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와서 칼럼을 통해 존재나 실존에 관해 설명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향한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에 관해 명하게 알지 못하는데 무엇을 성취하거나 쟁취하더라도 공허함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반으로 말할 때, 업적이나 실적으로, 성적이나 필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감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 세속 철학자들에게 세뇌된 것이다. 그것도 일리가 있긴 하다. 그 이유는 대체로 모든 인류가 세상에 속하기에 철학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 즉 유기된 자의 성격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나 중생의 경험을 한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다르게 밟는다. 어떤 면에서 직업이나 삶의 질을 통하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이르는 과정 자세는 전혀 다르다. 이 과정의 자세에 관해 칼빈 선생은 우리에게 큰 통찰력을 준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즉 존재를 가지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강조는 단순히 서언이거나 구호가 절대 아니다. 그의 걸작 <기독교강요>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진리를 파악하고 성경의 말씀을 분석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데 필연적인 문장이다.
칼빈은 지식(knowledge)을 존재(being)라고 의미로 사용한다. 존재(being)는 일반으로 본질(substance)과 본체(subsistence)로 나뉜다. 매우 추상적 언어이다. 존재는 본질이란 존재와 본체라는 존재로 구성돼 있다. 이 존재가 실제로 드러날 때 실존(existence)이라 말한다. 업적, 성적, 필적 또는 실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갖게 될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실존을 본 것이다. 존재의 드러남이다. 실존도 존재의 한 모습이지 실존이 존재 그 자체는 절대 아니다. 그 존재는 인생 전체를 통해 밝혀지거나 드러난다. 숱한 경험과 지식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존재라고 착각하고 한다. 그 존재가 착각하여 교만을 갖기도 하고, 좌절하여 자살에 처하곤 한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으로 존재를 파악하거나 정의 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면 자신의 존재를 찾는 다른 과정은?
칼빈은 지식을 존재, 존재를 본질과 본체라 보지만, 이것은 라틴어에서 가져온 단어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인데 본질을 character로, 본체를 property의 뜻으로 사용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본질을 성격, 본체를 특성이라고 번역한다. 또는 각각 본성이나 속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아무튼 본질, 성격, 본성은 같은 부류이고, 본체, 특성, 속성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본질은 일반적 성격, 본체는 특별한 성격이다. 특별한 성격, 즉 특성은 본래 부동산이란 뜻을 지닌다. 땅처럼 움직이지 않는 고정 재산이다. 이따금 인간은 고향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그 고향은 자신이 태어나거나 자란 곳이다. 그곳은 움직이지 않는 부동산, 즉 특성이다. 귀소본능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자에게 해당하는 용어이다. 자신이 어릴 때 자란 곳,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 즉 본체를 찾으려는 것을 의미한다.
변하지 않은 심정의 고향처럼 부동산이란 단어를 통해 인간의 본체를 특성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말 흥미롭다. 본체는 진정한 자아, 즉 존재이다. 본질은 누구든 지니는 성격 또는 본성이다. 인간은 자신만이 지닌 본체(subsistence)와 누구든 일반으로 지닌 본질(substance)이란 존재(being)이다. 자신의 존재감은 본체와 본질이라는, 즉 특성과 일반 성격이라는 의미로 접근해야 한다. 드러난 실존만으로 보는 것은 부동산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동산을 가지는 것이다. 늘 변화무쌍한 자신의 동산으로 자신의 재산을 삼아선 안 된다. 변하지 않는 부동산으로 자신의 재산을 삼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알려면, 영원한 부동산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