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단지 / 이향아
별일 없을까?
현관문을 열면서 염치가 좀 없었다. 한 달 가까이 비워두었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떠나 있으면서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녁 끓일 것은 없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다’는데 마음 편할 리가 있겠는가.
문을 열자마자 후덥지근한 기운이 훅 끼쳤다. 그동안 내내 장마가 계속되어서 그렇겠지,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통풍이 되지 않은 집안 구석구석이 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언제나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뒤늦게 뉘우치듯이 뇌까리는 말. ‘역시 집이 최고야’를 후렴처럼 중얼거리면서 앞뒷문 열어 놓고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마루에서 안방으로 안방에서 부엌으로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집안은 속으로 골병이 든 듯 변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이 없는 동안 집은 놀랍게도 개미들의 소굴로 완전히 바뀌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부엌을 요새로 삼고 바쁘게 왕래하고 있었지만 방이건 마루건 아랑곳하지 않고 득실거렸다. 눈이 나쁜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개미들이 몸놀림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재발라서 내 손가락으로 그들을 따라잡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손바닥에 물을 묻혀 개미를 쓸어 잡으면서 다시 그 시집詩集의 제목을 떠올렸다. 『나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인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시인의 이름은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그 제목을 접하고 내가 처음 느꼈던 감정은 ‘당혹감’이었고, 그 당혹감 가운데는 한 자락 연민이 깔려 있어 이상한 감동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시집의 제목을 보고 웃었다는 것은 큰 실례다. 어색해서 웃었건 어이가 없어서 웃었건 웃었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웃음으로 인해서 시인의 진실성과 진지성을 훼손하였다면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변명할 말이 있긴 하다. 나는 그 시인과의 거리, 대조적인 정서 때문에 웃었다.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였다’고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통회하는 그와는 달리, 나는 ‘개미 같은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까.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지 않고 오늘처럼 손바닥으로 쓸어 몰살을 시키면서도 귀찮다, 징그럽다는 생각은 할지언정, 죄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한다면, ‘개미 같은 것쯤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사건인가’ 하는 반발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무수히 개미를 눌러 죽였다. 손가락으로 눌러 죽였음은 물론이고, 한꺼번에 소탕하기 위해서 그들을 유인하여 살충제도 여지없이 뿌렸다. 개미는 물론이고 훨씬 더 큰 벌레들도 죽였다. 인간인 내 앞에서 그들은 생활에 유익하지 않은 벌레일 뿐이다. 벌레니까 망설이지 않고 깔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 이 시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았으면서도 벌레를 죽일 때마다 이상하게 자꾸 그 시집 제목이 생각나서 귀찮다. 개미들은 일렬종대로 서서 같은 목적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 보았다. 긴 선을 따라 마지막에 닿은 곳이 있었다.
‘그렇구나, 이걸 몰랐었구나’
꿀단지였다.
올봄에 ‘한봉’, ‘순수’, ‘무공해’, ‘진짜’라는 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내 친구 S가 가져온 꿀단지. 그 단지의 봉한 입구 터진 틈으로 개미들은 분주한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뚜껑을 열어보는 순간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미 그 속에는 꿀 속에 몸뚱이를 처박고 죽어 있는 개미들이 수천, 수만 마리가 넘을 것 같았다.
꿀단지 속에 빠져 죽은 개미.
그들은 내게 숨이 멎을 것 같은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 내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내가 하마 빠질지도 모르는 꿀단지에 대하여, 내가 주야로 다가가고 있는 내 꿀단지까지의 거리에 대하여 소리치고 있었다. 내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서기가 아니며, 공식에 대입하는 수학문제처럼 단순하지도 않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고개를 겨우 넘으면 또다시 다른 고개, 목적하는 그곳은 무지개처럼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나는 그동안 얼마나 허탈해하며 불평을 쏟아냈던가. 그러나 미결의 퀴즈처럼 남아 있는 난제,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목숨을 유지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넘치는 것보다는 다소 부족한 것이 나를 이만큼이라도 생기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꿀단지 속에 죽어 있는 개미들은 전력투구 최선을 다하여 살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력투구라는 것은 종종 눈먼 돌격이 되기도 한다. 아름답다고 하여 너무 가까운 과녁까지 파고든다면 그 독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것, 영원히 극복되지 않는 거리가 최선일까.
‘나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인 사람입니다’
그 시인의 말은 ‘나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사람입니다.’ 혹은 ‘나는 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라는 뜻이었을까. 그 말이 오늘은 새삼스럽게 돌아와 애절한 음향으로 내 귀에 박힌다.
날마다 신문에는 꿀단지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문짝만 하게 뜬다.
[이향아] 시인. 수필가. 현대문학 등단
*『 어머니의 큰 산』, 『새들이 숲으로 돌아오는 시간』 외
* 석정시문학상, 한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살아오면서 체득한 삶의 지혜, 우리 사회의 현상을 개미의 죽음을 들어 일깨운다.
익히 한 번 쯤 목격한 일이다. 몸뚱이를 꿀단지에 처박고 죽어 있는 수천 수만 마리 개미의 몰골을.
꿀단지에 빠진 개미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말. 왼통 귀가 멍멍하다.
첫댓글 이향아선생님의 글을 이곳에서 만나니 여간 반갑지가 않습니다. 자그마한 키에 아담한 체구에서 스며나오는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신분, 이분의 글을 아주 좋아합니다. 시도 수필도 참 맛깔스럽게 쓰시지요. 말씀은 또 얼마나 구수하게 잘 하시는지 몰라요.
잘 읽었습니다.
만나뵌 적 없지만
저도 이향아 선생님 글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