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중춘판 <동경대전> 필사본. 목천판 <동경대전>이라고도 불린다. 이 필사본은 규장각에서 몰수한 동학문서에 수록되어 있다. >
임오군란 이후 입도자 늘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간행으로 자신감을 가진 해월은 동학의 확산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1882년 3월 10일 수운의 순도제례를 마친 후 유시헌 등 제자들이 해월에게 올해의 운세가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해월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오래 이어져 내분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 여러분들은 오로지 성심(誠心)으로 수도(修道)하고 경천명(敬天命) 순천리(順天理)하기를 당부한다.”라고 당부하였다. 해월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뒤숭숭해지더라도 괘념치 말고 오로지 수행에 힘쓰라고 강조하였다.
6월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구식 군인들에게 1년 넘게 받지 못하다 지급받은 군료(軍料)에 겨와 모래가 섞여있고 수량까지 속이자 분노한 군인들이 군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빈민층까지 가담해서 군란은 확산되었다. 군인들은 개화파 관료를 공격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 본영을 습격해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熊本禮造)를 살해하였다. 또 군인들은 서대문 밖 일본공사관을 포위해 공격하자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가까스로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군인들에게 살해된 일본인은 13명이나 되었다. 일본공사관 공격과 일본인 살해는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탈과 세력 확장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시위군은 궁궐로 난입해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관찰사 김보현을 살해하고 민비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민비는 장호원까지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였다. 고종은 대원군을 옹립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민씨 척족을 제거하고 서정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7월 3일 1,200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압박을 가했다. 또 민비의 요청으로 청병 4,000명이 국내로 들어와 7월 13일 대원군을 납치하고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대원군의 납치로 민씨 척족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군란으로 인해 청과 일본 양국의 군대가 국내로 들어왔다. 일본은 군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을 체결해 박대한 배상금을 받아내고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군대를 주둔시켰다. 청은 대원군을 제거하고 민씨 정권을 후원하며 내정과 외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였다. 이듬해인 1883년에는 청과 조청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해 경제 침탈과 내정 간섭을 가속화했다.
이렇게 정세가 불안하자 동학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해월의 수제자 가운데 한 명인 손천민은 이때 입도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해월을 찾아 송두둑으로 찾아오는 도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치적 소요와 외세의 침탈 속에서 불안해하는 민중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오군란 이후 청군과 일본군의 주둔 속에서 동학에서 강조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을 듣고자 송두둑으로 모였다. 이 시기에 충청도의 청주와 목천 지방에서 입도자가 많이 늘어났다.
<계미중춘판 <동경대전>으로 목천판이라고도 불린다. 천안의 김찬암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향토사학자 김종식이 세상에 알렸다. 김찬암의 집 뒤뜰에 항아리에 묻어서 보존했다고 한다.(사진출처: 충남일보, 2016년 6월 19일)>
목천에서 <동경대전> 재판각
1883년 2월에 해월은 <동경대전>(계미중춘판) 100부를 간행하였다. 1880년 경진판의 미진한 부분도 있었고 입도자가 늘어나 경전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자 다시 경전 판본을 다시 만들었다. 간행 장소는 천원군 목천면 구계리 김은경(金殷卿)의 집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표영삼의 고증에 의하면 현재 천원군 병천면 도원리 면실마을에 김은경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1985년 표영삼은 구내리를 찾기 위해 목천 일대를 뒤지다 면실마을에서 김내기를 만나 그곳에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이 많이 살았고 기와집에 사는 김곤양(김은경)이라는 접주가 유명했다고 들었다. 병천면의 마을 안내에도 면실마을에는 동학혁명 이후 일본군이 마을에 불을 놓아 전부 소실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신축된 마을이라고 쓰여 있다.
김은경은 강릉 김씨로 이 지방의 토호(土豪)였다. 김은경이 언제 동학에 입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881년 유경순(柳敬順), 윤상오(尹相五), 김영식(金榮植), 김성지(金成之) 등과 함께 단양군 샘골에 있는 해월을 찾아 수도의 절차를 문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80년을 전후해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김은경이 샘골을 찾았던 때가 <용담유사>를 간행된 직후여서 그도 경전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해월이 <동경대전>의 재판각의 필요성을 말하자 자신이 경전 간행을 주도하기로 작정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김은경을 비롯해 대접주 김용희와 김성지, 김화성 등 목천의 도인들이 6천 냥을 모아 <동경대전> 재판각에 드는 비용을 대었다. 목천판 <동경대전>의 발문은 다음과 같다.
아, 선생(先生, 수운 최제우)께서 포덕을 담당할 그때 성덕에 잘못됨이 있을까 염려하여 계해년(癸亥年, 1863)에 이르러 친히 시형(時亨)에게 주어 간행하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로 넘어왔다. 갑자년(甲子年, 1864)에 불행을 당한 후 도의 운세가 침체되고 미미하여 장장 십팔 년이나 오래되기에 이르렀다. 경진년(庚辰年, 1880)에 이르러 예전의 가르침과 명령을 극진히 생각하여 삼가 동지들과 더불어 의견을 내어 자문하고 약속해서 판각의 공을 이루었다. 글에 빠진 것이 많음을 한탄하다가 목천접중(木川接中)에서 찬연히 복간(復刊)하여 비로소 무극대도의 경편(經編)이 드러났다. 이 어찌 선생의 가르침을 모앙함이 아니겠는가. 감히 졸문(拙文)으로 편말(篇末)을 끝낸다.
세재계미중춘(歲在癸未仲春) 도주(道主) 월성(月城) 최시형(崔時亨) 근지(謹誌)
계미중춘(癸未仲春) 북접중간(北接重刊)
지금까지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던 목천판 <동경대전>의 판각본이 2011년 천안의 향토사학자이며 금석학을 연구하는 천안전통문화연구회의 김종식이 발견해 세상에 공개하였다. 판각본 목천판 <동경대전>은 목천읍 한천의 김찬암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선대에 경전을 항아리에 넣어서 집 뒤뜰에 묻어두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뒤뜰을 파서 목천판 <동경대전>을 찾아냈고 김종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목천판 <동경대전>의 크기는 22.32㎝이며, 한 페이지를 8칸으로 나누고, 각 칸에는 13자로 판각했으며, 전체 38장으로 만들어져있다. 글씨체는 한자 글씨의 정서체인 해서체(楷書體)를 사용하였다. 무자판 <동경대전>과 비교하면 판각에 상당히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경전의 마지막 장에는 ‘계미중춘(癸未仲春) 북접중간(北接重刊)’으로 굵은 글자로 판각되어 출판 시기와 판각의 주체를 기록했다. 표지에는 한문으로 ‘東經大全(동경대전)’이라 쓰여 있다. 이 목천판 <동경대전>은 1880년 제작된 경진판 <동경대전>이 발견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가장 오래된 <동경대전>의 판본으로 동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가 크다.
<세성산성. 동경대전을 간행한 면실마을에서 약 7㎞ 거리에 위치해 있다. 목천 지역의 동학혁명군 1,500여명은 1894년 9월 2일 이곳 세성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세성산의 높이는 해발 189m의 비교적 야트막한 산이지만 주변이 낮아서 우뚝 솟아 있다. 10월 21일 이른 아침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이 세성산의 동학혁명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혁명군들은 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관군의 정예부대에 무참히 학살당했다. 세성산 전투에서만 전사한 혁명군이 370명을 포함해 약 1,000여명이 희생되었다. 목천판 <동경대전>을 간행하였던 김화성, 김용희, 김성지 등 목천 동학의 삼로(三老)들도 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일용행사(日用行事)가 도
1883년 여름 들어 충청도 북부지역에서 동학에 입도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충주, 청풍, 괴산, 연풍, 목천, 진천, 청주, 공주, 연기 등에서 대거 입도하였다. 충청도 도인들의 특징은 종교성보다 현실의 사회 변혁에 관심이 많았다. 해월은 새로 입도하는 자들에게 말한 법설은 다음과 같다.
우리 도의 운이 방금 기운차게 일어나 번성해 우리나라 곳곳에 널리 퍼질 뿐 아니라 장차 동서양에 크게 떨칠 것이니 여러분은 성경신을 위주로 하고 포덕에 더욱 힘써라.
여러분이여, 우리 도에 드는 사람은 많으나 도를 아는 사람이 적음을 한탄하노라. 도를 안다 함은 곧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니, 자기를 알고자 아니하고 먼저 남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야 가히 민망치 아니하랴. 그러나 사람이 어찌 도를 알고 도에 드는 자 많으리오. 혹은 운에 의하여 들어오며 혹은 기세에 의하여 들어오나니 입도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어려우니라.
내가 독실하게 공부할 때에 억수같이 내리는 비 가운데서도 옷과 두건이 젖지 아니하였으며, 능히 구십 리 밖에 있는 사람을 보았으며 또 능히 바르지 못한 기운을 그치었으며 조화를 썼으나 지금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끊었노라. 원래 이것들은 다 작은 일이요 결코 대도의 바른 도리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선생님께서 조화를 쓰지 아니하심도 또한 이에 원인한 바니라.
도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용행사가 다 도 아님이 없나니, 천지신명이 만물과 더불어 차차 옮겨나가는지라, 그러므로 정성이 지극하면 한울이 감동하니 여러분은 사람이 알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오직 일에 처하는 도를 통하지 못함을 근심하라.
해월은 우선 동학이 앞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동서양 할 것 없이 포덕이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동학이 신비와 기적에 치중하는 종교가 아니라 현실 생활에서 참된 삶을 살아가는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해월은 도는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는 생활, 즉 일용행사(日用行事)가 모두 도 아님이 없다고 현실 생활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 해월은 한울님이 천지만물과 함께 옮겨나가는 존재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한울님이 내 몸의 생성 변화를 주관하는 존재, 즉 시천주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해월은 현실 생활에서 나를 닦는 것을 위주로 참된 삶을 만들어가는 종교가 동학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