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절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세상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은 그 본성에 있어서 어떤 개별적인 것으로 분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세상적인 것을 약탈당하거나 상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전체규정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유규정(思惟規定)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는 우선 현실적인 것에 대한 상실을 무한히 높이고 그런 다음 세상적인 것 전체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이다. (...) ‘세상적인 것에 대한 절망’이라는 공식은 절망의 다음 형태를 나타내기 위한 최초의 변증법적인 표현이다.”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중에서
가톨릭 관상수도자들이 바치는 저녁기도 중에 전형적인 기도의 말이 있다. 그것은 “오늘 저녁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는 사람’이란 모든 희망이 단절된 사람들, 곧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다.
절망이란 말 그대로 ‘희망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절망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오히려 이러한 절망을 거친 다음에, 이러한 절망을 극복하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 책은 인간이 가지는 다양한 절망의 형태들과 그 전말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어떻게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인간실존에 대한 정신-심리학적인 분석이지만 매우 형이상학적이고 시적이며 섬세한 자아에 대한 분석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들 가운데서 오늘날 젊은이들 혹은 중년들이 흔히 가지게 되는 ‘자신도 잘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절망’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위의 대목이다. 이 분석을 매우 평범한 글이나 일상의 일들에 적용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절망
사람들은 살아가다가 절망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이 절망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세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적인 것 자체’에 대한 절망이다. 가령 어떤 학생의 경우 아무리 애를 쓰도 어떤 특정 과목(수학이나 미술 혹은 음악 등)에서 성적을 낼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나는 수학은 포기했다!” “나는 음악은 포기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학생의 경우는 아무리 애를 쓰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이 학생은 “나는 공부를 포기했다!”라고 한다. 이러한 경우는 다른 말로 어떤 특정과목에 대해 혹은 공부자체에 대해서 어떤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희망’이 없다는 것, 즉 절망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류의 절망은 ‘인간관계에서’, ‘직업적인 일에서’ 혹은 ‘윤리 도덕적인 분야에서’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인간이 이렇게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획득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고, 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이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두 가지 절망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이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이다.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절망과 자아에 대한 절망
그런데 ‘세상적인 것 자체’ 혹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공부를 포기한 고등학생은 ‘대학진학’을 포기하듯이, 세상 그 자체에 대해 혹은 삶 그 자체에 대해 절망한 사람은 ‘세상 그 자체’ 혹은 ‘삶 그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도식적으로 고찰해본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기다리는 것 혹은 희망하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인 것도, 건강적인 것도, 인간관계에서도, 윤리도덕적인 것도 그 어떤 것에도 실망을 하여 더 이상 기대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절망’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러한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절망이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세상적인 것 일체를 상실하거나 약탈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살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아무리 비관적으로 보더라도, 여전히 자신보다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세상 그 자체’에 대해서 절망하는 사람의 경우는 엄밀히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거나 혹은 절망이 그 사람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을 하거나 절망이 자신 속에 있는 경우는 두 경우뿐이다. 하나는 ‘자신이 무엇인지’ 혹은 ‘자신 안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의식이 한층 더 높아져서, 세상의 어떤 것으로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인간이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정신이란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정신이란 그가 정상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한에서는 무한한 가치를 산출할 수가 있다. 즉 사유하는 인간은 가치를 산출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없다. 가치란 본질적으로 나에게 의미를 주는 것,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 나아가 나로 하여금 행복을 야기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가령 아이큐가 낮아서 도저히 공부에 희망을 걸 수 없다고 해도, 그림을 그리거나 수영을 하거나 혹은 어떤 사회봉사를 하면서 충분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고, 또 행복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직위가 전혀 없어도, 전혀 돈이 없어도 인간이란 마음만 먹으면 어떤 기쁨을 주는 일, 가치가 있는 일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고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가령 잘 나가는 사업가가 어떤 이유로 사업이 망하여 절망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보자. 비록 세상적인 것이 완전히 상실된 것 같지만 여전히 그는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고,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가 살아온 과거의 추억이 있고, 그의 가족들이 있으며, 그가 자주 다니던 산과 들은 그대로 있다. 즉 그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은 소멸되었으되, 그의 자아는 전혀 소별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마음만 먹는 다면 충분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그리고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영위할 조건을 여전히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자기 속에 있는 절망’이 일체의 세상의 것에 대해 포기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삶(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세상 자체에 대한 절망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혹은 ‘자아에 대한 절망’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이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이 ‘세상에 대한 절망’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자아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는 젊은이들의 자살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를 어두운 절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원 높은 의식과 빛을 지향하는 절망
반면 자신의 의식이 한층 높아져서 ‘세상적인 것 자체’ 혹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해 절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전형적으로 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특히 수행자나 수도자들의 의식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신성한 어떤 것, 이상적인 어떤 것이어서 더 이상 세상이 줄 수 있는 ‘적당한 것’ ‘어느 정도 정의롭고’ ‘어느 정도만 진실하고’ ‘어느 정도만 사랑하는’ 그러한 삶에서 의미를 가질 수 없을 때, 그의 의식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발견하고 있는 사람이다. 중세나 근대의 신비가들이 하나같이 발견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 혹은 종교인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대해서 절망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관점이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 혹은 ‘신성한 것’에 대해 눈뜨게 하는 이러한 절망을 우리는 ‘빛을 지향하는 절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세상에 대한 절망이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고 삶을 포기하거나 상실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세상에 대한 절망을 통해 자신 속에 있는 영원한 것 혹은 신성한 것에 대해 자각하고 진리를 살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할 것인가? 이는 결국 각자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