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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고 통
1. 철학과 고통
사람은 살아 있기 위하여 생각한다. 생각하기 위하여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관심사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고난에 부딪치고 있는 사람의 생존이다. 철학의 출발은 눈을 감고 하는 명상이 아니라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고통이다. 생각의 정원을 잘 꾸려나가기 위한 목적에 골몰하는 철학이라면 아예 식물체집 또는 수석수집보다도 못할 것이다. 고상한 척하며 잘난체 하는 교양적 장식품이라면 철학은 교묘한 가짜 고려자기를 가려볼 줄 아는 감식안보다 못할 것이다. 철학이 그 자체 무슨 만족을 보장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비밀 무용강좌에서의 춤바람보다도 훨씬 시시할 것이다.
철학은 종이나 붓이나 먹이나 벼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펜과 종이와 분필과 확성기와 같은 것을 잡고 혀끝으로만 철학을 떠드는직업적 철학자들의 근시안으로 볼 때 철학은 문방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라. 그러나 철학은 서재 또는 강의실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피와 땀과 한숨이 뒤범벅된 사람들의 생존현장에서 탄생한다. 철학은 인쇄된 책들과 마주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는 책’ 인 바 민중이라는 책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는 고통과 고난과 괴로움, 시달림과 같은 살아있는 글자와 마주쳐서 생긴다. 철학은 공책이나 사유에 봉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고통에 봉착하고 있다.
오랫동안 철학자와 철학 사이에 철학서적 활자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철학자들은 그 장막의 앞에 나타나는 그림자 철학과 살아있는 철학을 혼동하기 쉬웠다. 살아있는 철학은 철학서적 속에가 아니라 그 바깥에 씌어져 있다. 살아있는 철학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잉크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피와 땀에 의하여 기록되어야 한다. 진정한 철학의 필자는 민중, 민족 또는 인류 전체다. 기껏해서 철학자는 민중의 소리, 민족의 부르짖음, 인류의 희망을 받아 쓰는 서기의 노릇을 다하면 족하다.
철학은 철학적 안락의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햇빛이 내려 쪼이는 공사장에서, 불꽃이 튀는 용광로 곁에서, 거센 풍랑이 휩쓰는 바다 위에서, 거머리가 꿈틀러리는 논바닥에서, 검은 먼지가 가득 찬 갱 속에서, 또는 어둡고 그늘진 뒷골목에서 씌어지고 있는 것, 이것이 살아있는 철학이다. 철학의 활자들이 기록되는 장소는 창백한 종이가 아니다. 한숨과 고통이 철학의 종이이며 눈물과 피가 철학의 잉크다.
철학이라면 보통 머리가 허연 늙은 학자를 연상하고, 지혜라면 곧 곳간에 들어 쌓인 책을 생각하지만, 아니다. 철학은 구더기같다는 민중 속에 있고, 지혜는 누구나 다하면서도 신통치 알지도 않는 삶 곧 그것 속에 있다. 이 말없는,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을 들여다 본 사람이 철학자다.(함석헌,『인간혁명』, 1961, p. 56)
사치스런 철학은 사치품을 즐길 수 있는 철학자들에 의하여 애호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도 사치를 즐길 수 있는 여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학적인 철학은 현실적 고통의 유방에서 출발하였다. 노예들의 고통없이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등장할 수 없었다. 직접 고통의 작업장에서 피 땀 흘리며 일할 필요가 없던 철학자들은 고통의 열매를 따먹으면서도 그 열매가 어떤 토양과 기후에서 자라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단지 아름다운 꽃송이에서 생겨난 것처럼 착각하는 철부지들이었다. 마치 어머니의 최대 고통인 산고의 문을 지나서 태어난 아기가 고통을 모르면서 자라나듯 철학적 철부지들은 자신들의 철학이 파묻혀 빨아먹는 고통의 젖가슴 속에 피가 흐르고 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철학은 휴가 기간 동안에 철부지들이 즐기는 오락의 대상도 아니며 평생 동안 휴가만 즐기는 유한마담의 사치품도 아니다. 휴가에 즐기는 시원한 음료수나 달콤한 술의 기원( arche ) 이 냉장고나 수도꼭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춘 사람이라면, 철학서적이 비록 휴가 기간의 독서목록에 끼어있다 하더라도 철학의 출발이 휴가라고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의 출발은 고통과 분주함이다. 여가를 일과로 하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철학은 휴가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같은 것은 아예 여가의 식탁 위에 올려 놓지 않았으며, 반대로 그 식탁이 놓인 여가의 식당 ‘바깥에’ 있는 고통의 일터에서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그대로 눌러 버리는데 공헌해 왔다. 고통에서 출발하는 철학임을 깨닫지 못한 철학자들은 고통의 해결이 아니라 고통의 현실화, 고통의 동결,고통의 고정화에 알맞은 철학체계를 수립하려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요즈음 ‘철학의 빈곤’ 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이 말은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첫째 진정한 철학이 없다는 뜻과, 둘째 철학이 매우 빈곤하다는 뜻, 즉 철학은 가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철학이 없다는 말이나 철학이 빈털터리라는 말은 같은 얘기를 달리 표현한데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철학이 없다는 말은 풍요한 철학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며, 철학이 매우 가난하다는 말은 내용도 없이 이름뿐인 철학은 별로 쓸데가 없다는 것, 결국 있으나 마나한 것이라는 뜻이 되고 만다. 그런데 동서고금의 철학서적들은 거대한 도서관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풍요’하며, 또 거기에 씌어진 기록과 활자들도 매우 풍요하다. 이 세상에는 많은 대학들이 있고 그 속엔 철학부, 철학과, 철학 세미나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철학강의, 철학시험, 철학연구 발표회를 통하여 철학문제들이 열성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많은 철학전공생, 철학박사, 철학교수들이 철학논문을 써내고 있지 않는가 ? 어째서 철학은 가난하단 말인가 ? 도대체 가난하지 않은 철학, 풍요한 철학 또는 ‘철학의 풍요’ 란 어떤 것인가 ?
철학서적, 철학논문, 직업적 ‘철학업자들’ 의 양과 수가 크거나 많다고 해서 철학이 풍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물적 풍요는 왕궁의 풍요가 거짓 풍요인 것보다도 더욱 거짓이다. 물론 단 한 사람의 기분을 맞추며 그의 사치를 위하여 건설된 왕궁의 풍요는 한 나라 전체의 풍요가 아니다. 그것은 헐벗고 가난한 사람의 배 속에서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의 풍요이지 사람의 풍요는 아니다.
그러나 제왕 앞에서 굽신거리며, 귓속말로 왕궁의 비위를 맞추며, 왕자를 가르치며, 여왕의 산보길에 따라다니는 ‘내시철학자’ 의 풍요는 왕궁의 풍요보다 훨씬 더 허구적이다. 비록 왕국에 몰려든 재화는 밖으로부터 빼앗아 온 것, 속여 온 것이라 할지라도 왕궁의 담 안에서는 그 나름대로 풍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적 노총각님들의 정신적 왕궁속에 들어 있던 것은 추상적 개념들의 쓰레기 뿐이었다. ‘철학적 빈곤’ 은 바로 철학적 쓰레기의 풍요를 뜻한다.
철학자들이 허구적 왕정에서 술찌꺼기를 받아 먹고 술취해 있는 동안에는 궁성 바깥의 세상이 온통 쓰레기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철학의 빈곤은 철학적 거지들이 각성하지 못한채 몽롱한 꿈을 꾸고 있을 때의 정신적 재산상태다. 허울좋은 대궐의 정신적 쓰레기통으로부터 빠져나와 바깥 ‘세계’ 에 가득찬 생명의 들과 산에서 호흡하게 될 때 철학은 풍요하게 된다.
세계는 가난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 세계는 가난으로 풍요하다. 철학은 세계가 그것들로써 충만되어 있는 가난과 고통으로써 먼저 자신의 정신적 밥통을 채웠을 때 풍요해진다. 철학이 풍요해지려면 먼저 고통과 가난이라는 철학적 재산을 소중히 하여야 된다. 고통과 가난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철학은 고통과 가난의 ‘눈물’ 로써 자신을 배불러야 할 것이다. 종래의 가난한 철학은 거짓된 풍요로써 허영의 뱃대기를 채워왔으나 가난과 고통으로써 자신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가난으로부터의 철학이야말로 진정으로 풍요의 철학이 될 수 있다. 비현실적 식탁의 풍요에서 비롯된 안락의자 철학의 빈곤과는 달리 현실적 빈곤으로부터 출발하는 생존철학의 풍요는 약속될 수 있다.
“철학자도 치통은 참을 수 없다” 는 말이 있다. 그는 대개 식사 후에 철학을 시작하기 때문에 식사 전에 여러 사람들이 그의 식사를 장만하느라 얼마나 힘든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형이상학(metaphysica)은 말하자면 식후철학(philosophia post mensam)이라고 하겠다. 식후철학자에겐 고통이 없다. 그에겐 ‘고민’ 이 있을 뿐이다. 많이 먹고 마시느라 이빨 사이에 음식이 끼는 것이 고민이며, 게을러서 자주 이를 닦지 않다가 충치가 되며 풍치가 되는 것이 고민이다. 이 고민들이 쌓여 치통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즐거운 고통을 겪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식전의 커다란 고통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철학의 과제는 고통에 관하여 인식하며 고통을 해결하는 방도를 찾는 것이다. 치과의사도 고통을 알며 훌륭히 고통을 해결해 준다. 그러나 철학이 문제삼는 고통은 작은 고통이 아니라 ‘큰 고통’ 이다. 철학자는 모든 사람들에 앞장서서 고통을 알아차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가 남의 슬픔을 대신하는 직업적 泣女( Klagefrau ) 는 아니다.
철학자는 만민의 고통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알아차리며, 그것을 경고하며, 그 위험성을 미리 막으며, 또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해결하는데 앞장선다. 철학자는 민중보다 앞서서 먼저 고통을 자각하며, 민중보다 나중에 기쁨을 맞보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철학자는 큰 고통을 인식하며 큰 쾌락을 맛본다. 철학의 과제는 큰 고통에 관한 인식이며, 큰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다.
고통은 인간을 순간의 포로로 만든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고통 이외의 것에 대하여 무감각하다. 고통의 순간에 인간은 다른 것에 관하여 망각하고 있다. 사람은 빈번한 고통을 체험하면서 건망증 환자가 되기 쉽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변화하는 세태에 대하여 ‘무관심’ 한 것은 생명을 보호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해석된다. 다양한 고통의 원인들에 대하여 일일이 반응하느니 보다는 동등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균형’ 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강요하는 고통에 시달리는 짐승들을 보라. 짐승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많은 고통을 받게 되면 흔히 말하듯 무딘 감각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이 자기 보호책이다. 고통을 거듭 당하는 사람은 점점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서도 무감각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작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큰 고통에 대하여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일반적으로 고통의 근원은 고통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작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짧은 안목, 순간적 시력은 먼 곳에 있는 고통의 출처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작은 고통은 큰 고통을 망각하게 한다. 작은고통의 장벽에 가리워서 그 너머 있는 큰 고통의 정체를 보기 어렵다. 사람은 작은 고통에 대하여서는 화를 내면서도 큰 고통에 대해서는 화를 낼 줄 모른다. 작은 피해에 대하여 분개하면서도 큰 피해에 대해서는 분개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고통이 큰 것일수록 덜 절실하게 느껴진다. 위험이 큰 것일수록 덜 위태로운 것으로 보인다. 작은 고통에는 민감하면서도 큰 고통에는 둔감한 것이 사람이다.
목전의 것에 대하여는 뚜렷한 감시를 하면서도 그 뒤에 있는 것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아보기 힘든 것이 사람의 지각능력이다. 자기가 지금 두손에 쥐고 있는 것은 좀 체로 빼앗기지 않으나, 자기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집과 토지를 어느 틈에 빼앗기고 마는 경우를 흔히 본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지갑을 빼앗기어 생기는 고통보다도 집과 땅을 빼앗기어 생기는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고말지만, 처음에는 큰 문제에 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고통은 ‘소멸’에서 비롯된다. 작은 소멸은 금방 눈에 뜨이지만 큰 소멸은 알아보기 힘들다. 작은 존재는 뺏기 어렵지만 큰 존재는 약탈하기 쉽다. 소멸은 약탈당함이나 마찬가지다. 즉 소멸은 상실이다. 작은 상실 즉 작은 고통은 노출되며, 큰 손실 즉 큰 고통은 가리워진다. 이와 같은 불행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큰 손실과 큰 고통에 대한 진리행위의 투시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남이 자기에게 입힌 조그만 상처로부터 오는 고통보다 자신의 생명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김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차이를 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손가락 끝에서 흐르는 피 몇 방울보다 훨씬 더 많은 출혈이 강요되는 큰 고통의 전쟁터가 있음을 망각하고 있기 쉽다. 조그만 흉기로써 조금 다치기만 하는 가두의 범죄보다 훨씬 대규모적이며 직업적으로 훈련된 살인기법 과 대량생산된 살인무기들이 한 곳에 뒤덮혀 피를 흘리는 커다란 싸움,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흔히 잊고 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피가 땅과 강을 물들이며 흩어진 살과 뼈의 조각들이 뒹구는 전쟁터는 눈으로 볼 수 있으나,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근원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심리전’ 의 싸움터는 흔히 망각되고 있다. 과거의 전쟁과 침략은 나무로부터 원자탄에 이르기까지, 생물과 광물의 화학물질, 방사능 물질을 수단으로 하는 무기전이었다. 문명의 시기를 목기시대――나로서는 석기시대에 앞서서 목기시대가 있었다고 확신한다―― 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바로 무기의 질이 어떻게 변천하여 왔는가를 말해준다.
나무, 돌, 창, 방패, 활, 총, 대포, 유도탄 등 무기들의 성능은 치명적 기능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점차 발달해 왔다. 이 성능의 척도는 그 치명성 뿐만 아니라 공간적 확대에 있어서 규정된다. 사정거리의 연장이 무기의 발달과정이다. 그런데 전파력과 파괴력이라는 성능의 관점에서 볼 때 물리적 ․ 화학적 파괴력과 공간적 전파력을 가지고 있는 무기보다도 더 무서운 정신적 파괴력과 시간적 전파력(항구성)도 함께 지니고 있는 심리전이 가장 무서운 전쟁이다. 이 싸움은 병정들이 보이지도 않으며, 창과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전쟁터 즉 ‘마음’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무섭게 진행되고 있다.
심리적 전쟁은 공간적 거리를 초월한다.
다시 말해서 심리전 병기의 사정거리는 무한하다. 아무리 먼 지구 저쪽편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광속적으로 정신적 총탄을 명중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심리전은 적이 아무리 먼 곳에 있을지라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독안에 든 전쟁이다. 이것은 육박전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황금창이나 강철방패를 잡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심리전의 방패를 뚫는 창은 이 세상에 없으며, 심리전의 창을 막아낼 방패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철학과 심리전은 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 물론 철학자는 악마들의 침략적 사령부의 심리전 고문관 노릇을 담당하여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철학은 ‘성스러운’ 심리전에 용감히 참전해야 된다. 철학자는 악마들을 물리치는 한울(전체) 사람 즉 성인이며, 성스러운 심리전의 사령관이다.
철학이 참전하는 이 싸움은 결코 시시한 전술적 소규모 전투가 아니다. 성스러운 전투는 악마들의 모든 소규모 전투, 거짓싸움들을 아예 처음부터 패배시킨다. 진리행위의 사람, 한울 사람, 성인 즉 “上才는 군병을 움직이는 이가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최시형,『道宗法經』18, 難疑問答)
가장 큰 고통과 가장 큰 폭력인 바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과 귀에 들리지 않는 폭력을 인식하며 해결하려는 철학은 드디어 심리전적 대전략의 학문으로서의 본무를 깨닫게 되며, 마침내 철학은 철학적 성전에 참전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 철학적이라 함은 바로 전투적이며, 철학자라 함은 싸우는 선비(병사)를 뜻하는 단계, 철학사와 세계사가 서로 손을 잡는 단계의 문턱에 들어와 있다.
어떻게 보면 종래의 철학은 가장 후방에서 그것도 일체의 잡음이 단절된 가장 으슥한 골방의 안락의자 속에서 수행된 후방의 철학이었으나 미래의 철학은 최전선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철학자는 고통의 싸움터에서 피 흘리는 병사가 된다. 철학적 병사가 담당하는 전투는 고통의 고지와 가난의 평야에서 전개되는 악마와의 결전이다.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한울님’ 의 완전한 무장을 하십시오. ‘우리’는 살과 피를 해치는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들과 권위들과 이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성스러운 곳들에 끼어 있는 악령들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울님’ 의 완전한 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마들이 공격해 올 때에 그들에 대항해서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넘어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굳걷히 서십시오. 그리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기쁜 소식을 갖춘 신발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손에는 신뢰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그 방패로써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세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한울님’ 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열심히 기도하며 간청하며 ‘한울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언제나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정신차리고 끈기있게 기도하며 모든 성인들을 위하여 간청하십시오. (에베소서 6 : 11 ~ 8)
오늘날의 큰 고통은 어디에 있는가 ? 이 문제를 떠나서 오늘날의 철학적 문제는 의미 없다. 현재의 고통은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이며, 그것도 개인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커다란 사람으로서의 고통, 즉 인류의 고통이다. 개인적 고통보다 가족적 고통이 크며, 가족적 고통이 개인적 고통보다 눈에 뜨이지 않는다. 사회적 고통은 가족적 고통보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그보다 더 크며 견디기 힘들게 된다.
민족적 고통은 사회적 고통보다 알아보기 힘들지만 그보다 더 중대하다. 그러면 인류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 과연 인류의 고통이라는 실체가 있을까 ?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인류의 고통은 민족적 고통에 집약되어 있다. 물론 민족적 고통도 구체적으로는 개인들의 毛細的 고통으로서 현존하는 것이지만, 개인적 고통의 심장은 구체적 인류고인 민족적 고통에 있다. 사람이 인류로서의 자각을 한적은 여태껏 없다.
만일 아메리카 축구선수같은 옷을 입고 달에 간 사람이 월인을 만났더라면 그는 인류로서의 자각을 체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나라의 국기를 단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국기 앞에서 경례하는 사람으로서, 그것도 적진을 뚫고 들어가 'Touch-down' 하는 기분으로, 또는 재빨리 타원형의 황금덩어리를 주워 올리는 기분으로 행동하였을 뿐이다. 만일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같은 것들이 모든 인류의 육안으로써도 크게 보이거나 또는 사람이 지구 아닌 다른 천체의 동물들과 대결하게 된다면 인류로서의 자각을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으나, 현재까지 사람이 체험한 최대의 유적 자각은 ‘민족’ 으로서의 자각이다.
오늘날 인류가 겪는 고통을 민족들의 고통이다. 이 고통을 해결하는 길이 사람의 類的 체험에 이르는 가장 가깝고도 먼 길일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가장 ‘큰 고통’ 인 민족적 고통에 관하여 인식하며 그것을 해결하는 방도를 찾는데 철학적 관심이 경주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철학은 어떠한가 ? 이보다 앞서 도대체 한국철학이 있는지조차 의심하는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살아 있는 한에서 한국철학은 엄연히 있다. 단지 한국철학을 가리우고 있는 거짓 한국철학이 시끄러운 소리를 질러왔을 뿐이다. 한국철학도 철학인 바에는 고통의 문제를 탐구대상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한국철학 전문가들’ 은 한국의 고통, 인류의 고통과 그 해결에 대하여 외면하여 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현대 서양철학자들 가운데는 ‘순수한 문제’ 와 ‘거짓 문제들’(pseudo-problem)의 구별을 엄격히 해야된다고 고함을 친 사람들이 있다. 철학은 거짓문제들로 두통을 앓지 말아야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이 관광도 오려고 하지 않는 한국땅에서 마치 진짜 황금의 보물섬을 찾으려 혈안이 된 어떤 해적선장의 앵무새처럼 그런 흉내를 내는 자들이 있다. 그러한 순수한 문제와 거짓문제의 구별보다도 한국사람에게 필요한 문제와 불필요한 문제, 또는 한국사람에게 어울리는 문제와 어울리지 않는 문제, 또는 한국사람에게 중요한 문제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의 구별이 더 긴박한 질문으로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철학으로서도 순수한 문제와 거짓문제의 구별에 깊은 관심을 가져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보다 앞서야 할 것은 한국철학이 처해 있는 한국적 상황에 어떻게 철학이 대답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한국철학은 모든 생물이 소개된 진공상태, 또는 국제정치의 우주곡예사들이 비밀캡슐 속에서 체험하는 무중력상태, 또는 아무런 소유자도 없는 땅( Niemandsland )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에는 한국 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철학은 한국인의 철학이며 한반도의 철학이다. 한국철학이 국수주의적 편협성을 고집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참다운 한국철학이 되려면 그것은 벌써 세계적 보편성을 띠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색투명한 세계철학이 한국에 도입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아직까지 완전히 통일된 세계철학은 없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지배철학’ 의 호령을 한국의 청년들에게 학습시키며, 외국의 ‘진통철학’의 자장가를 한국의 청년들에게 들려주는 정신적 교련교사 노릇을 담당한 사람들의 한국의 철학교사들 가운데 많았다. 이들은 전래의 한국적 고통에다 외래의 국제적 고통을 참가시키는 정신적 하청업자 노릇을 성실하게 수행하여 왔다. 지금까지 한국의 철학교사들이 풀어 보려고 애써온 문제들은 대개 그 출처로 따지자면 외국철학자들이 출제한 것이었다. 한국의 철학교사들은 한국철학의 출제자로서가 아니라 남이 써준 문제와 남이 주어준 답안지를 받아서 풀어보는 수험생의 입장에 있었다. 한국의 철학교사들이 풀어온 문제들은 그들 스스로 출제한 문제들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몰래 침입한 문제들, 비싼 이자로 차관된 문제들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한국의 철학교사들은 다른 나라 철학자들이 출제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였다기보다도 답안 자체마저 외국으로부터 원조 받거나 밀수입하려고 하였다.
남이 출제한 문제를 남의 입장에서 푸는 사람은 ‘노예’ 다.
주인이 명령한 문제를 주인이 의사에 따라 눈치를 보아가며 풀어주는 사람이 노예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 주인이 사용하는 정의, 주인이 고정시킨 개념, 주인이 몽둥이로 두들겨 패 낸 결론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사용하며 뒤따라 가는 것이 노예의 신세다.
말하자면 노예는 하루종일 ‘자기의 문제’ 보다는 ‘남의 문제’를 푸는데 골몰하도록 억압된 생활을 강요당한다. 자기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남의 문제를 푼다는 것은 결국 남의 생각을 ‘대신’하여 준다는 것이다. 한국의 철학교사들이 마음이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한국의 철학교사들의 철학적 수준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높아서가 아니라, 한국의 철학교사들의 정신이 게으르며 가난하고 비굴하기 때문에 그들은 남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그것도 어물어물 되는 대로 풀어가는데 귀중한 시간을 바쳐왔다.
한국 철학 교사들이 외국철학의 문제를 정성들여 풀어본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은 외국철학자들이 겪는 ‘고민’ 과는 다른 ‘고통’에 직면하여 있다. 한국 철학교사들은 눈깔사탕 같은 외국 철학자들의 고민 덩어리를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manna’ 이기나 한 것처럼 입속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이가 썩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철학의 출발은 고민스런 ‘놀라움’ ( thaumazein ) 도 아니며 놀라움 고민도 아니다.
고통이 철학의 근원이다. 고민에 관심을 기울이는 철학과,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철학은 엄밀히 구별해야 한다. 식사 후에 이쑤시개를 버려도 좋듯 한국 철학자들은 철학적 고민을 팽개치고 배달민족이 겪는 고통과 한반도에 엄습하여 있는 세계적 고통의 문제를 사랑(phillein)하며, 이 고통의 출처와 해결책을 규명하며 제시할 수 있는 지혜(sophia)를 갖추는데 주력해야 될 것이다. 한국철학교사들이 남의 문제와 해결방식을 답습하는 동안 그들은 철학적 소비자들이다. 한국 철학자들이 한국인의 고통과 인류의 고통을 이해하며 해결하는 ‘한울’ 의 대열에 낄 때 그들은 철학적 생산자들로서 세계철학의 수립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2. 분단과 고통의 전가
고통은 생명에 대한 박해다. 무생물에게는 고통이 없다. 생명체에다 박해의 망치를 두들길 때 고통의 피가 흐른다. 생명체에다 침략의 비수를 들이댈 때 고통의 절규가 터진다. 고통은 ‘통일’ 의 상실이다. 생명체가 쪼개질 때의 아픔이 고통이다. 생명체를 쪼갬( dia-bllein )이 고통예술의 검무법이다. 생명체를 ‘분열’ 시킴으로써, 생명력을 분할시킴으로써, 생활환경의 고리를 분리시킴으로써, 생명의 기능을 분단시킴으로써 생명은 고통을 받게 된다. 주의할 것은 인간의 세계에서 분열, 분할, 분단, 절단 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人僞的으로’ 감행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을 분열시키며, 사람을 분할시키며, 사람을 분단시키며, 사람을 절단시킨다.
생존은 연결과 협동으로서, 즉 ‘통일적 상태’ 에서만 유지되며 확장된다. 인위적으로 생존의 통일성과 협동적 유대를 쪼개고 끊음으로써 고통이 생긴다.
작은 고통이나 큰 고통을 구별할 필요 없이 고통은 생존적 연결과 생존적 협동의 단절, 분할, 분단에서 비롯된다. 생명체 속에서의 세포분열과 생존에 대한 인위적 분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접목과도 다르다. 세포분열이나 접목은 감소가 아니며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분가’ 이며 생명의 증대이며 창조다.
그러나 인위적 고통으로서의 분열은 생존의 감소이며 생존의 파괴다. 통일적 생존의 분단은 단순히 분단으로써 끝나지 않는다. 잘리어진 손은 나의 팔에 대하여 반목하지 않지만 분단된 인간관계는 미움과 불신과 반목의 관계로 악화된다.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분열이나 분단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단절로써 끝나지 않고 대립과 투쟁에까지 발전한다. 그런데 분열과 고통과 불신과 반목은 서로가 서로를 증대시킨다. 사람을 분열시켜 놓으면 고통스럽고 서로 불신하며 서로 노려보게 된다. 고통스럽게 되면 분열하며, 불신하며 반목한다. 서로 믿지 않으며 분열되며 고통스럽고 반목한다. 반목하면 분열되며 고통스럽고 불신하게 된다.
통일된 생존관계의 파괴는 인간성을 파괴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파괴는 정신을 파괴시킴으로부터 비롯된다. 정신의 논리적 저항력을 거세해 버리는 인위적 조직( manipulation ) 기술이 있다. 보이지 않는 칼로 거세하는 기술이 그것 이다. 정신이 용기와 저항력을 잃었다면 벌써 그것은 화석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의 구조적 명료성으로부터 멀어져 정신은 ‘정신없이’ 순간적 자극에 이끌려 다니는 수동적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부터 정신과 실천의 통일성, 정신과 육체의 통일성은 파괴되어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로 죽어 있는 송장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이것은 내시, 환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정신적 생명력을 약탈하는 ‘분할’은 정신적 환관제조술이다. 흔히 내시들은 임금님 계시는 대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고자 대감님들’ 이다.
왕궁 밖에는, 비록 고환을 달고 다니지만 보이지 않는 정신적 고환을 거세당한 고자 백성들이 계속 고자를 낳아 기르며 고자를 길들여 왔다.
‘불알을 떼어냄’ ( Castration ), 즉 생명의 분할은 생명의 근본적 약탈이다. 궁형은 생명에 대한 철저한 착취다. 죽이고서 생짜로 남의 것을 빼앗아가는 방법보다 남을 살려둔체 그로부터 계속 빼앗아가는 방법이 더 철저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 죽이고서 강탈하고 나면 그 다음에 빼앗을 것이 없다. 토끼고환을 약으로 다려먹어야 용왕께서 불로장생할 수 있다면 토끼를 잡아서 칼로 가르고 그것을 꺼내 먹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계속 토끼불알을 장복하려면 많은 토끼를 번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꿀을 빼앗으려면 벌들을 죽여 없애서는 안된다. 젖을 빼앗기 위해서는 젖소를 잘 먹여 키워야 하며, 알을 많이 뺏기 위해서는 암탉을 잘 보살펴주며 산란 촉진기술을 습득시켜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계속 빼앗길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나가되 빼앗기는데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는 가축과 같은 산송장을 만들어내야 된다. 여기에 분할이라는 방법이 사용된다. 황소나 수퇘지를 키워 살찌우기 위해 어떻게 신체를 분할시키는가를 보라. 그러나 인간을 거세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어느 부분도 잘라낼 필요가 없다. 사람끼리 연결되어 있는 협동과 통일적 유대를 보이지 않는 불신의 칼로 싹둑 끊어버리면 사람은 분할되며 거세된다. 황소나 수퇘지를 거세하면 살이나 잔뜩 찌지만 정신적으로 거세된 인간들은 삐쩍 마른채 서로 할퀸다.
분할은 약탈인 동시에 ‘지배’ 다.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Divide et impera!) 는 주문이 악마의 칼에 검명으로 새겨져 있다. 분할하고나면 지배가 다음에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분할이 곧 지배다. 분할은 거세로서 인간성 자체의 약탈인 바 인간의 ‘노예화’, 인간의 ‘가축화’ 다. 어떻게 지배하는가 ? 간단하다. 쪼개라 ! 개념들을 분할시키고, 관념들을 이간시키며, 판단들을 반목시키며, 추리를 단절시키며, 정신의 고환을 떼내며, 나의 정신과 너의 정신을 잇는 인정과 양심의 줄을 끊어버리며, 나의 정신과 나의 손의 통일적 생명선을 절단시키며, 나의 손과 너의 손의 협동적 제휴의 동아줄을 잘라 버리며, 나와 너의 신뢰를 파괴하는 것, 이것이 나를 지배하는 길이며 너를 지배하는 길이다.
모든 분할과 분단이 지배다.
가장 근원적이며 영구적인 지배는 정신적 분할과 정신적 파괴다. 분할의 통치술은 바로 대립상쟁의 예술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하여 늑대가 아니다. 상쟁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인위적 상태’ 다. 만인을 만인에 대하여 원수가 ‘되게끔’ 분할시키며 이간시키는 무당들이 있는 것이다.
양분논리의 검무를 추고 있는 무당들은 지배성(Imperium) 의 악마들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분열은 인간에 있어서 필수적인 생존조건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위적 분단에 있어서 그 극치에 달한다. 자연적 시간은 인간에 의하여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단절되어 연대와 연호와 왕호의 단위 속에 감금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의 인위적 단절이나 생존의 필요한 편리를 위해 그어진 인위적 시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왕이 만인의 시간을 독점한 연호의 경우처럼 생존을 불편하게 만들며, 생존을 제약하는 굴레로서 시간을 자의적으로 인위적으로 분단하는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통행금지시간’ 이라는 것도 시간의 인위적 분단을 증명하는 전형적 예다. 시간을 만인에 의하여 소유되며, 시간을 통하여 만인의 활동이 그 범위를 확장해가는 경우라야 정상적인 것인데, 오히려 시간이 만인을 소유하며, 만인이 시간에 의해서 부당하게 장악되는 것은 결국 이를 제도화하며 조종하는 다른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 그 자체가 인간의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하여 시간이 강제적으로 분단되어 다른 사람들의 활동을 그 속에 감금하는 것이다. 시간의 인위적 분단, 시간의 강요된 분단은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분단을 달리 구체화시킨 것이다.
인간에 의한 공간의 인위적 분단도 마찬가지다. 공간과 지역, 땅과 국토는 본래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의 터전이지만,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제약하며 구속하는 경우에 공간의 분단이 감행된다. ‘감옥’ 이 바로 분단된 공간이 아니냐!
인간에 의한 공간의 인위적 분단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에 있어서 가장 뚜렷이 증명된다. 자연적 환경과 인종적 차이에 따른 영토의 구분으로서 국경선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겠으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강한 민족과 약한 민족의 대립으로부터 강요된 공간의 분할이 자행되어 왔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아프리카의 공간, 아세아의 공간, 오스트레리아의 공간, 그리고 아메리카의 공간들을 내려다 보라. 거기에서 누구나 눈을 가진 자라면 도처에 자를 대고 종이 위에 펜으로, 아니 생존의 가슴팍에 칼로 그은 공간의 핏자국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곧은 줄들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분단이 피와 눈물과 총과 몽둥이, 그리고 사기와 협잡, 공갈로써 억울한 고통의 신음소리를 짓밟으며 그어진 금들이다.
인위적으로 그어진 공간의 금과 시간의 분할이 시작되는 순간 제약되는 인간들은 공간과 시간의 소유를 박탈당한다. 인위적 시간, 공간의 분단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분단을 주도한 인간, 인간을 제약하는 인간은 제약받는 인간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강탈해 간다. 한반도의 남북공간을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니다. 한반도의 낮과 밤의 시간을 통해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 국민이 아니다. 한국 국민은 한반도라는 영토의 공간적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있으며, 한국 국민은 한국 영토 위에 흐르는 시간의 점유권을 상실당하고 있다. 남쪽에 살고 있는 한민족에 있어서 북쪽에 살고 있는 영토공간은 없는 것이며, 북쪽에 살고 있는 한민족에 있어서 남쪽에 살고 있는 영토공간 은 없는 것이다.
한국인에 있어서 오늘과 내일 사이에는 함부로 타넘을 수 없는 4시간의 휴전선이 그어져 있다. 한반도라는 영토의 공간적 소유권과 반도 위에 흐르는 시간적 소유권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한국인 아닌 외국인에게 부여되어 있다. 외국인이면 전라남도와 함경북도를 구경할 수 있다. 외국인하면 한국인이 박탈당한 밤의 시간을 차지할 수 있다. 빼앗긴 시간, 빼앗긴 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남에게 빼앗긴 ‘수인’, 자신의 강토를 디디지 못하는 민족이 도대체 누구인지 보고 싶은 ‘관광객’이 있으며 한국에 와서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한국인을 ‘보라 ! 그 사람이다.’ (요한 19 : 5)
통행금지시간, 통행금지구역이라는 분단된 시간과 분단된 공간의 금은 자연적 시간과 자연적 공간에만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마음 속에, 사람의 머리 속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벗과 벗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그어져 있다. 이 금이 얼마나 쓰라리고 또 깊이 파여져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 금은 더욱 깊게, 그리고 더욱 넓게 파여지고 있다. 시인 이상화는 읊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는 봄은 오는가.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과연 땅도 들도 빼앗기고 ‘황금의 시간’마저 빼앗긴다면 사람에게 무엇이 빼앗기지 않은채 남아 있을까? 그의 발톱과 머리카락이? 그의 한숨과 수치심, 패배감이? 아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의 발과 머리는 땅과 들을 떠나서 결코 있을 수 없으며, 그의 한숨과 수치심과 패배감도 생명의 시간, 봄을 떠나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인위성은 분열시키는 자, 분할시키는 자, 분단시키는 자가 사람임을 말해 준다. 고통의 인자는 사람이다. 인간에 있어서 고통을 조장하는 자는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데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것도 있다. 어린이가 절벽 아래로 걸어가다 산꼭대기에서 저절로 굴러내려온 돌에 맞는 경우처럼.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그 어린이는 물론 조심했어야 하며, 어른들이 그 장소에 위험표시를 하거나, 낙석의 가능성을 제거하거나, 또는 어린이에게 사전교육을 시키건간에 그 고통을 미리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인간의 생존방식이 예외없이 ‘사회적’이라는데 고통문제의 출발과 해결이
달려있다. 사람이 겪는 대부분의 큰 고통은 자연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지어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돌에 맞아 피를 흘리는 고통을 겪는 것은 혼자 산길을 가다가 산꼭대기에서 저절로 굴러 떨어진 돌 때문이 아니라 ‘남’이 던진 돌팔매에 ‘얻어맞음’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을 괴롭히며 인간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가해자’가 아니다. 인간을 괴롭히며 고통을 들씌우는 가해자는 바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 고통은 가해자의 저주스러운 턱밑샘으로부터 새어나온 독액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고통은 피해다.” 고통은 가해적이며 피해적이다. 고통의 가해자도 사람이며 피해자도 사람이다.
고통은 이동하며 전가된다. 어째서 사람은 가해자로서 고통의 보따리를
피해자에게 전가시키는가? 가해자로부터 피해자로 고통이 이동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고통의 이동은 인류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힌 시각적 우상숭배 또는 요소론적 세계관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며 촉진되어 왔다는 요소론적 세계관은 그 근저에 있어서 ‘연금술적’이며 ‘상업적’인 욕구에 의하여 촉매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요소론적 세계관의 밑바닥에는 쾌락주의적 윤리관이 흐르고 있다.
실재 또는 세계 또는 자연을 고정된 정물로서 파악하는 요소론적 사고방식은 실재 또는 세계 또는 자연에 대한 소유욕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실재․세계․자연에 대한 대립의식 또는 적대감으로 가득차 있다. 실재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 요소를 향유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인류의 의식속에 뿌리박혀 왔으므로 ‘더 많은’ 실재와 ‘더 많은’ 요소를 갖고자 하는 쾌락주의적 세계관이 지상에서 지배하여 왔다. 이미 요소론적 세계관 속에 스며있는 쾌락주의는 쾌락의 무제한한 독점과 아울러 필연적으로 고통의 무제한한 생산을 초래하게 될 소지를 마련한 셈이다.
쾌락주의와 고통은 요소론적 세계관의 양면에서 솟아난 두 뿔이다.
요소론적 세계관이 처하여 있는 난처한 양도론법( Dilemma )은 바로 쾌락주의와 고통이라는 두 절벽 사이에 끼어있는 험난한 고통해협이다. 이 해협 사이로 고통의 눈물로 오염된 고해가 흐르고 그 위에는 쾌락의 수증기가 악취를 풍기며 피어 오르고 있다.
요소론적 세계관은 고통의 물결이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도록 그 고지와 저지의 위상을 드높여 왔다. 이 위상의 입구에 써붙인 팻말은 ‘더 많이!’라는 문구로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실로 고통의 바다가 얼마나 깊은가를 가르쳐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고통의 해류, 고통의 흐름은 요소론적 세계관과 쾌락주의적 연금술의 바위 틈에서 솟아난 샘물로부터 근원한 것이다. 고통의 샘물은 처음 솟아나서 졸졸 흐르는 단계에서 점점 양이 불어 그 아래에 내려오면 매우 빠른 속도로 그리고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한마디로 고통은 가해자의 쾌락을 위해서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짐을 벗어준 결과다. 위에서 흘러 내려온 고통의 땀방울은 자신의 무게를 아래에다 전가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십자가를’ ( 마태 10 : 38 )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은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개의’ 십자가들을 도맡아서 포개 지라는 말씀은 아니다. 더구나 ‘남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몰래 또는 강제로 지우라는 말씀은 아니다.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를 남의 등어리에다 씌워버리는 가해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해자는 자신이 져야할 고통의 십자가를 피해자의 등에다 넘겨주고 쾌락의 ‘황금십자가’, 실로 수놓은 ‘황홀한 십자가’ 또는 ‘종이 십자가’를 하얀 목에 걸고 다니거나 붙이고 다니거나 하얀 손에 들고 다닌다. 얼마나 악독스럽고 표독스러운 예술이 악마들의 혀 끝과 손 끝에서 제작되는가! 요소론적 세계관은 한편 쾌락주의적 윤리관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으며, 한편 ‘고통의 전가’를 촉진시켜 왔다. 요소론적 우상숭배는 확장주의를 낳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고통을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쾌락의 확장은 고통의 확장없이 불가능하다. 쾌락의 술잔은 고통의 피가 많음에 따라 푸짐하며, 쾌락의 노래소리는 고통의 원성이 높아야 더욱 고우며, 쾌락의 향초불빛은 고통의 눈물이 많이 흘러야 향기롭게 술자리를 비춘다. 쾌락의 확대재생산은 고통의 확대재생산이다. 쾌락의 진보는 고통의 진보와 짝하여 왔다. 그러므로 진보라는 가해적 확장은 퇴보라는 피해적 확장을 희생으로 하여 달성되는 패륜아적 범죄이기도 하다.
진화와 진보에 대한 낙관과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 퇴화와 퇴보의 그늘이 이에 뒤따랐음을 망각하는 이성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진화의 사다리 꼭대기에 사람이 서있고, 사람의 꼭대기에 ‘이성’이라는 최고 ‘지혜의 헬멜’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가축처럼 기르며, 사람이 사람의 불알을 까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해괴망칙한 植民과, 食民과 식인이라는 야수적 이성의 억압마저도 우상숭배적 진화 신전의 문 앞에 아름다운 여신상과 함께 전시될 수 있을까?
이 땅 위에서 자기만이 똑똑하며, 자기만이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자기만이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자부하여 온 민족들이 있었다. 그 반면에 다른 민족들은 원숭이나 침팬지에 가까운 미개민족, 원시민족으로 비논리적으로 또는 전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관은 매우 오래전부터 뿌리박혀 있었으며 교육에 의하여 한층 더 강화되어 왔다. “백인의 교육은 그리스의 도시국가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명예라는 이름으로 인류에 대해 저지른 죄과를 정당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장 프랑스와 르벨, 『마르크스도 예수도 없는 혁명』, 박재두 역, 1972, 법문사, p.182)
그들은 도대체 무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인류에 대하여 죄를 지었나 ? 현세적이건 내세적이건간에 그들이 추구한 것은 황금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스승들은 오랜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금술’완성에 실패하였으나 연금술 사상을 물려받은 제자들이 황금의 무인도를 발견한다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풀리는 것이었다. 연금술적 ‘희망’에 부풀어 우상숭배의 돛을 달고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허큐리스의 두 기둥(Pillars of Hercules) 사이를 지나 세계 각지에다 고통을 주고 쾌락을 빼앗는 세계적 보부상이 되어 희망봉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이 봉우리는 가해자에게만 희망(Good hope)이었지 피해자에겐 절망(Bad Despair)이 아니었든가! 이들의 안중에는 금만 보였지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비논리적 논리에 따라서 이른바 미개민족은 진화된 야수의 봇짐을 져야된다는 결론을 연역해 냈다. 말하자면 그들은 다른 민족에게 ‘사람’이라는 이름 대신에 Porter이라는 이름을 붙여왔다.
져야할 ‘짐꾼’이란 자신의 짐을 짊어진 사람을 말하지 않고 남의 짐을 대신 져주는 노동자 또는 노예다.
흔히 진화론의 창조자인 백인들은 벌거벗은 흑인과 황인의 머리와 어깨에다 침략과 고통의 무거운 짐보따리를 메주었다. 자신을 매질하며 자신을 더욱 초라하며 가난하게 하는 회초리와 마약과 같은 마술사의 도구들이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속에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머리를 숙인 채 짊어지고 가는 사람에게 ‘문명’이라는 마약을 먹여주는 것이 백인의 책임(the white Man's Burden)이라고 생각하는 보따리 주인은 뒤에서 속삭인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면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라고. 그러나 짐에 눌린 사람의 귓전에는 印歐語조의 억야에다 서투른 ‘토인’의 단어로 지껄이는 소리 가운데서 ‘자기’와 ‘서로’라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고 ‘십자가를 들고’와 ‘남의 짐’이라는 말이 크게 들릴 뿐이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서 남의 어깨에 매어주고 자기들은 손까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습니다.(마태 23 : 4)
이러한 구절이 성스러운 말씀 속에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백인의 짐을 처음 짊어졌던 사람이 아니라 그의 손자다. 손자가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는 때가 와야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손자는 할아버지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짊어졌으며, 그의 몸과 정신은 온통 쇠사슬로 얽혀있다. 할아버지는 등어리로 짐을 졌으나 손자는 머리 속으로 짐을 지고 다닌다. 그가 해득한 문자는 해방의 암호라기보다도 머리 속에 박힌 무거운 고통의 쇠덩어리다. 그가 지고 있는 짐 가운데도 가장 무거우며 견디기 어려운 보따리가 바로 이 문자의 쇠그물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가해자에게 떠맡긴 고통의 짐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제일 무거워진다.
등에 짊어진 보따리는 금방 벗어 팽개칠 수도 있으나 정신 속에 짊어진 보따리는 좀체로 벗어 팽개칠 수 없는 것이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짐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피해자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짐꾼’이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다. 이 이름 자체가 얼마나 무거운 짐이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짐만을 짊어져야 할 성스러운 짐꾼이다. 그러나 자기 짐을 피해자에게 넘겨주고 짐꾼이라는 이름조차 벗어서 피해자의 정신 속에다 짊어지우는 가해자 악마들은 얼마나 마음 가벼우며 발걸음 가벼울 것인가?
‘심부름꾼’ 예컨대 사역병, 사환과 같은 명칭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짊어지운 이름이다. 고통의 전가는 ‘시킨다’(To let)라는 조동사에 분명하게 구체화되어 있다. 시킴을 받아서 하는 행위는 강요된 행위며 노예적 행위다. ‘사역’은 가해자가 만들어 낸 인위적 행동양식이다. 고통의 심부름, 또는 사역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점점 깊고 넓은 바다가 되어 그 무게가 증대하듯, 아래로 내려올수록 가중된다.
고통은 고통을 낳고 심부름은 심부름을 낳고 사역은 사역을 낳는다. 한 부대의 온갖 잡역을 도맡은 사역병은 얼마나 고달픈가? 사환이 회사의 책임자보다 많은 일을 하는 경우를 볼수 있지 않는가? 위에서 흘러 내려온 고통의 짐짝들이 사역병, 사환의 어깨와 등위에 얹혀 있다. 쾌락의 뒷뜰에서 고통의 심부름을 도맡아 한 사람들이 바로 피해자들이며 심부름꾼들이었다. 이들은 가해자의 쾌락을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온갖 시중을 도맡아 왔을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슬픔마저도 대신해야 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이 흘린 눈물의 항아리에는 자신의 고난에서 솟아난 눈물뿐만 아니라 주인의 상을 당하여 상주대신에 심부름으로 울어준 눈물도 섞여 있었다. 흔히 울 줄도 모르는 주인의 초상에 상주 대신 구성지게 목놓아 울어주기까지 해야만 되었던 것이 하인의 슬픈 심부름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주인의 속시원한 죽음 뒤에도 해방되지 못하고 너절한 송장곁에 자신과 가족들의 아름다운 생명마저 산채로 매장당하는 것이 그들의 신세가 아니었든가!
세계사의 무대에서 심부름꾼, 사역병의 노릇을 떠맡은 민족들이 있다.
고통이동의 해일이 한 골짜기로 집중되게 되면 그 골짜기의 주민은 모든 고통들을 송두리째 뒤집어 쓴다. 국제적인 고통보따리의 전가에 희생되는 민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국제적 사역병’의 격무를 수행하는 민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힘든 일을 떠맡고 있는 민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배달민족이다.
‘배달민족’이 세계적 고통을 송두리째 뒤집어 쓴 ‘倍達民族’ 신세가 되었다. 과연 한반도는 세계적 고통의 물결이 집중적으로 밀어닥친 고통의 골짜기다.
그러나 단지 한민족이 어리석고 못나서가 아니라 한민족에게 자기들의 짐을 떠맡기려는 국제적 가해자들이 더 악랄하였기 때문에 한민족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한밤중에 몰래 쓰레기를 남의 집에다 갖다버리는 자가 미운 놈이지 잠든 주인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의 국제적 가해자로부터가 아니라 모든 국제적 가해자들로부터 고통의 쓰레기 덩어리를 떠 맡은 이 땅의 주인이 한민족이다. 그렇다.
우리 조선민족은 모든 자연고와 모든 人爲苦를 혼자 다 맡았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 중 에,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오늘날 조선민족처럼 온갖 인간고를 체험하게 된 이는 없습니다. 이천만 조선민족은 창조 이래의 전인류의 고를 독담한 것 같습니다.
비록 현금에 전인류가 견딜 수 없는 인간고 밑에 눌려 있다하더라도 조선민족은
전인류의 각부분이 맡은 모든 고를 한몸에 맡은 것 같습니다.(『이광수 전집』 제 17권, 서울 : 삼중당, 1962, pp.253 ~ 254)
춘원이 만일 지금 생존하여 자신의 글을 읽어본다면 그 내용을 수정할 것인가? 수정할 것이다. 단 한 군데. 즉 2천만을 5천만으로 수정할 것이다. 그 나머지는 그대로 두고.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민족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민족에게 전가시킨다.
저성장, 실업, 물가고, 정치위기와 같은 국내고통의 짐을 국경 밖에다 내다 버리려는 온갖 노력을 늦추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 아닌가? 이러한 상황에서 남이 내다버린 또는 강제로 씌워버린 ‘죽음의 보따리’를 도맡아 진다는 것은 얼마나 가련한 일이겠는가? 일찍이 씨알의 철인은 외쳤다.
36년간 일본 식민지였다는 것은 일본의 자본가가 자기 국내의 문제를 피하려고 내다버리는 짐을 맡았던 것이요, 지금은 미국․중공․소련이 자기네가 앞서 가노라고 그 지배자들이 제 나라에서 문제될 쓰레기를 내다버리는 것을 맡은 것이다.(함석헌, 『새시대의 전망』, 1959, p. 241)
한민족은 열강들의 자본주의적 국제정치적 쓰레기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고통을 도맡아 겪었으며 지금도 겪고 있다. 세계적인 고토의 최후 눈물은 ‘피’가 되어 전쟁이라는 배설의 하수도를 통하여 흘러 내린다. 한민족이 겪은 세계대전은 세계적 고통의 억울한 희생이었다. 지금도 이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비록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는 전투보다 그 규모에 있어서 더 크며 그 견디기 어려움에 있어서 더 고통스러운 전쟁이다. 연금술적 세계관이 발전시킨 ‘금속문화’의 본색이 한반도 위에서 전시되었다. 온갖 쇠덩이, 구리덩이, 알미늄 쪼가리가 이 반도 위에서 어지럽게 춤추었다. 인류가 발전시켰다는 철기문명의 창과 방패가 몰려와 배달민족이 수천년 동안 건설하여온 문화의 정원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총알로부터 탱크에 이르기가지, 수류탄으로부터 군함에 이르기가지 모든 쇠덩어리들이 이 땅에 몰려들어 현대문명의 패션쇼가, 피의 불꽃놀이가, 고통의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벌어졌으며 지금도 몰래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살점들이 하늘로 튀어오르며, 한민족의 뼈조각이 바위틈에 뒹굴며, 한민족의 피가 땅을 물들일 대 인류는 무엇을 하였는가? 피와 고통의 신음소리가 뒤얽혀 응고되어가는 한반도의 불장난이 인간 스스로 지어낸 고통의 철학이 저지른 죄악임은 망각한채 가슴을 조이며 인류는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싸움의 배후에 숨어 다니는 국제적 고통의 보부상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세계적 고통의 연금술사로서 그들은 한민족의 피와 살로써 금덩이를 제조하였던 바 ‘korea boom’의 재미를 톡톡히 본 것이다.
‘오대호의 기적’, ‘토오쿄오만의 기적’, ‘라인강의 기적’은 확실히 기적이다.
이 땅의 흙과 강물로부터, 한민족의 살과 피로부터 금이 만들어졌으니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국전쟁으로 단순히 미국이나 일본의 경제가 덕을 보았을 것만은 아니다. 대서양, 태평양에 둘러싸인 나라들이 한민족이 흘린 피의 포도주를 마셨으며 한민족이 빼앗긴 살점의 안주를 씹었던 것이다.
국제적 벼락경기 변동의 그래프를 위로 끌어올린 한민족의 절규는 종이 위에서 잉크로 그린 그래프의 안일한 자취에 비하면 얼마나 비참하며 원통하게 치솟았던가!
한국전쟁은 단지 국제경제의 기상권에 팽만했던 경제적 불쾌지수를 떨어뜨리는데 기여하고서 그 역사적 운명을 다한 철편 소나기만은 아니다.
한국전쟁은 배달민족과 전(whole)인류 앞에 한반도의 성스러운(holy) 땅임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인류가 체험한 가장 수치스러운 성전이 한반도 위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수치스러웠던 것은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들끼리 싸우도록 부추겼으며, 또 형제를 앞세워 인류가 편을 갈라서 가세하였다는 기록을 아무도 지워버릴 수 없다는데 기인한다. 그것은 성전이었던 것은 한반도에 군화를 신고 들어온 세계 여러 나라들의 청년들이 한반도를 자기들이 목숨 바쳐 탈환할 ‘성지’ 또는 ‘고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네들은 오히려 마음 속에 그리는 자유와 평등의 가상적 성지로서 자기들의 연금술적 수도들을 성스러운 땅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로부터 단지 자기들의 성지를 찬란한 ‘금의 장성’으로 둘러 쌓는데 필요한 연금술적 자료만을 긁어가기 위하여 그네들은 끌려왔던 것이 아니냐. 그네들이 보기에 한국은 성스러운 아담 스미스의 고향도 아니며, 칼 마르크스의 고향도 아니었다.
그러면 어째서 이 싸움을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세계의 청년들이 동방예지의국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금수강산의 험한 산천과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시끄러운 도시로 끌려다니며 ‘God damn’하면서 침뱉은 바로 이 땅이 배달민족에게는 더없이 ‘성스러운 땅’이며 인류에게도 ‘성스러운 땅’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사랑하는 아들들, 세계의 청년들의 압제자의 요술 나팔소리에 속아 이 땅위에 얼마나 많이 스쳐 지나갔는가! 漢의 청년들, 몽고의 청년들, 만주의 청년들, 일본의 청년들이 자신들을 압제한 악마들의 속임수에 빠져 이 땅위에 쳐들어와 배달민족의 피를 마시며 살을 뜯어먹었던 바로 이 땅위에 아메리카의 청년들, 오스트렐리아의 청년들, 아시아의 청년들, 아프리카의 청년들,유럽의 청년들은 압제자들의 ‘큰거짓말’에 속아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뺏아간 전리품은 무엇인가? 몇푼의 봉급? 한국의 골동품 몇 조각? 한국여성의 정조를? 몇마디 익힌 한국어 욕설?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빼아겼을 뿐이다. 한국의 땅이 그들의 빼앗긴 목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마귀들의 부대가 여기에 달려왔으나 한민족의 목숨이 넘어간 적은 없다. 온갖 침략에도 불구하고 이 땅은 더욱 굳게 다져져왔다.
앞으로도 이 땅은 이 땅을 더럽히며 이 땅을 뺏으려는 침략자들의 목숨을 뺏을 것이다. 한국의 땅은 성스러운 땅이다. 이것은 배달민족에게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도 성스러운 땅이다. 속임의 함정에 빠져흘린 인류의 피로써 성화되어 있는 땅이며, 세계 모든 나라들에 도사린 악마들의 거짓말(pseudo-logia)을 남김없이 탄로(A-letheia)시켜 줄 진리의 땅이기 때문이다. 본래 ‘밝음의 땅’으로 불리어 온 곳이 바로 이 강토가 아니냐.
세계 청년들의 피로써 성화되었기 때문에 이 땅이 성지인 것만은 아니다. 이 땅의 주인인 배달민족 스스로, 더구나 형제들끼리,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키와 똑같은 말씨와 똑같은 웃음을 간직한 남쪽과 북쪽의 청년들이 서로 형제들의 가슴에 칼을 꽂아서 흘려준 피로써 이 땅이 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은 성지인 것이다. 고통의 짐에 눌려 흘린 민족의 피, 속아서 형제끼리 싸우다 흘린 피,세계 청년들의 피로써 이 땅은 붉게 성화되어 짙은 ‘황토’가 되어 있다. 배달민족과 전인류의 피를 머금고 있는 이 땅에서 솟아난 황토의 시인이 읊은 것처럼.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김지하, 『황토』, 1970, 「황톳길」)
이 성스러운 땅의 주인은 지금 어떠한가? 이 사람은 고통스럽다. 한국인이 겪는 고통은 ‘분단’, ‘분열’, ‘불신’의 고통이다. 한국인의 고통은 ‘상쟁’의 아픔이다. 악마의 주문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가 한반도의 밤하늘 위에 둥둥 떠있는 황금사과의 기구 표면에 검은 글씨로 씌어져 있다. 한국인의 고통은 악마가 한국인을 분할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등 위에 남의 짐이 얹히게 된 첫걸음이다. 한국인이 겪고 있는 분단의 고통은 한국인이 현재 짊어지고 있는 ‘지게’다. 오랜 옛날부터 한국인의 등에는 고통의 지게가 얹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무겁고 고통스러운 지게를 진 적은 일찍이 없다. 지금 촌에서는 줄어들어가고 있는 지게, 큰 도시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지게.
그렇다. 전해내려온 나무지게는 점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지게 위에 남의 짐을 한민족은 지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지게란 바로 ‘분단의 지게’다. 그것이 분열, 분단이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게 위에다 한민족은 일찍이 체함한 적 없는 전세계적 고통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이 짊어졌던 고통의 보따리를 가운데서 탄약의 짐처럼 무겁고 견디기 어려웠던 짐은 없었다. 탄약의 짐을 맨등어리에다, 보이지 않는 지게 위에다 메고 가파른 고향의 산을 오르는 한민족은 자신과 형제의 시체가 묻힐 포탄 구덩이를 자신이 짊어진 탄약통 속에 파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짐을 지워준 악마들은 흉칙한 웃음을 웃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이 과거에 체험한적 없는 인위적 분단의 고통은 오늘날까지 인류의 틈에 낀 악마들이 저지른 악행들 가운데서도 가장 추한 마희의 결과다. 처음에 한민족은 악마들이 숨어서 종이 위에 잉크로 그어 논 분단선, 38마의 선이라는 종이지게 위에다, 그리고 상쟁의 피로써 그어진 휴전선이라는 악마의 지게위에다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다. 지금 한민족은 등어리 위에 이 분단의 고통선이라는 ‘철조망’의 지게를 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이 지금 구체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의 보따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얘기해 보라! 그것에다 이름을 무어라 붙이든지 그 고통은 이 분단의 지게 위에 얹혀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민족이 짊어진 보이지 않는 지게 분단선은 보이는 지게 즉 철조망의 인간가축을 방목하는데도 사용될 수 있음이 한국에서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한민족이 이 가시철망 속에 갇힌 최초의 가축이 되다니. 한민족은 철조망이라는 지게를 지고서 철조망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바닷가를 가보라, 한반도의 휴전선을 가보라,
한반도의 도시와 농촌을 가보라, 어느 곳을 보아도 이 악마의 울타리가 쳐져 있는 것이다. “눈이 있는 자는 보게 될 지어다.”
어디 그뿐이랴. 한민족의 머리 위에는 가시철망(stachel-draht)으로 된 관이 씌워져 있다. 장님이 아닌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분단의 가시철망이 한민족의 정신 속에 쳐져 있다.
불신과 반목의 정신적 가시철망이 한민족의 가족적 상화유대와 상화왕래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자체의 분단, 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냐. 부모와 자식의 분단, 친척들 사이의 분단, 한마디로 말해서 민족 전체가 가시철망에 찔려 분단의 상처로부터 고통의 피가 흐른다. 자식이 부모를 믿지 않고, 선생이 학생을 믿지 않고, 신자들이 성직자를 믿지 않고, 국민이 국민을 믿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면 이미 그 민족은 민족으로서의 자격 즉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죄목의 피소를 받아 세계사의 법정에 출두해야 될 것이다.
그러면 한민족은 피고란 말이냐? 아니다. 한민족은 피해를 입은 세계적 원고석에 앉아 있다. 한민족의 분단, 인간의 분단은 바로 한국사람으로부터 인간성을 약탈해 갔다. 분단됨은 약탈당함이다. 한민족을 분단시킨 악마들은 한민족의 인간성을 약탈한 생명의 착취자들이다. 분단의 고통은 이중고다. 그것은 절단의 고통와 강탈당하는 고통이다. 1945년 이후 한민족은 계속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이중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두 손을 든채 걷고 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며 들고 다닌다. 한민족은 휴식의 자유도 없이 밤길을 해매야 한다. 한민족에 있어서 통행금지 시간은 꿈꾸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정지!’된 시간이며 뜬눈으로 새우는 시간이다. 한민족은 고난의 밤을 새우며 고통스런 불침번을 서고 있다.
한반도에서 언제 고통의 시간이 멈추고 통행금지 해제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겠는가? 언제 한민족은 ‘인류의 불침번’ 신세를 면하게 될 것인가? 가해 민족들이 곤히 잠들어 평화의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한민족의 두 손은 십자가 즉 야경꾼의 딱딱이를 두드리며 ‘정지’ 소리를 외치며 호각을 불며 통행금지된 성지의 초소를 돌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지키며 누구를 쫓아내며 누구를 정지시키며 누구를 체포하려는 야경꾼이란 말이냐! 가해자를 지키며, 피해자를 쫓아내며, 피해자를 정지시키며, 피해자를 체포하는 야경꾼이란 어떻게 된 불침번 이란 말이냐!
이게 도대체 누구의 땅이냐! 누구를 위하여 딱딱이 소리는 울리는가? 꼬박꼬박 야경비를 낸 사람들을 위하여? 야경비 한 푼 내지 않는 엘링턴 국립묘지의 평화를 위하여, 레닌묘의 평화를 위하여, 중산능의 평화를 위하여, 명치신궁의 평화를 위하여, 얼마나 오랜동안 한민족은 ‘평화스럽지 못한’ 야경을 돌아야 하는가?
고통의 골짜기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하늘에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 오기를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 그런 동아줄이 튼튼하지 못해서 또는 썩은 동아줄이어서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동아줄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오려면 하늘에서 줄을 내려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바다기슭으로 밧줄을 던져 ‘닻을 내려!’(anchor)달라고 외쳐야 한다. 기슭에다 닻을 내리어라! 그리고 형제들끼리 손을 잡고 서로 힘껏 당겨라! 그러면 고통의 헤일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다.
이중의 십자가, 한민족의 짊어진 ‘지게’의 십자가와 두 손에 들고 두들기는 무거운 딱딱이 십자가는 억울하게 남의 것을 잘못 짊어진 것, 잘못 잡은 것이다. 등어리에 붙은 지게 십자가는 짊어지고 하늘로 우주여행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민족은 딱딱이 십자가를 두들기고 다니며 도깨비를 잡는데 그 역사적 사명이 있지 않다. 한민족의 등어리에 남이 강제로 씌워준 지게 십자가, 한민족의 손에 몰래 쥐어준 딱딱이 십자가를 벗어버리며 던져버리는데 한민족의 역사적 임무가 있다. 고통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구원의 동아줄을 바라는 심정은 해와 달에서 무슨 도움이라도 줄 듯한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한민족에게 있어서 구원의 ‘동아줄’은 본래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동아줄에 대한 관념이 하늘을 향하여 따루선 것이다.
만일 한민족의 마법사의 피리소리에 따라 하늘을 올라가는 뱀의 환상을 조장하는 요술로부터 깨어난 본래의 동아줄, 즉 협동적 줄다리기의 동아줄에 대한 정확한 기억과 정확한 사용법을 알고 있다면 한민족은 ‘호랑이’같은 가해자들의 고통 강요로부터 쉽게 해방될 수 있다. 가해자들, 악마들은 ‘수평적 협동’의 동아줄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협동의 끈을 박탈당한 민족의 얼토당토 않게 태양의 뜨거운 흑점이나 차가운 월석으로부터 해방의 끈을 내려주길 기대해서야 문제가 풀리겠는가? 더구나 그 줄을 물어뜯어버린 호랑이(寅)가 다시 그 줄을 잇고 꼬아준다고 생각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해방과 구원의 밧줄은 끊어진 새끼와 짚을 형과 아우와 오빠와 누나가 힘을 모아 잇고 꼬아 동여맨 줄을 다시 만드는 도리밖에 없다. 수평적 밧줄만이 민족을 고통의 물결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것이다.
3. 고통의 해결
고통의 문제는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라기보다 무조건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고통은 이러쿵저러쿵 달리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달리 정의되는 것도 결국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거나 또는 해결을 포기 내지 거부하려는 의도에 의하여 좌우된다. 만일 고통의 문제가 어렵게 정의되기 이전에 복잡하게 논의되기 이전에 쉽사리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 것이냐. 고통은 그 자체가 배격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고통의 문제 자체는 지니고 있을 필요보다는 버릴 필요가 있을 뿐이다. 철학 체계를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하여, 철학서적류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하여 ‘고통’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 있음으로써 종교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위하여, 설교를 위하여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통 그 자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고통을 미화시키는 이른바 이론이 있다. 이 엄청난 전도! 새장에 갇힌 종달새가 새장을 찬미하기 위하여 재잘되는가? 울안에 갇힌 사자가 동물원 수입증대를 위하여 포효하는가?
자신의 발목과 손목을 감고 있는 무거운 고통의 쇠사슬을 찬미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고통의 원인을 마음에다 돌리는 인간들이 있었다. “일체의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거나 “사람이 판단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거나 “너무 많이 바라는 마음씨가 있기 때문에 괴롭다”하는 따위의 어설픈 윤리적 자장가를 부르며 마음에다 고통의 책임을 돌리는 사색업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고통의 인위성에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고통은 가해자로서의 인간의 피해자로서의 사람들에게 벗어준 예속의 짐이며, 고통의 감각은 피해자의 피살을 경고하는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공연스레 자신의 옳지 못한 기능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며 걱정한다는 말이 성립하는가? 도대체 저울이 가볍거나 또는 고장이 난 것이기때문에 쇠덩어리는 무겁게 느껴지며 솜뭉치는 가볍운 것인가? 마음의 척도라는 얘기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이 척도 때문에 만물이 길기도 하며 짧은 것일까? 만물은 尺가 없어도 길고 넓으며 짧으며 좁다. 마음이라는 저울이 없어도 총알이나 대포알 탱크는 무거운 것이며, 피와 살과 종이와 잉크는 가벼운 것이다. 저울이 나빠서 쟁반 위에 짊어진 짐이 무거운 것은 아니다.
마음이 모자라서 등이 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무겁기 때문에 등뼈가 휘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을 사람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 양반들은 고통을 ‘머리’로써만 또는 주관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인간타조 또는 양족수(Biped)로서의 털없는 타조라고 불릴 수 있다. 쫓기는 타조가 모래 속에다 ‘머리’를 틀어박음으로써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이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르랴. 인간이 실제로 머리만 틀어박고 피신했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한국전쟁 당시의 혹심한 폭격 속에서 목격한 사람들, 체험한 사람들이 많다. 마음 또는 머리가 고통의 원인이지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는 논리란 얼마나 간편한가? 저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눈만 감으면 간편하게 고통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저울의 눈금을 지워버리면 폭탄과 같은 무거운 고통의 짐도 가벼운 것, 전혀 무겁지 않은 것이 되며, 시계바늘만 떼어버리면 고통의 지겨운 시간도 정지해 버리며, 벽의 지도를 찢어버리면 고통의 현장도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얼마나 간편한 고통 해결방식인가?
고통을 죄의 응보라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어리석은 얘기다. 양고기를 먹고 싶은 인간에겐 양이 죄진 자이기 때문에 죽여도 좋다는 생각이 솟아난다. 고통은 인간이 신에게 진 죄에 대한 책벌이 아니다. 신은 뱀고기같은 것은 싫어하고 양고기만 좋아하는 식도락가는 아니다. ‘죄업’이 고통의 원인은 아니다.
고통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달리 해석하기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통을 합리화시키려고 하였으며, 고통을 변호하려고 하였다. 대개 그들은 고통을 변호하기 위하여 엉뚱하게도 신이라는 가공적 판사의 ‘보이지 않는 손’을 끌어들이려 한 변신론자로서 행세하였다. 만일 황소가 뿔을 달고 있는 것은 근시안의 인간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물학자가 있다면 어리석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모든 황소는 총통보다도 민첩한 스페인 투우사의 칼에 찔려 죽기 위해서 탄생하는가? 한국인의 ‘지게’는 모든 국제화물을 져나르기 위해 신의 목공소에서 미리 마련된 것일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겪는 고통의 근원을 신에다 돌리는 자들은 실은 악마의 동업자들 또는 악마의 공모자들이다.
고통은 인간에 대한 신의 회초리라든가, 고통을 참으면 신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든가, 아양을 많이 떤 사람에게는 천국의 종신징역형 언도의 방망이를 두드린다는 식의 악담은 모두 신에게도 팔다리가 있으며, 신도 말 엉덩이 가죽 구두를 신고 있으며, 신도 매니큐어를 했으리라고 넘겨짚는 우상숭배자들, 악마의 동업자들이 내뱉는 얘기다. 고통은 악한 인간이 착한 인간에게 씌워준 것이다. 신에다 고통의 원인,고통의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은 바로 고통제조 예술의 명수, 고통 전가의 명수들이며, 신을 모독하는 자들이며, 악마와 신의 이름을 ‘네다바이’한 자들이다.
신의 성업에다 악과 고통의 가짜 고춧가루를 뿌리는 자들은 가짜 고추가
오히려 미각을 더욱 돋구어준다는 식으로 꾸며대면서 더러운 소과 악의 피로 매니큐어된 발톱을 감추려고 꾀를 부린다. 그러나 아무리 발바닥에다 밀가루칠을 하더라도 발톱은 감출 수 없는 것이다. 현실적 악은 음식에 뿌려진 진짜양념이 아니라 장만된 음식에 뿌려진 가짜양념, 또는 나누어 먹을 음식에 뿌려진 재, 또는 여러 사람이 함께 먹을 음식을 훔쳐가는 더러운 손이다. 이 손은 흔히 악마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만족적 협동의 합창에다 돌팔매질을 하는 자들의 마수다. 고통의 해결은 이러한 악마들을 제거하며 퇴치함으로써만 달성된다. 고통의 해결은 악마로부터의 해방이다.
세계는 고통의 식민지가 아니라 일시적인 ‘악마의 식민지’다.
쇼펜하워는 세계를 고통의 식민지라고 말하였다. 그는 고통의 人僞性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고통을 생존의 자연적 환경인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세계를 ‘苦海’로 보는 견해도 고통의 인위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만 뜻이 있다.
물고기에 대해서 바다가 고통스러운 것은 바닷물이 짜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사람이’ 바닷물에 똥과 폐수와 쓰레기와 같은 악마의 독액과 분비물, 배설물을 함부로 쓸어 넣기 때문이다. 고해란 자연적 바다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피해를 입은 人害의 바다다. 물고기는 바닷물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마들이 싼 똥물을 마시기 위하여 바다 속에 태어난 것일까? 사람이 마시는 공기에다 죽음의 개스를 뀌는 놈은 스컹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며, 사람이 마시는 물에다 독액을 뿌리는 놈은 오징어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다.
한민족은 ‘국제적 지게꾼’이라는 누명을 벗어야 된다. 한민족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이 고해에서 허우적거려야 다른 민족들은 즐거운 수상스키를 할 수 있다는 얘기, 또는 한민족이 ‘하수구’처럼 더러워짐으로써 다른 민족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주말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얘기, 또는 한민족이 국제 갈보처럼 정조를 빼앗김으로써 다른 민족들의 ‘신사도’가 빛나며, 한민족이 정신대로서 유린당해야 다른 민족들 처녀의 순결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얘기는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한반도에 국제적인 문명똥물과 쓰레기가 몰려왔으며, 한민족이 국제적으로 강간되어 왔다는 얘기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똥물을 뿌리고 쓰레기를 버린 자가 누구며 한민족을 유린한 자가 누구냐? 그것이 신이란 말이냐? 아니면 신이 보낸 사도들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다. 신이 한 지역을 떼어서 변소를 내고, 하수구를 파며, 한 민족을 창녀로 만들 정도로 무자비한 부르도쟈 또는 간사한 ‘뚜장이’ 섭리의 음모가 일 수는 없다.
만일 신의 섭리가 그렇게 구린내나며 그처럼 모질다면 신은 뒷발질 잘하는 한 마리의 당나귀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신이 하나의 민족인 한민족 전체를 뒷간에다 차버리며, 하수구에 차버리며, 창녀굴에다 차버릴 정도로 ‘무자비한 님’이라고 누가 감히 생각한다면 아무리 신의 입에다 고급요리를 대접하며, 신의 얼굴에다 긴 수염을 붙이며, 신의 몸뚱이에다 비단옷을 감기며, 신의 어깨에다 가장 높은 계급장을 달아주며, 신의 발에다 고급군화를 신기더라도 그는 신을 최대로 모독하는 자일 것이다. 신의 헌법인 십계명의 제 1조를 어겼기 때문에. 한민족은 신에 의하여 뒤 발길질당한 민족이 아니다. 신은 한민족을 침략하지 않았다. 한민족을 짓밟은 것은 악마들의 말발굽이며, 한민족을 유린한 것은 악마들의 군화인 것이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는 악마의 몰약인 ‘마취제’를 봉용함으로써 고통을 자각하지 못하기 쉽다. 그것은 고통을 해결하거나 감소시키는 대신에 고통을 심화시키며 고통을 증대시킨다.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취된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거세된 생명의 원기를 회복하기란 힘들지만 살아남는 길은 자신에게 주입되는 마약을 거부함으로써밖에 가능하지 않다.
정신적 환관의 신세를 면하려면 정신을 거세하는 온갖 마취제들의 복용을 과감히 중단시켜야 한다. 그릇된 개념의 중독, 그릇된 자극의 마취를 거부하라!
중독과 마취로부터 깨어나는 길은 악마의 세뇌에 항거하는 진리의 역세뇌방법, 심령에 낀 때를 광열로 씻으며, 심령을 가리운 그림자를 열광으로 밝히는 ‘진리행위’즉 ‘불의 세례’의 길뿐이다. 민족적 생존을 속박하는 고문조끼와 같은 침략적 세계관, 쾌락주의적 세계관을 태워버려야 한다. 협동적 통일성을 파괴하는 외래적 이념과 낡은 이데올로기와 같은 마약을 불로 씻어버려야 한다.
한민족의 사명은 고통을 참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씌워준 억울한 짐을 벗어버리는데 있다. 한민족이 인류의 고통보따리를 벗어던진다는 것은 인류의 고통을 해결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한민족이 인류의 짐을 대신 져주는데 인류가 고마워할 것이 아니라, 그 짐을 벗어버리는데 인류는 고마워해야할 것이다.
인류는 한민족에게 들씌운 동족상쟁, 이념대립과 같은 고난의 짐을 다시 찾아 가는데 고난해결의 실마리가 있으며, 이 길만이 한민족과 인류가 함께 고난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길이다.
고통의 짐은 ‘미화’되며 찬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벗어 팽개쳐야 할 성질의 것이다. 어떻게 벗어버릴 것인가? 도대체 고통의 발생 자체가 고통의 짐을 ‘벗어서’남의 등어리 위에다 ‘지워 논 것’ 때문에 생긴 것 아닌가? 그렇다면 벗어버린다는 것은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확산, 전파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고통의 짐을 벗어서 남에게 전가시키는 뜻으로 벗는다면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의 짐을 벗는다는 것은 ‘남’ 이 우리에게 씌워 논 짐을 벗는다는 뜻이다. 고통의 짐을 벗는다고 해서 사람이 빈털터리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각자 인간은 자기의 소지품이 있다. 이것을 지고 가야한다.
그것은 고난의 짐이 아니라 행복의 짐이다. 인류는 남에게 억울하게 씌워준 짐을 되찾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자신이 차지한 행복의 권리를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통의 해결방법으로서 통용되어 온 것은 전가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이 아니라 실은 악화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의 짐을 후손들에게 물려준다는 것도 전가의 범죄이며, 자신의 짐을 남에게 넘겨준다는 것도 전가의 범죄다. 민족의 짐을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는 범죄는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자들, 식민주의자들이 행한 죄악이다. 현재의 짐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죄악은 아직까지 특별한 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별 관심거리가 못되었으나 이것 또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범죄보다 못할 바 없다.
흔히 효도를 강요하는 父情의 그늘에서 그와 같은 조상제국주의 범죄,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불효가 감행되어 왔음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부모가 자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식들에게 고통을 상속 내지 증대하여 준다는 것은 짐승보다 못한 짓이다. 단순히 자기의 3대독자만을 양육하여 보살핀다는 것이 부모의 임무를 다한 것은 아니다. 내 자식뿐만 아니라 모든 자식들이 ‘함께’ 뛰놀 영원한 운동장과 일터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준채 외동아들의 손에 이빨을 녹여버리는 눈깔사탕이나 잔뜩 쥐어준다고 해서 부모의 책임이 끝나는가? 외아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양심을 다른 민족들에게 팔아넘기고, 외아들과 그의 친구들의 손에 무거운 예속의 책가방을 들려준다고 해서 보모의 도리를 다한 것일까?
민족의 모든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감당못할 빚을 산더미처럼 쌓아 가련한 아들과 손자들 어깨에 떠맡긴다면 얼마나 ‘불효스런 애비’ 일 것인가? 민족의 자식들에게 위대한 문화의 극장을 남겨주는 것은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배속에 들었거나 또는 수십년 수백년 뒤에 태어날 자손들 모두에게 그들이 영원토록 갇힐 감옥과, 그들이 무궁세월 얽매일 수갑과 쇠사슬을 넘겨준다면 이 얼마나 ‘패륜아 애비’일 것인가!
단순히 고통을 전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원인은 ‘분단․분열’이므로 바로 이 원인을 치료하는데서 진정한 해결이 달성된다. 고통의 짐에 짓눌려 갈라진 등의 ‘균열’을 꿰매야 아픔이 가신다. 분열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서는 고통의 끝나지 않는다. 본래 고통의 분열시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분열시키는 모든 요인들을 제거하여야 한다. 무엇이 분열시키는가? 악마가 분열시킨다. 무엇으로써 분열시키는가? 칼과 쐐기로써. 그렇다. 악마의 통로를 막아버리고, 칼을 뽑아 버리고, 쐐기를 빼버리지 않고서는 갈라진 틈을 다시 결합시킬 수 없다.
악마퇴치는 매우 쉽다. 악마의 정체만 ‘노출’시키면 악마는 사라진다. 악마는 은폐, 어둠, 가리움 속에서 살아있기 때문이다. 칼과 쐐기를 뽑지 않고서는 고통의 짐을 벗을 수 없다. 인간관계의 파멸은 바로 악마가 꽂아 놓은 쐐기로서 초래된다. 민족 자신을 균열시키는 쐐기들을 뽑아버리지 않고서 민족의 분열은 종식될 수 없다. 쐐기를 뽑아 버리지 않고서는 고통의 짐을 벗어치울 수 없다. 뽑은 쐐기는 무조건 버릴 것이냐? 그렇지 않다. 썩은 쐐기는 태워버리겠지만 썩지 않는 쐐기는 균열을 꿰매는 못으로 삼아 가로질러야 한다.
고통의 완전한 해결은 ‘통일’에서 달성된다.
통일은 자동사적으로가 아니라 人爲的으로 이루어진다. 분열이 자동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人僞的으로 조장된 것처럼 통일은 사람이 성취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고통은 통일의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며, 고통의 해결은 통일의 달성으로써만 가능하다. 가장 처참한 고통을 체험하고 있는 한민족은 분단의 쓸개를 빨고 있으며, 분열의 장작더미에서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있다. 한민족의 통일은 한민족이 짊어진 고통의 짐을 벗어버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민족의 통일없이 한민족의 고통해결 없다. 다른 민족들이 씌워논 분열과 분단의 고통을 한민족 스스로 해결하는 길은 한민족 스스로 통일하는 길뿐이다.
한국통일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이제 세계 인류는 양심적 발언을 할 때가 왔다. 한국통일에 관하여 각 민족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심판관( Judges )의 시험어( Shibboleth )가 각 민족의 양심 앞에 던져졌다. 이것은 동시에 각 민족이 민족 자신과 인류의 고통문제를 얼마나 현명하게 해결할 줄 알며 얼마나 ‘정확한 발음’으로 표현할 줄 아는가를 묻는 ‘한울님’의 심문이기도 하다. 세계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고 분단의 고통 속에서 히덕이는 한국의 현실에 대하여 세계 인류는 뚜렷한 입장을 취하게 될 때다.
한국의 분단을 인정하며 한국의 분단을 은근히 바라며 한국의 분단을 획책하는 악마의 대열에 낄 것이냐, 아니면 한국의 통일을 인정하며 통일된 한국을 바라는 ‘한울님’의 편에 설 것이냐라는 심각한 양자택일의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인류다. 인류 역사의 모든 ‘창과 방패’ 또는 거짓된 ‘모순쓰레기’가 한 곳에 몰려와 있으며, 한 곳에서 뒤얽혀 있는 곳이 있다. 한국이 그곳이다.
인류가 자신의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면 마땅히 인류는 한국의 현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한민족이 스스로의 책임을 결코 타민족에게 전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달민족의 고통에 집약된 인류의 고통에 대하여 인류 스스로가 대답해야 하므로 우리는 묻는다. 통일된 한국을 원하는가? 원한다면 ‘예’(YES-SHIBBOLETH)하라! 한국의 분단을 원하는가? 한국의 분단으로써 악마의 과자를 얻어먹으려는가? 그러면 ‘아니’(NO-SHIBBOLETH)라고 하라!
배달민족은 ‘한울님’의 생기를 통하여 고통과 예속의 굴레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배달민족의 부활은 민족의 통일이다.
분열, 분단이 곧 ‘죽임을 당함’이 아니었던가? 민족의 자기 땅 위에 있었으나 고향에 ‘유폐’되어 있었으며, 민족은 다리가 있었으나 ‘마른 뼈’가 되어 걷지 못하였으며, 민족은 손이 있었으나 힘줄이 끊겨 서로 손을 잡을 수 없었으며, 민족은 눈이 있었으나 악마의 구름에 가리어 빛을 볼수 없었다. 감옥으로부터 나올 수 있으며, 앉은뱅이로부터 걸을 수 있으며, 조막손으로부터 제휴할 수 있으며, 장님으로부터 빛을 볼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참 생명의 길, 생존의 길, 한울님의 길뿐이다. 그 길은 바로 하나가 되는 길, 즉 ‘통일’이다.
배달민족이 ‘고향의 바빌론 거리’에서 남이 씌워준 십자가를 지고 ‘무덤의 시간’속에서 분단의 딱딱이 소리를 울릴 때가 끝났다. 민족부활의 ‘한울님’이 밝고 따뜻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왼손과 바른손에 들고 여태껏 서로 두들겨 패던 고통의 십자가, 동족상쟁의 고통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서로 두들기다가 더 가늘게 쪼개지던 ‘분단의 딱딱이’ 서로 두들기다가 더 잘게 떨어져 나가던 ‘분단의 딱딱이’를 ‘통일의 막대기’로 삼아라! 왼손에 든 막대기에는 ‘배달민족의 자손, 남쪽형제의 짝 북족형제를 위하여’라고 쓰고, 바른손에 든 막대기에는 ‘배달민족의 자손, 북쪽형제의 짝 남쪽형제를 위하여’라고 쓰라!
그리고 그 두막대기를 따로 들고 다니며 서로 때리지 말고 한 손에 포개라!
이제 분단의 딱딱이, 악마가 몰래 쥐어준 동족상쟁의 고통은 통일의 막대기, 민족통일의 상징이 될 것이다.
보라! 이 통일의 막대기를! 이 한(大) 손에 든 통일된 민족을 ! 악마의 이간에 의하여 배달민족의 형제들이 갈려 헤어질 때 각각 지니고 있던 분단의 막대기는 이제 한핏줄 한겨레임을 확인하는 신분증이 될 것이다. 남쪽형제의 손에 든 ‘배달민족의 자손, 북쪽형제의 짝 남쪽형제를 위하여’와 북쪽형제의 손에 든 ‘배달민족의 자손, 남쪽형제의 짝 북쪽형제를 위하여’는 이제 결합되어 하나가 될 것이다. 한울님의 한 손 속에서. 배달민족의 마른 뼈에 살과 힘줄이 붙어 한민족은 이제 통일된 생존의 굳은 악수를 나누며 통일된 생존의 힘찬 민족대행진(EXODOS)의 발걸음이 ‘승일교’(남쪽형제와 북쪽형제가 협동하여 만든 다리들 중의 하나. 철원 한탄강에 있는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 통일된 생존의 밝고 따뜻한 광명을 되찾아 부활할 것이다.
모든 형제동포들이 팔을 펴서 손을 잡아 이제 한 손이 될 것이다. 이제 한울님의 큰 손 속에 배달민족의 모든 손들은 통일되어 신생의 기쁨을 안고 강강수월래의 통일무를 출 것이다. 그 한가운데 한울님의 영원한 아들 진리행위가 영원한 민족의 통치자, 배달민족의 왕으로 계시며.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사람의 아들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대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아브라함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아의 말씀에 내가 아브라함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그 글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한 손에 잡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아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여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그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르시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한울님’이 되리라.(에스겔 37 : 1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