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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9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キリストの律法を全うする。
본문 갈 6:1~5
갈 6:1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2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4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5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1. 兄弟たち、万一だれかが不注意にも何かの罪に陥ったなら、霊に導かれて生き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ういう人を柔和な心で正しい道に立ち帰らせなさい。あなた自身も誘惑されないように、自分に気をつけなさい。2. 互いに重荷を担いなさい。そのようにしてこそ、キリストの律法を全うすることになるのです。3. 実際には何者でもないのに、自分をひとかどの者だと思う人がいるなら、その人は自分自身を欺いています。4. 各自で、自分の行いを吟味してみなさい。そうすれば、自分に対してだけは誇れるとしても、他人に対しては誇ることができないでしょう。5. めいめいが、自分の重荷を担うべきです。
지난 주일에는 이웃초청 식사모임과 성탄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사는 이 세상에 참된 평화의 빛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상식을 초월하시는 사랑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채워지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지지난 주일에 이어서 갈라디아서 강해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범죄와 부조리, 그리고 불의에 관해 성도가 취할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선하신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선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잘 알다시피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타락한 이후에 인류는 선을 위한 의지보다 악행과 범죄를 위한 의지가 더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 범죄와 악행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인데요. 결국 온 세상이 범죄만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시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7)
노아시대의 홍수는 그렇게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심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를 심판하셨지만, 결코 마음이 후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욱 슬퍼하셨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후에 이렇게 다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 8:21)
그래서 노아에게 하시는 말씀을 통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지요.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창 9:15)
대신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와 어떠한 악행이라도 용서하시려고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요.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모든 불의와 범죄에 대한 용서는 희생의 제물(희생제사)을 통해서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율법을 정하십니다.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레 4:20)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셔서 모든 죄악을 심판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시지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누구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순종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이지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대로 여전히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세상은 범죄와 불의, 그리고 부조리와 미움,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들의 죄와 허물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고 하지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32)
그러니 여전히 세상에는 범죄와 갈등과 악행과 부도덕함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도 자주 그런 범죄와 악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대체로 악행과 불의를 마주하면 분노하고, 증오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먼저 온유한 심령(온유한 마음)을 갖기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내면적인 태도를 말하는데요. 지지난 주일에 함께 나눴던 성령의 열매로서 설명한 덕목 중에 “온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의하고 범죄하는 자들의 모습을 본다면 가장 먼저 성령님의 마음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반응과는 사뭇 다른 반응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이, 혹은 부도덕한 이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바로잡는다(카타리티쪼)는 헬라어의 원어 뜻은 흐트러진 것을 정돈하다, 혹은 원상태로 복구하다, 혹은 빈 것을 채우다, 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잡다는 뜻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행하는 선택과 자세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범죄라고 할 것들, 혹은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는 주변인들을 볼 때, 단지 그들을 증오하거나, 혹은 그들의 잘못과 허물을 비난하면서 단죄하고 고발하여 처벌해야 하겠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갖기 전에.. 먼저 성령님의 온유함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임을 기억한 뒤에 그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지요.
제가 조금 복잡하게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요... 간단히 말하면 바로 예수님을 본 받아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바로 정의로움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고 망가진 아들을 고치신 것이지요. 마침내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 용서하며 기도하시지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4)
오늘 본문의 2절에서는 우리가 서로 짐을 질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개역성경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진다(혹은 남의 짐을 진다)는 것은 타인의 허물과 범죄에 대해서 책임의식을 함께 공유한다는 뜻이라고 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이 저지른 범죄나 부조리, 혹은 불의에 대해서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로 무관심하거나 외면하거나, 혹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관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문제와 부조리함을 다 끌어 모아 자신의 문제로서 몰입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할 것입니다.
우선, 이 땅의 죄악과 악행 및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서 나의 육신과 욕망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인식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와 악행을 함께 회개하고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를 늘 점검하고 자신을 영적으로 세우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 평가하기 전에 먼저 나의 연약함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4-5)
그렇다고 불의와 범죄에 대해서 입다물고 방관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또한 불법을 행하는 자를 옹호하거나, 혹은 변명하고 그 행위를 외면하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기준과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을 관리할 때, 타인의 불의를 증오나 단순한 비난이 아닌 시선과 태도로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곧 사랑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2:47)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사랑으로 자신을 지킬 때 비로소 진정한 정의와 축복에 속한 인생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믿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려고 마음을 열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온갖 좋은 것을 받을 때, 불의와 부도덕의 유혹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족영화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몬스터 주식회사라는 제목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인데요. 어린이들이 밤에 악몽을 꾸며 지르는 비명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몬스터들이 사는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몬스터들의 전력회사에서는 매달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모으는 지를 경쟁하는데요. 더 많은 문들을 통해 더 많은 어린이들의 비명을 모아서 에너지를 채우면 우수한 사원으로 표창을 받습니다.
애니메이션의 후반부에 가면 어린이들의 비명보다 어린이들이 행복한 웃음소리로 박장대소를 터트릴 때 몇 배나 더 많은 에너지가 채워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바로 하나님께서 범죄와 악행에 대해 우리에게 증오의 마음을 품고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뜻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벌어지는 범죄와 악행, 그리고 불의와 부조리는 흔히 세속적으로 생각하듯이, 보다 강력한 규제와 율법, 그리고 무력이나 권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이 힘을 가져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도, 진정한 승리도 없다고 말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 33:16-17)
대신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고 자랑한다고 고백하지요.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7)
이것이 성도가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로 승리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 축복의 주인공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유약해 보이고, 비천해 보이고, 누추해 보일지라도 결국은 더 많은 에너지와 더 큰 권세와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비명을 지르게 하고, 위력과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1의 에너지를 빼앗을 수 있다면, 상대의 마음을 얻어 감동하게 하고, 웃게 하는 것은 10의 에너지, 아니 100의 에너지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여전히 불의하고 범죄가 많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 씨앗을 심어 30배, 60배, 100배로 정의와 평화의 결실을 거두는 영생의 주인공이 된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과학과 기술과 학문들이 그 어떤 현실적인 장애도 극복할 수 있는 업적을 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범죄와 부조리와 불의를 온전히 바로잡을 수 있는 법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법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지키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더 많은 힘과 더 많은 소유를 구하기 전에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정돈하고 회복해야 할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후회도 있고, 아쉬움도 있지만, 실은 감사한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서 이루어진 지난 일 년 동안의 삶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를 더 할수록 주님과 동행하는 친밀함의 깊이가 더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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