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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온과 야곱의 서곡(40,2-31)
제1부 심판(1,1-31 ; 2,6-4,1)과 구원(2,1-5 ; 4,2-4)의 서곡으로 전개된 것처럼, 제2부의 본문도 시온과 야곱/이스라엘의 서곡(40,1-31)으로 이사야 예언서의 새로운 장을 펼친다. 이 서곡의 수신자는 시온과 야곱/이스라엘인데, 야곱/이스라엘은 41-48장에서, 시온은 49-55장에서 중심인물로 나선다. 40장은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앞부분은 하느님 백성을 향한 위로의 선포로 시작되어 유다의 성읍들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40,1-11). 뒷부분은 좌절에 빠진 야곱/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실 수 있는 힘을 보여주시는 내용이다(40,12-31).
1) 시온의 서곡(40,1-11)
40장은 시작과 함께 위로를 외치며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죄악에 대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백성”이라고 언급하며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신다(40,1-2). 이어지는 담화는 주님의 길을 묘사하고(40,3-5), 주님의 위로를 아직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 말씀의 영원함이 선포된다(40,6-8). 제1부에서 주님의 도성, 거룩한 산성, 의로운 이들의 안식처로 언급되며 신학적 공간의 중심지였던 시온은 이제 주님의 전령이 되어 유다의 성읍들을 향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40,9). 시온은, 권능을 떨치며 승리자로 오시는 하느님과, 새끼 양과 가축들, 어미 양들을 돌보시는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하느님을 선포한다(40,10-11).
1-2절 위로의 책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40,1)처럼 선포 내용의 반복은 제2부에서 주로 나타나는 표현 양식이다(51,9.17; 52,1.11). 이 같은 새로운 문체와 함께 제2부는 구약성경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하는 신학적 주제, 하느님의 ‘위로’를 제시한다(40,1; 49,13; 51,3․12.19; 52,9; 66,13; 에제 14,23; 16,54; 즈카 1,17). 1-39장이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 선고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40-55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위로의 말씀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2이사야서는 ‘위로의 책’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서 선포되는 위로는 1-39장에서 선포된 심판과 강한 대비를 이루고, 도성과 경작지가 황폐해지는 심판의 시기가 마무리되어 감을 암시한다(6.11 참조). 그러므로 ‘위로의 선포’는 하느님의 위로와 함께 새로운 시대로 전환되고 있음을 예고한다. 시기의 전환은 ‘복역 기간’, ‘죗값이 치러짐’, ‘갑절의 벌’이라는 어휘 사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비록 39장과 40장 사이에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히즈키야 임금에게 예고했던 바빌론 유배(39,6-7)는 일절 언급되지 않지만, 죗값이 치러지고 이미 갑절의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바빌론 유배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로는 하느님께서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신 이들에게 선포된다. 이 호칭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 관계에서 나타나는 표현(탈출 6,7; 레위 26,12; 신명 26,17-18; 29,12 참조)으로 제1부와 구별되는 사항이다. 1-39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때 “이 백성”(8,6.12; 29,13)으로 표현하며 호의적 태도가 아닌 중립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제2부는 위로의 선포와 함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 관계가 회복되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구원의 드라마가 전개될 것이 예고된다.
3-5절 주님의 길
위로의 외침은 광야에 길을 건설하라는 명령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광야에 놓이는 이 길이 유배에서 귀환하는 백성을 위한 해방의 길(35,10 참조)이 아닌, “주님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이 길은 주님께서 오시도록 광야에 놓이는 길이다. 이 길의 목적인 주님의 오심은 주님의 계시로 이해된다. 곧 유배라는 참사에서 벗어날 것 없는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고 이르시는 것이다. 길의 준비는 평탄화를 예고하면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높고 낮음을 보여주는 골짜기, 산과 언덕은 메워지고 낮아지며, 거칠고 험한 곳은 평지와 평야로 변화된다. 이러한 준비 후에 주님의 영광이 그곳에 드러난다. 구약성경에서 주님의 영광은 두 가지 맥락에서 언급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서(탈출 16,7.10; 24,16.17; 40,34-35 ; 레위 9,6.23 ; 민수 14,10; 16,19), 둘째, 솔로몬 성전의 축성(1열왕 8,11; 2역대 5,14 ; 7,1-3)과 관련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의 현존 혹은 부재를 보여준다(에제 1,28; 3,12.23; 10,4․18; 11,23). 그러므로 주님 영광의 계시는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주실 하느님의 능력을 보증하고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만이 정화를 거쳐 주님의 영광을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6,3-6). 그런데 이제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갑절의 벌로 제1부에서 예고된 심판의 과정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대, 곧 거룩한 씨앗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6,13 참조).
6-8절 하느님 말씀의 영원함
이 단락은 하느님과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강한 대비를 보여준다. 인간과 그의 영화는 마르고 시드는 풀과 꽃에 비유된다(40,6-7). 반면에 하느님 말씀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음이 강조된다(40,8). 여기서 풀과 꽃에 비유되면서 인간의 유한성이 강조되는 듯 묘사되나, 정작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이 아닌 인간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심성이다. 이러한 해석은 “영화”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셋(חסד)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 ‘충실, 자비, 연대성’의 의미를 지닌 헤셋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하느님을 향한 태도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한계성이 아닌, 인간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결심과 하느님 말씀이 지닌 영원함의 대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느님의 위로를 듣고 갑절의 벌을 받아 정화 과정을 거쳤지만, 그럼에도 다시 죄로 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에게 위로를 전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영원하다고 선포된다.
9절 기쁜 소식의 전령인 시온
여기서 시온과 예루살렘은 말씀을 받아 유다 성읍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등장한다(41,27과 52,7 참조). 선포의 중심에는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40,9)라는 외침이 있다. 이 구절은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이라고 직역될 수 있는데, “보라”라는 외침은 하느님의 현존을, “너희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과 수신자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기쁜 소식의 전령인 시온과 예루살렘이 전하는 소식은 하느님의 현존 및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다(40,9ㅅ). 1절과 9절은 “너희의 하느님”으로 연결되며, 이는 시온과 예루살렘(40,2ㄱ)이 하느님의 위로를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고, 수용한 다음, 이제 유다의 성읍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전령으로 활동하는 연속성을 드러낸다.
10-11절 주님의 오심과 새로운 방식의 돌보심
주님의 오심이 선포된다. 주님을 위해 준비된 길로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그분이 선포하신 위로가 구체적인 사건으로 변화된다(40,3-5 참조), 하느님께서 오시는 모습은, 권능을 떨치시고, 팔로 왕권을 행사하시는 가운데 전쟁터에서 개선하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40,10). 그분께서 지니고 오시는 상급과 보상에서 하느님의 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상급(사카르 שׂכר)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보답을 의미한다(창세 15,1; 30,18; 시편 127,3). 보상(페울라 פעלה)은 하느님께서 수여해주시는 일종의 보상과 같은 것이다(이사 49,4; 61,8; 시편 28,5의 “위업”). 아울러 상급과 보상이 묶여 정치·군사적 영역에서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일종의 전리품으로 이해된다(에제 29,19-20). 그리므로 하느님께서 오시는 행위는,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인가를 베풀기 위해 들고 오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전리품으로 취해 바빌론에서 데리고 나오시는 하느님의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이어서 하느님의 새로운 보호 행위가 묘사된다(40,11). 첫째, 하느님께서 목자에 비유된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을 종종 목자로 비유하고(호세 4,16; 미카 7,14; 에제 34,13-16; 시편 23,1; 28,9; 80,2), 목자는 임금을 표현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이미 제1부는 하느님을 참되고 유일한 임금님으로 선포하였다(6,5; 24,23; 33,22). 다윗 왕조가 멸망한 이후(38,7 참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목자의 모습, 곧 참된 임금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선포된다. 둘째, 하느님의 모으시는 행위가 언급된다. 하느님께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시는 행위가 새끼 양들을 모으시는 행위에 비유된다. 흩어버림이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였다면, 이제 하느님께서는 모으시는 행위를 통해 심판에서 구원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신다. 흩어진 이들을 모으시는 하느님의 행위는 구원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제2-3부의 중심 주제를 구성한다(43,5; 45,20; 48,14; 49,18; 54,7; 56,8; 60,4; 66,18),
2) 야곱/이스라엘의 서곡(40,12-31)
제2부의 두 번째 서곡은 야곱/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서곡이 “위로하여라”, “선포하여라”와 같이 명령형의 문장으로 구성되었다면, 두 번째 서곡은 하느님의 본질을 묻는 수사적 질문(12.13.14.18.21.25절)과 왜 야곱/이스라엘이 하느님을 향해 절망적인 탄식을 내뱉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구성된다(27절). 아울러 시온의 서곡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백성을 위로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야곱/이스라엘을 향한 서곡의 중심에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기되는 수사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야곱/이스라엘이 가진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힘으로 전환된다. 본문의 문체와 주제에 따라 이 대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위로의 원천이신 분의 본질에 대한 물음(40,12-14); 인간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권(40,15-17); 우상숭배의 헛됨(40,18-20); 지상 권력자들을 향한 심판(40,21-24); 천체 숭배(40,25-26); 야곱/이스라엘의 항변(40,27-28) ; 지친 이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40,29-31).
12-14절 위로의 원천이신 분의 본질에 대한 물음
이 단락은 백성에게 위로를 전하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한다. 이를 위해 다섯 개의 수사적 질문을 제기하며 하느님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를 겪으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다.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따르면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으며, 전쟁에서 패배하고 멸망하였다는 것은 그 민족이 섬기는 신의 무력함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바빌론에게 멸망한 기억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의 무능력을 체험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전해주시는 위로와, 유배가 거의 끝나고 있다는 예고를 온전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백성을 향해 위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가 선포된다. 곧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의 신 마르둑보다 열등하거나 무능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신과도 비교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선포된다.
15-17절 인간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권
여기서는 민족들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이 중심 주제이다. 모든 민족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헛것으로만 여겨지는 존재이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두레박에 떨어지는 물방울, 천칭 위의 티끌이며, 먼지에 불과하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은 이방 민족에 대한 멸시와 무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그들보다 더 높고 강한 힘을 지니고 계시며, 인간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뿐이다.
18-20절 우상숭배의 헛됨
이제 하느님의 능력은 우상들과 비교된다. 우상은 인간이 만든 작품에 불과하다. 우상과의 비교를 통하여 드러나는 참된 하느님의 본질은 제2부(특히 40-48장)를 이끌어가는 중심 주제이다(40,19-20 ; 41,6-7 ; 44,9-20 ; 46,1-2.6-7). 탈출기와 신명기가 전하는 십계명을 보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들어 있어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만이 홀로 참된 신, 유일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바빌론 유배 체험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만의 하느님이 아닌,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라는 하느님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곧 유배는 하느님의 무력함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이며,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강대국 바빌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하느님께서 지니신 유일성은 우상과 비교할 수 없다는 신학적 가르침으로 나타난다.
21-24절 지상 권력자
하느님의 능력은 역사와 우상을 넘어 이제 지상의 권력자를 향한다. 지상 권력자들의 능력은 위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힘을 하느님과 비교하면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들이 살아가고 다스리는 땅을 하느님께서 세우셨고, 그곳에서 그들을 심판하신다. 그들이 능력으로 무언가를 행하면 그것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무력하게 만드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는 지상 통치자들의 실체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25-26절 천체의 숭배
하늘의 별들이 언급된다. 이들이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늘의 군대들’로 지칭되기도 하지만 (신명 17,3; 2열왕 17,16; 예레 8.2), 여기서는 바빌론에서 숭배하는 우상을 의미한다. 이처럼 바빌론에서 별들은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이 점에서 하느님의 절대적 우월성과 비교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별을 창조하셨다(40,26). ‘창조하다’라는 동사(바라 ברא)는 구약성경에서 오로지 하느님만 주어로 등장하며 하느님의 절대적 능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창조의 능력은 다른 인간이나 우상에게는 없는 하느님만이 지니신 고유한 능력이다. 이 능력을 지니시기에 하느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누구도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그 능력을 측정할 수 없듯이 이스라엘과 민족들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도 설명할 수 없다(40,14 참조).
하느님의 고유한 능력은 창조의 능력과 함께 “거룩하신 분”이라는 주님의 호칭에서 정점을 이룬다(40,25). 하느님의 거룩함과 관련하여 제1부는, 백성이 자신들의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느님께서 백성을 향하는 가운데, 하느님 백성을 겨냥한다(1,4; 5,19.24; 10,17.20;12,6,17,7;29,19; 30,11․12.15; 31,1). 반면에 제2부는 민족들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위한 비길 수 없는 하느님의 보살핌을 보여준다(41,14.16.20; 43,3.14; 45,11 ; 47,4; 48,17; 49,7; 54,5; 55,5; 60,9.14). 40,25에서 사용된 “거룩하신 분”이라는 표현은 이후에 더는 표현되지 않고,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1사무 2,2; 탈출 15,11; 하바 1,12; 시편 77,14; 이사 6,3 참조).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자신을 공표하시는 표현으로, 지상과 천상의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인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보여준다.
27-28절 야곱/이스라엘의 항변
40,27에서 선행하는 본문과 구별되는 호칭이 쓰인다. 이전까지 “너희”(40,18.21.25)로 지칭되던 이들이 “너”로 변화된다. 앞 단락(40,12-26)은 야훼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증언하였다.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본질을 직접 드러내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익명의 대상이 아닌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탄원에 반박하신다(40,27). 하느님께서는 성조와 연관 지어 이스라엘 백성을 야곱/이스라엘로 부르신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조 야곱을, 그리고 그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떠올려준다(창세 32,29). 나라의 멸망을 겪고 낯선 유배지로 끌려온 이들에게 야곱/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시는 것은 그들이 바로 성조 때부터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 구원의 중심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유배라는 시간 동안에 자신들을 잊고 계시다고 생각하며 탄식한다. 이미 40,1에서 위로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스라엘 백성은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야곱/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당신 창조의 힘을 선포하신다(40,28).
29-31절 지친 이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은 피곤함과 지침을 모르신다(40,28-29). 오히려 젊은이들과 청년들은 피곤하여 지치고 비틀거려도 그분은 지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40,30). 하느님의 새로운 힘은 당신을 희망하고 바라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의심이 아닌 희망을 품을 때 세상의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강한 힘을 얻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라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하느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세상의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강한 힘을 얻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제2부를 여는 두 개의 서곡은 시온과 야곱/이스라엘에 관하여 들려준다. 이 둘은 이후 전개되는 제2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성조 야곱/이스라엘의 이름을 지닌 유배 공동체의 이야기가 41-48장에서 전개된다. 이어서, 성취되는 귀환의 목적지로서 시온이 49-55장의 중심에 위치한다. 두 개의 서곡은 제2부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미리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이야기의 중심인물 시온과 야곱/이스라엘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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