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공산성
백제가 서울 한정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의 공산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의 전체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의 이름은 처음에 웅진성으로 불렀다가 고려시대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백제멸망 직후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고,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충청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이괄의 난때에는 인조가 이 성으로 피난하였다.
성안에는 백제시대 추정왕궁터를 비롯한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임류각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다.
금서루 입구 비석군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이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재민천교영세비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송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제불망비, 유애불망비, 창덕선정비”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의정, 도순찰사,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
목사 김효성비
조선시대 공주 목사였던 김효성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1828년에 세운 비이다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등의 문헌 기록과 동분조사자료 및 지형적 여건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지어졌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산성 쌍수정
1734년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인조는 이곳에 서있던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는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을 건립하였는데 이건물이 쌍수정이다.
쌍수정 사적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비이다
비문에는 이괄의 반람,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등이 적혀있다. 1708년에 세웠으며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깨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추정 왕궁지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475sus 이후에 세워진 왕궁처로 추정되는 곳이다. 1985~ 1986년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10칸․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연못 및 저장시설 등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의 연꽃무의 수막새를 비롯아혀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부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성 연못
백제가 475년에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직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 연못이다. 1985~1986년에 걸친 왕궁터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연못안에서는 연꽃무의 만(卍)자무늬 막새기와 벼루, 등잔, 삼족토기 등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나왔다 연못은 대접모양으로 자연석을 정연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윗부분 지름이 7.3m,바닥지름이 4.78m, 깊이는 3m에 이른다.
공산성 진남루
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초기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세운 문루이다. 그 뒤에도 여러차례 고쳐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되어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높은 축대위에 앞면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영은사
조선 세조4년에 세워진 사찰이다, 묘은사로 불렀다가 이괄의 난때에 이 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
광해군 8년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리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작으나 단아한 모습의 원통전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좌성이 모셔져 있으며, 청동범종, 아미타후불탱화, 칠성탱화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공주 공산성 연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못이다, 금강에 가까이 위피하여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게 하였고,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을 이루게 단을 쌓았으며, 연못 수면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시설을 하였다
전체적으로 위가 넣고 아래가 좁은 모양이다.
특히 성의 안과 밖을 몰래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암문이 연못까지 연결되고 있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만하루
조선영조대에 건립된 누각이다 연못과 금강사이에 자리잡은 누각은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평소 경치를 관람하는 역할을 하였다 홍수로 붕괴되어 땅 속에 묻혔다가 1982년 발굴 조사로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1984년에 발굴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건물이 복원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기둥 받침돌과 기단석 디딤돌등을 원형 그대로 이용하였다.
공주 잠종냉장고
충청남도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시설이다. 일반적으로 누에는 알 상태로 월동하여 4월 중순에 부화한다, 그러나 누에의 먹이인 뽕잎이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때는 5월이 되어야 한다.
이때까지 부화를 억제시켜 농가에 보급하기 위해 겨울철 금강의 얼음을 채취하여 잠종냉장고에 넣음으로써 낮은 온도를 유지하게 하여 누에의 부화시기를 늦추었다. 보호고는 지하 1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공북루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 통로로 이용되었다 1603년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 터에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아래는 성으로 통하는 통로이며 위는 마루로 만들어 강가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건물 안에는 여러 글과 시 등이 걸려 있어 충퓌를 더해주고 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로 평가받고 있다.
여러가지 체험도 할수 있는 공간이 있다.
주 소 : 충남 공주시 금성동 65-3번지
전화번호 : 041-856-7700
첫댓글 옥사체험장은 체험하기 싫어지는곳이네요^^
ㅎㅎㅎ 그러게염^^ 시간이 다급해서 사진으로만 ㅉㄱ었는데 저도 옥사체험은 꺼려져요..ㅎㅎㅎ^^;
공주 공산성..
가까운 곳에 있어서.. 공주 분들은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