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폴 루벤스 <동방박사의 경배,1617~18년경>
<주님 공현 대축일>
(나해)
(마태 2,1-12)
<별>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마태 2,1-3).”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9ㄴ-11).”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는,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 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을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해서
‘동방’은 페르시아일 수도 있고, 아라비아일 수도 있습니다.
‘박사’ 라는 말은, 원문 단어의 뜻대로 번역하면 ‘점성술사’인데,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
천문학자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분의 별’이라는 말은, 실제로 어떤 별이 아니라,
메시아 강생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징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묵시록을 보면,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황금 등잔대의
신비는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고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이다(묵시 1,20).” 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본 별은, 어쩌면 별처럼 보이는 천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별은 왜 베들레헴으로 직행하지 않고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했을까?
또 왜 예루살렘에서는 모습을 감추었을까?
그것은 박사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박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 임금은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통치자로서 메시아 강생을 공식 확인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놀라기만 하고 그것으로 그쳤을까?
복음서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메온’과 ‘한나’ 같은 사람들은(루카 2장) 메시아 강생 소식을 듣고서,
메시아를 직접 만나게 되기를 학수고대 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헤로데의 반대쪽에서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을 그냥 흘려들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조금 관심을 갖다가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당황하고 두려워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잠시 안 보였던 별이 다시 나타난 것은,
박사들을 통해서 메시아 강생 소식을 예루살렘에 선포하는 일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별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계신 ‘집’으로 박사들을 안내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에서 예수님을 낳았지만,
출산 후에는 방을 구해서 옮겨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사들이 본 메시아는 평범한 ‘갓난아기’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기만 합니다.
박사들의 ‘기쁨’은 그들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 기쁨은 계시를 받기 전부터, 즉 표징을 보기 전부터 그들이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은,
자신들의 믿음과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예물이 세 가지여서 동방 박사들을 세 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정확하게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유향은 예수님의 사제직을,
그리고 몰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후대 사람들의 해석일 뿐이고, 박사들 자신들은 자기들의
마음과 정성을 표현하려고 가장 귀한 예물을 바쳤을 것입니다.>
‘별’이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2ㄷ-15).”
신앙인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과 응답은,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 일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하나의 별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에서, 아버지를 찬양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충실하게 실천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빛이신 주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등불이며 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 세례 축일>
(다해)
(루카 3,15-16.21-22)
<세례, 십자가>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15-16)”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회개했음을 표시하는, 또는 회개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메시아를 잘 맞아들이기 위한 세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 나라에 잘 들어가기 위한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로 씻는 예식일 뿐이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을 받는 성사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요한의 말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일을 준비하는 예언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보다 ‘더 큰’(더 위대한) 분이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라는 말은,
“그분의 위대함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 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아니고,
실제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말은,
그 세례는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말은,
그 세례는 사람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불’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의 세례’는 ‘깨끗하게 하는 힘’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7).”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계기로 해서
누가 알곡이고, 누가 쭉정이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알곡입니다.
그러나 코로나를 핑계대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과
그것을 핑계대면서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여기서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라는 번역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제로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회개의 표시’인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십자가를 암시하신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세례는 십자가의 시작이고, 십자가는 세례의 완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1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여기서 ‘세례’는 십자가 수난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에도 하느님 말씀이 들려오는데,
그때에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태 17,5).
‘너희’는 제자들(신앙인들)이고,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가 십자가의 시작인 것처럼,
우리가 받는 세례도 우리 자신의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6ㄴ-7).”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렵고 힘들 때도 있고, 쉽고 편안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 때에는 멈추고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스스로 쭉정이가 되는 것입니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야고 5,7).”
우리는 자신의 신앙생활이 결코 헛고생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