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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마스, “언어”의 서문, “언어”, 옐름슬레우,
LOUIS HJELMSLEV LE LANGAGE
UNE INTRODUCTION augmenté de
DEGRÉS LINGUISTIQUES
Traduit du danois par Michel OLSEN Préface de Algirdas Julien GREIMAS
© 1963 by Berlingske Forlag, Ktfbenhavn
© 1966 by LES EDITIONS DE MINUIT
벩송이 쓴 윌리엄 제임스의 “실행주의[Pragmatisme]” 서문이 실행주의와 벩송 철학의 관계[relation]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표이듯이, 그헤마스가 쓴 루이스 옐름슬레우의 “언어[Langage]”(1966)의 서문은 파리 기호학파와 옐름슬레우 기호학의 관계를 공증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맥락에서 자주 인용되는 글이다. 게다가 벩송의 그 글이 제임스가 사망한 이후 출간된 프랑스어 번역본의 서문이듯이, 이글은 옐름슬레우가 사망한 직후에 출간된 프랑스어 번역본 서문이다.
그헤마스가 말하기를, 옐름슬레우는 소쉬르의 공시성과 통시성에서 통시성을 스쳐 지나가면서, 공시성을 재발굴한다. 첨언하자면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통시성이란 단순히 말이 시대를 거쳐서 성립한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더 심원하게 짧은 말이든 긴 말이든 어떠한 말도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당대에 여기에 거리를 두었다는 것은 우선은 그 시대를 휩쓸고 있었던 인도-유럽어 재구 작업에 옐름슬레우가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더 넓게 언어의 화행론적 용법, 용례, 그리고 담론이 아니라 기저 구조에 더 관심을 쏟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파리 기호학파와 옐름슬레우의 관계를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옐름슬레우는 구조주의자는 아니다. 그헤마스가 말하듯이 옐름슬레우 작업의 가장 탁월한 지점은 통합체적 구조와 계열체적 구조, 더 나아가서 내용 평면과 표현 평면의 상호관계를 언어의 근간으로 보면서 이 이중분열의 교호가 언어의 ‘생성적’[génétique]자질을 입증한다는 것을 역설했다는 그 점이다. 내가 더 적극적으로 말해보자면, 이 생성적 언어가 표현되는 그러니까 밖으로 드러나는 두 분절이 내용과 표현이라는 것을 그가 눈치챘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세미 바디흐가 얼핏 말했던, 기호의 내재성이 출발한다. 그리고 이 관계의 추적은 ‘생성적 친족성’이란 것을 그릴 수 있게 하는데, 이것은 당시 인도-유럽어 연구의 구조주의적 관점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화행론자는 결코 아니지만, 그의 이론은 화행론에 열려있다. 또 여기서 우리는 옐름슬레우가 언어의 형식화[formalisation]에는 찬성했지만, 언어의 공리계화[axiomatisation]에는 반대를 명시한 이유를 알 수 있다―전자는 창작적 회로이며 동태적이고, 후자는 기호논리학적이며 정태적이다. 소쉬르의 기의와 기표의 관계가 다분히 공리계화라면, 옐름슬레우가 대체한 내용과 표현의 관계는 형식화이다. 물론 이 말뿐인 것이 아니다. 옐름슬레우는 구체적으로 이 내용과 표현 관계의 상충하면서도 상응하는 특성을 탈바꿈(tranformation), 교환(convertion) 등등의 자신만의 형식들로 입증한다. 이 언어 기계들의 정체는 이 서문만으로는 당연히 알 수 없고, 그의 연구를 보아야 한다. 비록 매우 어렵더라도. 옐름슬레우조차도 이 과학의 이질성을 인정해서 그로세마띠끄(glossématique)라고 따로 칭한다―통상 언리학이라고 번역하기는 하는데.
덧붙이자면 옐름슬레우 기호학의 난해는 표현 면에 있지 않다. 문제는 내용 면에 있다. 언어 표현은 가시적이라 분석에 언제나 열려있다. 그래서 그 분석의 실패와 성공까지도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그런데 표현이 절대 아닌 것으로서 순수-내용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명쾌하게 드러내기 굉장히 어렵다. 특히 논문을 쓴다면, 내용 면은 어떤 교환 작업 속에서 필연적 요청으로서 입증되는 무엇처럼 다룰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조금만 방심하면 곧 그것은 표현 면으로 떨어져서 표현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끈기없는 자가 내용 면은 존재하지 않으며 표현 면만이 있다고 믿어버릴 때, 그는 기표의 연쇄만이, 즉 문법과 시스템만이 모든 기호를 가동한다고 외쳐대며, AI의 번역과 창작이 결국에는 모든 예술을 말소하고 신세계의 무엇을 열 것이라 주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딱딱한 언어이다. 끈기있는 옐름슬레우주의자는 파리 기호학파와 함께 통합체적 표현면과 계열체적 내용면 사이의 교호만이 ‘미묘한’ 그리하여 끝없이 미끄러지는 만들어지는 언어(le langage formateur)를 생성한다고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 공시성과 통시성, 계열체와 통합체. 박용래의 시가 기호학적이라고 자주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언어를 간결하게 쓰려고 각고의 노력을 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간결해지면 질수록 그 언어는 하나의 기호계와 같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산유화”(1925)도 있지만, 나는 “건들장마”(1979)를 들고 싶다. 이 시는 통시적으로 뛰어가는 아이의 통합체적인 산문성이 어느 순간 공시적이면 계열체적인 시성으로 전변하는 그 순간을 기가 막히게 그리고 있다. 그렇게 내용과 표현의 교차가 하나의 언어를―한 편의 시를 생성한다. 나는 재주가 없어서 너무나 어렵게만 말했지만, 간단히 말하면, 수평의 ‘총총걸음’이 수직의 ‘백발의 꽃대궁’으로 탈바꿈(tranformation)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시는 하나의 기호계의 예로서 충분한 자격을 성취한다. 우리는 박용래가 이 시를 자기 시집 제목으로 삼은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지금도 역시, 어찌 보면 비평의 본질일, 내용 평면에 대한 이야기는 어렵게 분석될 것인데―나는 여기서 이 시의 이미지가 나타내는 이러한 성질을 자세히 비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건들 장마 / 박용래
건들장마 해거름 갈잎 버들붕어 꾸러미 들고/ 원두막 처마밑 잠시 섰는 아이/ 함초롬 젖어 말아올린 베잠방이 알종아리 총총 걸음/ 건들 장마 상치 상치 꽃대궁 백발(白髮)의 꽃대궁/ 아욱 아욱 꽃대궁 백발(白髮)의 꽃대궁/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
* 건들장마 : 초가을에 비가 오다가 금방 개고 또 비가 오다가 다시 개고 하는 장마.
(1979)
p. 7~21
[P7-2/7]
프랑스어 번역판 서문
그러나 학자에게는 자기 앞에 있는 창조로서의 과학[une Science]을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루이스 옐름슬레우 Louis HJELMSLEV.
루이스 옐름슬레우[Louis Hjelmslev]는 1963년 5월 30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당시 그를 매우 기쁘게 했던 그의 언어[Langage]의 프랑스어 번역이 완료되던 때였다 ; 이 순간은 또한 혁명적 시대의 마지막을 표식하면서, 소쉬르주의의 가장 중요한 직관들을 성취한 형식화이자 형식적 성취인 그의 작품이 다소 명시적으로 도처에서 승리하는 순간이기도 했는데, 만약 사람들이 20세기 언어학을 간주하기를 19세기 역사학적 문법학, 혹은 일종의 고전주의의 정점에 대한 반론을 취하듯이 한다면, 만약, 옐름슬레우가 믿었던 것처럼, 한 세기 반동안의 연속적인 연구들의 성취들이 준(準) 선형의 기여들처럼 고려될 뿐이라면, 더욱 다양하고 아마도 더욱 바로크적인 개화인, 오늘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한, 랑가주 이론의 형식화를 통해 수여된, 옐름슬레우가 행한 분석과 발견의 방법론의 세공이라는 관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옐름슬레우의 기여는 더 이상 논쟁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지만[8] 일반적인 성취로서 우리는 Nicolas Ruwet의 최근 연구인 오늘날 일반 언어학[La linguistique generale aujourd’hui]보다 더 나은 증거를 찾지 못할 것이다(1). 그는 지난 10년간의 언어 연구 대차대조표를 만들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진행 상황을 평가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덴마크 대가의 심층적 형식화들을 택한다.
1899년 10월 3일, 언어학의 세기가 될 금세기의 문턱에서 태어난, 루이스 옐름슬레우는 상황들의 찬조와 호기심의 수렴이 모두 함께 뒷받침된 그의 경력을 알아챈다. 사실 언어학이 국가의 사명 중 하나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덴마크인으로 태어난다는 것, 그것은 젊은 고등학생으로서 복합어들에 대한 논문을 쓸 수 있고 논문을 수료해 볼 수 있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코펜하게 대학 취임 강연에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덴마크에서 전통은 전통을 깨뜨리는 것이다” ; 또한 옐름슬레우가 한 성찰의 원천들 중 하나는 비교 언어학의 덴마크인 창시자인 라스뮈스 라스크[Rasmus Rask]의 작품으로 남아있으며, 그의 생애에서 그것들의 탐구에 수년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수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타고난 형식화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그것을 초대하는 환경, 즉 일반 아이디어의 세계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그의 초기 연구 분야로 리투아니아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당시의 관점에 따라 인도-유럽어 문제의 중심에 즉시 좌정했다는 것이다 : 옐름슬레우는 자신의 논문에 전념했을 뿐만 아니라(Baltic Studies, 1932) 이 지형을 좇는 탐사는 자신의 새로운 이론적 개념의 가치를 검증할 수 있게 하겠다. 실천적 훈련들의 장으로서 랑가주의 음성학적 차원을 채택하는 것, 그것은 이 특권적인[9] 영역에서 Holger Pedersen 또는 Grammont의 가르침들을 프라하 음운학자의 새로운 공식화와 더불어서 직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친구 Uldall과 함께, 다니엘 존스(Daniel Jones) 학파에서 만든, 표현 이론을, 병행되면서 상반되지 않는 통사체적[syntagmatique] 해석을 통해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때까지 지나치게 계열체적[paradigmatique] 차원을 축으로 잡아 전개되었었다(On the Principles of Phonematics, 1935).
그러나 옐름슬레우가 인정한 바에 따르면 바로 (1926년과 1927년) 파리에서의 체류가 있었으니, 이때에 Meillet 및 Vendryès와 함께, 그의 두 번째 과학적 탄생을 구축했고 이때가 그의 인생을 1928년부터 1943년까지 도래할 해들이자 특유한 계획으로, 위대한 창조의 시기로 탈바꿈하게 했다. 이 계획, 당시에는 여전히 모호했고 단일 영역으로 제한되었던 그것은 “일반 문법의 합리적인 기초를 통해 인도 유럽어 통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 그것은 이미 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일반 문법 원리[les Principes de grammaire generale (1928)]와 "내재적 방법"이 처음으로 확고한 표현을 발견한 일반 문법 연구로서 격의 범주들[La Catégorie des cas, (1933-1937)]과 더불어서 점차 확장되었다.
두 명의 덴마크 언어학자인 H. J. Uldall과 그보다 나이가 많은 Viggo Brondai와의 늘어난 개인적 접촉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평면 위에서의, 당시 유럽 대학에서의 경력이 없이도 한 삶을 극화하는 데 성공하도록 한다. 1933년에 시작되어 그를 첫 번째 사람과 연결시키는 긴밀하고 풍성한 협력이 1936년에 그로스마틱의 개요[An Outline of Glossematics]라는 이름으로 코펜하겐 회의 참가자들에게 배포된 안내문으로서 이 새로운 언어학 선언문을 생산한다 - 이는 1928년 헤이그 회의에서 음운론이 확인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 이 공동 연구는 사실상 분리로 이어진다 : 그로스마틱의 개요는 1937년 Uldall의 단독 서명 하에 첫 번째 입문 부분으로 축소되기까지 한다 ; 위대한 그로세마띠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옐름슬레우의 전망은, 그것의 기원들에 대한 다소 신비에 놓인[hermétique] 용어론이 떨어져 나간 채로, 서언들[Prolégomènes]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그 공존을 말해보자면, 1931년 Hjelmslev가 설립한 코펜하겐 언어학계의 두 지배적인 인물 중 하나이자 Acta Linguistica 저널의 공동 편집자인 Brondal과는 종종 긴장이 감돌았고 파란이 일어났는데, 이 공존은 항상 겉으로 보기에 환원할 수 없는 반대들과 다양한 입지들의 견지로 표현될지라도, 흐르는 시간은 점점 더 두 이름들이 덴마크 구조주의라는 공통 사업과 연계되게 만들어갔다.
바로 전쟁과 점령기간에 옐름슬레우의 마지막 두 작품이 거의 동시에 덴마크어로 작성된다 : 랑가주 이론으로서 서언들(les Prolégomènes à une théorie du langage, 1943)과 언어(Language, 1963년에만 출판). 이 두 작품은 어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장접이그림의 두 날개들처럼 지금 등장한다 -- 하나에는 역시 애쓸 가치가 있는 정의들과 연역들의 폭포들로 이루어진 촘촘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그에 못지않게 주목할만한 명쾌한 단순성이 있다 :언어가 역사적 문법학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고 그것을 언어의 구조적 개념의 관점에서 나타나도록 일반 언어 유형학의 문제에 통합한다면, 서언들은 랑가주 이론을 건립하는데, 이 이론은 언어학의 이전 성과들을 포함하면서, 특히 인간 과학들의 인식론처럼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랑가주를 관통하여, 인간의 모든 현상들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몇 해 동안에, 일반의 관심을 끄는 몇몇 수의 연구들이, 과거만큼이나 활발하게, 출판될 것이다 ; 루이스 옐름슬레우의 60번째 생일을 기회로 삼아, 언어학적 에세이[Essais Linguistiques (1939)] 모음집 속에 다른 중요한 텍스트들과 동시에 이 연구들은 통합될 것이고, 코펜하겐 언어학 서클의 관심 덕에 등장할 것이다. 천천히 다가오는 병은 그가 더는 대규모의 작업은 개진할 수 없게 했다.
[11] 언어 이론을 발전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하는 언어학은 그때까지 가능했던 두 가지 쉬운 해결책을 포기해야 한다 : 1) 언어학은 이러저러한 존재론 속에 통합하면서 언어학을 창립하는 언어의 철학에 자신을 맡길 수 있었었거나, 2) 분석적인 실천을 거기서 끌어내는데 성공하지 못하면서도, 또한 “사실들”을 한계 짓는 것, 언어학적 발명들을 구성하는 것을 애쓸 뿐인 언어학의 경험론적 분석들을 고수하였으니, 19세기의 행복감 속에 있다는, 과학이 축적과 공생을 통해, 오직 홀로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러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리 잡은 “내재적 방법”의 역할이 발견되는 곳이며, 엄격함의 이름으로 안심한 채 되는대로 하기에 맞서게 이끌어야 했던 투쟁이다. 따라서 옐름슬레우의 노력은 과학적 이론들과 이 이론들을 형식화할 수 있는 절차들이 자리잡는 수준까지 랑가주 철학을 되낮추는 것에 있었는데, 사실들의 전체들에 관계적 체계들의 위상을 부여하면서 재해석작용을 통해 수복할 수 있는 그 사실들의 전체들을 되높이면서 말이다.
그 결과는 첫 번째로는, 공리학[une axiomatique] 처럼 여겨지는 랑가주 이론으로, 이 이론의 구성적인 개념들은, 우등한 범-언어학의 수준에 자리 잡은 채, 쓸모있는 기술에 복속될 수 있어야 그리고 되어야만 한다 ;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다양한 기호 체계를 기술하는 데 필요한 분절들을 연속적인 연역을 통해 생성할 수 있는 계서적 구성물이다 : 자연어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범언어들과 의미작용의 체계들. 이러한 절차들에 따라 기술된 모든 랑가주는, 더 이상 물질적 보조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관계들로 형성된 구조로 환원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말뭉치에 내재한 채로 남는데, 말하자면, 이 말뭉치의 기능하기와 존재하기 방식들을 통해서만 합당하게 된다. 우리는 알아보건대, 이러한 랑가주 이론은 자신의 내부에, 발견과 분석의 절차들을 정립하면서 이것들을 통합한다 [12]: 언어적 대상은 명백한 무질서로부터 발산하며[emerge] 매번 스스로를 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성한다. 여기에서 랑가주 이론은 과학적 방법들의 구성물에 가까워지는데, 이 구성물의 가치는 내적 응집과 기술된 “실재성”에 적합한작용이라는 척도에 따라 판단된다 : 아마도 처음으로, 인간 과학들의 분야에 속하는 과학이라는 용어는 그 은유적 사용을 상실한다.
옐름슬레우의 장점은, 우리가 보듯이, 응집된 랑가주 이론을 세공했다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이론의 필연성을 명백함으로써 승인하고 부과할 수 있게 하였다는 데에도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전제된 이론들의 건립들을 명료하게 하는 참조들 없이 더는 언어학을 실행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이 위로 랑가주 이론이 세워지는, 본질적 공준들을 끌어내기를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은 통감하건대, 옐름슬레우의 구성물이 모든 것에 앞서 설립되어 있으니, 말하자면, 소쉬르의 위대한 이분법들, 일의적으로 드러나는 개념들의 형식 아래, 응집된 분절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옐름슬레우는 정녕 아마도 소쉬르, 그러한 직관들을 명료하게 할 줄 알았고, 그것들에 획득한 공식화를 가할 줄 았았던 그의 유일한 계승자처럼 출현한다.
이러한 이분법들의 첫 번째인, 랑그와 빠롤의 대립은, 언어학의 개척자들을 크게 뛰어넘었다. 발견에 도움이 되는 제 가치에 만족하지 않고 -- 이 가치는 분명히 언어학인 바와 언어학이지 않은 바를 한계짓기 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사람들은 인식해야 하건대, 이러한 두 개념들의 반의성 있는 형식화는 불충분하게 밝혀지고 다종다양한 해석들의 길을 열어두었다는 것이다. 빠롤은, 더 특수하게도, 꽤나 연속적으로, 꽤나 동시적으로, 랑가주의 재량있고 개체적인 사용작용과 동일시되었는데, 이 사용작용은 빠롤이 랑그의 자료체[corpus]와 혹은 가능한 빠롤들의 총체성과 그리하여 혼동되도록 한다 ; 의사소통의 현실태로서 이 동화작용은, 한편으로, 담론을 유일한 촉지할 수 있는 언어학적 현실성처럼 고려하도록 승인한다. 두-전쟁들-사이에 대한 소쉬르주의의 주저함들의 윤곽들이 매우 잘 추적되는, 동일한 주제의 그렇게나 많은 변주들이 있다.
옐름슬레우는 이중적인 전개로 이러한 다가성(plurivocité)의 끝까지 갈 줄 알았다. 우선 일반적 인식론의 틀 안에서 이것을 통합하면서, 옐름슬레우는 소쉬르의 이분법에 있는 두 축들을 두 모델들에 동화하게 했는데, 여기서 이 두 모델이란 분석에 종속하는 실재성의 보충적 파악의 양태로 고려되는 매우 일반적 범주의 바였다 : 시스템과 프로세스, 모든 프로세스는 기저 시스템을 전제로 하며, 모든 시스템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프로세스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진다. 감안해야 하건대, 다른 한편, 우리는 랑가주를 말할[parler] 수 있기를, 계층들의 계서제처럼 재현되는 정도 안에서만 그렇다. 그 두 계서적 모델들 -- 하나는 계열체적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체적인 -- 각 계열체적 층계를 불절하는 계층들 사이 관계 타입을 통해 구별되는 -- 이것들은 모든 전체 기호학의 내적 조직화를 셈한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공론 영역으로 떨어진 또 다른 소쉬르주의 이분법은 기표와 기의의 이분법이다. 이 이분법이 자리를 내주었던 해석작용들의 다양성은 오랫동안 신비화된 혼란을 이 이분법 주변에 보존했다. 어떤 언어학자들은 강의에서의 이분법적 특질을 망각하고 연이어지는 접근과 확장을 통해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구성된 기호 최초의 제시적 정의만을 유지해 왔다. 이로 인해 모든 것이 마치 "형식"이 매번 "의미"를 뒤덮는 것처럼 발생하는 ("단어들", "음소들", "어휘소들" 등)기호들의 언어학이 산출된다. 우리는 이것이 "단어들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소쉬르의 또 다른, 잘 알려진 주장과 모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옐름슬레우의 해석은 전반적으로 표현의 평면과 내용의 평면을 구별하는 동시에 상호 의존성의 심히 중층적인 조건들을 정의한다. 한편으로 두 평면은 상호 전제의 관계에 의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프라하 학파에게서 따온 교환의 원리가 명확하게 공식화된다 : 만약 이 구별작용이 다른 평면 위에 병행하는 구별작용을 유인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구별작용도 평면들 중 하나 위에서 알려질 수 없다 ; 이것이 바로, 그리하여, 표현이든, 내용이든 단위체들의 재인식의 절대적 기준이다. 그러나, 반면에, 두 평면은 자율적이며 두 평면들의 단위체들 사이에 용어 대 용어 식의 대응이 주장될 수 없다 : 목도된 평행주의는 구조적 및 유형론적 질서에 관한 것이지 원자적이거나 쌍-일의적인[bi-univoque] 것이 아니다. 랑가주는 따라서 남용되어 온 관습적인 의미의 기호들 체계가 아니라, 표현과 내용이라는 독립적인 계서적인 구조들의 이중 함축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옐름슬레우의 이러한 공식화들을 고려하면서 이미 다양한 언어 학파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예를 들어, 과거 미국 언어학은 사실 언어의 통합체적 차원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또한 이 언어학은 종종 --"형식"으로 받아들여진-- 표현의 평면에 대한 기술과도 동일시되었다. 이 언어학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과한 한계들을 미심쩍은 뛰어넘음을 통해, “기호들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항상 분석을 밀어부치면서 말이다. 바로 유럽 시원들로의 돌아섬이, 야콥슨의 실질적 다양화작용과 재탄생을 설명하는 것인데, 로만 야콥슨이 행한 가르침의 전파는 더욱이 이 유럽의 시원들의 이방(異邦)에 있지 않았다.
"실체가 아닌 형식"인 언어에 대한 소쉬르의 반성에서 시작하여, 옐름슬레우는 아마도 가장 독창적인 새로운 이분법을 세공했다. 그리고 이 이분법의 일반화는 인간 과학들이 지난 세기에서 물려받은 어떠한 반목들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이 반목들은 형식주의로 이루어진 수많은 절차들로 주기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 형식과 실체라는 이분법. 실체, 이는 “물질”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있는데, 언어학적이지 않은 천성의 물리적 혹은 정신적 지지대의 바이며, 형식 덕에, 내용의 평면 위에서 만큼 형식의 평면 위에서도 항상 분절되는 것이다[15] : 그래서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이 존재한다. 문법학은 내용의 형식에 대한 분석이다. 이러한 형식은 기의의 질서를 제기한다. 그것은 메를로 퐁티가 다른 영역에서 그치지 않고 반복했던 바대로 기표화된 형식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표현의 형식과 실체가 존재한다 ; 두 종류 형식의 연구들이 마찬가지로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가치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형식에 대한 이러한 개념작용은 -- 19세기 전통의 가운데에서 -- 프랑스 구조주의의 인식론적 위상들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적이고 기호논리학적[sémantiques et sémiologiques] 연구들의 갱신을 보고하는 것인데, 이 개념작용은 고전학들이 인간 과학들로 구성되도록 도우면서 고전학들의 신성불가침 영역들 안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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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옐름슬레우 개념을 이렇게 상기하는 이유는 랑가주를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독자에게 제출된 텍스트의 명백한 단순성에 대한 인상을 거슬러 독자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이 상기는 보완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첫 번째 장에서 19세기 언어학의 주요 획득을 명확하게 재현한다. 이와 관련하여 옐름슬레우가 거의 전적으로 덴마크 언어학자들을 인용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 책은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던 당시에 덴마크 청중을 위해 쓰여졌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이 역사적 노출과 풀리지 않게 혼합된 것은 그의 랑가주 이론에 따라 만들어진 옐름슬레우의 해석이다. 한편, 이 작품의 목적이 무엇인지, 저자의 언어 사상의 일반 경제에서 그 위치가 무엇인지와 같이 대답이 즉각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질문에도 둘레를 치기를 요청한다.
서언들에서 발전된 옐름슬레우의 이론은 실제로 소쉬르의 중요한 이분법 중 하나인 공시성과 통시성[de synchronie et de diachronie]을 조용히 지나가 버린다. 작품 랑가주를 인식하지 않으면서, 그의 이론이 통시성 개념을 그 구성에 적합치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공시적 차원만을 고려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랑가주는 나타나기를, 구조적 비통시성[une achronie]의 의미에서, 문제를 넘어서는 형식으로, 본질적으로 이 문제에 전념하고, 문제의 해결을 제안하는 보완적인 텍스트로 등장한다.
우리가 언어에 대한 고유한 정의를 제공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매우 다양한 랑가주들의 존재, 그리고 제한된 의미에서 인류가 사용하는 약 3,000개의 자연어들의 존재는 그들의 유형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나아가기를, 언어이론은 완수되고, 보증을 청구할 수 있을 것이니, 자연어들에 있는 다중형식의 실재성에 적합한작용[l'adéquation]이 언어 이론에 제공하는 보증이 그것인데, 이는 오직 그것들의 구조적 다양성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떤 것이 언어학적 종류들의 구축들일 수 있는 객관적 조건들인지, 소위 옐름슬레우의 공식화를 좇아서, 어떤 것이 내용 평면 뿐만 아니라 표현 평면 위에서도, 언어학적 체계의 구조물 관점에서 양립가능한지, 어떤 것이 범주들 사이에서 양립불가능한, 혹은 결국 상호 필연적인 범주들인지, 아는 순간에만 그러하다. 왜냐하면 모든 특정 언어가 조합[combination]의 원리를 제기한다면, 그것의 추산은 조합 가능한 요소들의 수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한 조합들을 필연적인 것들 혹은 배타적인 것들이 되게 하는, 그것들을 규칙들, 제한들 또는 구속들의 형태아래 정의하기도 요청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전망에서 우리는 (실체 수준에서 그것들의 구현인) 자연어들의 용법들로부터 자연어들의 (형식의 질서인 “도식들”의) 내재적 구조들의 기술을 제안할 수 있다[17]. 그래서, 구조로부터 - "실제로" 현존하는 랑그들의 - 많은 용도를 연역할 수 있다면 옐름슬레우에 따르면 그 반대는 사실이 아닌데 : 이 용법으로부터 우리는 단 하나의 이 용례로서의 내재적 구조만을 기술할 수 있다. 따라서 유형학적 기술에 우선하여 초안이 전개된다 : 랑가주 이론은 완벽해지겠는데, 그 구성을 허용하는 공리학이, 특정한 언어학적 구조들의 기술로부터 확립된, 그리고 이 언어학적 구조들을 오롯이 포섭하여 확립된, 일반적 모델과 합류할 때가 그렇다.
이렇게 제기된 문제는 자연어들 수준에 위치하는데, 이 자연어들 수준이란 사회학적 현실들이며, 그리하여 의사소통 능력에 의해 전제되는 구조적 동시성의 조건들에 이 사실로부터 부합해야 하며, 자연어들의 사회성 자체인 조건, 시간 속에서의 어떠한 펼쳐짐을 내포해야[comporter] 한다. 그 결과, 옐름슬레우에 따르면 이 점에 관해서 우리는 순수한 동시성들에 대해 말할 수는 없고, 언어적 상태들에[d'états linguistiques]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인데, 상태들로서 받아들여진 자연어들은 체계들이자 이 체계들의 통접을 조건짓는 규칙들처럼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구조의 공식화는 덜 중요하다 : 사람들은 체계적 양태에 따라 상태들을 설명하려하는데, 으뜸-음소들 혹은 으뜸-의미소들의 형식 아래 이 사태들의 생산성과 구성요소들의 분배의 조건들을 통합하면서 그렇게 한다. 혹은 사람들은 이 상태들을 규칙적인 양태를 따라 재현하는데, (옐름슬레우가 다른 용법으로 탈바꿈[transformation]을 예비한) 상태들에 있는 전환[conversion]의 가능성들의 공식화들처럼, 합리적 체계들과 정태적 교환의 규칙들을 일으키니, 말하자면, 이 상태들을 현존의 양태 그리고 구조적 상태의 양태로 고려하게 하면서 그렇다. 여기에서 이는 음소론의 혹은 의미론의 질료[matière]로 된 통시적 법의 양태는 아니다.
그러한 언어학적 구조는, 이번에는, 내부에서부터 고유한 방식과 관련된 탈바꿈들을 촉진할 수 있는데, 소위 그것들의 심층적인 규칙작용의 특정화 덕이다. 이 규칙작용은 그것들의 구축적인 구성요소들 사이의 (양립가능성, 양립불가능성, 상호전제하기라는) 연관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어들의 비교가 언어 유형학 확립의 기초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 부분적 유형학이 있으니, 그 상호관계하기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오직 어떠한 구성요소들 혹은 어떠한 범주들, 일반적 구조들을 선택하는 한에서 말이다. 만약 사람들이 랑가주의 계서적인 모든 층위들의 고려를 견지하고 있는, 모든 탈바꿈들을 고려하게 만드는, 유일한 모델을 구성하는데 전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렇다. 이러한 유형학적 겨냥은 통시적인 개념과는 다시금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로부터, 탐구하기와 실험하기의 어떤 특권적 장이 옐름슬레우에게 19세기에 세공되었으며 그가 생성적 친족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을 둔, 특정 탈바꿈들 시스템을 재현할수 있게 했는지 이해한다. 끈기있게 구성되고 능숙하게 분절되어 궁극적으로 공통된 원래 언어의 재구성으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건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모델이 촉진할 수 있는 해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여유롭게 스스로 질문할 수 있었다.
일반 유형학의 조건들이 더욱 정밀해짐에 따라 생성적 친족성의 정의가 점차로 풀려나온다. 생성적 친족성은 무엇보다도 표현의 유일한 평면 위에서 상호관계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제한되는데, 왜냐하면 그를 따르면 생성적 언어학은 상호관계를 맺은 내포들에 대해 어떠한 확실성을 품고 선언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표현 (음소들)표현요소들 사이에서 확립한 상호관계들 그리고 옐름슬레우가 기능들의 이름으로 가리킨 이 상호관계들은 전통과 달리, - 음소의 법칙들은[19] 표현의 비언어학적인 인식할 수 없는 실체를 제기하는데 - 이 음소의 법칙들처럼 해석되지 않아야 하며, 표현의 형식의 수준에서 탈바꿈들로 헤아려지는 공리들처럼 해석되어야 한다. 이 모델의 약점은, 심지어 사람들이 이 모델을 형식적 해석작용에 복속할 수 있을 때조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관계들의 시스템이 표현의 구성요소들 그리고 이 구성요소들이 알리지 않는 비 범주들 수준에서 확립되어 발견된다는 것으로부터, 이것들이 표현 구조 내부에서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성적 언어학이 작동하는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재인식되고 기록되는지 궁금해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이다 : 통합체적으로는, 표현 평면의 한 단위체인 음절 속 그것의 위상을 통해 구성요소들은 정의되는데, 반면 계열체적으로 구성요소들은 내용 평면의 단위체들[l'unités]의 내부에서의 오직 교환 검증 덕분에 구별될 수 있었다. 생성적 언어학은 그러므로 두 종류의 이질형태소들 단위체를 사용한다 : 표현의 단위체들, 이것이 표준인데, 그리고 내용의 단위체들이다. 내용의 단위체들은 심지어 “단어들”, “단어들의 분절체들”이 아니다. 옐름슬레우는 이렇듯 매우 명료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마치 이러한 분절체들이[segments], 게다가 “최소한의 기호들”로 불리는 이것들이 형태소들의, 말하자면 어근들의, 파생어들 혹은 굴절어들의 실재성으로서 있는 것처럼 일어난다. 19세기 초에 비교문법이 구축될 수 있었던 조건을 생각해 보면, 실제로 그 개화가 가능했던 것은, 18세기 언어학계에는 아직 잘 인식되지 않은 상황들 속에 있으면서도 수행되었던 앞서 있어야할 이러한 구축적 부분들로의 단어 분석 덕분이었다는 것을 통감한다. 언어학자들이 단위체[l’unité]라는 단어에 대한 그리스와 헬레니즘 전통을 고수하는 한은, 16세기 이후 요청되었던 비교주의에서는 아무런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성적 언어학은 전적으로 구조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음소들[20] 수준에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해당 형태소의 수준에서는 용법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호관계의 조절에 앞서 있는, 표현의 구성요소들의 결정작용을 허용하는 자료체는 구조적 조합들[une combinatoire]의 조건인, 모든 음절-단위체들로부터 구성되지 않으며, 형태소들로서 용법 속에서 유효하게 실현된 음절들로만 구성된다. 옐름슬레우가 생성적 친족성에 대해 연속적으로 현시하는 두 가지 해석 공식화들 중에서, 우리는 두 번째를 선택해야 한다 : 생성적 친족성은 구성요소들 사이에 확립된 기능이 아니다(그리고 우리는 이를 연속작용[연속체]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 하기 이러한 바는 생성적 친족성을 정의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 생성적 친족성은 “표현 요소들 (두) 랑그들 기호들 사이의 연관으로 구성된다[연관에 있다]”(p. 112). 표현 수준에서의 지배에서 벗어난, 구성요소들 사이 상호관계들의 체계는 표현 구조들의 탈바꿈들을 복속하는 형식 모델을 잘 구축한다 ( 이 구성요소들은 범주들의 틀 안에서 경우에 따라 다시 정의될 수 있다) ; 이러한 비교주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학적 질서로 남으며, 생성적 친족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생성적 친족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역사와 그 친족성을 묶어내는 것, 그것은 바로 표현 구조의 이 탈바꿈하는 모델이 내용 평면에 뿌리내린 동시에, 형태소들의 형성하는 음절들로부터[syllabes formatrices] 구성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 두 번째 조건은 어떠한 유형의 내용 단위체들을 가두고 있는 자료체를 참조하는 것으로 구축되며, 결과적으로 단번에, 표현의 음절적 결합들을 제한하는 것이다. 기의 형식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위상을 기술하는 랑그들에 일치하고 있는, 자료체의 어떠한 봉쇄가 없다면, 발생적 언어학은 기표의 형식적 유형학을 구축하지 않는다. -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이분법을 물려주기만 한다면 : 한편으로, 닫힌 언어학적 세계 그리고 이미 실현된 결합요소들의 기술, 다른 한편으로, 또 열린 우주 그리고 실천적으로 마르지 않는 결합요소들의 기술, 루이스 옐름슬레우는 오늘날 언어학적 논쟁을 계속 지배하고 있다.
[21]옐름슬레우가 하는 숙고의 가치에 설득된 채, 작은 언어학자들 그룹은 번역자들로서 연합했다. 그리고 랑가주의 프랑스 본을 준비하고 출현하게 하는 것을 도왔다. 이 공통의 작없은 중요한 텍스트를 매우 광법위한 대중에게 보고하는 것을 바랄 뿐이었는데,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영면한 대가에 대한 가장 최근의 오마주로 탈바꿈해 버렸다.
알지다스 줄리앙 그헤마스
Algirdas Julien GREIMAS.
첫댓글 La glossématique (du grec glôssa, « langue ») est une théorie de linguistique structurale élaborée par Louis Hjelmslev à partir des pensées de Ferdinand de Saussure (fondateur du structuralisme). wiki. // 말설자가 아니라 혀설자를 써서 언설기호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낫다 : glossématiq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