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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사탑과 광장)
<기울어진 종탑의 도시 - 피사 Pisa>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까지를 춘추전국시대라 부른다. 이 시대는 한 국가에 의한 통치규범이나 이념을 바탕으로 국정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소국들이 군웅할거하여 주로 전쟁을 통해 각자의 지경을 넓혀 가는 어지러운 시대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221년에 이르러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제라 불리는 시황제가 나타나 천하를 통일했으니 그 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국가 진나라다. 서양의 역사에서도 중국역사와 동일한 역사의 순환(cycle)을 중세 이후에 찾을 수 있다.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 반도안에 속해 있으면서 로마제국에 의해 컨트롤되었던 각 도시들은 급격한 해체의 과정을 걷는다. 베네치아, 제네바, 피렌체, 아말피 그리고 피사와 같은 도시들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타고 올라 도시국가로 우뚝 서서 오랜 세월동안 유럽의 역사를 리드해 왔다. 이들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서로 물고 물리는 투쟁을 거치면서 역사의 부침을 계속하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베네치아가 최후로 멸망함으로서 19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의 통일속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도시는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고도 피사 Pisa다. 아르노강의 물줄기가 가녀린 여인의 허리를 휘감듯 고딕양식의 교회당과 르네상스기의 아우라를 물씬 풍기는 고풍스런 건축물들을 훑고 지나간다. 피사 시내를 관통하는 이 아르노강은 옛날 피사공국의 번영과 멸망을 함께 보여주는 역설의 현장이다. 피사는 지중해와 가깝다. 지중해의 대형범선은 피사의 아르노강을 따라 도시 중심부까지를 왕래하면서 무역을 통한 번영을 누렸으나 북부지역에서 몰려오는 퇴적층들이 강바닥을 매우기 시작하면서 배들이 입항치 못하고 말았다. 배들이 떠난 피사는 더 이상 부를 창출하는 도시국가가 될 수 없었으므로 국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힘에 의한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세상이라고 역사는 늘 가르치고 있지 아니한가?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서양의 속담은 피사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된다. 피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폴리스(도시국가) 피렌체는 약체로 전락한 피사를 넙죽 물어 한 입에 삼켜 버리고 말았다. 이 일은 13세기말에 일어났다.
피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기울어진 탑이다. ‘피사의 사탑’이란 이름은 세계사 교과서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란 과학자의 이름이 함께 붙어 다닌다. 피사의 사탑은 기적의 광장이라 이름하는 넓디 넓은 잔디밭위에 세워져 있다. 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피사의 광장은 거의 늦봄처럼 따뜻하다. 초록의 윤기가 토스카나 지방의 푸른 하늘아래서 융단처럼 고운 빛을 띠며 다이나믹한 기운을 발하고 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누워있다. 기울어진 종탑과 두오모의 대성당이 묘하게도 비대칭 균형을 이룬다 천년이 넘도록 변치 않는 앤티크한 광휘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온 몸을 휘감는다. 행복한 따사로움이며 따사로운 행복감이다. 이탈리아 다른 지역의 격조높은 건출물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피사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여기서 만져보며 체험한다. 순백의 대리석과 수학적 배율로 정교하게 설계된 각각의 건출물들, 여기에 기울어진 사탑이 빚어내는 장엄한 앙상블은 중력의 법칙을 거부한 채 시간을 아득히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수직각 4도의 비밀을 유지하며 서 있다. 잠시동안이라도 피사의 기적의 광장에 수놓인 초록의 융단에 누워 신비스런 아름다움에 도취되는 일은 참 귀한 축복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진정 무엇일까? 첫째 불완전한 것을 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완전함이요. 둘째 균형잡힌 비율과 조화요. 셋째 투명함과 빛이다. 이는 이탈리아가 낳은 현대 최고의 지성 움베르토 에코가 정의한 것인데 아마도 그는 여기 피사를 두고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