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후반 주한 미국공사관의 전경.
1903년 주한 외국공사들이 한데 모여 찍은 사진. 당시 미국 공사였던 알렌(오른쪽 네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민경배 교수 제공
선교사들의 과감한 국내 전도여행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조정의 여권을 받은 것은 1898년 6월 10일 스왈런 선교사의 경우가 처음이다. 스왈런 선교사는 1907년 ‘하늘 가는 밝은 길’이란 찬송가를 지은 사람이다. 선교사들의 전도여행은 그전까지는 불법이었다.
정식 승인이 나기 전 선교사들은 조정의 법을 어기고 서북지방과 관북지역을 휘젓고 다녔고, 결국 ‘금교령’이 발포되는 사태를 초래한다. 심지어 빈톤이라는 선교사는 왕궁에 가서 대문을 열라고 야단을 치면서 고종이 수많은 궁녀를 거느린 것을 곧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소동을 벌이다 구속되기도 했다. 알렌은 선교사들의 이런 행동을 항상 경계하고 조심했다.
美 외교관으로 대사까지 승진
1890년 7월 9일 미국 대통령은 알렌을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알렌은 그해 11월 12일 부총영사, 1897년 미국 공사 겸 총영사, 1901년 6월 21일에는 주한 미국 특명전권대사로 승진한다. 1887년 11월 한국 외교관으로 미국에 가서 활약한 시간까지 합치면 알렌은 18년 동안 외교관으로 지낸 것이다. 알렌은 자신의 생애를 ‘묘한 인생길’이라 불렀다.
이런 알렌의 모습을 선교사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마펫 선교사는 알렌이 미국공사관에서 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섭게 비난한다. 그는 미국 선교본부에 이런 글을 보낸다. ‘이제 알렌 박사는 정치계로 나갔으니 한국선교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아예 완전히 말소시켜야 합니다.’ 알렌을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로 인정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알렌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미국공사관 옆의 덕수궁
1895년 초겨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겪은 고종은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불안에 떨던 고종은 결국 미국공사관이 있는 정동에 경운궁 곧 덕수궁을 짓고 거기서 머문다. 근대 한국의 격동기에 미국에 기댄 한국 왕실의 모습이다. 고종은 담 너머로 늘 미국공사관을 건너다봤고, 가끔 알렌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한번은 알렌이 옆 머리카락에 포마드를 바른 것을 보고는 “그것이 무엇이냐”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알렌은 포마드 한 병을 드렸다고 한다. 그만큼 격의 없는 사이였다. 또한 당시 알렌은 인천 바닷가에 별장을 하나 짓고 있었다. 그러자 고종은 고관 한 명을 보내 그 인근에 하계 궁전을 하나 짓는다고 산등성이 하나를 사들인 일이 있다.
미국공사관의 3면은 덕수궁에 맞붙어 있었다. 고종이 바라던 환경이다. 당시 미국공사관은 한옥으로 지어졌으며 외국 공사관 건물 중에는 가장 볼품없었다. 알렌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그 공사관 건물은 유형문화재 132호로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에 한 가지 곡절이 있다. 알렌은 한국의 임금이 있는 곳 옆에 미국의 힘으로 으리으리한 공사관 건물을 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렌의 깊은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덕수궁보다 높은 데 지은 성당
사실 고종은 왕궁에서 눈을 들어 높이 쳐다보아야 하는 진고개(명동)의 높은 곳에 성당을 짓는 것을 보고 언짢아하셨다. 그래서 그 건축을 보류하길 바랐으나 천주교에서 강행하여 지었다는 말이 있다. 사실 현재 성공회 성당도 덕수궁을 압도하는 형세로 높이 웅장하게 솟아 있으며 거기에 영국공사관이 있다.
알렌, 세브란스병원 건축에 기여
1892년 여름 한국에 온 에비슨 박사는 제중원을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옮기기로 하고 알렌과 함께 조정과 교섭해 그 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서울역 앞 대지였다. 1900년 에비슨은 미국 뉴욕에서 거부 세브란스씨로부터 병원 건설비로 미화 1만 달러를 받고 돌아왔다.
세브란스병원 기공식은 1902년 11월 27일 외국 사신들과 정부 고위 관리들, 그리고 한국 교인들과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됐다. 그날 미국공사 알렌은 감동적인 축사를 한다. 그가 이루어 놓은 한국 선교의 기념비적 성과가 이렇게 실체로 우뚝 서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은으로 만든 흙손으로 정초를 집례한다. 그날에는 9년 전 시카고에서 알렌과 길이 어긋났던 윤치호가 외무협판으로 나타나 알렌과 눈물겨운 악수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서먹하던 선교사들과도 감격으로 피차 악수한다.
조정과 알렌의 마지막 인연
세브란스병원은 기공한 지 2년 만인 1904년 11월 16일 개관한다. 알렌 역시 미국공사로 참석한다. 일본 고위 관리는 일본에도 현대식 병원이 여럿 있고 규모도 큰 것들이 있지만 설비는 세브란스병원에 따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실토한다.
알렌은 그가 해임되던 1905년 3월 세브란스병원의 경영에 대한 조정의 보조를 간청했고 조정은 논의 끝에 보조하기로 결정한다. 알렌이 한국을 떠나기 전 고종을 알현할 터인데 그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회신을 한 것이다. 그동안 알렌의 수고를 보상하는 조치였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출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8) 알렌 외교관인가 선교사인가|작성자 뱅갈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