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승려인 아난다 엠(Ananda M.)은 그의 저서 『아리아인의 지혜(The Wisdom of the Aryas)』에서 열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단순히 등불이 불꽃이 꺼졌을 때처럼 "꺼진다"는 뜻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이 단어에 관해 말했던 것을 따라왔던 사람들은 이 단어를 단순히 소멸과 같다고 설명한 사람들의 오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이해할 것이다. 참으로 소멸은 어떤 의미에서 욕망, 열정, 자기 망상의 소멸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부정이 아닌 다른 용어로 설명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 즉 우리의 모든 긍정적 정의가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는 삶, 인간적 생각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삶 너머에 있는 것, 모든 삶이 지향하는 바로 그 목표에 대해 말한다.
가르침을 받아온 불교도에게 열반이란 궁극적이고 저 너머의 것이며 삶의 목표를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아-꿈(Self-dream)이라는 이 존재와는 완전히 다른 상태로서, 이름짓고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크게 넘어설 뿐만 아니라 사고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아리아인들 중 가장 위대하신 분께서 인간들 스스로가 초래한 모든 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얻은 지혜의 경이로움과 위대함이 있다.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넘어선 이 영광과 모든 갈등의 문제들을 수반하는 존재의 목적이 되는 이 평화는, 우리에게 가장 근접한 의식보다 더 가까이 우리 곁에 있으며, 심지어 이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희망보다 더 소중한 희망으로 여겨진다.
여전히 궁극으로 승화된 의식적 존재가 달과 태양의 모든 영광을 지나 별빛 반짝이는 높은 곳 너머 무한히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면, 이 우주들의 본거지가 있고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에테르의 무한한 심연 저 너머에는, 허공이 더는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갈망하던 새처럼 (인간의) 생각은 허망하게 날갯짓을 하며 저 높은 곳에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여전히 그 존재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보다 더 높은 곳에서 일시적 순간 동안이나마 진정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인 그 의식보다 더 높은 곳에 머물고 있다.
사심없이 살고 사심없이 죽는 것,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더 큰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것, 높은 천국이나 극락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 오직 날마다 이타적으로 성장하는 것, 이것이 마스터의 삶과 마스터의 가르침에 고루 퍼져 있는 교훈이니 마침내 모든 생명에게 평화가 오기를!
애니 베산트 박사는 최근 강연에서 이 주제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불교의 철학에는 주님 고타마 붓다께서 열반의 상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신 멋진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은 담마파다(법구경, Dhammapada)의 중국어 번역본에서 찾을 수 있으며, 중국어판은 트뤼브너(Trübner)의 동양 시리즈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붓다께서는 열반이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창조되지 않은 것을 가져다가 창조된 것과 연결하고, 실재의 것을 가져다가 비실재의 것과 연결하는 등 다양한 문구를 사용하셨다. 그는 열반은 존재하며, 열반이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로 요약하셨다.
그것은 (경의를 담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창조되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 즉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혀 우주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열반은 공허함(void)이 아니라 충만함(plenum)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생각은 우리가 모든 위대한 철학 체계를 공부할 때 반드시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고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종종 사용되는 표현은 공허함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에 서양에서 소멸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충만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체성을 완전히 잃지 않고 의식이 점점 더 확장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원주(원의 둘레) 없는 원의 중심을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리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놀라운 통일성(unity)을 한 번 깨달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잊을 수 없으며,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남을 돕고 구원하기 위해 하위 몸들(육체, 감정체, 지성체의 세 매개체들)로 참된 자신을 가릴지라도, 아무리 물질의 십자가에 바짝 매여있고 침대에 묶이고 좁디좁은 곳에 갇혀 있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눈으로 왕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신 안에 항상 가까이 있는 땅을 보았음을 결코 잊지 못한다.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 하늘로 떠날 필요 없이 단지 자신의 의식을 열어서 그 영광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붓다께서 오래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불평하고 울며 기도하지 말고 눈을 떠서 보라. 왜냐하면 그 빛은 바로 당신 주위에 있으며, 그것은 너무나도 경이롭고 아름다우며, 사람들이 지금까지 꿈꾸거나 기도한 적이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뛰어나며, 영원하고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멀리 떨어진 땅"은 선지자 이사야가 인용한 구절이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오역이다. 이사야는 아주 멀리 떨어진 땅이 아니라 아주 먼 곳에 있는 땅을 말했는데, 이는 매우 다른 개념의 매우 아름다운 땅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가 더 높은 차원에 대해 어느 정도 경험한 적이 있었으며, 그의 생각으로 별들이 흩뿌려진 하늘 들판의 화려함과 우리 지상에 있는 비좁은 지하통로를 비교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삶을 저 높은 삶과 비교했을 때, 어둡고 사악한 길을 맹목적으로 기어 다니는 삶에 비해 찬란한 목적을 뚜렷하게 가진 삶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통해 영혼을 불어넣어 신성한 신의 뜻을 완전히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라한(Arahat, Arahant)이 하는 일
아라한은 인간 존재의 가장 높은 차원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일을 해야 하며, 그 일을 하는 동안 열 가지 큰 족쇄들 중 나머지 다섯 가지 족쇄들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6. 루파라가(Ruparaga) - 형태의 아름다움이나 형태를 가진 물리적 존재,
심지어 천상계에 있는 형태 있는 존재들에 대한 욕망
7. 아루파라가(Aruparaga) - 형태 없는 삶에 대한 욕망.
8. 마나(Mana) - 자존심. 자만심 (pride, conceit)
9. 웃다카(Uddhachchha) - 동요, 과민성 (irritability), 어떤 것에 방해받지 않으려 함.
10. 아비자(Avijja) - 무지(ignorance)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족쇄에는 끌림(attraction)뿐만 아니라 그 반대인 거부감(repulsion)의 관념도 포함되며, 이 족쇄를 벗어던진다는 것은 낮은 형태의 세계는 물론 더 높고 형태 없는 차원의 어떤 것도 잠시라도 그 끌림으로 그를 붙잡을 수 없거나 그가 그 안에서 일을 할 경우 거부감으로 그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성품의 특성을 의미한다.
여덟 번째 속박인 자존심이 사라지면 그는 자신의 업적의 위대함을 잊게 되고, 교만은 불가능해지며, 이제 그는 항상 빛 속에 서서 어떤 낮은 것과도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된다. 그런 다음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는 완전한 평온이 찾아와 모든 지식을 자유롭게 습득하고 지구 행성 체인과 관련하여 실질적으로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