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7.10 04:28
-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주님께서는 어제 여러 당부에 이어
오늘은 사람들을 조심하고, 환난은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래서 저는 오늘 왜 조심해야 할까?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 여기에 생각을 집중해봤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보통 조심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니 뭔가 다른 것이 있는지 그것도 생각해봤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을 조심하라고 할 때는 부정적인 뜻이 있잖습니까?
예를 들어 남자는 늑대요 여자는 여우라는.
믿을 놈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 저도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뜻에서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씀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는 것을 조심하고,
조심하지 않는 것을 조심하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조심하지 않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너무 조심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이고,
너무 조심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조심이 지나치거나 부정 일변도가 되면 그런 조심은
소심과 다를 바 없는 나쁜 조심이기에 아니함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조심이 그런 것일 리 없고,
조심이란 말 자체도 원래는 그렇게 나쁜 뜻이 아닙니다.
조심(操心)이라는 말의 조 자에 동사적으로 ‘잡다,’ ‘쥐다,’ ‘조종하다,’의 뜻이 있고,
명사적으로 ‘깨끗이 가지는 몸과 굳게 잡은 마음’이라는 뜻이 있듯이
말 자체는 좋은 뜻이며 그 반대말인 방심(放心)과 비교하면 더더욱 좋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마음을 먹다, 마음을 잡다.’라고 할 때의 그 뜻으로서
방심하고 있다가 뭘 어떻게 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이요 마음을 잡는 것이며,
내 마음을 풀어놓아 마음이 마음대로 막 날뛰지 않도록
코뚜레를 잡고 소를 부리듯 내 마음을 잡고 조종하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내가 진정 내 마음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옳게 사람을 조심하면 사람을 너무 믿어 실수하는 일도 없겠지만
옳은 일을 할 때 너무 걱정하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며 하지 않고
두려워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거나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느님을 잃는 것 그것만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오로지 하느님을 잃지 않도록 그것만 조심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소심하지만 않으면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그러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0,16-23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며
그 길이 ‘이리떼 가운데로’ 가는 길임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곧바로 위로를 더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봅니다.
먼저 ‘뱀의 슬기와 비둘기의 순박함’입니다.
슬기로우면서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영리하되 악하지 않은 것 ―
그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다음은 ‘끝까지 견딤’입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끝까지 견디는 인내는
우리 의지의 힘으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걱정 대신
우리를 붙드시는 그분께 자신을 내맡길 수 있습니다.
가장 깊은 위로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시련 앞에서 곧잘
무슨 말로 버틸까, 어떻게 견딜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 우리 혼자 던져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친히 말씀하시고 견디게 하시는
성령을 두십니다.
이리떼 가운데서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시련을 다 없애 주시기보다,
그 한가운데에서 성령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시련을 겪는 이의 곁을 지키는 것으로 그를 돌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시련 앞에서 ‘무슨 말로 버틸까’ 홀로 걱정만 하지는 않는가?
나는 ‘아버지의 영’께 자신을 내맡기는가?
나는 슬기로우면서도 순박한 사람인가?
나는 견디는 이의 곁을 지켜 주는가?
주님,
이리떼 같은 세상에서도 두려워 떨지 않게 하소서.
걱정 대신 ‘아버지의 영’께 저를 내맡기게 하시고,
끝까지 견디도록 친히 붙들어 주소서.
그리고 견디는 이의 곁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캔디’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캔디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입니다.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캔디는 주저앉지 않습니다. 울고 싶을 때도 있었겠지만, 다시 일어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캔디를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외롭고 슬픈 일을 만납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이 내 삶의 마지막이 되느냐, 아니면 새로운 길을 여는 시작이 되느냐입니다.
얼마 전에 캔디처럼 어려운 상황을 씩씩하게 이겨내는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자매님은 사기 결혼으로 미국에 왔습니다. 알고 보니 배우자는 유부남이었고, 폭력도 있었습니다. 결국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는 인종차별 때문에 힘들어서 이직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지금 직장에서는 그런 차별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매님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었습니다. 힘든 과정을 걸림돌로 여기지 않고 디딤돌로 여기는 긍정의 힘이었습니다. 저는 자매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고, 아이와 함께 행복한 미국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신앙은 고통을 없애 주는 마술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은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힘을 줍니다. 신앙은 외로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하는 빛입니다.
또 종신 부제 과정을 공부하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신앙과 삶이 일치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부부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분들이었습니다. 저에게 세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지 물었습니다. 네 복음서 중에 어느 복음을 좋아하는지 물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어느 제자를 좋아하는지 물었습니다. 보통 교우들과 대화할 때는 잘 받지 않는 질문이었습니다. 마치 호기심 많은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연옥을 설명하면서 ‘패자부활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을 이야기합니다. 성인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함께하면 연옥에 있는 영혼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정화되어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뜨거운 감자는 삼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뱉어 버리기도 아깝습니다. 잠시 기다리면 감자가 식고, 그때는 삼킬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천국으로 곧바로 들어가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영혼이 정화되는 곳, 그것이 연옥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네 복음서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긴박함이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예수님의 공생활과 수난과 부활을 전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구약의 완성으로 전합니다. 유대인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쓰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이방인 공동체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돌아온 아들, 자캐오,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의 자비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영적인 스승으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선포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고백처럼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심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저는 루카 복음을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루카 복음에는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병자들,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제자를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나 역시 오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의 길을 이야기합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걷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신앙의 길은 특별한 사람만 걷는 길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지혜와 분별이 충만하여 주님의 길을 충실히 걸어간다면 우리는 신앙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신앙의 길을 사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걱정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오늘 내게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신앙인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캔디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 고통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삼는 사람,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지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은 고통 중에도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하는 이정표입니다. 절망 중에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외롭고 슬픈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저앉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아버지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길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의인은 그 길을 따라 걷고, 죄인은 그 길에서 비틀거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틀거릴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연옥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주님 안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제자들을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이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도 합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 하면서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우리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양으로 세상에 파견됩니다.
사나운 이리 떼한테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우리마저 이리처럼 이빨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19-20).
우리는 겸손하고 온순한 양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아버지의 영께서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맞서겠다고 자신의 힘을 기르는 데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공간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자기 확신’이 강해질수록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할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겨 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현존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내맡기며 끊임없이 청할 때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세상에 맞서야 합니다.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정의(의로움)에 목마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복되어라, 정의(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진복팔단: 제1주간
정의(의로움)에 목마름!
2026년 7월 9일 요일
리처드 신부는 의로움(義)과 정의(正義)를 하나로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 "진복"은 영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은 이 "진복"을 다소 누그러뜨려 "옳은 것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혹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로 번역하지만(우리말 성경도 '의로움'으로 번역하고 있음), 이는 온전한 의미를 담지 못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문 그리스어는 분명히 "정의(正義)"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니다. 진복팔단의 중간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정의라는 개념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짝을 이루어 같은 메시지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곧 이 세상에서 정의을 살아낸는 것은 가난한 이들, 온유한 이들, 눈물 흘리는 이들의 갈망과 굶주림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일치와 연대 자체가 이미 깊은 사회적 정의의 실현입니다. [1]
평화운동가 존 디어(John Dear)는 평생을 비폭력의 길을 걸으며 헌신해 온 인물인데, 그는 이 진복팔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의로움도 단순히 개인적으로 선행을 실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 공동체 전체가 지닌 보편적 책임을 요약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삶에 필요한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서로에게 공정한 정의를 추구하며, 모든 이가 서로와 피조물, 그리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회적·경제적·인종적 정의를 향한 열정을 지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히브리어 "정의"라는 말이 지닌 참된 의미이며, 그래서 유다 전통은 이 정의를 강력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체계적이고 구조화되고 제도화된 불의에 맞서 온몸과 온 힘, 그리고 영혼을 다하여 저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정의를 마치 음식과 음료, 빵과 물처럼, 곧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문제처럼 추구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투쟁에 생명을 바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만족을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정의에 목마르고 굶주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곧 세계적 정의를 우리 삶의 우선순위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진복은 우리에게 풀뿌리 운동에 참여하여 한 가지나 두 가지 불의의 상황에 맞서 싸우고, 그 투쟁에 깊이 관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모든 불의의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불의에 맞서는 것은 곧 모든 불의에 맞서는 길이 됩니다.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가 거듭 강조했듯이, "어디에서든 불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체계적 불의의 희생자들과 벗이 되어 그들과 함께 서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마음을 찢도록 허용하고, 불의를 종식시키려는 운동에 참여하며, 우리의 재물을 그 목적에 봉헌하고, 그 투쟁에 자신을 헌신하십시오. 이것이 곧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삶입니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리의 비폭력적 인내와 진실을 증언하는 삶은 결국 승리하여 정의라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편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정의의 편에 서 계십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덕이라는 우주의 활은 길긴 하지만, 그것은 정의를 향해 굽어져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투쟁에 생명을 바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만족을 약속하십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공동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제 영혼을 북돋아 줍니다. 오늘은 라자로의 이야기(Lazarus’s story)를 읽다가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이야기가 제 마음을 깊이 울렸고, 비록 인터넷을 통해서였지만 우리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세계 곳곳의 형제자매들이 ‘활동과 관상 센터’에 보내 주시는 모든 이야기들에 감사와 감격을 드립니다. 그 이야기들은 제가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 Shona C.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Jesus’ Alternative Plan: The Sermon on the Mount (Franciscan Media, 2022), 142–143.
[2] John Dear, The Beatitudes of Peace: Meditations on the Beatitudes, Peacemaking and the Spiritual Life (Twenty-Third Publications, 2016), 61–62, 66, 6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nh Trí,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잎 위에 맺힌 빗방울처럼, 진복팔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방울씩 이루어 가는 처방을 제시합니다.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주님께서는 거듭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우리는 지성을 "계획할 수 있는 능력"과 연결해서 생각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적이 불분명하더라도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에 매력을 느끼곤 합니다. 물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계획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획을 세우는 일이 강박적인 것이 된다면 문제가 됩니다.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이는 미래의 상황에서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가 부족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지금 더 잘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실제로 만나게 되면, 미리 준비한 말만 반복하게 되겠지요?! 이렇게 강박적으로 만들어진 계획은 결국 '나'를 항상 과거 속에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미래를 미리 살려고 애쓰다가, 실제로는 과거 속에 머무는 셈인 것입니다.
지성은 낡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창조주이신 사랑의 하느님에 의해 우리 안에 주어진 지성을 신뢰해야 하는데, 그 신뢰란 사실 그러한 지성과 직관을 주신 창조주 하느님을 신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직관을 불신한다면 그것은 곧 사랑의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일 겁니다.
"그때에 (너희가 말할 것을)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아닙니다. 사랑, 지성, 믿음과 같이 살아 있는 것들은 내일을 위해 저장해 둘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지금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리 떼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이라는 말은 아마도 지성의 본질, 그리고 믿음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라고요….
어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풍요롭고 아릅답고 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선을 의식하고 바라보고자 하는 수양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양이 그냥 마음먹고 "실천해야지..."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만족스럽게 이 수행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익숙해 있던 정신구조에 머물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에 자꾸만 우리가 마음먹은 바를 까먹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이 펼쳐 주시는 선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반복적으로 망각하는 '내' 현실부터 의식하려는 첫 걸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내'가 얼마나 자주 우리의 결심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망각 속에서 참으로 풍요롭고 은혜로운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고 다시, 또다시 이러한 수양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와 네팔에서 널리 쓰이는 "나마스떼"라는 인사말은 "당신 안의 신성한 빛(혹은 내면의 선함)에 경배합니다." 혹은 "내 안의 신성함이 당신 안의 신성함에 인사합니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참 아름다운 인사말이고, 또한 단순한 인사말을 넘어 일상 안에서의 수양을 가능케 하는 화두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칸들이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사말들도 그저 타성에 젖어 쓰게 된다면 이 인사말의 의미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인사말의 의미를 의식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수행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깨어 의식함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깨우고 우리의 근본적인 존재성으로 들어서는 여정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말로 중요한 관건은 '내'가 쓰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동기를 얼마나 깨어 의식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시각으로 인해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방향을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조차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의 방식을 다시 한번 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어떤 문제에 대한 비판보다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자기 스스로가 그 문제에 대한 '대안'이 되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쉽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대안을 내놓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더 나아가 '내'가 그 문제의 대안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프란치스코에게 들려 주셨던 주님의 말씀, 즉 "쓰러져 가는 나의 교회를 다시 세워다오!"라는 주님의 부탁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는 당시 세상의 문제, 교회의 문제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그것을 고쳐야 할지를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가 그 대안이 되어 살고자 노력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 깨달음을 하루아침에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을 깨어 의식하는 가운데 부단히 이 수양을 해 나가면서 주님의 이끄심에 따르는 법을 서서히 깨달아갔을 것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도 우리 여느 사람들처럼 자꾸 망각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여느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그 정신의 경향을 깨우고자 부단히 노력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런 그의 노력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해 주셨던 거고요…!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때로 지혜롭게, 그러나 때로 순박하게!
몽골 자연 피정, 벌써 닷새째입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대초원을 마음껏 산책하고 있습니다.
게르 캠프 바로 앞에 큰 습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주위로 말과 소, 양과 염소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너무 좋아, 자동으로 발길이 그리로 향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광경이 마치 천국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런데 초원 속으로 들어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제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즉시 알게 되었습니다.
사방 온 천지가 그들이 먹고 배출한 부산물이었습니다.
몽골 오기 전에 누군가 하셨던 말씀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밤하늘은 별천지, 대초원은 똥천지^^
조심조심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래 이게 우리네 인생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내려다보면, 질퍽질퍽하고 견디기 힘든 냄새가 진동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 사제생활, 봉헌생활, 역시 멀리서 바라보는 게 좋습니다.
가까이 들어가서 바라보면 즉시 다가오는 것이 실망이요 배신감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인간적 나약함이나 결핍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형제자매님들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나와 다른 한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이고 과제라는 것을.
성가정, 깨가 쏟아지는 잉꼬부부의 탄생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 양보와 자기 죽음이 필요한 것인지를.
오늘 예수님에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아주 의미심장한 한 말씀을 남기고 계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복음 선포 과정에서 그리고 인간관계 안에서 때로 뱀처럼 슬기롭게, 때로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하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모든 행동거지에서 보다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냥 양보하고 물러나고 희생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닌데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코 바람직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이 우리 주변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과 악을 식별하려는 노력을 거듭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인간의 의지인지, 무엇이 사탄의 유혹인지 구별하려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 세상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 지혜롭게, 그러나 때로 순박하게, 때로 부드럽게, 그러나 때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게 처신하는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를 각오하여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16-23).”
1)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예수님의 양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예수님의 양답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리 떼’ 라는 말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박해자들을 가리킵니다.
겉으로만 보면, 또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사탄의 이리 떼’가 ‘예수님의 양들’보다 훨씬 더 강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양들’이
‘사탄의 이리 떼’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이길 수 없고,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또 모든 신앙인들은 박해에 굴복하지 말고, 승리자로서 당당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뱀처럼 슬기롭고’는 “성령의 지혜를 청해서 받아라.”로 해석할 수 있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는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지혜’와 ‘예수님의 온유함’은 이리 떼의 물리적인 폭력과 박해를 무력화시키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0-18).”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승리자는 주님이시다.
그러니 신앙인답게 살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그 승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입니다.
3) 23절의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 숨어라.”가 아니라, “박해가 없는 곳으로 가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여라.”입니다.
순교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박해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옳습니다.
<순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스테파노 순교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큰 박해를 받았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1ㄴㄷ.4).”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신자들은 숨어 있지 않고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이 널리 전해졌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박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악한 일을 역이용해서 좋은 결과를 만드십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의 박해는 지나가는 일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박해자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종말, 재림, 심판을 막지 못한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전에 죽는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부활해서 예수님의 재림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1테살 4,15-18).>
----------------------------------------------------
260710.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 지난 8일 공유한 2026.07.07 21:48에 올리신 나를 찾아 떠나는 관계의 여행
이후로 묵상글 아직입니다.
저는 오늘 새벽 다시 읽었고 여러분에게도 ----
나를 찾아 떠나는 관계의 여행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이 더 푸르게 된 것도 아니었고, 하늘이 더 높아진 것도 아니었으며, 사람들의 얼굴이 더 아름다워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변한 것은 오직 한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자기 두려움과 자기 욕망과 자기 영광이라는 좁은 방 안에 갇혀 살던 한 인간의 마음속으로 하느님의 숨결이 조용히 스며들기 시작했고, 그 숨결은 메마른 흙에 스며드는 새벽의 이슬처럼 아무 소리 없이 그의 존재를 적셔 갔으며, 그때부터 세상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전혀 다른 얼굴로 그 앞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회개란 죄책감에 짓눌려 눈물을 흘리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숨 쉬실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이라는 것을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으로 배웠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삶을 억지로 바꾸지 않으셨고,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사랑으로 기다리셨고, 기다림 속에서 그의 굳게 닫힌 마음을 조금씩 녹이셨으며, 마침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생애를 붙들고 있던 거짓 자아의 성벽을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비로소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도가 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입술이 하는 일이 아니라 존재가 하는 일입니다. 말이 많아질수록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투명해질수록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숨 쉬십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침묵은 기도였고, 그의 눈물도 기도였으며, 그의 걸음과 나환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끝마저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느님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심장 안에서 살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그의 몸을 떨게 만들었던 나환자의 얼굴이 어느 날 문득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코를 막고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가 하느님의 상처가 되었고, 가까이 가기조차 싫었던 냄새가 자비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바뀌었고, 나환자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달라졌으며, 그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새로운 시력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쓰디쓴 것은 달콤함이 되었고, 혐오는 포옹이 되었으며, 두려움은 형제애가 되었고, 죽음처럼 보이던 곳에서 생명의 샘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을 세상 밖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향하여 더 깊이 걸어가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 머문 사람은 반드시 상처 입은 사람들 곁으로 걸어갑니다.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들은 사람은 반드시 세상의 신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외면하는 길은 프란치스코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언제나 사람의 얼굴을 향했고, 그의 관상은 언제나 형제를 향해 열려 있었으며, 그의 찬미는 들꽃과 새와 바람과 태양과 달과 가난한 이들의 눈동자 안에서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도 혼자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너를 통하여 비로소 내가 되고, 너는 나를 통하여 너 자신을 발견하며,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참된 이름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밀어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밀어내는 일이었고,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존재의 잃어버린 조각을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나환자를 끌어안던 그 순간 프란치스코는 사실 자기 안의 가장 깊은 나병을 끌어안고 있었고, 가난한 이를 사랑하던 순간 그는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병자의 눈물을 닦아 주던 순간 그는 자신의 상처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숨 쉬실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를 열어 드리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기도가 되었다는 말은 그가 기도를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호흡이 머무는 공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의 심장을 통과하자 그의 판단은 연민으로 변하고, 그의 두려움은 신뢰로 변하며, 그의 욕망은 사랑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거짓 자아가 무너질수록 참된 자아가 드러났고, 그 참된 자아 안에서 그는 비로소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진실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에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흘린 눈물은 나환자의 상처를 만지는 손으로 이어졌고, 침묵의 기도는 가난한 형제와 빵을 나누는 식탁으로 이어졌으며, 하느님께 드린 찬미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라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셨고, 프란치스코는 그 관계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깊이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도 타인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섬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신이 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너를 통하여 나를 만나고, 너는 나를 통하여 너 자신을 발견하며,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비로소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서도 멀어지고, 다른 사람을 품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참모습에 가까워집니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나병을 보았고, 가난한 사람의 굶주림 속에서 자신의 가난을 보았으며, 병자의 상처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그 만남은 동정심이 아니라 존재의 일치였고, 자선이 아니라 형제애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바람만으로 숲을 이루지 않으시고, 물방울 하나만으로 강을 이루지 않으시며, 사람 하나만으로 당신 나라를 세우지 않으십니다. 서로 내어주는 관계 안에서, 서로를 살려 내는 사랑 안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품어 주는 형제성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바로 그러하듯이, 존재는 홀로 완성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는 높은 산으로 올라갔지만 결국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왔고,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가장 낮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십자가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참된 관상이었습니다. 눈을 감아 세상을 잊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세상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이 짧은 한마디는 그의 생애 전체를 담고 있는 끝없는 강물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전부가 되실 때 비로소 나는 더 이상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이 전부가 되실 때 비교는 조용히 사라지고, 경쟁은 힘을 잃으며, 소유는 무의미해지고, 명예는 먼지처럼 흩어집니다. 오직 사랑만이 남고, 내어줌만이 남으며, 형제라는 이름만이 남습니다. 하느님이 전부가 되시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하나의 나병을 품고 살아갑니다. 인정받고 싶은 갈망, 비교하려는 습관,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 용서하지 못하는 기억, 끝없이 자신을 증명하려는 두려움, 사랑받기 전에 먼저 사랑하려 하지 않는 인색함, 이것들이 우리 존재를 조금씩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그 나병을 숨기지 않습니다. 햇빛 아래로 데려오고, 사랑 안으로 데려오며, 형제의 품 안으로 데려옵니다. 상처를 감추는 동안에는 치유가 시작되지 않지만, 상처를 사랑 안으로 가져오는 순간부터 은총은 조용히 숨 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외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 창조되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사람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사랑에 움직여지는 자유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내 삶 안으로 모셔 오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안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하느님께 내 삶을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마침내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한 가지를 배워 갔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 인간다워진다는 것, 하느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수록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 사랑할수록 더 많이 내어주게 된다는 것, 내어줄수록 더 많이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자유로워질수록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울려 퍼지게 된다는 것.
그때 비로소 한 사람의 생애는 한 편의 기도가 됩니다. 한 사람의 침묵은 복음이 되고, 한 사람의 미소는 성체가 되며, 한 사람의 눈물은 세상을 적시는 축복이 되고, 그의 존재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숨결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하여 오늘도 조용히 세상을 사랑하시며, 상처 입은 형제들의 얼굴을 어루만지시고, 가난한 이들의 손을 붙드시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끝없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당신이 나의 전부가 되실 때, 비로소 나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관계였습니다. 하느님과 나, 너와 나, 그리고 피조물과 나 사이에서 창조 때부터 시작된 나를 보았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