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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37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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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데살로니카 1서 말씀은 오늘 우리를 거룩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데살로니카 1서 4장 3절)
어떤 사람들은 거룩함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랄까, 더 나아가서 약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옛날 기억이 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안에서 누군가가 조금 거룩하게 사는 분위기를 풍기면 ‘상뚜스’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 여러 그룹 가운데 바리사이라는 나름 잘 나가던 그룹, 자칭 거룩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란 용어 자체가 ‘분리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으로부터의 분리이겠습니까? 죄와 우상숭배, 불결함과 이방인으로부터 분리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스스로를 죄투성이인 인간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거룩하고 고결하며 깨끗하고 무죄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종래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제한적이고 그릇된 거룩함을 날카롭게 질타하시며, 거룩함의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십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함이 더 이상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 사제들이나 레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세리나 죄인들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충분히 거룩한 사람이 될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유다인들 시선으로 볼때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이나 창녀들도, 두 팔 벌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얼마든지 성인성녀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을 고스란히 전수받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함이 교회 만의 것만이 아님을, 교황이나 주교, 사제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통해 명쾌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덕은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살아가고 각자 어디에 있든 날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자입니까? 자신이 봉헌한대로 기쁘게 살아가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결혼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자기 배우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보기가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 올라, 함께 생활하시는 수녀님들과 촛불을 들러, 서울 나들이를 몇번 다녀왔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피드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체 사제요 수도자가 되서 그게 뭐하는 짓이냐? 시국이나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성당 안에서 기도 열심히 하시면서, 거룩하게 살면 좀 좋냐? 정 그러고 싶으면 사제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라!’는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곰곰히 묵상해보니,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존경하는 직속 상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정답이겠구나 싶어, 그분의 가르침을 찾아봤습니다.
고민고민하는 제게 교황님께서는 너무나 간단히, 단칼에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일이 곧 교회의 일입니다.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으로부터 우리 교회가 분리되어, 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서는 절대 안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당연히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서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치자들에게 제공할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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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이 감정만으로 안 되는 이유>
이런 것이 일반적인 이별 공식이라 합니다. 첫눈에 빠져 서로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면 서로 모든 것이 완벽해서 이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영원히 내 곁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줄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콩깍지가 벗겨지는 때가옵니다. 변치 않을 거라던 영원한 사랑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하지만 원래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일 뿐입니다.
상대의 변화 때문에 더 빨리 섭섭해 하는 쪽은 일반적으로 여자입니다. 남자는 일과 사랑의 중요성을 50:50으로 여긴다면 여자는 거의 100%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더 빨리 신경을 다른 쪽으로 옮기기 때문에 여자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남자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런 처지에 놓인 자신이 비참하여 변한 남자를 비난합니다.
남자는 영문도 모른 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여자가 변했다고 믿게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봤던 그 모습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쪽 다 사랑의 마음이 식게 됩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잘 극복해내느냐에 따라 관계가 오래가던가, 거기서 끝나던가 하게 된답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로 따지자면 하느님은 남자이고 우리는 여성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하는 두 가지 부류의 신앙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관계를 잘 유지할 줄 아는 현명한 처녀들이고, 다른 부류는 그렇지 못한 처녀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화를 우리가 잘 이해하여 당신과의 이별수순을 밟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두 부류 모두 등잔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기름이 넉넉히 보충되어 있었고, 다른 처녀 부류는 처음엔 기름이 있었으나 이내 말라버렸습니다.
만약 기름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한다면 이 두 부류는 이렇게 나뉠 것입니다. 어떤 부류의 신부는 신랑을 위한 사랑의 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또 어떤 부류는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입니다. 좋았다, 싫었다 하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사랑에 변함이 없고 다른 부류는 오락가락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의지’도 있어야합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사랑을 채워 넣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기름은 신랑에게서 채워 넣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신랑을 위해 타는 것이지 신랑에게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주인은 오로지 하느님이고, 그 연료는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려면 기도해야합니다. 그 기도로 사랑이 불타고 있어야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이미 불타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은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과 무관합니다. 상대를 위해 내가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오니 불을 꺼뜨려버렸습니다 사랑이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상대가 잘해주면 좋고 서운하게 하면 화를 냅니다. 결혼했다면 그 결혼은 상대고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어서 주님께서 맺어주셨다고 믿어야 할 텐데, 조금만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질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에 좌지우지 되게 놓아두었다가는 금방 꺼져버립니다. 사랑의 감정은 소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감정이 마르지 않게 규칙적으로 기름을 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하고 싶다면 기도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차에 기름도 소진되기 전에 채워야 하기에 주유소에 가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 안에서 스스로 기름이 솟아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싶다면 규칙적인 기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다면 그만한 의지를 기도시간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감정에 의지가 결합되어 완전하게 됩니다.
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람을 피워서? 못생겨서? 지겨워져서? 지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등등의 수많은 이별의 이유를 대도 실은 모두 변명일 뿐입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지가 있으면 상대가 어떻든 나의 감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도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이 세상 것들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사랑을 감정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거기에 의지를 결합시킨 사람들이 현명한 처녀들입니다. 사랑하기로 했다면 상대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든 나의 사랑의 불은 그대로 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보충해야합니다.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꾸준히 기도하느냐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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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1-13 :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신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우리로서 보편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 선행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여기서도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랑이 언제 올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등을 가지고 있던 처녀들 중에서도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고 한다. 무엇으로 그렇게 구분할까? 그 차이는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 사도 바오로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은 모든 액체 위에 뜬다. 기름에 물을 부으면 기름이 뜬다. 또 기름 위에 물을 부어도 기름은 위로 뜬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한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가장 예기치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는 선을, 사랑을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가지고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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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이전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1테살 3,12) 해 주실 것이라고 빌고,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실(“더욱더 그렇게 살아가라.”)에 맞는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바랍니다. 죄를 피하려고만 하면 유혹이 더 늘어나고 부정적이고 암담한 상황에 마주하여 심각한 위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은 저절로 죄를 피하고 자신의 영성 생활의 역동성에 힘입어 보호를 받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 바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거룩하게 보존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사랑스러운 긴장 관계와 기다림에 대한 충실, 곧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는 자세를 제시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피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노력과 책임이 필요합니다.이 비유의 주인공은 똑같은 숫자로 둘로 나뉜 열 처녀가 아니라 늦게 도착한 신랑입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혼인 관습에 따르면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에 신부와 함께한 처녀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모든 비유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는 오늘도 혼인 잔치로 표현됩니다. 모든 면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닌 우화가 아니더라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거룩한 교부들을 통하여, 비유에서 다양하게 등장한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신랑은 예수님을 뜻하고, 그분의 지체는 재림의 지연을 뜻합니다. 한밤중에 예상하지 못한 그분의 도착은 주님께서 오실 예견할 수 없는 시간을 나타내고,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는 주님을 기다리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거나 거부당하는 것은 심판의 판결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늘 깨어 준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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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 처녀의 비유>
방심한 상태로 지내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두 가지 경우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주님께서 한참 뒤에 오실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서, “준비는 ‘나중에’ 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경우. 마태오복음 24장 48절에 나오는 ‘불충실한 종’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면, 너무 빨리 오셨다고 불평할 것입니다.
2) 주님께서 금방 오실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서, 처음에는(처음에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고 있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으니까 기다리는 것에 지쳐서, 또는 긴장이 풀려서 준비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우. 마태오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라고 불평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오시든지, 너무 늦게 오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언제 어떻게 오시든지 간에 우리는 주님을 즉시,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재림’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마치고 나서 하느님 앞에 서는 일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저를 빨리 부르셨습니까?” 라고 항의할 수도 없고, “왜 이렇게 저를 늦게 부르셨습니까?” 라고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재림’에 관한 비유 말씀들을 보면, 마치 기다리는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는 듯이 주님께서 일부러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마태 24,50) 오시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꼭 그런 식으로 오셔야 하는가? (일부러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를 골라서 오시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에 대해서, 반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재림 날을 미리 예고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준비 시간을 충분히 주신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그러면 다들 성실하게 심판 받을 준비를 할까? 미리 예고를 해도, 방심한 상태로 지내면서 아무런 준비도 안 할 사람이 많을 텐데, 사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그랬고(마태 24,37-39), 소돔이 멸망을 당할 때에도 그랬습니다.(루카 17,28-29)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은, 만일에 종말과 재림의 날이 미리 예고된다면, 인간 세상의 모든 활동이 그 순간 정지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날만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할 의욕 자체를 잃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자주 생기는데, 테살로니카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신자들 가운데에는 종말이 곧 온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만 끼쳤습니다.(2테살 3,11)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하면, 종말과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인생이 끝나는 날을 미리 알려주면, 그것이 각자의 인생에 도움이 될까?”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알게 되면, 또는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되는지 알게 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전에 나온 어떤 영화에 그런 내용이 있었는데, 그 영화를 보면, 앞으로 살날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아무렇게나 막 살기 시작하고,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대로 ‘삶’을 포기해버립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인간 세상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마태 25,1-5)
만일에 처녀들이 예상한 시간에 신랑이 도착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 명 모두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의 도착이 생각보다 늦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이 예상한 그 시간에 신랑이 도착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슬기로움’은 “내 삶의 기준을 주님에게 맞추는 태도”이고, ‘어리석음’은 “내 삶의 기준을 내 마음대로 정하는 태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믿음 실천과 사랑 실천을 하면서,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충분할까?” 라고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열 명의 처녀들이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은, 기름의 준비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 설정된 상황일 뿐이고,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르 4,16-17).”
어리석은 처녀들도 처음에는 등불을 켜 놓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기쁘게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리석은 처녀들의 등잔 속에 있었던 기름이 떨어지고 등불도 꺼져 가는 것은,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은 있지만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 것,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 생각으로만 믿고 삶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것이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뿌리가 없는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 때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데, 재림과 심판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뿌리가 없는 신앙인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태 7,21) <“나도 전에는(처음에는)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말은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지 않으면, 전에 잘했다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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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어제 처음으로 신학교에 강의를 나가 수업을 가르쳤습니다. 3학년 학생들이었는데, 새 학기 첫 수업이니 만큼 수업에 대한 열의도 강해보였고 꼼꼼히 필기하는 모습이 참으로 예뻐 보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신학생 시절, 미리미리 예습하고 복습하며 시험을 준비하는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무엇이든 미리미리 준비한다는 것, 특히나 학업과 같은 지루한 과정을 준비한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신학생들 사이에서는 “시험 때에 신학생들이 기도하는 방식”이 우스갯 소리로 전해지는데, 오늘 이것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신학생들은 평소에 물론 수업을 성실히 듣지만 그것을 매일매일 암기하고 준비하기란, 과목도 과제도 많고 할 일도 많아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험은 학기 마지막의 과정이므로 아직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학기말 시험이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시험이 서술형이기에 공부하기 위한 양이 적지 않은데, 시험 기간동안 책을 쌓아두고 신학생들은, “주님,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결국 시험 날이 다가옵니다. 교수 신부님들께서는 시험 당일, 강의실에 서술형 문제를 칠판에 적으시는데, 그 문제는 역시나, 제가 공부를 소홀히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적으시는 교수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시험이 끝나면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성적표가 우편으로 배송되는데, 점수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러한 이야기는 벼락치기를 하는 신학생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우스갯소리이지만, 사실 아주 가볍게 넘길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비슷한 후회를 생각보다 자주 일상생활 속에서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서둘렀으면 미사에 늦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빨리 준비했으면 버스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지금보다 좋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이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지방의 혼인 잔치의 모습을 살펴봐야 하는데, 이 당시의 혼인은 몇 가지 필수적인 단계가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신랑은 신부의 아버지에게 신부를 데리고 가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고 이 과정이 끝나면 반드시 1년이라는 혼인 준비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신부는 임신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결을 증명해야했고, 신랑은 신부와 함께 지낼 집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신랑은 자신의 아버지의 지시가 내려지길 기다렸습니다. 혼인 날짜를 정하는 것은 신랑의 아버지의 권한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앞서 말씀드린 이 모든 과정이 성실히 준비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들을 신부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신부 집에서는 언제 신랑 집에서 신부를 데리러 올지 몰랐으므로, 신랑이 데리러 오기만 하면 즉시 떠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오면 이제 등불을 들고 행렬을 이루어 결혼식장에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을 오래 사용하기 위해서 많은 기름이 필요했고, 날이 어두워진 후, 거리에 나올 때 등불을 켜지 않고 나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기름이 부족하면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택함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 인류구원을 위해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바르게 영접하여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나아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경고입니다. 우리들 모두, 하느님을 언제 만나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막연하게 느껴지고 아주 나중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루고 방심하다가 결국엔 이미 늦어 버린 뒤 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처녀들이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타인에게서 빌릴 수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과연 나 자신은 지금 이 순간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 돌이켜 봐야 하겠습니다. 이 준비는, 빠를수록, 그리고 공을 많이 들일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날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 전례를 시작으로 다시금 “선함”이라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사랑”이라는 기름을 충전해야 하겠습니다.
이 “선과 사랑”은 다행히도 비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과 그에 대한 보답의 자세.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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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윤호요셉 신부님]
신학생 시절 아침기도가 끝나고 묵상하는 시간이면 마치 조는 시간인 것처럼 졸음이 몰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축제의 개막식 날로 기억됩니다.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주제로 신학교의 일상을 영상물로 제작한 일이 있었는데 아뿔사! 아침기도를 바치고 묵상시간에 디딜방아 찧으며 졸고 있는 제 모습이 영상물에 편집되고 만 것입니다.
그날 개막식의 사회자가, "졸고 있는 풍경이 나가면 개막식이 어떻게 되겠느냐"며 축제를 마치고 맥주를 샀던 웃지 못할 추억의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분심과 졸음. 분심은 정신을 집중하면 쫓을 수 있지만 졸음은 정말 몰아내기 힘든 도둑과 같습니다.
특히 점심 식사 후 조수석에 앉은 뒤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고 갈 때 찾아오는 졸음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듯 졸음은 생리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졸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무를 다 하지 않고 졸고 있는 태만이기에 문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에게 자선과 자비를 베풀고, 이웃과 자연과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풍경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 앞에 미련한 처녀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특히 불의와 전쟁에 침묵하는 것을 넘어 불감증 환자가 되어버린 듯한 우리들의 모습은 현명한 처녀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없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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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금재 마르코 신부님]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이 처녀들은 혼인식에서 들러리 역할을 하는 이들로서 당시에는 큰 명예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준비를 소홀히 해서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혼인식은 저녁 무렵에 열렸고, 연회 중에는 축하의 의미로 횃불이 켜졌습니다. 행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부와 함께 있던 들러리들이 신부를 뒤에 두고 밖으로 나가 신랑을 횃불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횃불은 막대기를 심지로 삼아 기름에 적신 헝겊으로 둘러싸였습니다. 횃불이 꺼져 갈 때는 기름에 적신 새 헝겊으로 감아 주어야 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신랑이 여느 혼인식과 달리 도착하는 것이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등잔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름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켠다는 것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평소에 하느님의 말씀을 잘 실천한 이들은, 가장 작은 이웃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때에도 그분을 알아보고 잘 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잘 실천해 보지 못했던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제대로 모시지도 못합니다.
운동선수는 평소에 열심히 연습해야 시합 때에도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정적일 때에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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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빈 등을 기름으로 채우렵니다>
마태오 25,1-13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빈 등을 기름으로 채우렵니다>
아직은 빈 등 하나 들고
알 수 없는 삶의 길을 나섭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끝나는 길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삶의 길입니다
삶의 길 위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등 밝힐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고
오직 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내 삶을 이끌 등의 기름을
홀로 정성껏 채워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기름 한 방울로
미움의 길을 밝히고 싶습니다
나눔이라는 기름 한 방울로
탐욕의 강을 건너고 싶습니다
품음이라는 기름 한 방울로
차별의 산을 넘고 싶습니다
올바름이라는 기름 한 방울로
불평등의 골을 메우고 싶습니다
더불어 함께함이라는 기름 한 방울로
무관심의 벽을 부수고 싶습니다
기름 가득 채운 등 하나 환히 밝혀
어둠의 죽음을 넘는 마지막 한걸음
기쁘게 가볍게 내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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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내 손을 잡고….>
어느 날 저와 고운님들에게 “영원한 하늘나라로 이사 가야 할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하늘나라로 이사 가는 날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천기누설입니다. 하늘나라로 이사 가는 날은...뒤돌아보다 소금 기둥 되는 불행한 날이 아니라, 평생 셋방살이하다가 자기 집을 사서 이사 갈 설렘과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 날이다. 또한 하늘나라로 이사 가는 날은...방학은 다 끝나가는데 밀린 숙제로 학교 가는 길이 두려운 길이 아니라, 숙제를 열심히 다 했으니 칭한 받으러 가는 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소풍 가는 기쁜 날처럼, 하늘나라 가는 길도 소풍 가는 날처럼 기쁘게 가야 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 24장에 보면…. “그날이 오면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최후의 심판 날을 앞두고 우리가 심판에 통과할 수 있도록 시험 문제와 해답을 미리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하늘나라를 충실하게 준비하기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잘 사용하였느냐? 잘 나누었느냐?” 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날이 오면 신바람이 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칭찬과 상급을 한꺼번에 받으며 우뚝 설 것입니다. 신바람 나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날이 오면 어쩔 줄 몰라 할 것입니다. 관심을 두지 않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그날을 맞게 되어 심판과 준엄한 벌을 받으며, 그날에 수치와 고통을 당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후회막급 인생들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언젠가 미사 후에 형제들이랑 소주 한잔하는데 한 형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집사람 치맛자락만 꼭 잡고 있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겁니다.”
은근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아내의 모습을 자랑하면서, 자신은 부족하지만, 아내 덕분에 하늘나라에 쉽게 갈 수 있지 않겠냐? 는 것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제가 그 형제에게 이런 말을 주었습니다.
“집사람 치맛자락만 꼭 잡고 있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겁니다.”
형제님의 이 말은 이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과 같습니다. 기름이 나누어지지 않고, 문이 닫혀버려서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형제님들을 쳐다보며 이렇게 외쳐보았답니다. “이 사제의 기름을 나누어 줄 테니, 이 사제의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따라오십시오. 함께 가야지요.”
그러자 모두 “아멘.” 합니다.
이제 고운님들에게 이런 고백이 있으시기를 바라면서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믿습니까?" 믿고말고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정말 믿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빨리 집에 가서 준비하시지요. 예수님이 지금 오시고 계시는지 모르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난 더 준비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늘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늘 깨어 준비하는 마음으로 매 순간 주님이 오시는 날처럼, 가진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며 기쁘게 나누고 살아가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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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39)
♧♧ 시편 45편 14-15절….
"한껏 화사하게 꾸민 임금님 딸이 금실로 수놓은 옷에 싸여 안으로 드는 구나. 오색 옷으로 단장하여 임금님께 인도되고 처녀들이 그 뒤를 따르며 동무들이 그에게 안내되는구나."
‘임금님 딸...’은 임금의 신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삼고 있는 믿음으로 주님께 충실한 이들(교회)을 상징합니다(마태오복음 25장 1-13절. 열 처녀의 비유 참조).
임금의 신부가 된 이는 그 신분이 변하여 임금이 누리는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께 충실한 이들 역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순간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 내적 본성까지도 성화시켜 변화되며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지극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 시편 45편 16절…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되어 그들은 왕궁으로 들어가는구나."
여기서 ‘그들은...’ 15절에 언급된 ‘처녀들과 동무들’ 곧 신부의 들러리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신랑과 신부의 혼인으로 말미암은 신부의 들러리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들러리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어두움에서 빛 가운데로, 죽음에서 영생에로 나아가는 천국 시민의 행렬을 상상하게 해주기에 충분합니다. 마침내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현재 이 땅에서도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친교 하는 가운데 성령이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함께 머물러야 할 장소인 영광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요한 14장 16-17절. 참조)
♧♧ 시편 45편 17절…
"당신 아들들이 조상들의 뒤를 이으리니 당신께서 그들을 온 땅의 제호로 삼으시리이다."
지금까지 임금과 신부간의 영광스러운 혼인 장면에 대하여 묘사한 다윗은 이제 이 구절에서 그 같은 혼인의 결과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즉 임금과 신부간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조상들의 뒤를 이어 모두 임금 노릇을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영적 자녀들인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임금 노릇을 하게 될 것(요한 묵시록 22장 5절. 참조)임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시편 45편 18절…
"저는 당신 이름을 세세 대대에 알리리니 백성들이 당신을 영원무궁토록 찬송하리이다."
시편 45편의 마지막절인 이 구절은...메시아에 대한 찬양의 성격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부분입니다.
즉 이 구절은...주님께 충실한 이들이 영원토록 홀로 흠숭과 영광,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를 미리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천사와 원로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내용을 연상하게 합니다.(요한 묵시록 5장 13-14절, 7장 1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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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가 하루에 7권의 책을 각 권당 50페이지 이상, 모두 350페이지 이상을 읽는다고 하면 깜짝 놀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것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책만 보느냐고 하시지요. 정말로 그럴까요?
아닙니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사와 기도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가톨릭 사제이니까요. 가톨릭의 오랜 기도인 성무일도를 바치고 묵상을 합니다.
미사에도 충실하기 위해서 1시간 전에는 고해소에 들어가서 성사도 주면서 미사를 준비합니다. 여기에 많은 글을 쓰고 있고, 매일 운동도 빼놓지 않고 1시간 이상을 합니다. 사람들과 만남도 피하지 않습니다. 누구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을 10년 이상 해왔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특별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성실하지도 않고,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니까요. 저의 비법을 말씀드리면 아주 간단합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컴퓨터를 켜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에 텔레비전을 치워버리고 보지 않으니 오히려 시간이 남아서 모든 것을 다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다음에 해야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넉넉할 때에도 이런 모습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서 ‘다음에 하자’는 말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면서 살아간다면 분명히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기름을 꾸어주지 않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치사해 보이는 그 다섯 처녀를 지혜로운 처녀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코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사한 행동을 옹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확실치는 않지만, 분명히 오시기 때문에, 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이 준비해야 할 부분들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일이 늘 ‘다음에 해야지’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일에 걸림돌이 되는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주어진 것을 최고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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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삶}
커다란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분께서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야지요.” 물론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이 앞선 자매님처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저항하지 말고 체념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운명으로 하느님께서 짊어 준 십자가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또 다른 도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아픔과 슬픔을 겪게 되겠지만, 여기에만 집중하면서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하느님을 통해 평화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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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같이 있던 신부님이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갔습니다. 한의원은 매번 광고를 내주시기에 인사를 드릴 겸 함께 갔습니다. 80이 넘으신 원장님은 어린이와 같은 미소로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백만이 넘은 신경이 있으며, 우리의 혈관은 11만 킬로가 넘는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몸은 신비롭다고 하였습니다. 친절하신 원장님은 제게도 침을 놓고, 쑥뜸을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좋으신 분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길을 가다가 낡고 초라한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삶에 지쳐 보이는 부부는 스승과 제자를 위해서 우유와 치즈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부부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은 스승은 어찌 이리 힘들게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부부는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늙은 암소가 있습니다. 암소가 주는 우유를 먹고, 치즈를 만들고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스승은 길을 떠나면서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 집의 소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시오. 제자는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승의 영적인 힘을 믿고 소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제자는 우연히 가난한 부부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은 없어졌고, 번듯한 집이 있었습니다. 집에는 예전의 나약한 부부가 아니라 건강해 보이는 부부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물으니 부부는 대답했습니다. 어느 날, 암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약초를 캐고, 밭을 가꾸고, 기술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번듯한 집에서 남 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깨달았습니다. 젊은 부부에게 늙은 암소가 있으면 암소에 의지해서 다른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암소가 없으니 젊은 부부는 각성하게 되었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문득 우리 안에 있는 ‘암소’는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과거의 잘못된 삶으로 가려는 생각이 암소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배웠고, 초대되었지만 욕망에 따라 살려는 마음이 암소입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암소입니다. 엄중한 국제 정세를 외면하고 당리당략으로 싸우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암소입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으면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게으름이 암소입니다. 제게도 분명 암소는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암소입니다.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암소입니다. 스스로 일어서기보다는 누군가에 의지하려는 암소입니다. 저도 암소를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내 안의 ‘암소’는 버리고 ‘기름’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하나는 ‘거룩함’의 기름입니다. 거룩함의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근심하고 걱정하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합니다. 내 앞에 놓인 장애물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 장애물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거룩함의 기름에서는 ‘겸손, 배려, 나눔, 친절, 사랑’의 불꽃이 피어납니다.
다른 하나는 ‘식별’의 기름입니다. 지금 느끼는 기쁨과 행복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기쁨과 행복이라면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됩니다. 지금 느끼는 고독과 아픔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고독과 고통이라면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청하면 됩니다. 지금 느끼는 기쁨과 행복이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느끼는 고독과 아픔이 분노와 원망 때문이라면 그 분노와 원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없다면 알곡을 맺을 수 없습니다.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함’과 ‘식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으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좋은 기름을 준비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시차 때문에 하루 먼저 올려 달라는 문자가 와서 하루 먼저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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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기자증을 받으러 외신기자 협회에 다녀왔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뉴욕 시내로 갔습니다. 문화의 도시답게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깜빡 잊고 여권을 놓고 왔습니다.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성직자 신분증이 있었고, 경비원은 성직자 신분증을 확인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교구에서 발행한 성직자 신분증이 미국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외신 기자증이 있으면 박물관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뉴욕 시민에게 주는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직자 신분증이나 기자증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거짓에서 진실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고, 많은 사람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둘째는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살아있는 권력의 불의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욕망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비록 권력의 칼에 목숨을 잃었지만, 세례자 요한의 외침과 정신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우리는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는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믿으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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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어라!”>
-거룩하고 슬기로운 삶-
새벽 집무실 앞 돌층계를 내려가다 넘어져 크게 다칠번 했습니다.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위험하듯 삶도 그러함을 깨닫습니다. 깨어있어라는 강론을 준비했는데 순간 깨어있지 않아 넘어진 것입니다. 순간 떠오른 말이 불가의 사자성어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밑을 보라’입니다. 멀리 보지 말고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봄의 때가 있으면 여름의 때가 있고, 여름의 때가 있으면 가을의 때가 있고, 가을의 때가 있으면 겨울의 때가 있습니다. 젊음의 때가 있으면 늙음의 때가 있고, 탄생의 때가 있으면 죽음의 때도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꽃필때가 있으면 열매 맺을 때가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이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인내의 믿음이요 겸손입니다.
어제 처음으로 밤나무 밑에서 밤알을 주었습니다. 밤나무를 보니 벌어진 밤송이들이 있어 얼마동안은 밤을 주울 것 같습니다. 열매 익어가는 가을이요 추석이 점차 가까워짐을 알립니다. 이런 때의 변화는 너무나 자명하여 누구나 인정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 합니다. 언제 사고가 나고 병이 날지, 주님이 결정적으로 오실 날은 언제일지, 또 죽음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어라!”
결론은 모든 때에 답은 “깨어 있어라!” 이 한 말마디뿐입니다. 우리 한 수도형제의 종신서원 상본의 성구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수도승다운 우선적 덕목이 깨어 있음입니다. 수도원 성전 뒷면 양쪽의 올빼미 사진의 눈도 바로 ‘깨어 있어라’는 말없는 가르침을 줍니다. 제의방 성모자상 옆의 핀란드 흰 올빼미 상의 눈도, 또 제 집무실 책상 앞 오른쪽 흰 올빼미 상의 눈 역시 ‘깨어 있어라’는 말없는 가르침을 줍니다.
깨어있음은 기도입니다.
께어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있음은 개방입니다.
깨어있음은 현존입니다.
깨어있음은 영원입니다.
깨어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있음은 충만입니다.
깨어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있음은 빛입니다.
깨어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있음은 그리움입니다.
깨어있음의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진공상태의 깨어있음이 아닙니다. 텅 빈 충만의 깨어 있음입니다. 사랑의 주님의 현존 가득한 깨어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은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이어지는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끊임없는 기도가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사유하는 사람이요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무사유에 기생하는 악입니다. 악의 평범성이요 악은 디테일 안에 있습니다. '기생충'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특징은 무사유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사유에 기생하는 악이요, 하여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결국은 악에 희생됩니다. 어제 세례자 죽음에 관한 강론중 복음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미쳤다 했는데 모두 악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입니다. 불광불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제대로 미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수행입니다. 인생광야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잘 살면 성인도 될 수 있지만 잘못 살면 괴물도,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전개되는 사회 현실을 볼 때도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말들도 생각납니다. 광분, 광풍, 광신, 광기, 광란, 광인 이래서 사람이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어라!”
미칠 ‘광狂’에 대한 답은 이 하나뿐입니다. 깨어 살기 위해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성무일도 수행에 정진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평생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깨어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들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기다릴 때, 하느님을 그리워할 때, 저절로 깨어있게 됩니다. 막연한 깨달음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기다리며 그리워할 때 깨어 있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 보다는 사랑할수록 깨끗한 마음이요 이 때 하느님을 봅니다. 마음이 깨끗할 때 깨어있게 되고 이어지는 은총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니 이런 깨끗한, 깨어있는, 깨달음의 영혼들에게는 애당초 악이 기생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래야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수도원 정문을 지날 때 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글귀가 새겨진 바위판 아래 네 개 벽돌에 쓰여진 성구를 읽게 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래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요 깨어있는 삶입니다. 옆 바위판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인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운동하라.”역시 깨어 있음을 위한 필수적인 수행입니다. 참으로 깨어있을 때 깨끗한 마음, 깨달음에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열처녀의 비유가 목표하는 바도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깨어있는 삶중에 축적되어 가는 영혼 등잔의 신망애 기름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준비하면 늦습니다. 신랑이신 주님이 오시는 데 영혼 등잔에 기름이 떨어진 어리석은 처녀들의 당혹감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평상시 사랑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했던 반석위에 인생 집짓는 삶이었다면 이런 낭패를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바로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신랑인 주님이 도래했을 때 등잔에 선행의 기름 가득하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입장했는데 기름 구입하러 갔던 어리석은 처녀들은 입장이 좌절되었습니다. 삶의 기름인 신망애의 삶은 도저히 돈을 주고 살 수도, 또 누구에게 빌릴 수도 없는 평생 우리 각자가 하루하루 깨어 축적해 가야할 하늘에 쌓아 놓은 보물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입니다. 천국을 상징하는 혼인잔치의 문은 닫혔고 입장이 좌절된 어리석은 처녀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얼마나 절망적인 선언인지요!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깨어있는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무지에 대한 답도 깨어있는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 말씀의 주제는 선명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거룩한 삶의 촉구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참으로 깨어 거룩하게 살 때 저절로 불륜을 멀리할 것이며 사람을 색욕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인격으로 존중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깨어 있는 삶’,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깨어있는 삶이 바로 슬기롭고 거룩한 삶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영원히 ‘낡지 않는, 부패하지 않는, 무지의 악이 기생할 수 없는 거룩하고 슬기로운 깨어 있는 삶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사랑하며, 깨어 거룩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런 우리 의인들에게 쏟아지는 다음 화답송 시편의 축복입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시편97,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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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가 보나 보지 않나 한결같아야 한다>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하루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해서 입니다. 간혹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하는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 하기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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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의 말씀에서 구원의 공동체적 요건과 개별적 요건이 다가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명, 어리석은 다섯, 슬기로운 다섯 등 다수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나름의 공통분모로 묶인 이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들이 '혼인 잔치에 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공동 목표나, 어리석은 이들끼리, 또 슬기로운 이들끼리 비슷한 수준으로 모였다 해도 "저마다"(마태25,1) 갖춰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등"입니다.
하늘 나라를 고대하며 사는 우리는 모두 혼인 잔치에 오시는 신랑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처녀들과 같습니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신부의 행복에 비유하지요. 비유 속 처녀들처럼 우리도 이 같은 목표로 기다림을 삽니다.
교회는 우리가 밤을 밝혀 신랑을 기다릴 수 있도록 저마다 "등"을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등"은 우리가 받은 율법, 계명, 제도, 규범 등 신앙 생활의 아우트라인(outline)일 것입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제시되지만 각자의 실존에 따라 간직하고 가꾸어가는 "저마다의 등"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성소 건립을 명하실 때 "등불이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라"(탈출 27,20)고 하셨듯이, 주님 앞의 "등불"을 각자 보살피고 돌보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다"(마태 25,10).
그렇다면 열 처녀의 운명을 가른 "기름"은 무엇일까요? 물론 등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게 하는 연료지요. 우리가 받은 율법, 계명에 불이 활활 타오를 수 있게 해 주는 '정신'이고 '혼'이고 '사랑'입니다. "기름"이 불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려면 우리가 신경을 써가며 남은 양을 가늠해야 하고, 새롭게 갈아넣고 채워주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지펴진 불은 지속적인 회개와 쇄신, 포용과 개방성을 연료 삼아 계속 타오릅니다. 세상 구석구석에, 교회 구석구석에 드러나지 않게 존재하는 그 빛과 열기가 바로 교회의 밝기, 세상의 온도를 유지합니다.
나름 충분하리라 여겨 여분을 챙기지 않았던 다섯 처녀들은 늦어진 신랑 탓에 혼비백산해서 상인에게 달려가 기름을 사옵니다. 그렇다면 "기름"은 구입할 수 있기도 하네요. 다행히 그녀들은 "기름"으로 환산할 수 있는 비슷한 가치의 재화를 소유하고 있었나 봅니다. 꼭 등잔에 필요한 바로 그 "기름"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그 재화를 "기름"으로 바꾸는데 "때와 장소"에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상인이 있는 "곳"에 가서 기름을 사오는 "사이"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힙니다. "지금 여기"에 있던 이들은 신랑과 만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지금 여기"에 부재하며 다른 곳을 헤매던 이들은 이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그리스도교에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저마다 "등"이 주어집니다. 세례로 받은 성령이 첫 불을 당겨 주셨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이 이 불을 간직하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이에 응답하는 우리의 영적 노력에 따라 불은 맹렬하게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조금씩 사그라들 때도 있지만 적어도 이 말씀 묵상을 만나기 위해 마음을 쓰는 우리의 등불은 아직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거룩한 긴장을 유지합니다. 사랑의 눈물을 모아 기름을 짜고 그릇에 간직했다가 등에 부어 불을 키우다 보면, "그 날과 그 시간"에 이 빛과 열이 신랑을 만나는 우리의 길을 밝혀주고 따사롭게 온기를 부여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우리는 이 말씀의 근거를 구약성경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에서 찾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실천을 부부관계 안에서 이야기하지요.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부여된 십계명의 "간음하지 마라"라는 율법의 한 조항을,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거룩함이라는 보다 엄선된 등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등불은 존중과 신의의 기름으로 유지되고 정결한 향내를 풍기며 타오를 것입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우리는 '주일 미사 지키고 교무금 내고 소임 잘 하는 게 어딘데...' 하며 기본으로 주어진 율법과 계명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조차 제대로 소화 못 해 주님께 죄송할 일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는 받은 등잔만 잘 간직하다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 했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욱더"라는 말씀으로 율법과 계명 이상의 분발을 요구합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더,더,더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충분함'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신랑 향한 열망과 혼인 잔치에 대한 간절함은 더 순수하고 순결하고 향기로운 기름을 마련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합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위해 "지금 여기"에서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본질만 남기고 나머지를 과감히 버리고 떠나고 내려놓게 됩니다. "오직 중요한 하나"를 붙잡는 슬기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6).
이 말씀이 울리는 순간, 가슴 터질 듯한 환희와 열락에 휩싸여 신랑 앞으로 뛰어나갈 수 있도록, 나날이 말씀과 함께 거룩한 기름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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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하느님은 연약함, 결핍, 한계, 물질적 · 존재론적으로 가난을 행복 선
행복 선언(마태 5,1-12)은 그리스도교의 ‘대헌장
(Magna Carta, 국민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된 문서)’이라고 일컬어진다.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들, 곧 부족하고 한계가 있으며 야하고 부서지기 쉬운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침내 실현할 행복을 선포하신다. 특히 첫째 행복에 이것이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런데 왜 이‘기쁨의 찬가''''가 겉보기에는
불합리해 보일까? 그것은 이 책 첫 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연약함, 결핍, 한계, 물질적 · 존재론적으로 가난한 상황은 하느님이 활동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복음 안에서 마음이 충만한 구원을 경험하는 데 필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별로인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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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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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마태 25,2)
다섯 가지 감각
육신에 생기를 주는 모든 영혼은 다섯이라는 수로 나타납니다. 영혼은 다섯 가지 감각을 사용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 다섯 문을 통해서만 무엇을 인식합니다. 옳지 않은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냄새 맡지 않고, 맛보지 않고, 만지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 깨끗함 때문에 이 비유에서 처녀로 불립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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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마태25,1)
'혼인 잔치의 비유!'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이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끝까지 신랑을 기다리다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간 처녀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였습니다.
나머지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신랑의 오심이 늦어지자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졸다가 잠이 든 사이에 신랑이 오는 바람에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늦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 언제 어떻게 찾아올 지 모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항상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깨어 있음'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삶이고, 매순간 순간마다 일어나야 하는 '나의 회개'입니다.
더러움 속으로부터 벗어나 거룩함에로 나아가는 '나의 회개'입니다.
너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 너를 쳐다보는 사이에 신랑이신 주님께서 오십니다.
오늘도 매순간 순간에 나의 모든 지체가 깨어 있는 거룩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교회의 또 다른 도전들!
많은 신자가 평신도 봉사직에 참여하고 있지만, 이것이 사회, 정치, 경제 분야에서 그리스도교 가치를 더욱 확산시키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참여가 흔히 교회 안의 임무에 머물고 말아, 복음에 따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진정한 노력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0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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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8월 30일) '준비하는 사람'
마태오 25장 1~13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나가라"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는
마음은 있었지만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 잔치상에 들지 못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신랑과 함께
기쁨으로 잔치상에 들어갔습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느긋합니다.
빠뜨릴뻔 했다가도 채워놓습니다.
닥쳐서하는 사람은 급합니다.
중요한것을 빠뜨리거나 놓칠수 있습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늘 시간이 충분하고
닥쳐서하는 사람은 늘 시간이 부족합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닥쳐서하는 사람은 조급해집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기회를 잡습니다.
닥쳐서하는 사람은 기회를 놓칩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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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
슬기롭고 어리석은
우리가 있습니다.
같은 목적지를
바라보면서도
사뭇 다른 우리들
삶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준비없이 만나는
시간에는 언제나
아픔만 있습니다.
등(燈)은 기름을
기름은 등을
필요로합니다.
주님을 기쁘게
만나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목적입니다.
목적 없이
그냥 살았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어떠한
만남이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남과 마음은
등과 기름처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매순간이
말씀의 기름이
필요한 만남의
여정입니다.
슬기로운 준비의
시간을 걸어가는
순례자의 기쁜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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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마태25,1-13)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는 길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서기 위해 믿음의 기름이 필요한 것이지
우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기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름처럼 믿음은 타올라야 합니다.
타오르지 않는 믿음은, 타오를 것 없는 믿음은 눈 앞에 있는 신랑조차 알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면 언제나 우리가 준비한 믿음의 기름은 초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빛나는 빛이시고 주님께서 가장 빛나는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어리석게도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하기에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기름이 없는 등은 장식용에 불과합니다.
수없이 문이 열리고 닫혀도 주님을 향해 떠난 이들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갑니다.
믿음은 스스로를 갇히게 할 수도 있고 반면 주님께로 나아가게도 할 수 있습니다.
기름이 필요한 것은 신랑이신 주님 때문입니다.
이 기름 또한 주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여정 되십시오.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믿음을 향하고 믿음으로 들어가는 하루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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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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