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말기 한월(寒月) 스님의 40살 깨닫는 광경과 명말 불교 쇠퇴
2020년 8월 21일
명나라 말기 한월 법장(漢月法藏, 1573-1635) 스님은 15살에 출가하고 19살에 구족계를 받아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습니다. 40살에는 깨닫고 60살에 죽겠다고 크게 결심하였습니다.(四十當悟道,六十歲死矣) 24살에 『능엄경』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불교 교리와 참선 방법도 많이 알고 있었으나 정작 깨닫지는 못하였습니다.
40살 3월부터 백일 참선을 하였는데 처음 며칠 동안에는 어지럽고 토하다가 나중에는 졸다가 대나무 쪼개는 소리를 듣고 인법개공(人法皆空)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상 『능엄경』 제6권에서 말하는 수능엄정(首楞嚴定) 참선 방법으로 깨우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깨닫는 광경을 상세하게 묘사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어록이나 서신에서도 이 광경을 자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깨달은 뒤에 후득지(後得智)를 얻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중국 선종의 화두를 떠올려서 깨달은 광경을 이해하고 설명하였습니다.
한월 스님이 깨달았던 참선 방법은 선종의 참선 방법과 다릅니다. 이 점은 한월 스님이 억지로 둘을 이어붙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은 경지가 아주 높지 않았습니다. 아라한 단계에 오른 것처럼 묘사하였으나 실제로는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한월 스님은 사실상 스승이 없이 깨달았습니다. 명나라 말기 큰 스님들이 대체로 스승 없이 깨달았습니다. 사승관계조차 밝힐 수 없을 만큼 불교가 쇠퇴하였습니다. 한월 스님의 개인적인 큰 문제는 스승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42살에 고개를 숙이고 임제종(臨濟宗) 제38대 종사 밀운 원오(密雲圓悟, 1566-1642) 스님을 찾아가서 억지로 계승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밀운 원오 스님을 그냥 임제종 조사를 닮았다는 뜻으로 “임제원류(臨濟源流)”라고만 평가하고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감산(憨山) 스님도 찾아갔으나 실망하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유명하게 된 뒤에는 서로 자신들의 종파를 계승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계승할 만한 종파가 없었는지 포기하였습니다.
명나라 말기에는 불교 선종에서 계승자(法嗣)을 어떻게 선발하고 상속할지 문제가 크게 등장하였습니다. 종사 스님이 무슨 근거로 계승자를 지목하고 상속해줄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깨달음을 근거로 하면 오랫동안 모셔왔던 스님들을 모두 배척하여야 하며 이 스님들도 새로운 계승자를 모셔야 합니다. 당나라 6조 혜능 스님도 이런 문제를 겪었습니다. 따라서 법사 문제는 일반 가정에서 큰아들 또는 똑똑하고 잘하는 아들에게 상속하는 문제보다 더욱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한월 스님은 당나라 각범(覺範) 스님과 원나라 고봉(高峯) 스님을 모델로 삼아 임제종 정통을 세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종의 오가칠종(五家七宗 : 臨濟宗、曹洞宗、溈仰宗、雲門宗、法眼宗과 臨濟宗의 黃龍派와 楊岐派)을 계승하려고 『오종원(五宗原)』을 편찬하였습니다. 명나라 말기에는 선종의 맥락이 거의 끊어졌기 때문에 여러 선사는 오가칠종을 다시 공부하여 잇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회의론이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한월 스님은 이 문제에 관하여 임제종 밀운 원오 스님과 대판 다투었고 결국 헤어졌습니다. 밀운 원오 스님은 『벽망구략설(闢妄救略說)』을 지어 한월 스님의 주장에 반대하였습니다.
한월 스님은 교학과 선종을 겸수하자고 주창하였고, 당시 동림당(東林黨) 회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양명 후학 가운데 왕기(王畿)와 나여방(羅汝芳) 두 학자는 현성양지를 주장하고 따로 수양공부할 것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서적을 읽는 것도 반대하였습니다. 동림당 사람들은 양명 후학의 현성양지를 몹시 미워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월 스님은 동림당 회원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한월 스님은 강소성 소주 근처 삼봉 청량선사(三峰 清涼禪寺)에 머물렀기에 삼봉 한월 스님이라고 불렸습니다. 여러 절에서 강연을 부탁하고 주지를 맡으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사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을 비롯한 거사들이 한월 스님을 잘 모시고 달래서 그냥 머물렀습니다. 만약에 한월 스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면 소주에는 불교가 사라진다고 거사들이 걱정하였답니다. 한월 스님이 입적한 뒤에는 제자들이 청나라 옹정 연간까지 이어졌으나 옹정제가 배척하고 임제종을 지지한 뒤에는 많이 쇠퇴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월 스님과 제자들을 옹정제가 삼봉종파(三峰宗派)라고 불러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현재 대만 불교계에서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불교 서적을 많이 수집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2019년 5월까지 『明清佛教稀見文獻』, 126册,約190部를 출판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강남지역 불교학자와 대학 및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불교 자료가 공개되었으니 조선 말기 불교와 중국 불교의 교류 역사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능엄경』 제6권:
初於聞中,入流亡所。所入既寂,動靜二相,了然不生。如是漸增,聞所聞盡。盡聞不住,覺所覺空。空覺極圓,空所空滅,生滅既滅,寂滅現前。
黃宗羲,「蘇州三峰漢月藏禪師塔銘」,『南雷文案』,卷6:
萬曆以前,宗風衰息,雲門、溈仰、法眼皆絕,曹洞之存密室傳帕,臨濟亦若存若沒,什百為偶,甲乙相授,類多墮窳之徒。紫柏、憨山別樹法幢,過而唾之,紫柏、憨山亦遂受未詳法嗣之抹殺,此不附之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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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峰和尚年譜』, 弘儲編, 40살 조목:
스님 40살 2월 그믐날 늙으신 낭천(朗泉) 스님과 함께 백일 묵언 수행을 하였다. 참선 자리에 올라앉자마자 갑자기 어지럽고 침을 1되를 뱉었고 잠시 뒤에는 몸을 풀리더니 아주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 아주 깊은 우물에 빠져서 나오려는데 손발로 잡거나 밟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닷새 뒤에는 틈틈이 깊이 잠들었는데, 창밖에서 두 스님이 대나무 울타리를 짜려고 큰 대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대나무 쪼개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고 갑자기 하늘이 산산이 부서지고 땅이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더니 인법(人法) 모두 공(空)되었고 어떤 진(眞)도 없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몇 십만 분의 일 걱정거리도 찾을 수 없었고 이 상황을 어떤 비유로도 비유할 수 없었다.
(백일 참선을 마친 뒤에는) 예전에 보았던 서적들을 꺼내서 펼쳐보는데 종이 위에 쓰인 도리가 저절로 잘 보여서 알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새도록 정좌하였는데 마치 잠깐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동안에 조주 스님의 “내가 청주(靑州)에 있을 때 적삼 7근을 지었다.”는 말씀이 떠올랐고, 조주 스님의 고백수자(古柏樹子)부터 운문(雲門) 스님의 건시궐(乾矢橛), 정각(正覺) 스님의 “신부가 나귀 타고 아무개가 끌고 가더라.(新婦騎驢,阿家牽)”, 도행(道行) 스님의 “커다란 팔각형 맷돌이 헛돌고 있더라(八角磨盤空裡走)”, “운문(雲門) 스님의 부채가 33천 하늘로 날아갔더라(雲門扇子〔足+孛〕跳上三十三天)”까지 화두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여러 삼매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더니 지난날 횡설수설하였던 일들과 봉갈(棒喝)하였던 일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알았고, 운문종(雲門宗)의 “땅이 사라질 때까지 아주 작은 허물과 걱정이 없다.”는 구절이 전제(全提)라고 알았던 것이 전구(轉句)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구절이 반제(半提)라는 것도 알았다. 이렇게 계속하여 전제(全提)의 상황을 알아야 하는데, 임제 선사가 알지 못하였던 황벽 선사는 불법이 없다는 것, 덕산 스님이 세상 노승들의 혓바닥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회초리를 맞거나 나무라는 소리(喝)를 듣고 아라한의 등정각(等正覺)에 올랐겠는지를 알아야 한다.
행자 스님이 “스님 얼굴이 예전과는 달리 좋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묻기에 “참선을 마치고 내려와서 짚신을 많이 밟았더니 짚신이 편편해졌더라.”고 대답하였다.
(萬曆)四十年壬子(1612):
和尚四十歲,二月朔,與朗泉大德相期,入百日不語死關。才上蒲團,忽眩暈,嘔痰一斗,遂放身熟睡,如墜千尺井中求出,相似手足都無攀攬。至第五日已,間方深睡,窓外二僧,夾籬拗折大竹。聲若迅雷,頓見虛空粉碎,大地平沉,人法俱消,一真不立。盡大地,覓纖毫過患,了不可得,無有譬喻能喻。
揭開從前文字,但見紙墨義理,了不關思。端坐終夜,如彈指頃。無思惟中,觸著趙州云︰“我在青州,做領布衫重七斤。”凡(趙州)古柏樹子、(雲門)乾矢橛,(宋、正覺,七言絕句)新婦騎驢,阿家牽,(釋道行)八角磨盤空裡走,至雲門扇子(足+孛)跳上三十三天。種種三昧,一時現前,因勘破向來橫說豎說、行棒行喝總未是,向上全提在所以雲門道“盡大地,無纖毫過患”,猶是轉句,“不見一色”,始是半提。直得如此,須知更向上全提時節:倘臨濟不曾見得,黃檗佛法無多子,德山尚疑,天下老和尚舌頭,何能棒下成等正覺,喝下成等正覺?
行者嘗曰︰見和尚顏色異嘗,問如何是?和尚得力一句,答曰︰下床踏匾蒲鞵口(口,草誤字)。
참고자료:
『碧岩錄』,四十五,青州布衫重七斤︰
舉,僧問趙州,“萬法歸一,一歸何處?”州云:“我在青州,作一領布衫,重七斤。”
宋、釋道行,「頌古十七首」(其一)︰
用盡自己心,笑破他人口。八角磨盤空裡走,金氌現子變作狗。
雲門扇子(足+孛)跳上三十三天釋義
釋道顏,偈七首(其三)︰
一滴滴水,一滴滴凍。天寒人寒,風動幡動。
雲門扇子(足+孛)跳上三十三天,築著帝釋鼻孔。
東海鯉魚打一棒,雨似盆傾,不出諸人十二時中尋常受用。
唐、永嘉玄覺禪師,「證道歌」:
建法幢、立宗旨,明明佛敕曹溪是;第一迦葉首傳燈,二十八代西天記。法東流、入此土,菩提達摩為初祖;六代傳衣天下聞,後人得道何窮數?真不立、妄本空,有無俱遣不空空;二十空門元不著,一性如來體自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