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나는 1945년생 음력10월24일(양력11월28일)생으로 주민등록상에는 46.1.16로 출생신고 올해 76세다. 早失父母 孤兒로 1956년부터 初等學校 5,6학년과 中學校 3년을 楊平에서 보냈다. 中1 때 전교 영어암송대회에 나가서 3등을, 中2,3학년은 한가장학금으로 공부하였다. 그런데 1961년부터 高等學校는 서울에서 춥고 배고프게 3년간 살았다. 분노와 한탄과 체념의 세월이었다. 1964년 2월 졸업 후 鍾路區 堅志洞 平和堂印刷所에서 용돈을 벌면서 大學入學檢定考試에 응시 1965.11월에 합격하였다. 이걸 가지고 陸軍 甲種幹部候補生試驗에 합격하여 1966.5월에 入隊하였다.
② 祖父(宜寧南氏 24대)는 외동아들로 결혼해 6남매(宜寧南氏 25代)를 낳았는데 미두로 재산을 탕진하였다. 처자식들에게 유산 하나 남기지 않고 젊어서 돌아가셨다. 1956년 祖母와 두 姑母만 생존해 있었다. 자식들(25代)이 가난으로 배우지를 못했다. 祖母는 姑母가 모셨다. 집안에 神의 저주가 내린 것일까? 1967년 孫子(宜寧南氏 26代)가 셋이나 있었지만 祖母를 모실 형편이 못되었다.
③ 1956년 여름 나는 11살 때 大方洞 큰姑母집에서 楊平 큰아버지(伯父) 집으로 보내졌다. 伯父는 6.25때 학살당하셨고 伯母와 두 四寸兄(26代)과 누나가 있었다. 4식구가 남의 집에 방한칸 빌려 세들어 살았다. 땅은 논 200평이 전부였다. 여기서 初等學校 5,6학년과 中學校 3년을 보냈다. 명절에 族譜를 꺼내놓고 父(25대)부터 高祖父(22대)까지 4대 祖上祭祀를 지냈다. 四寸兄들이 祖父 무덤이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데 돈을 벌면 移葬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난으로 두 四寸兄들도 中,高等學校를 못 다녔다. 더구나 나까지 와있었다.
④ 高等學校는 1961년 3월에 入學하여 서울서 결혼한 四寸 兄(1934년생)과 시작하게 되었다, 나중에 楊平식구들이 서울로 합쳤다. 경제적으로 고통이 심하였다. 高等學校 1학년 등록금은 큰고모 집에서 1년간 가정교사로 대납해 주었다. 高 2~3학년때 아침은 굶고 登校하고 점심시간엔 수도물로 배를 채우며 오후 시간까지 수업을 듣고 下校해서 을지로 2가 작은姑母 식당에 들러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곤 하였다. 고교 내내 學校공부가 정상적으로 될 리가 없었다.
⑤ 나는 1967.5.13에 육군 小尉로 임관하여 中尉 때 長期服務를 지원하고 大尉 때 1974.3월에 渡美軍事留學을 갔었다. 美國人의 인도로 일요일에 미국인 교회에 갔었다. 30세 1975년 12월 6일 대구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신혼여행을 가서 호텔방에서 지난 세월 외로웠고 가난했던 설움들이 순간 북받쳐올라 침대에 엎드려 한 시간 이상 흐느껴 울었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1남1녀를 낳았다. 딸과 아들(宜寧南氏 27代)은 결혼하여 외손녀가 올해 고1, 중1이다. 친손녀는 초5이고, 친손자는 초3(宜寧南氏 28代)이다.
⑥ 四寸兄(26代)들은 25년 전에 부산에서 70세가 되기 전 돌아가셨고 5,60대 조카 3명(27代)이 있다. 1966년 入隊하고는 四寸兄들과 왕래가 거의 없었다. 두 四寸兄도 부산에서 고생이 많았다. 宜寧南氏 26代 세 남자 중 나만 살아남았다. 가난과 무지는 불편한 게 아니고 詛呪였다. 지난 3월에 宜寧南氏 大宗會에서 2006년에 발행된 宜寧南氏 族譜 한 질(전7권)을 구매했다. 내 이름이 伯父와 나의 父의 이름 아래에 양쪽에 등재되어 있었다. 내가 早失父母 孤兒가 되자 아마 祖母가 나를 아예 족보에다 큰집 식구로 묶어 버렸다.
⑦ 2005년부터 호주제 폐지로 호적은 가족관계증명서로 대치되었다. 울산에 살고 있는 큰집 조카로부터 戶籍과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받아 지난 7.4에 宜寧南氏 大宗會로 보냈다.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가 의령남씨 집성촌이다. 祖父의 1910년 주소는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였고 祖母는 가평군 상면 원흥리이었다. 지난 9.7 추석에 켄싱턴 가평에 가서 가족과 1박을 했고, 11.24에는 祖父의 주소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547번지를 찾아가 보았다. 112년이 지난 지금 거기는 거대한 국제병원의 주차장 부지가 되어 있었다.
⑧ 35세인 1980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일차로 고졸출신 육군장교 2천명을 韓國放送通信大學에 입학시켰다. 절호의 기회였다. 1987년 8월 43세에 연세대 行政大學院도 졸업하였다. 12.19에 29페이지 宜寧南氏族譜增修譜를 宜寧南氏 大宗會로부터 우편 수령하였다. 예수님도 족보가 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우리 집안 뿌리는 宜寧南氏 忠景公(在-5대)-忠簡公(智-7대)-杆城公(俅-8대)派다. 우리 家門이 南在와 南智 祖上을 이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의 집안으로 거듭나고(reborn) 이어져 가기를 기도한다. 교회는 1985년 제대 후 1987년부터 십일조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⑨ 예수님은 孤兒와 寡婦와 나그네를 사랑하셨다. 富者는 누가 도와 주지 않아도 잘 산다. 敎會 牧使가 눈이 멀어서 孤兒는 못보고 富者만 쳐다보고 있다. 敎會는 나와 같은 孤兒에게 安息處가 되어야 한다. 韓國 敎會의 위기에는 먼저 되었다고 자처하며 공로의식에 빠진 목사들 때문이다(개봉동하면 생각나는 교회). 오늘의 내가 있게 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