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비록 국보 제46호인 내부벽화는 뜯겨져 성보박물관에 별도로 보관중이지만 그 벽화가 들어차 있던 조사당 건물 자체도 국보 제19호이며, 국보탐방에서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데 조사당이나 무량수전이나 국보가 국보를 품고 있는 것이다.
(국보 제19호 탐방기 :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17/2015021701806.html)
조사당은 조사(祖師)스님을 모신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의 선덕(先德). 후세 사람의 귀의(歸依)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 또는 한 종(宗)이나 파(派)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즉, 불교의 한 종파를 처음 개창한 승려를 이어 법통(法統)을 계승한 후대 승려들이 우리들이 조상을 모시듯이 창시조 승려를 모시고 기리며 받드는 것을 말하는데 신라 하대에 이르러 구산선문이 개산하면서 각 산문별 개산조를 기리는 일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부석사의 조사당(祖師堂)은 부석사를 처음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초상화를 모시거나 그와 관련된 불교적인 상징물등을 모신 전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신앙은 선종(禪宗)에서의 신앙형태이지 의상의 화엄사상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형태였으니 부석사에 의상을 기리는 조사당이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상한 일인데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아마도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부석사에도 화엄종에는 맞지 않지만 유행에 따라 이를 세운것으로 보고 있다.
<부석사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박한 건물이다. 발견된 묵서(墨書)에 따르면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워졌다고 하니 내부 벽화도 그때쯤 제작 된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정면에 보호 철망은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선비화(仙扉花)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벽화 여섯 점 국보 제46호
조사당에서 벽화를 떼어낸 것이 해체, 수리 하느라고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때 였다고 하며, 이후 조사당 내부에는 비슷한 성격의 그림을 그려놓고 벽채로 떼어낸 진품 벽화 여섯 점은 하나하나 따로따로 액자에 넣어 보관중이었다.
나름대로 손질은 했겠지만 완전 복원을 한 것은 아닌지라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전체 윤곽은 물론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어려운 상태이며, 유리액자 형태로 보관하다보니 빛이 반사되고 번들거려서 질감이나 색채 식별이 쉽지 않아 많이 아쉬웠다.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 여섯 점, 여섯 개의 대형 액자 형식으로 보관 전시중이다.>
여섯 점의 벽화는 조사(祖師)스님인 의상을 모셔놓은 조사당 내부의 벽화였으니 의상대사를 모시고 수호하는 그림이었을터, 수호신 성격의 사천왕상 네 점과 범천과 제석천 두 점이며, 식별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하단에 명칭을 써놓았다.
<왼쪽부터 제석천,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범천 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은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며, 두 발로 악귀를 밟고 서 있는 그 표정과 자태가 각양각색이다. 사악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을 보호하고 침략자로부터 수호하는 역할인데 조사당에서는 의천을 극진히 지키고 있었던 듯 하다.
<절집에 들어설 때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는 사천왕상, 속세의 잡귀가 불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호신인데 부석사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조사당 벽화로 사천왕상을 세웠다. 그래서 절 입구에 사천왕문이 없나?>
사천왕상 외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는데 이들은 인도의 신이었으나 석가여래를 수호하는 최고의 수호신이 되었는데 둘은 불법수호의 쌍벽을 이루며 제석천은 오른손에 불자(佛子) 왼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범천 역시 불자를 들고 있으나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벽화에서는 사천왕은 물론 범천과 제석천을 식별하기 어렵다. 참고로 석굴암에 새겨진 범천과 제석천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왼쪽이 대범천, 오른쪽이 제석천이다.>
사대부 양반들이나 스님들이나 조상을 극진히 섬기는 마음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뼈대있는 양반들은 집안에 사당을 모셔 조상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며 특히 중시조나 파조를 모심에 그 지극함이 실로 국법을 지킴과 다를 바가 없는데 절집의 스님들도 자신들의 종조(宗祖)나 파조(派祖)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화엄종의 종찰(宗刹)인 부석사에서 선종의 산문에서 개산조를 섬기는 방식으로 조사 스님을 섬기고 모셨으며 조사당 안의 벽면에 부처님을 수호한다는 사천왕상과 범천, 제석천의 벽화를 그려 붙인 것은 조사(祖師)에 대한 공경심이 부처님에 못지 않은 것임을 나타내는 증표라 할 수 있다.
다만 채색화로 남겨진 6점의 벽화 국보의 상태가 많이 손상되어 안타까운 마음이며, 원본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모본(模本)이라도 하나 더 만들어 원형에 가깝게 복원 전시한다면 원작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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