문을 열어둔 채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면 ‘똘똘이’가 문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는 눈빛에는 ‘아이고 이 등신들아, 뭘라고 그리 힘들게 사냐? 그냥 아무데나 편하게 하지’ 하고 빈정대는 듯했다.
서로의 본성과 환경을 고려하면, 모두가 자연의 한 부분일 따름이니 그게 맞겠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하기야 인간들의 생활을 보면 문명이니 문화니 하는 이름으로 편리함과 속도를 위해 많은 노고와 시간을 들여, 얼마나 복잡하게 하고 있으며, 힘들여 자연을 파괴하고는 다른 모양으로 짓고 다시 만들어 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서로 함께 살면 정이 들게 마련이다. 제법 낯이 익었다 싶자, 요 녀석은 꼭 높은 꼭대기에 앉기를 좋아했다. 내가 앉아 있으면 무릎 아니면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앉는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손발을 모두 자유롭게 사용하니까 줄을 타거나 올라가거나 만지는 데는 도가 트였다. 책상 위의 담배갑은 꼭 찢어 보고 담배 개비는 부숴봐야 하고, 책이나 노트는 낱장을 넘기다 갈기갈기 찢어 놓기도 했다. 잉크병도 쏟아봐야 한다. 그 속에 잉크가 흘러 손에 묻으면 그냥 탈탈 털어버린다. 잉크가 온 침실에 튀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서로 눈으로 얘기(?)하는 편인데 녀석의 눈동자는 쉴새 없이 움직이며 내 눈과 행동을 살핀다. 내 성난 얼굴만 봐도 기분을 읽은 듯이 저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꼼짝을 않는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봐도 똘똘이의 뜻을 하나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말은 그냥 잘못했을 때 큰 소리뿐이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야행성(夜行性)인지 밤에 자지를 않는 것도 내게는 불편했다. 한 밤중에 자다가 소리를 질러 일어나 보면 줄을 타고 가다가 줄에서 떨어져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 것이 목에 줄이 챙챙 감겨 옴짝달싹 못할 지경에 이른 상태다.
유용할 때도 있었다. 선내 통로나 방안에 어쩌다 나방이 종류가 날아들면 언제 보았는지 잽싸게 낚아채 먹는다. 가끔 식당이나 선교에 벌레들이 많을 때는 데려다 풀어 놓으면 말끔히 소탕해 주기도 한다. 아마도 야생에서는 주요한 먹거리이며 일상의 가장 중요한 행위인 듯 했다.
그 놈의 긴꼬리가 성가시다고 2등 기관사는 꼬리를 잘라 버렸는데, 결국 생존하지 못하고 수장(水葬)으로 끝냈다. 그 꼬리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던 것이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란 뜻이다.
겨울철 일본에 올라오면 이 녀석은 지옥이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한다. 방문 밖에라도 나갈 눈치가 들면 구석에서 나오지를 않으려고 발버둥이다. 따뜻한 비눗물로 씻길 때는 어쩌다 몽당연필 만한 고놈의 ‘고추(자지)’가 마치 주인 잃은 내 것처럼 빳빳하게 치켜 서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계속 키우다 부산에 입항하면 집에 가져다 키울까 했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어 처분하기로 했다. 마침 일본에서 인연이 닿아 2천 엥을 받고 넘겼다.
눈이 오는 날이었는데 목줄에 끌려가기 싫어하는 모습과 눈빛이 마치 내가 처음 사 올 때의 모습과 똑같아 애처롭고 미안하기도 했다. 귀찮고 미워하면서도 곁에 있을 동안 많은 정(情)이 들었음은 분명했다.
모르지, 혹시 넉 달이 아니라 4년 정도의 세월을 함께 했다면, 옛날에 본 약장수처럼 소리로도 뜻은 통할 수가 있었을런지…. 어쩌면 가능할 것이라는 상상만은 해 본 적은 있다.
똘똘이 녀석을 바꿀 때 풀어준 그 시계는 결혼선물로 아내에게 받았던 것인데, 후에 방콕에서 메이커 제품을 사다 줬는데도 수월찮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역시 세월이 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