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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사유가 참된 것이다 / 김종훈(문학평론가)
강희안은 어느 시작 메모에 ‘바야흐로 때는 서정시(抒情詩)→반시(反詩)→비시(非詩)의 도정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당분간은 좀더 망가질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으리라’라 적었다. 다소 수동적인 목소리를 담고 있으나, 저간의 그
의 시적 실천을 상기하면 이 수동성은 겸손의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첫 시집 『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과
둘째 시집 『거미는 몸에 산다』의 편차를 염두에 둔다면, 또 둘째 시집과 그 이후 시들의 확고하면서도 섬세한
변화에 주목한다면, 저 ‘바야흐로’는 여느 시의 지금이 아니라 강희안이 스스로 마련한 그의 시의 지금인 것이다.
강희안은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시가 아닌 시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시에서 ‘시적인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는, 먼저 그가 생각하는 시 아닌 시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시 밖에 있으며 그 토대는 단단하다. 이때의 ‘시적인
것’은 그가 실천하는 ‘비시(非詩)’도 아니려니와 그가 거절한 ‘서정시(抒情詩)’도 아니다. 차라리 비시(非詩) 안에 드
리워진 시적인 것일 터인데, 한 시인의 믿음과 한 분석자의 믿음이 여기에서 겯고 틀 것이다.
강희안의 비시(非詩)에 관한 사유를 이해하는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그가 발표한 시의 변화를 따라가는 길,
그의 시를 평한 글을 따라가는 길, 그의 시에 대해 직접 말한 그의 육성을 따라가는 길이 그것이다. 간혹 시 안에
서 시에 관한 그의 사유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길도 나 있다. 앞의 길들은 굴곡져 있으나 제 모습을 찬찬히 드러내
고 뒤의 길들은 뻗어 있으나 제 모습을 빠르게 감춘다. 앞의 길들은 ‘서정시(抒情詩)’에서 ‘비시(非詩)’로 변화하는
면모를 보여주나 뒤의 길들은 ‘비시(非詩)’에 집중하여 그 이념을 말한다. 마주하고 있는 시편들이 여기 있으니, 이
글은 앞의 길들에서는 시집의 변모 양상을 살핀 평글을 참조하고 뒤의 길들에서는 자주 언급한 그의 육성을 참조
하여, 그의 생각을 갈피 짓고, 그의 새로운 시들과 대화하고자 한다.
첫 시집과 둘째 시집 사이에서 많은 평자들이 차이를 읽어냈고 한 평자는 공통점을 읽어냈다. 많은 평자들은 서정
시에서의 탈출을 읽어낸 것이고 한 평자는 서정시의 반복을 읽어낸 것이다. 대부분의 평자들에는 이경수가 속해
있고 한 평자는 권혁웅이다. 이들은, 시인이 자신의 시를 이야기할 때 직접 참조한 비평가들이다.
강희안 시인이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시에 대한 낭만적 태도이다. 모든 문학은 본질적으로 낭만적 성향을 지니고 있기
도 하지만, 낭만적 태도로는‘지금, 여기’의 문학을 돌파해 나갈 수 없음을 그는 깨달은 것이다. …<중략>…
기표와 기의 사이는 물론이고 존재와 기호 사이에도 필연적 관계는 없고 자의적일 뿐이지만, 시인은 미끄러져 달아나
는 관계의 틈을 사유함으로써 불가능에 도전한다.
― 이경수, 「언어로 지은 새 집 증후군」, 『애지』, 2004년 가
을. 215면.
시인은 거미는 몸에 산다의 세계가 첫 시집, 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에서 어떤 전회(轉回)를 이룬 세계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첫 시집의 자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중략)… 이 자서는 거칠게나마 낭만주의적 시관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젊은 날의 영혼의 비밀스러운, 그리움과 고통의 기록이라는 것(물론 여기에는 감상이 끼어들 틈이
없지 않다).…(중략)…
이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시집 거미는 몸에 산다의 세계는 시인의 언명과 다르게, 시인의 첫 번째 시집과 완전히 결별한 세계가 아니다. …<중략>… 많은 시가 전통 서정시의 어법과 구문을, 첫 시집의 발성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 권혁웅, 「기호의 제국」, 『문예연구』, 2004년 겨울. 319~320면.
두 비평가는 인용문의 첫 문단에서 두 번째 시집이 낭만성을 거절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경수가 말하는 ‘낭만적 태
도’가 모든 시인에게 숙명적이고(“모든 문학은 낭만적 성향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권혁웅이 말하는 ‘낭만주의적 시관’이
어떤 시인에게 선택적이라는(“물론 여기에는 감상이 끼어들 틈이 없지 않다”) 차이가 있으나, 둘 다 강희안이 의도했던 바와
는 크게 어긋나 있다. 시인은 낭만성이 아닌 서정시와의 결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어 이경수는 낭만성을 속에서 서정성
으로 고쳐 읽어 둘째 시집의 변화된 지점을 말하고, 권혁웅은 낭만성을 겉에서 서정성으로 고쳐 읽어 둘째 시집의 서정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 두 논의는 강희안이 둘째 시집 이후의 시편들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낭만적 태도라 할 만한 부
분들이 거의 사라졌고, 더불어 서정성이라고 할 만한 부분들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강희안은, 오해를 불러왔던 낭만적 태도와 결별하고, 서정성에 천착한 뒤 그 또한 거절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가 그 결과이다.
÷의 달이 호수에게 왜 나를 비추느냐를 묻자 그는 나를 비춘 적이 없다고 되물었다. 구름이 서행하다 몸의 스크럼을 푼 곳은 문자 이전일까, 이후일까? 그녀는 나와 괜히 결혼했다고 트집을 일삼으며 웃었다. 통통 튀던 %들조차 널 중심으로 나를 취했으나, 한쪽으로 기울었다. 삐딱한 관점에서 너는 위장 이혼을 종용했다. 그들이 거주한 몸은 빗장뼈를 뽑았기 때문에 헐거웠다. 시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솔직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忄에 고착된 그들은 양쪽 도어록을 잡고 울었다. 서로 힘껏 잡아당겨서 열리지 않았다. 예수의 발 뒤꿈치도 뒤집어 볼 수 없었다. 파경을 각오한 호수의 달빛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댔다. 기도로써 뽑아든 평등의 벽을 보았다
― 「÷%忄」 전문
강희안에 따르면 이 시는 ‘비시(非詩)’의 일종이다. “시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솔직할 수 없다고 고백”한 구절에서 유추하면 이 시는 솔직한 시이며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 시이다. 그의 시 속에서 서정은 죽었고 비서정은 태어났다. 여기에서의 서정은, 서정을 가르는 여러 시도들 중 유력한 개념인 ‘동일시의 시학’을 의미하는 듯하다. 서정시는 자아와 대상을 동일시하고,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을 동일시한다. 이 동일시의 거부는, 자아와 대상이 함께 하면서 자아가 넉넉해지고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의미를 명징하게 하는 서정의 순기능보다는, 애초에 합해질 수 없는 자아와 대상을 같은 것으로 보아 자아가 폭력적이 되고 기호 표현이 기호 내용에 들러붙어 의미를 옭아매는 서정의 역기능에 주목한 시선에서 비롯한다. 시인은, 자아와 대상과의 불화에 주목하는 한편, 기호 표현에 힘을 불어 넣어 기호 내용이 묶었던 끈을 끄르게 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풀려난 기호 표현이 불화하고 있는 자아와 긴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풀려난 채로 기호 표현은 기호 놀이의 세계에 다시 고립될 수 있다.
인용시의 자아는 충분히 불화를 겪고 있다. “결혼했다고 트집” 잡히더니 위장 이혼을 종용당하고, 결국 파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 또한 기호 표현은 충분히 힘을 얻어 기호 내용과 관계없이 스스로 미끄러지고 스스로 의미를 생성한다. 제목은 ‘마음심 변’이 미끄러지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또는 평등이 벽이 되는 형태) 각각의 기호는 스스로 수식과 확률과 마음을 표상하기도 한다. 수식이라는 가장 확실한 세계부터 마음이라는 가장 불확실한 세계까지, 기호 표현이 거느린 뜻의 범위는 넓다. 이들은 내용을 만들어 낼 만큼 힘도 세다. 수식을 대표하는 ‘÷’는 호수의 표면이 되어 불화를 조장하며, 확률을 대표하는 ‘%’는 기울어진 빗장뼈가 되어 어긋남을 상징하며, 마음을 대표하는 ‘忄’은 문과 문고리가 되어 그녀와 나로 하여금 “양쪽 도어록을 잡고 울”게 한다. 자아와 기호 표현과 파생된 의미들이 서로 갈등하는 국면이 연출되고 있다. 세부의 갈등하는 모습은 동일시의 거부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충분히 시적이다.
그러나 시의 기획으로 시선을 옮기면 이 시는 그가 말한 대로 비시적(非詩的)이다. 불화가 낳은 균열이 시의 몸에도, 혹은 시의 감각에도 전달되는 것이 시적이라고 상정한다면, 인용시의 표면은 불화나 균열로 보기에는 너무 매끄럽다. 우선 수식과 확률과 마음이 각각의 기호와 일대 일 대응하는 모습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강희안은 둘째 시집 서문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 아니라 ‘존재는 언어의 집’이란 사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라 했다. 하이데거의 말과 그의 선언은 불화를 겪고 있다. 인용시의 자아와 대상,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도 불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시의 몸과 그의 뜻은 조화롭다. 불화의 뜻을 시의 몸은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집이 아니라 그릇이며 이때 시의 몸은 존재가 아니라 수단이 된다. “기도로써 뽑아든 평등의 벽을 보았다”는 시의 몸을 고려하지 않고 발화된 자아의 관념 같다. 그릇이 감당하기에 이 말의 뜻은 차고 넘친다. 그가 말한 서정시의 불가능성이 여기에도 적용될까?
아이가 실패를 감을 때
발가락이 얼굴을 페팅하며
누나의 까만 젖꼭지 살살 굴려대야
활짝 뒤집히던 REVI'S 청바지
탄력적으로 원주를 긋던
실패가 멀리 가면
‘誤!’란 fort(저기)에 기대어
쾌락의 원칙을 넘어섰지
…<중략>…
아글바글 잡담을 즐기면서
강박증과 콤플렉스의 바늘에 찔려
실패가 돌아오면
내출혈에 젖던 몸의 허구
누군가 나를 구심점 밖으로 밀며
탈수기를 돌려대고 있을 때
‘我!’란 da(여기)에 남아
실꾸리가 아버지를 토했지
실패한 사유가 참된 것이다
― 「실패한 놀이」 부분
그가 견지한 서정시의 불가능성이 시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인용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도르노의 말 “실패한 사유가 참된 것이다”로 마무리되는 「실패한 놀이」는 실패한 사유가 진리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성공을 위해 복무하는 사유는 매끈매끈하다. 쉽게 대상을 설정하고 거기에 쉽게 마음의 파장을 대입하는 자동화된 서정시는 시로서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답습이다. 서정시의 동일시가 낳는 부정적인 측면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가 부정하는 시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그는 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화된 서정시를 부정한다. 그러니까 ‘비시(非詩)’의 사유는, 실패가 진리에 이르는 도정이듯, 참된 시에 이르는 도정인 것이다. 그는 부정을 거쳐 진리에 도달하려고 한다. 여섯 번 부정해야(“함께 쓰지 마라”, “많이 쓰지 마라”, “붙여 쓰지 마라”, “계속 쓰지 마라”, “끼고 쓰지 마라”, “섞어 쓰지 마라”) “시마”에 들릴 수 있다.(「올바른 안약 사용법을 통한 시창작 유의 사항」).
실패한 사유가 곧 진리라는 그의 믿음은, 참된 말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언술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정신분석의 입장과 닮아 있다. 그는 시에 프로이트의 손자가 실패를 내던졌다가 잡아당겼다가 하며 그때마다 ‘오’(fort)와 ‘다’(da)라는 소리를 냈다는 유명한 일화를 인용한다. 프로이트는 아이가 사용한 언어가 어머니의 결여를 일정 부분 충족했다고 보았다. ‘다’(여기, 오다)라고 하며 아이가 웃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언어는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도 하지만, 오는 대상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 결핍을 근본적이게 한다. 언어의 순기능과 역기능에서 강희안이 먼저 주목하는 것은 역기능이다. 강박증과 콤플렉스라는 부작용에 주목하고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마지막에 토한 것을 보면 그러하다. 그러나 언어의 순기능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부른 ‘오’(oh)를 그는 슬며시 거짓을 뜻하는 ‘誤’로 바꾸어 ‘참된 것’과 대응하게 한다. 시의 ‘내용’은 쾌락에서 증상으로 나아가지만 시의 ‘표현’은 거짓에서 진리로 나아가고 있다.
이처럼 그가 믿는 부분은 표현에 있다. 인용시에서처럼 기호 표현에 힘을 주어 스스로 미끄러뜨리는 방법 외에 기존의 언술을 파괴하는 다른 하나의 방법은 어린아이의 말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언어를 접하며 그 내용으로 들어가는 길을 모르는 아이는 언어의 형상에 주목하여 뜻을 개척한다. “실패”가 두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생략한 부분에서 ‘마흔’이 “마음”으로 미끄러지는 것도, 어린아이의 상상력과 더불어 강희안의 전략을 반영한다. 세차게 몰려든다는 뜻의 ‘殺到’와 그림자인 ‘shadow’와 겹쳐 사용한 「나무들의 쇄도, shadow」란 시 제목도, 그 안의 “ㅏ→ㅓ→ㅡ로 미끄러지면서도”의 구절도, 대문자와 소문자의 뜻을 갈라 사용한 「병원균 K, k」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동화된 서정시를 거절하려는 그의 이러한 전략이 유효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그의 시에 자주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까지 전적으로 찬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 그 전략의 확고함이 그가 거절하려는 ‘자동화’를 이끄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우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유효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
나무가 남의 속을 들여다보기까지
내 속의 속내 속의 속내인
나를 끄집어내기보다
남밖에 모르고 몰랐으리라
너 밖으로 나간 그와
너밖에 알지 못하는
그 속내 속의 속내의 속인
나를, 부디 용서해 달라
ㅏ→ㅓ→ㅡ로 미끄러지면서도
불거진 뿌리로 갈겨쓴
질기디 질긴 나무들의 안부
이제 더 이상은 듣지 않으리라
― 「나무들의 쇄도, shadow」 부분
“ㅏ→ㅓ→ㅡ”는 ‘나→너→평평한 나무의 그림자’ 또는 ‘나→너→나무의 그루터기’(2연 부분)를 형상화한 것일까? 분석하는 입장에서 이 대입의 과정은 비시적(非詩的)이다. 시의 분석은 시의 뜻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지 단조롭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 밖으로”와 “너밖에”를 ‘너 이외에’와 ‘너뿐’으로 바꿔 그 뜻을 헤아리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시적인 표현을 토대로 생겨난 “불거진 뿌리로 갈겨쓴”이라는 표현은 시적이다. 뿌리의 모양새는 ‘갈겨쓴’ 모습을 실감나게 하며, ‘갈겨쓴’ 글씨의 형태는 앞서 마련된 ‘ㅏ’나 ‘ㅓ’의 직립의 모습과도 ‘ㅡ’의 수평의 모습과도 어긋나 기획에 수렴되지 않는 완강한 힘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 불일치는 균열과 불화의 표지이며 도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이다. 형태적인 측면에서 그러하다. 더욱이 “나무들의 안부”가 갈겨서 쓰인 것이라면 걱정을 담은 안부의 본뜻은 여기에는 통하지 않는다. 귀찮아서 안부를 갈겨썼다면 실제로는 나무가 나를 내팽개친 것이고, 조급해서 안부를 갈겨썼다면 나무와 나 사이에 어떤 불안감이 조성된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시적으로 확장된 의미가 이 안부에 담겨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러하다. “갈겨쓴”은 비시(非詩)의 과정을 거쳐 얻어낸 진리이자 실패한 사유를 거쳐 손에 쥔 참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호 표현의 고투와 기호 내용의 고투가 함께 들어 있다.
구체적 현실과 괴리된 언어는 이미 그 존재성의 기반을 위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실존적 현실과 언어의 통합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중략)… 그래서 현실적 징후들을 섬세하고 밀도 있게 포착한다는 것이 제게 있어선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그러다 보니 자기만의 세계 인식이 그 어떤 것보다도 선결 과제였지요. 기존의 관념을 깨기 위해선 당대의 삶과 밀착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그것을 들어올려 줄 제 나름의 사유 체계가 필요했던 거죠.
― 강희안·김태형·김종태 대담, 「히말라야시다의 괴로움과 마주한 거미의 몸」, 『시안』, 2004년 겨울, 193~194면.
언어에는 어떤 불가해한 힘이 있어 소리와 운율의 배치에 의해서도 존재 자체를 변화시킬 원초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다. …<중략>… 이를 환언하면, 존재와 언어의 관계성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지, 거기에 대립이나 동화라는 어떤 관념의 축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존재와 언어의 경계를 무화시켜 전일체를 구가하는 과정이 중시될 뿐이다.
― 강희안, 「새로운 영토 탈환을 위한 치열한 고투」, 『시평』, 2005년 봄, 35면.
대개 시인은 삶과 언어의 관계를 생각해 시를 쓰지만, 시인의 삶을 보지 못하는 분석자는 주어진 언어의 요모조모를 따져 그의 삶을 엿본다. 시적 진리에 닿기 위해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이 함께 고투해야 한다는 명제가 분석자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시인에게 그것은 “언어와 존재”, “실존적 현실과 언어”, “삶과 밀착된 언어”로 나타난다. 강희안은 앞의 시에서 살펴보았듯이 언어 중에서도 기호 표현의 자율성 확보가 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라고 믿고 있다.(“언어에는 어떤 불가해한 힘이 있어 소리와 운율의 배치에 의해서도 존재 자체를 변화시킬 원초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빠지기 쉬운 위험 요소도 알고 있다.(“구체적 현실과 괴리된 언어는 이미 그 존재성의 기반을 위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앞서 기우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타개책을 마련하는 지점에서 그의 입장은 분석자의 그것과 갈라진다. 그는 기호 표현과 긴장할 실존적 삶을 끌어들이고, 분석자는 기호 표현과 긴장할 기호 내용의 고투를 생각한다. 이 두 개의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매우 크다. 다만, 분석자의 입장에서는 프로이트 손자의 예를 들어, 언어는 근원적 결여를 조장하지만 또한 증상을 치유하기도 한다는 점과, 증상을 치유하는 언어의 순기능에서 기호 내용의 몫이 적지 않다는 점을 부연하고 싶다.
그는 또한 사유 체계의 확립을 강조한다. 기호 표현의 자율성을 믿고 그것에 힘을 주려는 전략은 나름의 사유 체계에서 나온 것이다.(“기존의 관념을 깨기 위해선 당대의 삶과 밀착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그것을 들어올려 줄 제 나름의 사유 체계가 필요했던 거죠”) 그리고 그 체계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언어와 존재와의 일체화 과정을 중요시하기도 한다.(“오히려 존재와 언어의 경계를 무화시켜 전일체를 구가하는 과정이 중시될 뿐이다.”) 그가 강조하는 사유 체계와 언어-존재 간의 일체화 과정은 되새길 가치가 있는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체계의 필요성과 일체화 과정에 대한 그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하면서도, 이번에도 확고한 체계가 언어와 존재와의 일체화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점을 부연하고 싶다. 그도 밝혔듯 존재는 시인이라는 실존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언어의 존재이기도 하며 시의 존재이기도 하다. 시인의 확고한 사유 체계는 시를 존재가 아닌 사유의 수단으로 바꿀 수 있다. 그가 인용한 아도르노의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성공한 사유는 거짓이다. 그리고 확고한 사유 체계는 성공한 사유이기 쉽다. “제 나름의 사유 체계”가 시를 생각하고 쓰는 매순간 불화를 겪으며 갱신되었으면 하는 까닭도 여기 있다.
나탈리 망세의 첼로처럼 권세의 모랄은 다양하다. 그녀는 목사가 조직적으로 깎아놓은 최면의 입성을 벗어 던졌다. 그녀는 첼로와 함께 오르가즘의 활을 당기며 세상을 쏟아 놓았다. 무서울 정도로 어떤 목수는 잔인한 음부의 권능을 즐긴다. 나탈리 망세, 그녀는 흩어진 말씀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첼로와 함께 그녀의 자궁 속으로 밀어 넣었다
― 「나탈리 망세의 첼로」 부분
짧은 대화를 마칠 때가 되었다. 같은 생각이 만나면 대화는 독백으로 바뀌고 아예 다른 생각이 만나면 대화는 반목으로 바뀐다. 그의 사유와 시에 대해 공감하면서 시적인 것에 대한 믿음은 확고해졌고 그의 사유와 시에 대해 의문을 달면서 확고한 믿음의 영역은 확대되었다. 그의 시와 그의 글과 그의 시에 대한 평글과의 대화는 분석자에게는 유익했다. 이제 나탈리 망세가 지녔던 생각을 곱씹으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나탈리 망세는 그의 설명대로 스위스 출신의 누드 첼리스트이다. 그녀는 보수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첼로에 대한 통념을 상쇄시키고자 대중 앞에 옷을 벗는다고 말했다. “다리를 벌리고 그 가랑이 사이에 첼로를 세”울 때 관객의 호기심은 보통의 첼로 연주를 들을 때보다 훨씬 자극되었을 것이다. 관심을 끌고자 하는 그녀의 의도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과 그녀의 연주는 첼로의 보수적 이미지의 반대편에서만 유용한, 혁신이라는 확고한 사유의 수단이 되고 만다. 만약, 그녀가 통념을 타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미에 닿기 위해 옷을 벗는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녀의 안간힘은 눈을 감고 그녀의 연주에 몰입하는 관객을 늘렸을지도 모른다. 이때, “흩어진 말씀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첼로와 함께 그녀의 자궁 속으로 밀어 넣”는 행위를 바라보는 일방적인 시선이 누그러지며, 그녀의 몸과 그녀의 연주가 일치되는 순간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_ 차례
1부
012-중학 국어 시간
013-돌
014-목재소에서
017-문을 찾는다
018-개미
020-지리산 폭설
022-대장꾼 일기
025-엉겅퀴꽃을 보러 숲에 갔다
026-풀잎에게
028-암암리에 그들은
030-할머니의 뜨개질
032-돌 그림자
033-시계 소리를 듣다보면
034-겨울나기
037-숲에선 무슨 일이-
2부
040-가구에 대하여
041-거미는 몸에 산다
042-슬픈 동화
043-기호의 문
044-오징어, 질긴
046-발자국 내려놓다
047-토란국을 먹다가
048-해오라기의 碑銘
049-엑스트라, 그는
050-색깔론
052-타조의 꿈
054-새벽 공양
055-시간을 뒤적이다
056-아이의 꼭지점
060-색과 빛을 따라가다
3부
061-카메라의 눈
062-나탈리 망세의 첼로
064-脫中心注意
065- ÷%心
066-오리의 탁란
068-조개의 불, 싱싱한
069-너무도 사적인 현대 시작법
075-여닫이 미닫이
076-나무들의 쇄도, shadow
078-영화관에서는 왜 팝콘을 먹는가?
080-소리의 덫
081-그의 지퍼는 몸에 달렸다
084-관료가 되려거든
086-실패한 놀이
088-비트박스를 개봉하는 3가지 방식
4부
092-말의 쓰임새에 관한 보고서
094-맛있는 라면 조리법
095-후각 캠페인
096-양파
098-감성의 돔을 짓다
100-즐거운 오독
101-문명은 문맹의 텍스트였다
102-○인의 그림자
104-거울의 문
105-방귀를 읽다
106-시각의 덫
108-다시 쓰는 별주부전
109-어른 척척척
110-똑똑하다
111-소금의 유혹
113-해설 ― 김종훈
_시인의 말
미학과
새로운
모럴의
관계를
독자가
읽는다
사회와
독자의
틈입자
시인이
참여의
향방을
묻는다
2017년
겨울
―출판사 서평
강희안의 시가 우리 시에서 낯설게 보이는 것은 그동안
기표에 관심을 둔 모더니스트들이 대부분 현실을 배제하
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기표와 기의의 문제를 현실과
언어의 문제로 대체하면서 현실에 대한 시선을 실험시에
정직하게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실험시가 수사학적 기교에 머물었다는 시사적
실패를 스스로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박현수(시인)
ISBN 979-11-959991-1-8 03810
판형:국판변형 130x208mm 값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