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洪直弼 1776 1852 洪兢弼 南陽 伯應, 伯臨 梅山, 鷺湖 文敬 박윤원(朴胤源)의 문인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하에서 수학한 전병순(田秉淳)·조병덕(趙秉悳)·한운성(韓運聖)·임헌회(任憲晦)·소휘면(蘇輝冕)이 매문오현(梅門五賢)으로 일컬어졌다.
매산집(梅山集) 홍직필(洪直弼)생년1776년(영조 52)몰년1852년(철종 3)자백응(伯應)호매산(梅山)본관남양(南陽)초명긍필(兢弼)초자백림(伯臨)시호문경(文敬)
정조 22 1798 무오 嘉慶 3 23 3월, 東村에 가서 中洲 李直輔를 뵙다. ○ 4월, 仲父 洪鼎簡, 季父 洪濟簡, 외숙 박성한과 盤松池에서 蓮을 감상하다. ○ 7월, 祖父(洪善養)喪을 당하다. ○ 11월, 楊州의 冰巖에서 從弟 洪翼弼과 「中庸」을 읽다.
헌종 15 1849 기유 道光 29 74 8월, 헌종이 승하하자 輓章製述官이 되다.
梅山先生文集卷之十六 / 書 / 答鄭五而 在箕○己酉二月
殘局破敗。戛戛乎下手。不待盛諭。而稔識其眞境實際。以鄙家之桐鄕也。嶺左山水海東鄒魯八字。卽先王考手筆。而鐫揭官門。尙保有其舊否。每誦雷淵詩南來不唾陶山石。爲是前修絃誦邦。叵耐興慕也。可能興行儒化。克紹文獻先生安陰徽躅。丕闡退溪老子玩樂餘敎否。敎化風俗。卽爲治之第一義諦。餘人尙云乃爾。况座下乎。幸益慥慥於振民育德。壹遵程張二子晉城雲巖成法。如何如何。晦翁詩若知赤子元無罪。合有人間父母心一句。爲座下誦之。
매산집 제16권 / 서(書) / 정오이재기 에게 답함 기유년(1849, 헌종15) 2월〔答鄭五而 在箕○己酉二月〕
*정재기(鄭在箕, 1811~1879) 본관 하동(河東), 자 오이(五而), 호 개은(介隱)
쇠잔한 시국이 파탄 나서 손을 쓰기가 몹시 어려움은 좌하께서 말씀하지 않아도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으니, 이는 그곳이 저희 집안의 동향(桐鄕)이기 때문입니다. ‘영좌의 산수는 해동의 추로이다.〔嶺左山水海東鄒魯〕’라는 여덟 글자는 바로 좌하의 조고께서 손수 쓰신 글씨로서 판에 새겨 관아의 문에 걸어 둔 것인데, 아직까지 옛날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지요?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의 시에 “남쪽에 내려와 도산의 돌에 침을 뱉지 못함은 선현께서 거문고 타고 글을 외던 고장이기 때문이라네.〔南來不唾陶山石爲是前修絃誦邦〕”라고 하였는데, 이를 욀 때마다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유학의 교화를 일으켜서 문헌(文獻) 선생이 안음(安陰)에서 행하신 훌륭한 자취를 능히 계승하고 퇴계(退溪) 노선생이 완미하고 즐거워하신 남은 가르침을 밝게 천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풍속을 교화함은 바로 다스림을 펴는 첫 번째 의리이니, 다른 사람들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좌하는 어떠하겠습니까. 부디 백성을 진작시키고 덕을 기르는 일에 더욱 부지런히 힘써서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장자(張子) 두 분이 진성(晉城)과 운암(雲巖)에서 이루어 놓은 법을 따르시기를 바라오니, 이렇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시에 “만약 적자에게 본래 죄가 없음을 안다면 응당 인간의 부모 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네.〔若知赤子元無罪合有人間父母心〕”라고 하였는데, 이 한 구절을 좌하를 위하여 읊어 드립니다.
[주-D001] 정오이(鄭五而) : 정재기(鄭在箕, 1811~1879)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오이, 호는 개은(介隱)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池谷面) 출신이며,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13대 종손이다. 1848년(헌종14) 6월에 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어 1850년(철종1)까지 봉직하였고, 그 밖에 문의 현령(文義縣令), 함평 현감(咸平縣監), 서산 군수(瑞山郡守), 은산 현감(殷山縣監) 등을 지냈다. 저서로 시문집인 《개은유고(介隱遺稿)》가 있다.[주-D002] 동향(桐鄕) :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고을의 지명으로, 흔히 선대의 조상이 다스리던 고을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한(漢)나라 때 주읍(朱邑)이 동향의 색부(嗇夫)가 되어 이곳을 매우 잘 다스렸는데, 뒤에 그가 죽자 그의 아들이 이곳에 장사 지냈더니 이곳 백성들이 모두 그를 사모하여 사당을 지어서 그를 제사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주-D003] 영좌의 …… 추로이다〔嶺左山水海東鄒魯〕 : 영좌(嶺左)는 영남좌도, 곧 경상북도를 이른다. 추로(鄒魯)는 유학(儒學)이나 문교(文敎)가 흥성한 곳을 뜻하는 말로, 맹자(孟子)가 추(鄒)나라에서 태어나고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데에서 유래하였다.[주-D004] 남쪽에 …… 때문이라네〔南來不唾陶山石爲是前修絃誦邦〕 : 이 시구는 남유용(南有容)의 문집인 《뇌연집(雷淵集)》 권6 〈입도산(入陶山)〉에 보인다.[주-D005] 문헌(文獻) …… 자취 : 문헌은 정재기(鄭在箕)의 13대조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ㆍ수옹(睡翁), 시호는 문헌이다. 정여창은 1495년(연산군1)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올렸으며 이를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져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주-D006] 정자(程子)와 …… 법 : 정자는 정호(程顥), 장자(張子)는 장재(張載)로, 두 사람이 각각 진성 영(晉城令)과 운암 영(雲巖令)이 되어 선정을 폈던 것을 말한다. 정호는 진성 영이 되었을 때에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가르쳐 부역에 서로 협조하게 하고 환난에 서로 구휼하게 하였다. 또 시골에 향교를 설치하여 문풍(文風)을 일으켜서 부임한 지 10여 년 만에 교화가 크게 행해져 유복(儒服)을 입은 자가 수백 명에 달하게 만들었다. 《二程全書 卷11 明道先生行狀》 장재는 운암 영이 되었을 때에 정사에 있어서 근본을 두터이 하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으며, 매월 초하루에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마을 사람 중 나이가 많은 이들을 불러 직접 술을 따라 주어 사람들이 노인을 봉양하고 어른을 섬기는 의리를 알 수 있게 하였다. 또 이 자리를 통해 백성들의 고충을 물어 보았으며 아울러 자제들을 훈계하는 뜻을 말하였다. 《宋史 卷427 張載列傳》[주-D007] 만약 …… 것이네〔若知赤子元無罪合有人間父母心〕 : 이 시구는 주희(朱熹)의 〈삼목장간(杉木长涧)〉 시에 보인다. 《朱子大全 卷10 杉木长涧》 적자(赤子)는 백성을 비유해 말한 것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역) | 2016
....................
여덟 글자는 바로 좌하의 조고께서 손수 쓰신 글씨로서 판에 새겨 관아의 문에 걸어 둔 것인데->여덟 글자는 바로 저희 조고께서 손수 쓰신 글씨로서 판에 새겨 관아의 문에 걸어 둔 것인데
*선왕고는 매산 홍직필의 조부이다. 정재기의 조고가 아니다. 홍직필의 조부 洪善養은 예안 현감(禮安縣監)을 지냈고 정재기(鄭在箕)가 예안현감일 때(기유년) 홍직필이 편지 보낸 것이다.
....................
宋煥箕 1728 1807 恩津 子東 性潭, 心齋 文敬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
朴胤源 1734 1799 潘南 永叔 近齋 文獻 김원행(金元行)의 문인
洪直弼 1776 1852 洪兢弼 南陽 伯應, 伯臨 梅山, 鷺湖 文敬 박윤원(朴胤源)의 문인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하에서 수학한 전병순(田秉淳)·조병덕(趙秉悳)·한운성(韓運聖)·임헌회(任憲晦)·소휘면(蘇輝冕)이 매문오현(梅門五賢)으로 일컬어졌다.
부계정사(扶溪精舍) - 함양 문화유산
부계 전병순이 강학하던곳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부전동에 있다.
전병순(田秉淳)은 성리학자로 고종 6년 기사년에
부전암(扶田菴) 옛터에 스승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명명해준 부계정사(扶溪精舍-서상면 옥산리 부전동 현존)를 건립, 부계집.
부계(扶溪) 전병순(田秉淳 1816-1890)
숙재(肅齋) 조병덕(趙秉悳 1800-1870),
입헌(立軒) 한운성(韓運聖 1802-18620,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1811-1876),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 1814-1889)
함께 매문오현(梅門五賢) 으로 일컬어졌다. 전병순(田秉淳)의 아우 율리(栗里) 전시순(田蓍淳)도 홍직필의 문인이다. 조병덕의 문인 사근당(四近堂) 전상묵(田相默)도 서상면 옥상리 출신이다.
저서에 부계집(扶溪集) 9권 5책, 편서에 삼은합고(三隱合稿) 4권 2책이 있다.
田相默 潭陽人字致淵號四近堂幼有異質早師文敬公肅齋趙秉悳許以吾道之南賜號四近堂幷爲之序天性純至事親之道葬祭之義一遵古禮不踰繩尺優得師門之的傳與族叔扶溪秉淳栗里田蓍淳講劘道義趙肅齋文集親自校正不事科業築室於楸溪上自號四近題屛曰卽閉門閉口閉耳閉目也鼓山任憲晦爲序其屛極共贊述有文集<安義邑誌 [誌] 文行>
간재집(艮齋集) 전우(田愚)생년1841년(헌종 7)몰년1922년자자명(子明)호간재(艮齋), 외암(畏菴), 구산(臼山), 추담(秋潭), 수현(守玄), 고옹(蠱翁), 양하왕인(陽下尫人)본관담양(潭陽)초명경륜(慶倫)소자천추(千秋) 임헌회(任憲晦)의 문인.
鄭煥輔 號復齋蔭東老子,蔭以孝憲宗壬寅命旌<咸陽郡誌 [誌] 孝行>
정재기(鄭在箕, 1811,순조11~1879,고종16) 본관 하동(河東), 자 오이(五而), 호 개은(介隱)
....................
3 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좌병영계록(慶尙左兵營啓錄)○헌종(憲宗) 헌종(憲宗) 15년(1849) 3월 11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2012~2017
기(趙秉錡), 신녕 현감(新寧縣監) 신석필(申錫弼), 예안 현감(禮安縣監) 정재기(鄭在箕), 봉화 현감(奉化縣監) 최호문(崔虎文) 등 13개 읍은 규례대로 거행하여 군오(軍伍)의 연습(鍊習)을 일체 정식(定式)에 따르고 전마(戰馬)의 이미지
4 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좌병영계록(慶尙左兵營啓錄)○철종(哲宗) 철종(哲宗) 원년(1850) 10월 11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2012~2017
감(靈山縣監) 조병기(趙秉錡), 신녕 현감(新寧縣監) 최영석(崔永錫), 군위(軍威) 겸임 비안 현감(比安縣監) 이상종(李象宗), 예안 현감(禮安縣監) 정재기(鄭在箕), 봉화 현감(奉化縣監) 김우수(金禹銖), 기장 현감(機張縣監) 김정 이미지
5 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좌병영계록(慶尙左兵營啓錄)○철종(哲宗) 철종(哲宗) 2년(1851) 3월 11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2012~2017
) 변한규(邊漢圭), 현풍 현감(玄風縣監) 심교진(沈敎鎭), 군위(軍威) 겸임 비안 현감(比安縣監) 이상종(李象宗), 예안 현감(禮安縣監) 정재기(鄭在箕), 봉화 현감(奉化縣監) 김우수(金禹銖), 기장 현감(機張縣監) 김정묵(金鼎默) 이미지
..................
정원호 교남지嶠南誌
禮安
郡名 買谷 善谷 宣城 禮安
官員 縣監 文蔭從六品 訓導 名一人
公廨 客館 近民堂 內東軒 一眺軒 外東軒一名製錦軒 鄕射堂軍官廳將官廳人吏廳斥邪碑閣別砲手廳軍器庫 在客館東 石氷庫 在郡東一里縣監李梅臣所築
官案(朝鮮)
卞壅 太祖朝 鄭肖成路蔡顥李文命 定宗朝 權踐吳淑 太宗朝 尹興義成揜成守良朴原禮高士原羅尙久朴好生姜友德鄭介保庾珚閔好禮曺範 世宗朝 李永茂朴潔鄭斯仁趙夏宋繼適 愼言崔士老丁續宗權倦文汝衡趙增 文廟 鄭係權景行 廟端 崔資 世祖朝 曺變興安億壽鄭孝恭崔漢伯盧敬信許斯孝 睿廟 金貴知 成廟 李持韓伋李義根李管林金銓 民立生祠 盧允釐 燕山朝 裵季厚李陲劉永貞 中廟 韓休洪義孫金濬崔決申樽趙守忠安範鄭公徵洪胤昌郭瑋朴仁範金自湖金守雍金世憲任鼐臣 仁宗朝 趙應卿 明廟 李秀枝李鳳壽 柳輬魚叔義梁成海郭趪 爲置
易東書院學田又出官店良賤以(屬宣)廟 鄭惟一孫英濟柳夢鼎羅藎國李俊宗李軸金夢熊高應陟郭瑾鄭士信鄭應台申之悌 金廷龍金就義崔光弼安旭曺次碩鄭浹安聃壽朴善良 光海朝 金自漢朴▼(王+旱)鄭文振李繼祉李寬李德溥金精厚 仁祖朝 楊時遇金寧高仁繼金▼(王+晋)羅茂松洪錫禹琴尙鉉金養誠南碝朴景元金景厚李慶恒
梁榞
孫必大黃立信金光宇 孝廟 洪宇遠鄭維地韓得一權碖姜好奭鄭東燁 顯廟 申瑠李碩寬韓聖輔李斗光申厚載李世基 肅廟 李泰夏趙持憲李材吉閔處重李明鎭李有老金兌昌李東馣黃潤河許源南壽明尹遇明李涵金聖游朴鶴齡宋徵奎朴弼莘 朴聖諿 景廟 李德淳 英祖朝 沈宗賢呂命周韓德弼李弘佐宋堯輔李梅臣 築石氷庫 朴師漢朴民秀金光遂金致溫朴處厚趙祉命南公弼宋煥世宋在淵 李沇
洪善養
李宅源 正廟 尹欽烈申光鼎韓光傳任璸徐有器宋耕玉金履銈尹瑩朴獻源洪樂敎李永夏金直行 純祖朝 李永耆洪萬源鄭烈南履遇黃▼(道/木)鄭在誠徐謙淳崔養重沈鐛沈弘模金仁淳沈興鎭李㯙金履鍾金宜淳 憲廟 宋端和申錫龜鄭翼烈
鄭在箕
哲廟 黃銑權宅夏柳祈睦李有謙 高廟 金禹銖李顯儀鄭基魯洪在錫 尹致能金秀升李徽應南德熙李鶴淵成鍾永 禹成圭崔鳳煥趙奭永宋萬燮洪亮燮林時益趙元植柳寅睦李應稙安世中李憲榮 光武 南廷弼李鍾魯張德根曺奉承趙珪熙柳浩榮李康準李敬善錢澤洗尹瑛燮尹弼五 甲寅移管安東郡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 예안현(禮安縣)
동으로 영해부(寧海府) 경계까지 41리, 남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12리, 서로 영천군(榮川郡) 경계까지 39리, 북으로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 41리, 경도(京都)와의 거리는 5백 4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매곡현(買谷縣)이다. 신라 때에 선곡(善谷)으로 고치고, 내령군(奈靈郡)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때에 성주(城主) 이능선(李能宣)이 거의(擧義)하여 귀순(歸順)하였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길주(吉州)에 붙였으며 신우(辛禑)가 그 태(胎)를 현지(縣地)에 간직하였다 하여 다시 군으로 하다가 얼마 후에 주(州)로 승격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 와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매곡ㆍ선곡ㆍ선성(宣城).
【성씨】 본현 김(金)ㆍ이(李)ㆍ우(禹)ㆍ조(趙)ㆍ안(安)ㆍ권(權)ㆍ강(姜)ㆍ박(朴)ㆍ정(鄭)ㆍ최(崔)ㆍ가(賈). 의인(宜仁) 김.
【풍속】 풍속은 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보인다. 지역은 편소(偏小)하고 토질이 박(薄)하다 김효정(金孝貞)의 동루시(東樓詩)에 있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녹전산(祿轉山) 현 서쪽 20리에 있다. 요성산(邀聖山) 현 북쪽 18리에 있다. 장갈현(長葛峴) 현 동쪽 30리에 있는데, 영해부(寧海府) 청기현(靑杞縣)의 경계이다. 영지산(靈芝山) 현 북쪽 5리에 있다. 용두산(龍頭山) 현 북쪽 22리에 있다. ○ 최선(崔詵)의 용수사(龍壽寺) 기에, “태백산(太白山) 남쪽으로 3백여 리를 높았다 낮았다 하여 우뚝하게 빠져 나온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용두산인데 실로 영가군(永嘉郡)이 이 산을 짊어지고 도시가 된 것이다.” 하였다. 비암(鼻巖)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위에 5ㆍ60명이 앉을 만하다. 앞으로 큰 시내에 임하여 고을 사람들의 유상(遊賞)하는 곳이다. 조산수(造山藪) 부진(浮津) 남쪽 언덕에 있다. 나화석천(羅火石川) 현 동쪽 28리에 있다. 곧 봉화현(奉化縣) 매토천(買吐川) 하류이다. 손량천(損良川) 현 동쪽 5리에 있다. 곧 나화석천 하류인데, 현 남쪽 1리에 이르러서는 부진(浮津)이 되고, 남으로 흘러 안동부에 이르러서 견항진(犬項津)이 된다. 부진(浮津) 현 남쪽 1리에 있는데, 곧 나화석천 하류이다. 안동부에 이르러서는 요촌탄(蓼村灘)이 된다.
『신증』 월명담(月明潭) 현 동쪽 25리에 있다.
【토산】 인삼(人蔘)ㆍ꿀[蜂蜜]ㆍ지치[紫草]ㆍ송이[松蕈]ㆍ은어[銀口魚]ㆍ철(鐵) 현 동쪽 상리(上里)에서 난다. 오미자(五味子)ㆍ석이버섯[石蕈]ㆍ잣[海松子]ㆍ옷[漆]ㆍ백복령(白茯苓)ㆍ설면(雪綿).
【성곽】 북산성(北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1백 49척, 높이 4척이며,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녹전산(祿轉山) 봉수 남으로 안동부 개목산(開目山)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봉화현 용점산(龍岾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추흥정(秋興亭) 객관 동쪽에 있다. 홍희(洪熙) 원년에 현감 박결(朴潔)이 세웠고, 관찰사(觀察使) 하연(河演)이 이름 짓고 기(記)를 썼다. ○ 은여림(殷汝霖)의 시에, “비단 펼친 듯 네 창문엔 산빛이 가깝고, 유리 깔아 놓은 듯 한 지역엔 물빛이 깊구나.” 하였다. 동루(東樓) 현 동쪽에 있다.『신증』 쌍벽루(雙碧樓) 부진 언덕 위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선안역(宣安驛) 현 남쪽 3리에 있다. 대사원(大寺院) 현 서쪽 1리에 있다. 장원(場院) 현 동쪽 28리에 있다.
【불우】 용수사(龍壽寺) 용두산(龍頭山) 남쪽에 있다. 고려 때의 중 성원(誠源)이 처음 지었으며, 의종(毅宗)이 중 석윤(釋胤)을 위하여 고쳐 짓고, 용수사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최선(崔詵)에게 명하여 기를 짓게 하였다. 『신증』 이우(李堣)의 시에, “절 서쪽 10리 못 되는 곳, 소나무ㆍ전나무 빽빽하게 들어섰다. 산과 시내는 온갖 풍파 다 겪은 후, 쓸쓸한 옛 절만 남았구나. 선경(禪扃)엔 구름 연기 자욱하고, 음침한 골짜기에는 도깨비들이 울부짓는데, 문을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무무(貿貿)한 중 서넛뿐일세. 비바람에 시달리다 남은 긴 집[長齋]은, 반절이나 불에 타 없어지고, 빈 뜰에 섰는 탑은 층계가 희미한데, 금부처[金粟]의 빛깔 초췌(憔悴)하다. 무너진 담장엔 등 갈 엉켰고, 그림 벽엔 거미줄만 늘어졌는데, 소조(蕭條)한 물색(物色) 너무 많아, 일찍이 놀던 곳이 아닌 듯하다. 광려산(匡廬山) 글 읽던 곳에,별안간 광무(廣武)의 눈물을 뿌리네. 상교(象敎 불상 모시는 교) 쇠함을 알 수 있으니, 천 년 만에 성인 다스림 만났다. 우리 도가 하늘 가운데 행하여지니, 사교[陰霾]는 스스로 물러났다. 중의 옷이 갓과 망건이 되고, 징과 바리때는 쟁기로 화하는구나. 마침내 법당[金仙宮]터 변하여, 민간의 전리(田里)로 만들게 하네. 환히 빛나는 주 나라 공자(孔子)의 법, 만고에 사람 기강 붙든다.” 하였다. 성천사(聖泉寺) 요성산(邀聖山)에 있다. 골내사(骨乃寺) 영지산(靈芝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산성 안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의인폐현(宜仁廢縣) 현 동쪽 9리에 있다. 본래 안덕현(安德縣)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었는데,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현으로 승격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안동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때에 예안에 예속시켰다. 대왕수(大王藪) 최선(崔詵)의 용수사(龍壽寺) 기에, “용두산의 남쪽에 동네가 있고, 동네 어귀에 숲이 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대왕수라고 칭한다. 대개 우리 태조께서 경계를 순시하니 남쪽 지방에 이르러 여기서 군대를 주둔하고 3일 후에 떠났는데, 지금 그 땅에 높은 나무, 뭇 풀들이 많아도 나무꾼 풀베기꾼들이 감히 가까이 들어가지 못하니 용[神物]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하였다.
【명환】 본조 성엄(成揜) 현감이 되었다.
『신증』 김전(金詮) 성종(成宗)이 유신(儒臣)들을 각 도의 피폐한 고을로 나누어 부임하도록 명하였는데, 김전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서 나가 현감이 되어 청렴 간결하게 정치를 하니,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산 사람의 사당을 세웠다.
【우거】 고려 우탁(禹倬) 옛날 살던 곳이 비암(鼻巖) 남쪽 2리에 있다. 단양군(丹陽郡) 인물조에 자세하다.
【효자】 고려 황재(黃載) 지인(知印)으로서 서울에서 벼슬하는데, 꿈에 그 어머니가 병환이 난 것을 보고 곧 사직하고 하루 만에 이르니, 어머니가 과연 병이 계신지라 목놓아 울면서 시약(侍藥)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3년을 여묘(廬墓)살이하였다. 홍무(洪武) 신사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세(賦稅)를 면해 주었다.본조 우석보(禹錫寶) 어버이를 위하여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성종 12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연계일로종산전(緣溪一路從山轉)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시내 따라 한 길이 산으로 돌고, 골짜기에 가득한 숲에 은은한 안개가 깊구나.” 하였다. 안전산수불수병(眼前山水不須屛) 김보륜(金輔輪)의 시에, “멀리 바라보면 어렴풋하나 가까이선 도리어 밝고, 눈앞에 산과 강 있으니 병풍은 필요하지 않네.” 하였다. 수복산중노굴반(水複山重路屈盤) 서거정의 시에, “물 겹겹 산 첩첩 길은 구불구불 한데, 풀풀 나는 단풍잎은 가는 말을 보내네. 다른 날 예전에 놀던 곳 내가 기억할 건가, 명구(名區)를 지나가면서 자세히 보노라.” 하였다. 협절분천수지진(峽折犇泉隨地盡) 전인(前人)의 시에, “골짜기가 끊어졌으니 급히 흐르는 샘물은 땅에 떨어져 다하고, 산은 여러 봉우리를 벌였으니 하늘을 찌를 듯하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으로 10리이다. 서면(西面) 처음 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북면(北面) 서북쪽으로 처음은 8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동상(東上)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동하(東下)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의서(宜西)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의동(宜東)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성지】 의인고현성(宜仁古縣城) 고현의 남쪽에 있으며 흙으로 쌓은 유지(遺址)가 있다.
【누정】 망미루(望美樓)ㆍ관심정(寬心亭)
【사원】 역동서원(易東書院) 선조(宣祖) 무신년에 건립하고, 숙종 갑자년에 사액하였다. 우탁(禹倬) 단양(丹陽) 조에 있다. 박충좌(朴忠佐) 고려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 도산서원(陶山書院) 선조 갑술년에 건립하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이황 문묘 조에 있다. 조목(趙穆) 예천(醴泉) 조에 있다.
【창고】 고려 신우(辛禑) 8년에 왜적이 예안(禮安)을 노략질하였다. 9년에 부원수(副元帥) 윤가관(尹可觀)이 왜적을 맞아 예안(禮安)에서 싸워 대패하였으며, 전의부령(典儀副令) 우하(禹夏)는 왜적과 예안에서 싸워 적의 머리 여덟을 베었다.
...................
매산집 제1권 / 시(詩) / 빙려에서 감회가 있어 두 수〔冰廬有感 二首〕
우리 조부께서 벼슬을 사양하시고 / 吾祖謝簪笏
만년에 금화산(金華山) 서쪽에 거주하셨네 / 晩家金華西
손자가 때때로 홀로 찾아오니 / 兒孫時獨至
창 사이에 쓰신 글이 눈물에 젖노라 / 淚濕窓間題
숲 골짜기 길이 남아 있는데 / 林壑雖長在
남여는 어찌하여 돌아오지 않는가 / 籃輿奈不回
서글퍼하며 지팡이 꽂아 놓으시던 길에 / 傷心植杖路
마른 풀은 다시 싹을 틔우네 / 枯草復生荄
[주-D001] 우리 조부 : 홍선양(洪善養, 1727~1798)으로 자는 사호(士浩)이다. 1754년(영조30)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장의(掌議)로 있으면서 상소하여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을 변호하는 자들을 배척하였다. 1765년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고 벼슬이 청주 목사에 이르렀다. 본집 권44에 홍직필이 지은 묘지(墓誌)가 실려 있다.[주-D002] 금화산(金華山) : 지금의 서대문구 일대에 있는 안산(鞍山)의 지맥이다. 홍선양은 벼슬에서 물러나, 지금의 남창동ㆍ서소문동ㆍ태평로ㆍ남대문로 일대인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에 집을 짓고 거주하다가 별세하였는바, 바로 금화산의 서쪽이 된다. 《梅山集 卷44 祖考牧使贈吏曹參判府君墓誌》[주-D003] 남여(藍輿) : 앞뒤를 각각 두 사람이 어깨에 메는 뚜껑이 없는 작은 가마로, 주로 좁은 길이나 산길을 갈 때 이용되었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성백효 (역) | 2016
.......................
.......................
梅山先生文集卷之四十四 / 墓誌銘 / 祖考牧使贈吏曹參判府君墓誌
漣川縣東十里玄溪之上淸華山下。有吾家六世昭穆之葬。祖考府君衣履。三遷而從先兆。用遂骨肉同聚之素願焉。府君諱善養字士浩。我洪出自中國。唐宣宗遣八學士敎國人。洪氏乃其一也。家南陽而籍焉。以高麗太師諱殷悅爲鼻祖。曾孫諱澓禮史。累傳至諱由道。隨恭愍王燕邸錄勳。密直司事。有孫諱溟。入本朝判漢城府尹。理京兆。卜宅于崇敎坊。子孫世居焉。生莊襄公諱師錫。有文武全才。受獻陵顧命。歷二世有諱以平司成。以經術德行。與戊午諸贒幷稱二十八宿。生諱德潤宗廟署令。兩世幷贈吏曹判書。生諱仁恕戶曹判書。壬辰扈駕。卒于龍灣。辭錄勳。爲穆陵名臣。卽府君六世祖也。生諱邁洪州牧使。生諱汝龜。丙丁後秉義自靖。世稱大明處士。長子諱泰元通德郞。次子諱泰亨生員。通德公妙齡殉孝旌閭。取生員公子諱重埰爲嗣。亦弱冠而歿。贈司僕寺正。生諱尙彦三登縣令。贈左贊成。配順天金氏。通德郞載重女。左議政承霔其先祖也。英宗三年丁未。擧公于漢師里第。甲戌增廣中生員試。姻親有將任送樂助歡。府君辭曰小成不過一時悅親。而親在任所。何用張樂。屢掌太學議。䟽論羣小營救辛壬餘孼之罪。由是積被一邊人齮齕。屢入寢郞望未蒙點。亦由此故云。癸未丁外艱。乙酉授康陵參奉。例調繕工監副奉事尙瑞院直長。以微眚見罷。旋除司饔院直長。陞尙衣院主簿。轉義禁府都事,掌樂院主簿。遷刑曹佐郞。決訟公明。判堂沈公鏽頌府君干籌座曰。洪某聰明端詳。靡適不宜。必當大闡。非久於郞潛者云。時有親鞫。上命秋曹入。府君以刑房郞。替行問郞事。周旋敏速。奏對明暢。上稱善不休。
壬辰拜禮安縣監。治尙愷悌。上下孚感。大繕公廨。不勞一民。民不知有役。
丙申丁內艱于任所。
服闋除司䆃寺主簿,儀賓府都事,貞陵令,廣興倉守。
甲辰除宜寧縣監。宜處嶺陬。邑鉅俗頑。公治以治禮之法而尙嚴。値歲大侵。撫綏安接。雅言荒歲之民。莫尙於不擾。不擾莫尙於不責納。設賑末務也。公賦外納官者幷許蠲免。按使問公私賑便否。府君曰公賑卽是正道。私賑辦穀。終涉料販。只知有公賑。不知有私賑也。按使靳持。府君不報。營蓄官廩衙眷。計口而食。餘皆入賑資。又以準直預貿各營耗糓及邸價糓。多般拮据。濟活累千人。時飢民多染癘。府君每冒危難臨賑。子弟諫不聽。其爲民國不自恤如此。繡衣道伯俱啓善賑狀。準職有命。邑人攻石頌惠。
丁未陞載寧郡守。郡坪多宮庄。鄕俗好干囑。府君用一切法。靡所撓改。境有唐灘。舟楫通于箕城。民咸願立市。證期設塲。與鳳山之銀坡接壤。鳳民富饒者以兩市幷日。慮欠專利。沮毁乃已。按使入其說。至遣幕裨於唐灘。揮旗罷市。府君以去就爭之。按使知不可奪。寢罷市之擧。唐灘成大市。爲載民無量之惠。邑多富戶。有稱廵營幕屬。嚇以索賂。蕩產者甚多。府君嚴法峻繩。推尋賂錢。民戶賴以安業。繡衣啓聞其狀。庚戌陞黃州牧使。時有以守令乘屋轎。臺言申禁。朝家令諸道俾之首實。府君未曾乘有屋。而嫌分疎控實。敎曰某是戚姻也。當用加倍之律。特罷其職。他倅之倖免者。媿恧不已。咸以此韙府君。辛亥拜淸州牧使。周歲而遞。癸丑辟壯勇營從事官。營以宿衛重地。將郞極一時之選。府君管營金糓。侍帳殿考試。兢惕靡懈。移尙衣院僉正。又辟爲宣惠郞。戊午七月十四日。終于養生坊第正寢。壽七十二。孝懿聖母致賻。又下襚衣。遣姪宗善爲文侑祭。哀榮俱備。九月祔葬于玄溪。己未遷于仁聖洞。又遷于北面馬渴里。又遷于玄溪乾坐。府君性於孝。以兩世獨身。被父母鍾愛。而克修子職。雖囊篋細瑣。靡不躳檢。贊成公戒其服勞致疾。而不少自逸。金夫人夙嬰貞疾。府君晝夜侍側。視其被服厚薄。食品硬軟。罔不調適。尋醫問藥。靡極不至。雖以術而亢者。孚感自來。切脈論證。親執刀圭。不許人替。曆錄形證差劇。匙箸多少。日較月比。用驗衰旺分數。若是者五十年。
奉板輿于禮安任所。孝養備至。親心每眷戀親懿。則獻以廩俸。資其所施與。其先意承順如此。癠候漸革。每抃手祝天。掌爲之血。及喪毁瘠幾滅性。金夫人氣貌凜若不保朝夕。而享壽八耋。咸謂府君純孝攸致云。
蚤治博士業。聲譽播著。皆期以大闡。而積歲侍湯。靡遑進取。親沒而廢擧。掌銓者聞府君年至筮仕。欲擬齋郞。府君讓與尊行。銓長贒之。移其擬于尊行。人皆感服。歷官內外。不求赫譽。而咸有遺愛。處上官僚寀。務盡和敬。而有所挾者則不少撓屈。亦不苟同。有內懷不悅者。而亦不屑也。罕交遊愼言語。朋知間相爾汝者絶少。常病世俗握手附耳之狀。戒子孫曰末路友道先喪。而今人交際。專事狎昵。其可乎。褻語慢辭。未或發口。故久而益敬。城府坦蕩。和氣滿容。言笑溫潤。接人無賤貴親踈之殊焉。族戚告貧。靡所慳。無有乃已。庀其昬喪。殫盡事力。屢典州郡。閽無阻禁。竆者如歸家。而虛心款接。罔不醉德而服義。性愛閒靜。晩歲以書畫花竹自誤。杖屨園亭。悠然有出塵之趣。人物雌黃。時政得失。未或掛齒。盖以地近戚畹。而尤自謹約也。平生不通關節。忘懷得喪。聞人奔走權門。苞苴鑽刺。若將凂焉。見俗吏以損下益上自衒者。痛斥不已。嚴於辭受。苟涉非理。絲髮不取。切姻有管金穀甲兵十數年。而一赫蹄不及。其人歎府君淸操。非今世所有云。府君雅言干囑求乞。非士夫事。於此不嚴。餘無足觀。非公幹不出戶庭。蚤起盥櫛衣冠。竟日端坐。几案書帙。咸有位置。堂室軒窓。不留纖塵。作字齊整。好戲翰墨。亦無潦草。可驗心力精密也。敎子孫雖微過。不少寬假。不許以褻服見。不令閒漫追逐。長胤典數邑。始欲就養。因歲儉不肯往。敎曰吾家食。不使汝憂。餼廩盡付賑資。濟活饑氓。斯爲報國恩承父志之道。幷朔例饌羞而不許送致焉。可見其踐述之眞正也。配平山申氏。通德郞錥之女。判書思簡公浩其先祖也。先府君三年生。先府君四十九年卒。始葬玄溪先塋局內未坐。後遷祔于府君墓右。孝順慈謙。有女士風。无育。繼配全州李氏。通德郞鐸之女。世宗別子翼峴君璉其先祖也。生後府君六年。卒先府君十三年。淸明樂愷。閫範咸備。祔葬于府君墓左。擧三男三女。長履簡同敦寧贈吏曹判書。次鼎簡縣監。次濟簡通德郞。女適金載象進士沈能基完城君燧。判書男直弼。謬蒙旌招。躋上卿不敢起。女適縣監金泰根,尹約烈。庶子若弼前主簿。庶女適武科李敬愚。縣監男翼弼縣令。庶子奭弼營將。通德男允弼。金載象男鏽,。二女參判鄭漪,申錫久。直弼系子一純前縣令。女進士閔慶鎬。翼弼系子一貞。女沈興澤。庶女徐康輔。奭弼男一寧,一成。女宋載純,李甲愚主簿,沈能恂。允弼系子一曾。一純系子㝡秀。餘不錄。府君德性渾厚。氣象寬綽。篤於天倫。確乎素履。奉親祭先則先質而後文。接人御物則誠中而發外。才美內蘊而恥於自衒。進取有階而安於守分。其心以爲行己處事。寧拙無巧。寧約無夸。寧失於密。無失於踈。寧失於拘。無失於苟。考諸表裏。明白純粹。無不可對人言者。府君自號默窩。庶幾默而成之。存乎德行。小子何敢述焉。先考嘗詔不肖曰世無卓然可以不朽人者。無寧子孫自作之爲安。歷選幷時。知德者寥寥。於是體先考遺意。爲府君玄隧之誌。用備陵谷之易焉。
[주-D001] 誤 : 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