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련 6월 3일 목요일
첫 페이지를 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진다.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는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이 책은 예전에 읽은 <걷기의 인문학> 의 작가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다. <멀고도 가까운> ㅡ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읽기가 무척 어려운 책이다. 한문장 한문장 의미를 살펴가면서 읽어야 한다. 문장이 길어서 주어며 서술어를 가려내기 어렵다. 으이그~ 그러나 이 작품의 맥은 화해와 성숙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153 쪽ㅡ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157 쪽 ㅡ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이해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 에게 해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 170 쪽 ㅡ물론 우리 모두는 다양한 방식으로, 조금은 무난한 방법으로 이런저런 외면을 한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두세 명의 사람들에게 써야 할 답장을 보내지 않고 있다. 위기에 처한 야생동물 보호에서부터 정치범과 관련한 문제까지 다양한 문제와 관련한 이메일들을 열어 보지도 않고 삭제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내가, 심지어 독자 입장에서조차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자아는 확대되지만 그다음엔 자아도 위험과 고통을 분담하게 된다. 꼭 사람에 대한 공감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간이 아닌 나머지 세상에 대한 걱정과 공감도 무한히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에 대한, 생물과 장소, 생태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구 자체에 대한 걱정 말이다.
자아란 내가 느낀 것과 느끼지 못한 것, 현존과 부재, 담장에 둘러싸인 무감각의 영역 바깥에서 알 수 없는 것들끼리만 이어져 있는 누더기 같은 것이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현자가 아닌 이상 모든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건 고사하고 고통을 알아보고 그걸 인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기저기서,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의 자아를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으로 그들이 건넨 징표나 부적을 20년째 지니고 다니는 태국의 승려를 만난 적이 있다. 결국, 그는 늘 요란한 소리를 내는 슬픔 같은 100파운드 무게의 포대를 두 개나 끌고 다니다가, 포대가 너무 무거워서인지, 자신이 너무 오래 그것들을 지니고 다녔음을 깨달은 건지, 그 짐들을 내려놓았다. 대화가 끝날 무렵 승려는 작은 부적을 내게 건넸다. 가지고 다닌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가벼웠던 그 부적은 몇 년 동안 내 지갑 안에 들어 있다가, 가벼운 등산을 하러 나간 사이 차에 도둑이 들어 지갑을 훔쳐 가면서 함께 사라졌다.
* 173 쪽ㅡ 우리는 늘 슬픔을 먹고 산다. 그것이 아름다운 서정시와 대중가요의 본질이며, 슬픔과 상심이 그렇게 달콤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감정,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이다. 슬픈 노래를 들으면 우리는 묘한 비통함을 느끼는데, 마치 3분 동안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상실을, 소금기가 있는 눈물 같은 슬픔을 다시 떠올리고 애도한 후, 노래의 마지막 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그 슬픔을 닫아버리는 것만 같다. 파란 석양빛 같은 슬픔은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가는 것임을, 시간이 있기에 변화가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변화의 또다른 이름이 상실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슬픔도 아름답다. 아마도 그것이 참된 울림과 아득한 깊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 우리 앞에서 멀리 있는 것들, 우리가 잃어버란 것들, 사랑하는 자와 사낭받는 자가 각자 원하고 상상하고 이해하는 것들 사이의 심연, 점점 더 벌어져 어느 순간 도저히 건널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 심연에 관하여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시작할 때의 희망과 마침내 도달한 결과 사이의 거리, 드디어 무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지나야만 하는 여정과 점점 더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과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284 쪽ㅡ듣는다는 것은 귓속의 미로에서 소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허락하는 것이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거꾸로 그 길을 되돌아서 그 소리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다. 이 듣는다는 행위 말이다. 이는 당신이 각자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당신이 고유한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게 당신의 우주에서 그 자리를 찾아 주는 것,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은 감각의 미로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맞아 주기 위해 손을 뻗는 것, 그것을 껴안고 그것과 섞이는 일이다. 즉 타인의 삶이 여행자라도 된다는 듯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 340 쪽 ㅡ고대 그리스어 '시그노스' 라는 단어가 있다. '이해하다, 공감하다, 용서하다, 봐주다' 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는 이 단어는 생각과 느낌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이해가 용서 혹은 대상 자체의 출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 단어의 범위는 이해를 위해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감정이입에 이르기 위해 이해가 필요하며, 감정이입은 또한 용서임을, 이 모든 것은 서로서로를 도우며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영어에서는 '이해한다' 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며,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종종 이해를 먼저 구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변명의 남발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 350 쪽 ㅡ"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적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갈라진 조각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글을 쓰다가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지를 발견할 때 느끼는 희열도 그렇다. 여기서 나는 내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에 도달한다. 어찌되었든 원단의 뒷면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게 마련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우리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그 패턴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 세계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우리는 그 예술 작품의 일부라는 것이다.
갑작스레 등장한 세계의 패턴이라는 표현은 어떤 일관성이나 모든 것을 잇는 연관성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래된 표현을 빌리자면, 이야기는 직조된다. 이야기는 대상을 묶어 내는 실이 있고 그 실로 세상이라는 천이 직조되었다. 강력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그렇게 이어져 패턴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이야기가 되어 그것을 말하고 또 누군가에게 말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 옮긴이의 평ㅡ 타인의 이야기가 들어올 자리를 마런하기 위해, 내 이야기의 일부를 비워 내는 것. 그렇게 타인의 어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더 커진 경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은 성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저자 리베카 솔닛이 책 한 권을 지나오며, 그 안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거친 과정이 그것이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늘 옳은 결정은 아닐테고, 모두와 화해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과 나의 이야기를 지켜 내는 것이 결정되는 경계 혹은 한계가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 라고 솔닛은 말한다. 어쩌면 이책을 읽은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깨우침도, 화해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사랑의 한계에 대한 확인된 것이다. 그게 다 솔직한 반응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 내 생각 ㅡ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아이슬란드의 추위 속에서 겪은 여러가지 경험과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 잘 나타나 있다.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런 세계의 삶을 책으로 만들어 낸 동화, 역사서, 사진집을 밀도 있게 보여줘서 실감났다. 특히 <프랑케슈타인> 의 주인공의 심리적 궤적과 그와 비슷한 작품들, 곰이나 개와 결혼한 여자들 신화, '그래드캐년' 을 여행하먼서 겪은 일, 체 게바라의 혁명에 대한 심도있는 조망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내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죽여야 하는 살아있는 채소들과 육고기, 생선들에게 화해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