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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및 최후의 심판.
요한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이다. 이 세상 끝에 관한 일을 창조주께서 계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 밖에는 그 누구도 월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 계시가 임하였는가? 그것은 사도 요한에게 임하였다[계1:1].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비밀 계시의 권리를 주신 것이다[고전15:24~2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신임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비말을 맡기셨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으로 증거 되어 나타났고 그것이 사도 요한에게 보여 진 것이며, 그 계시록의 내용은 주님의 증거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계시를 받은 자가 사도인 만큼 계시의 사용방법과 용도의 효험은 온 교회의 공동 유익을 위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였다[계1:4].
여기 일곱 교회는 각 시대의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대의 일곱 가지 교회 형편을 보시는 것이다.
이 일곱 가지 형편은 모든 시대와 모든 지방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곱 수는 완전과 성결을 상징한다]
※ 일곱번 인봉한 책을 열다[계6:1~8:5]
그런데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를 보았다[계5:1].
힘이 있는 오른 손에 그 두루마리 책은 세계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및 그것을 하나님만이 세계의 장래를 아시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는 주재권을 표시하고 상징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시려는 그 오묘를 그의 교회에 알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일곱 인봉은 계시의 일곱 내막에 대한 엄중한 은익을 상징하는데 이 일곱 인의 내막이 계6장 이하에서 하나씩 열어서 가르쳐준다. 일곱 번 인봉한 그 책은 저 유력한 천사 자신에게도 알 수 없는 것으로 천사가 큰 음성으로 누가 그 두루마기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부르짖는 소리가 천상과 지상과 지하에 까지 미치었다[계5:2~3].
그러나 이처럼 천사의 부르는 큰 소리에 대하여 전 우주에는 한 마디 대답도 없으니 이는 할 수 없는 죄악 세상의 적막강산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것을 느끼는 자는 큰 소리로 울지 않을 수 없다.
전 인류의 죄와 자기의 죄를 통감하는 회개의 울음소리, 계시와 구원을 애원하는 소리, 이와 같은 울음소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들리는 귀한 소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보려는 간절한 심령을 가진 사도 요한은 그 두루마기를 펴거나 볼 수 있는 합당한 자가 없어서 계시가 중지될 것 같은 생각에 크게 울었다. 이 같은 요한의 곡성은 참으로 귀하고 위대하다.
우리도 요한과 같은 큰 울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육신과 고통을 위하여 울고, 자기의 재산의 손해를 위하여 울고, 자녀의 사망을 인하여 울고, 질병이나 환란을 운다.
그러나 이것은 사소한 울음이다.
요한은 계시책을 받거나 열기에 합당한 자가 나타나지 못함을 보고서 울었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황폐하고 적막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유구 무언한 온 인류의 참상에 대한 울음이다.
이는 우주와 세계를 위한 큰 울음이요, 인류의 죄를 위한 거룩한 울음이다.
진실로 세계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을 죄 있는 인간은 알 수가 없다.
또 다른 생물들도 알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의 자격을 가진 자는 천사들 중에도 없다.
그런데 이 자격을 가진 자를 계5:5절이 잘 알려준다. 야곱은 일찍이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나실 것을 예언하여 말하였다[창49:9~10].
이 예언이 성취되어 과연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히7:14].
다윗의 왕통이 오랫동안 끊어졌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계승된 것이다[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승리하시고 구속사업을 성취하신 것이다[골2:14~15].
그 승리는 사단과 죄의 권세와 사망과 세상을 이긴 것이다[눅10:18, 요14:30, 계1:18].
이와 같은 승리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만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가 되시며 하나님의 비밀을 그의 택한 백성에게 계시하고, 또 계시대로 구원을 완성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히7:26~28].
이처럼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는 천지 만물 중 하나라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일은 천지 만물을 구속하시며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즐거워할 일은 우리에게 계시자 곧, 구세주가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 하자.
우리에게 기도가 없는 때에는 악취가 가득한 사람이 되고 만다.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자,
이제 어린양 예수님께서 그 받으신 일곱 번 인봉한 계시를 열어 보이시는 광경을 살펴보자[계6:1~8:5].
인[印]이란 인장이나 도장을 말하는데 이것은 개인이나 단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특정 재료에 이름이나 문자 혹은 도안을 새겨 놓은 것으로 편지나 문서의 진정성과 권위를 나타내는 표시로, 혹은 계약시의 상호 약속의 증표로, 또는 권세와 위엄을 확인하고 상대방에 대한 신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또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봉인 때, 문을 잠글 때, 자신의 권리 곧 소유권을 나타내는 공식적인 표로 사용되었다.
성경에서는 인이 지닌 비유적 상징적 의미가 하나님의 인정과 보증, 절대적인 소유권, 확증, 막강하고 완전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표현이다[엡1:14, 계7:2~4].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그 일곱 인봉을 열 때에 나타난 광경은 해석하는 일이 어렵다.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정당하고 유력하다는 해석은 아래와 같다.
“인을 뗄 때에 나타나는 광경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는 섭리적 사건들의 전개로 보았다”
흰 말을 탄 이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상징인데, 실로 복음은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심판인 것이다[요3:16~21, 고후2:16].
이 흰 말을 탄자는 세계의 종말기를 당하여 멀리서 땅을 향하여 싸우시는 그리스도이시고, 활은 멀리서 적을 사격하는 무기이니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의 실현 도상에서 붉은 말 탄 자, 검은 말 탄 자, 청황색 말 탄 자 등이 따라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리의 실현은 그의 재림에서 절정을 보여 주시려고 성숙하게 진행하여 가는데, 그 단계들은 모든 섭리적 사건들의 전개로 나타난다.
곧, 첫째 인에서 넷째 인까지 열 때에 “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함이요, 다섯째 인을 뗄 때에 순교자들의
부르짖음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탄원이요, 여섯째 인을 뗄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어지고 달이 온통 피 같이 되는 광경은 위의 모든 인 떼는 계시의 절정인 듯 그의 재림이 가까이 닥쳐옴을 예시하는 것이다[계6:1~17]. [알포-드 및 크레다너스의 해석]
일곱 인의 계시들이 보여주는 대로 세상 끝날의 재앙들이 단번에 다 내리지 않고 사람의 회개를 기다리며 횟수를 늘려 점점 더 크게 재앙을 내린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이 지극히 큰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참고로 흰 말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붉은 말은 전쟁의 표상으로 이 전쟁은 종말 심판과 관계없이 신약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전쟁을 가리킨다. 그리고 검은 말은 슬픔을 상징하는 검은 빛으로 흉년과 기근에 대한 것이요, 흉년은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전쟁의 재앙이 편만할 때에 기근이 동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자명한 일이다.
이 날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심은 이 날에 신자들의 종교 생활에 대한 보호를 상징한다는 뜻이다[감람유와 포도주는 성경에서 종교를 상징함]. 또 청황색 말은 공포와 시체의 빛으로 이 단계의 환난이 절정에 이른 것으로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 모든 재앙의 총 출동으로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계6:12~15절의 여섯째 인을 뗄 때에 그 환난의 절정을 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 세상 것에 붙은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한없는 공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시기가 있음같이 또한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의 시기가 있는 법이다[계6:16~17].
6장 끝에서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무서운 환난을 내어다 보게 된다.
그런데 그 무서운 환난이 임하는 시기는 아직 미래에 있을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환난을 미래로 지연시키는 네 천사들의 운동을 계7장1~3절에서 만나게 된다.
그 운동은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장차 세상 끝 날에 있을 여섯째 인의 환난 때에 해를 당하지 않도록 먼저 해결할 일로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 운동이다. 그러므로 계7장은 앞으로 있을 대 환난[계8장]에 신지들이 영적으로 해를 당하지 않도록 구원하신다는 위안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날인하는 행위는[계7:1~4] 복음 전파를 통하여 택한 백성에게 성령을 주시는 역사이다. 이것은 계8장 7절에서 시작되는 대 환난 중에서 영적 구원을 보장한다는 상징 계시이다. 그리고 성도들의 이마에 인치는 일은 성령으로 신자의 심령에 인치심을 의미한다. 이것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소유 확보요,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보증하여 주신다는 약속의 의미이다.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확실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에게 그렇게 인침을 받은 자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었다.
상기한바 도장은 그 소유자의 권세를 표시할 때에 사용되는 것이다.
부자의 도장은 그 소유한 재산에 대한 권리를 대표하고, 법관의 도장은 그 권세를 대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장은 하나님의 소유하신 권세 곧, 측량할 수 없는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권세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나님은 이 큰 권세를 가지고 우주를 감시하고 관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인침 받은 천사의 인장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장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큰 권세를 대표하는 인장이라도 그 인장의 효력은 그 소유자가 생존하지 않았으면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영생하신 분으로서 유일무이 하신 절대권세를 가지셨으니 그의 인장이야 말로 대권을 대표하는 효력을 영원히 발생시킨다.
그러므로 한 번 선택되어 성령의 인침을 받은 성도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장으로 확보된 구원은 두 가지 놀랍고 위대한 사실을 보여 준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이다.
계 7:4절에 인 맞은 자들의 수효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각 지파에서 12000명씩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평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실시하시지 않고 선택된 자에게만 실시하시지만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으로 공평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우리가 이 모순된 세상에서 위안 받는 길은 오직 공평하신 하나님이 필경 모든 일을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음으로서 얻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구원의 확보를 얻는 수효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최다수임을 보여 주신다. 본문[계7:5]에 12000명씩 각 지파에서 뽑아 인을 쳤으니 12000숫자는 한 개의 상징적인 숫자이다. 이것은 계5:6절에서 일곱 영이 한 분 성령을 상징적 표현하고 일곱이라는 상징적 숫자로 성령의 사역이 어디든지 미치는 완전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여기 12000숫자도 상징적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12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숫자라는 것을 12지파와 12사도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런데 12를 1000배하면 12000이 된다.
1000이란 숫자는 히브리인의 관념에서 최다수를 의미 한다[시90:4, 벧후3:8, 창24:60].
그러면 12000수효의 뜻은 선택 수[12란수]를 최대 수량으로 증가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되 최다수를 구원하신다는 밀이다.
그리고 본문의 이스라엘의 12지파 이름도 문자적으로 유대 민족의 열 두 지파를 의미하지 않고, 언약에 속하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신약시대에서 복음으로 계속되어 완성될 영적구원을 상징한다. 그런데 신약의 백성을 구약 백성의 열 두 지파에 기초하고 세우는 것은, 복음으로 구원 받은 백성들이 구약과 같은 체계의 백성들인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반열에 참가하게 된 사실인 만큼 이것이야말로 우주적으로 자랑할 만 한 일이요, 생각할수록 감사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되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최다수로 구원하실 영원한 계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나”라는 사람을 기용하셨으니 이 놀라운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땅위에서 어떤 대국의 시민권을 얻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계약에 근거한 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된 자로서 그 기쁨이 얼마나 크랴! 찬송하고 기뻐하세.
이렇게 하나님의 인장으로 확보된 구원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신 속죄의 피이다[계7:14~17].
인생의 문제는 죄악 문제를 해결함으로써만 해결 된다.
죄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지옥에 던지게 만든다[마 5:22].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무서운 죄에서 우리를 사죄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니, 그분은 오직 정죄 자이신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속죄하여 주신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 값을 삼으셨다.
하나님은 이 일을 홀로 경영하시고 오래 동안 역사하시고 성취하셨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몇 날 동안에 그 말씀으로 이루셨지만 속죄는 그 독생자의 피로 이루시려고 영원 전에 계획하시고 여러 천년 동안 예언하시다가 필경 이루셨다. 이렇게 이루어진 속죄의 피는 영원 전부터 진실로써 성립된 언약의 피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앙을 무한히 영원하도록 내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하셨다[고후1:20].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는 그의 피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언약이다[요6:53~56].
진실로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 받는 이 진리는 참되고, 꿀보다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것을 음식을 먹듯이 생각으로 먹고 행함으로 먹듯이 믿어야 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세상을 떠날 때에 천국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확실하게 체험하게 한다.
"성도들이 별세하는 것을 보기는 참으로 재미있다”[스펄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보혈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는 구원을 받는 자들이 택함 받고 성령 받아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는 말씀만 들어서 알고 믿었던 복음 운동이었다. 그렇다! 땅에서는 복음을 들을 뿐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셨다[롬10:17].
땅에 있는 우리는 들음이 중요한 일인 줄 알아야 한다. 땅에 있는 자들이 어찌 하늘나라를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복음을 듣기만 하여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운동은 하나님의 인 치시는 운동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믿음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렇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에 인 치시어 보내셨고[요6:27~29].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도 우리에게 인 치시는 관계로 보내셨다[고후1:22, 엡1:3, 4:30].
그러므로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진실성에 인치는 행위이고[요3: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 쳤느니라],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는 자이다[요일5:10/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한 복음 운동은 144000인에게 인치는 운동으로 이것은 택한 백성에게 인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운동에 있어서 성경말씀을 듣는 것 이상 기대하지도 말고 다만 그것을 듣는 태도를 진정으로 취해야 된다. 누구든지 그것을 들어서 믿는다면 참으로 믿음에 이를 것이고, 듣는 것을 중요시 하지 않으면 믿음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땅 위에서는 듣는 것 이상으로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 생활하는 중에서 보려고 하는 시험을 물리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듣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고 항상 기뻐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은 믿음의 대상을 볼 수 있는 그 때가 올 것을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있다.
우리는 하늘에 가서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기독 신자는 자기가 구원받은 줄을 모르고 힘쓰는 자가 아니고, 구원 받은 줄을 확실히 알고 감사해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 복음의 구원의 방도가 확실하게 성과를 가져오는 줄을 알고 그것을 힘껏 믿고서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뻐하자!
※ 일곱 나팔의 재앙[계8:6~11:19]
나팔은 쇠나 뿔로 만든 관악기로서 세속적인 행사뿐 아니라 종교 의식에도 많이 사용 되었다. 신년에는 나팔을 불어 알렸기 때문에 나팔 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나팔은 전쟁을 알리거나, 병사를 소집할 때, 말씀을 선포할 때, 마지막 심판을 알리는 경고 메시지로 언급하였다. 한편 나팔은 하나님의 현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위엄과 권위, 임박한 위험과 심판 경고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전쟁시 나팔을 부는 것은 전쟁의 시작을 알려서 대비케 함은 물론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수6:20, 욜2:1, 마24:31].
계8:7절의 천사의 나팔은 교회와 반대되는 순연한 세상[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발동을 선언하는 것이다. 여리고 성은 이런 나팔 소리로 인하여 무너졌다. 세상 끝에도 이런 의미의 천벌이 있을 것이다[렘4:19]. 일곱 나팔의 재앙은 첫째가 피 섞인 우박과 불의 재앙이요, 둘째는 불붙는 큰 산이 바다에 던져짐이요, 셋째는 쑥이란 별이 여러 물 근원에 떨어짐이요, 넷째는 일월성신의 3분의 일이 어두워짐이요, 다섯째는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의 재앙이요, 여섯째는 마병대의 재앙이요, 그리고 일곱째 재앙 전에 계10:1~11:14절에서 앞장 5장의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던 심판 책을 다시 그 천사가 환상으로 그 책을 가지고 사도에게 임하여 그로 하여금 그것을 온 세계에 예언해야 될 사명을 인식케 하였다[계10:8~11]. 왜냐하면 그 천사가 전하고 있는 임할 재앙들은 전 세계에 관계를 가지고 미치고 있기 때문에 본장은 한 개의 삽화적 계시로서 다시 한 번 온 세상에 그것을 예언하여야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사도에게 계시의 준비가 있은 후에 일곱째 인에서 구원의 최종적 완성을 선언하는 하늘로부터의 들러오는 큰 음성이 있었다[계11:15~19].
그러면 나팔 재앙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
여러 가지 많은 해석이 있지만 모두가 너무 독단적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나팔 재앙들에 대하여 몇 가지 확실한 견해만 채용하고자 한다. 곧, 이 나팔 재앙들은 성도들을 영적으로 해하지 않고[계9:4],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 악한 자들만 해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애굽에 내린 열 재앙이 애굽 사람들만을 해한 것과 같다.
그리고 나팔 재앙들의 상징적 표현에 있어서 첫째 나팔 재앙 피는 살륙을 의미하며 전쟁의 표호라 할 수 있다.
둘째 나팔 재앙인 불 붙는 큰 산은 예례미야의 예언[렘51:25]에서 적 기독국가 바벨론의 멸망을 가리킨 것처럼 여기서도 적 기독국가를 가리킨다고 아니할 수 없다. 셋째 나팔 재앙인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이 쓴 쑥이라, 물 삼분의 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는다. 여기 떨어진 별은 종교적 지도자의 타락 상징 한다.
그 이유는 쓴 물을 달게 만드는 일은 진정한 선지자의 한 일이었으니[출15:23, 왕하2:19~22] 물을 쓰게 만드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을 쓰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이단 운동을 상징한다. 넷째 나팔 재앙인 해와 달과 별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빛을 잃고 어두워지는 것은 위의 셋째 나팔 재앙[이단]으로 인하여 종교가 어두워지고 따라서 정치도 어지러워질 것을 상징한다. 여기 일월성신은 종교적 지도자들을 상징한다[단12:3].
또한 정치 지도자들을 상징할 수도 있다[사13:10,계6:13~15]. 이 재앙은 현대의 세태와도 관련된 듯하다. 제 2차 대전 후에 우리는 교회의 정화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 붙는 산”과 같이 적 기독국가들은 패하고 종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는 더욱 타락의 일로를 걷고 있다. 전쟁 후에 “쑥”과 같은 이단 교훈이 성하여짐에 따라 지도자들[일월성신]은 혼미하여 졌다.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회개 문제는 심각히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과 타협하여 도덕과 의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부정한 이익만 꾀하는 행위로 다수 주의를 따른다. 이 세대가 이렇게 배도의 기미를 농후하게 보이고 있으니 멀지않은 장래에 다섯째 나팔 재앙인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의 재앙으로 배도가 땅에 가득해 질 것이다.
황충들은 자연스럽지 않고 흉한 모양을 가지고 나타나는데 그것은 잔인한 군사의 세력은 물론이고, 건전하지 않고 기괴한 이단을 상징한다. 이런 기괴한 교훈의 운동은 결국 인간의 영혼을 멸망시킨다. 이것을 따라서 여섯째 나팔 재앙인 이만 만인 마병대의 수로 대 전쟁이 다시 있게 될 것같이 보인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을 여는 것[다섯째 나팔 재앙]은 종교적 타락, 혹은 배도를 상징하고, 마병대의 살육 행위[여섯째 나팔 재앙]는 글자 그대로 살육의 행위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재앙은 부분적으로 과거의 어떤 시대의 현상과도 서로의 관계를 맺어 왔다고 할 수 있으나 특별히 이것들은 세상 종말에 있을
일들이다. 세상 종말에는 주로, 전쟁과 이단과 배도가 더욱 중복되고 악화될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당한 해석이다.
오늘날에는 이 재앙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같이 보인다. 이제 앞으로 눈앞에 환하게 보이는 것은 대 전쟁이다.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괴악한 시대에 놓인 것 같이 보인다.
여기 계8장~9장의 나팔 재앙들은 6장에 기록된 일반적인 재앙들이 복음 전파에 유익한 방편으로 사용된 것과 비교하여서 특별한 것으로 세상에 속한 자들을 벌하기 위하여 내리는 재앙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렇게 계8~9장의 말씀은 인류에게 내릴 재앙이 현재보다 장래에 더 많을 것을 재앙 받는 자들의 수효가 3분의 1이란 숫자로 확실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더 많은 수효가 받는 재앙은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성경은 이 세상 끝 날이 가까울수록 재앙은 더 크고 더욱 많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계8:13,15:1].
그러므로 우리는 땅 위에서의 평안을 꿈꾸지 말고 오직 소망을 하늘에 두고 더욱 우리의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 마지막 환난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땅 위에서 환난과 핍박을 받으나 그것의 대책으로 전적 기도를 힘쓰는 것뿐이다. 진실로 마지막 환난이 임하여 우리의 구원이 완성하기 전에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계8:3~5절에도 대환난 전에 우리의 할 일에 대하여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기도에 대한 말씀만 나온다. 우리는 대환난 전에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도 기도해야 한다. 형식뿐인 기도는 버리고 참되고 간절하게 예수의 이름[향기]으로 기도하면 우리 속에 있는 악은 소멸 되어가고,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할수록 우리는 거룩하여진다. 이는 예수님의 향기가 모든 악취를 없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친히 기도에 힘쓰셨다. 예수님은 군중보다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주무시는 것보다 기도하기를 중요하게 여기셨다.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 올라가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들은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기를 끊지 않고 계속해야 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렇게 여섯째 나팔 재앙인 큰 전쟁 뒤에도 평안은 없다[계9:20~21].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형벌로써 다스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벌로써 다스림을 받기 전에 은혜로 다스림 받는 기회가 귀하다.
이 큰 전쟁 후에 최후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된다[계13장].
이 최후의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가장 어지럽게 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것이다[계19:11~21].
이와 같은 계시록8장~11장의 일곱 나팔 재앙은 불택자에게 어둠의 고통과 죄악의 고통과 죽어지지 않는 고통이 얼마나 심한 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둠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 것을 지내보지 않으면 모른다. 어두움 가운데는 소망도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마22:13, 요9:4]. 어둠 속에서는 사람이 아무 동작도 할 수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 마귀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면 이렇게 괴롭다.
하나님을 모르는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른 소망도 없고 참된 생명의 동작을 할 수 없다.
또한 그 죄악의 고통도 사람이 흔히 느끼지 못하는 고통 중 하나이다. 이것은 실상 전갈이 쏘는 것 같은 고통이다[계9:5].
죄악의 고통을 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죄는 늘 불유쾌한 것으로 심령 속에 그 자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마다 그 범한 죄악은 그의 양심을 찔러서 서지 못하게 한다[시130:3]. 또 이 세상에서는 죽음보다도 흉한 비참한 슬픔이 있으니 그것은 죄악의 고통이다. 이런 죄악의 고통을 지옥의 고통이라고 한다. 그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자는 자기 영혼이 죽어 없어지기를 원해도 그대로 되지 않고 지옥의 고통은 계속하여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죽음을 당하고라도 그런 죄악의 고통을 피하려고 힘써야한다.
그것은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는 것뿐이요[히12:4], 욥처럼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고 해야 하는 것이요[욥13:15]. 그리고 진실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계시록11장에서는 1절의 성전[지성소를 의미]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영적 성전으로 기독교회를 가리키는 비유이다. 소유의 회복이나 확보를 의미하는 상징적 행위로서[겔42:2,43:13] 복음운동을 비유한다. 여기 척량에 들어 있는 부분은 주님의 소유하시는 백성이요, 동시에 성전 밖 마당은 외부적으로 또는 맹목적으로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복음을 받지 아니한 자들인 외식하는 자들이며, 두증인은 신약 시대의 복음을 증거 하는 참된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계11:4절의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도 성령의 역사가 있는 기관으로 복음의 빛을 발휘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데 기독교회가 42달[악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에게 짓밟힌다.
이는 신약교회 시대에서 세계 종말의 최후 한 주간의 전반부를 말한다.
그 후반부는 갑자기 아주 섬뜩한 환란으로 가득할 것인데 그것은 계13장에 기록된 바와 같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최후의 한 주간의 전반부는 상징적 연수로서 적그리스도가 최후 활동하기 전의 신약시대 전부를 가리킨다. 이것은 복음서에 있는 이방인의 때를 말하는 것이다[눅21:24].
※ 마흔 두 달[42개월]에 대해서는 단9:24~27절에 있는 말씀을 해석함으로 자세히 알 수 있는 기간인 듯하다[마라나타 카페의 성경 각권 묵상 및 기도제목 목록에서 70이레를 참고 할 것].
여기 “마흔 두 달”을 계12:13~14에서는 삼년 반이라는 기간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하였다.
이렇게 표현할 때에는 반드시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핍박자의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 “한 때”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가운데 끝을 가지고 있는 기간이요, “두 때”는 그 한 때의 계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핍박자가 한 때의 권세를 얻고 그것이 점차 강화된다는 의미에서 두 때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 때는 그 핍박 행위의 시작을 의미하고, 두 때는 그 핍박 행위의 강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 때”는
그 핍박 행위가 절단되고 말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환난에 대하여 주님의 말씀도 이와 같은 해석을 암시하였다[마24:6~8,22:22]. 그런데 여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란 말이 칼빈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그 기간이 신약 시대인데 상징적 표현인 “마흔 두 달” 또는 “일천 이백 육십일”[계11:3]에 해당되는 기간일 것이라 한다.
이 기간 마흔 두 달은 단 9:27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장래에 대한 70이레의 일로서 세부분인 7 주일과 62주일과 마지막 1주간[합 70주일] 중에서 그 마지막 1주간의 후반부 3년 반을 말한다. 그 마지막 한 주간은 왕[적그리스도]이 이르러서 모든 악행을 하게 되는데 계시록13장은 그 후반부 3년 반 마흔 두 달 동안 적그리스도가 연출할 최악의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가 여섯째 나팔 재앙인 큰 전쟁[마병대의 재앙] 후에 최후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3장은 사탄[붉은 용]의 시킴을 받아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활동과 및 그 앞에서 일하는 거짓 예언자의 유혹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계13장에 바다에서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인 짐승이 나온다고 하였다[계13:1~2].
여기 묘사된 짐승은 다니엘서 7장에 기록된 "네 짐승"의 혼합체로서 이 세상 말기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왕국의 절정이다. 이 괴이한 적그리스도 왕국을 짐승이라고 한 것은 그 왕국이 짐승처럼 무지하게 인류를 착취하며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짐승의 열 뿔은 열 왕이요, 또 말하기를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요한의 시대]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고 했다“[계17:9~10].
그러면 요한 시대에 벌써 지나간 다섯 왕국은 혹이 말하기를 애굽, 앗수로,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라고 한다.
그리고 요한 시대에 있는 것은 로마요, 장차 와서 잠간 동안만 있을 왕국은 로마 이후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이 일곱이 다 지나가고 최종으로 나타날 것은 제 8 왕국이다.
그것이 바로 본장 1절에 묘사된 짐승 곧, 적그리스도이다.
여기 제 8왕국의 여덟째 왕은 짐승의 본체로서 적그리스도 나라의 최후적 발악이 출현이 되는 것을 말한다[계13장].
적그리스도는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참람된 이름들을 가지고 참람한 주장을 한다.
최종의 적그리스도 나라는 사탄으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아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위대한 사실에 대한 거짓 모방으로서 죄악이 육체로 부활한 것 같은 극히 가증한 일로서 활동한다.
세상 끝날 마지막 한 주간 후반부 마흔 두 달 동안 최후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최악의 활동을 통하여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계11~13장] 불구하고 교회는 그 환난 가운데 빠져 멸절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구원될 것이다[계14:1~5]. 그리고 성도들을 핍박하던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리라는 이 같은 사실을 통하여 계14장은 성도들을 위로하며 그리고 끝날 심판에 대한 예고로서 앞으로 될 일들의 대한 전주곡으로 들러주고 있다.
또한 계14장은 계11~13장의 결론이기도하다.
이어서 계15:1~19:10까지는 마지막 재앙 일곱 대접 재앙으로 인하여 교회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천벌 받는 일에 대하여 말한다.
일곱 대접의 재앙[계15:1~19:10]
계15장은 마지막으로 내릴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한 머리말로서 계16장 이하에 대한 서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벌하실 경우에 그것을 일시에 집행하지 않으시고 여러번 경고하여 오다가 필경 실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다. 그러므로 그 결론적 심판에 이르기 전에 서론적 계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미리 나타난다.
이 세상에는 재앙들이 많이 있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임하는 것이다.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마지막 재앙이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앙이 내리는 초기에 즉시 반성 회개함이 지혜롭다.
믿는 자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
그 이유는 내세엔 죄가 없지만 현세에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현세에 죄가 없다면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을 공경할 것이다.
하나님을 못 섬기게 하는 장애물은 죄 뿐이다.
죄 밖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정당한 이유는 하나도 없다[계15:4].
계16장에서 부터는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의 재앙이 집행된다.
천사가 대접을 쏟아서 재앙을 남김없이 내린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남김없이 쏟는 마지막 재앙임이 분명하다.
첫째 천사가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내렸다.
악하고 독한 헌데는 애굽에 내렸던 재앙인데[출9:10], 이것은 심히 아픈 헌데인대 하나님께서 그 원수를 벌하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셨고, 예로서, 헤롯 안디바가 몸에 벌레가 먹어 죽었다[행12:2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고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었다. 바다는 열국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피가 된다 함은 인류가 죽어서 온 세계가 죽음으로 뒤덮이게 될 것을 가리킨다.
또는 바다가 실제로 피가 되므로 어류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출7:17~21].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었다[계16:4~7].
이것은 음료수를 마시지 못하게 만드는 벌이다[시78:445].
오늘날 인류는 음료수에 대하여 그렇게 귀한 줄을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핍절하지 않고 흔한 까닭이다.
그런데 이 흔한 물이 홀연히 피가 된다면 인류는 다 죽을 수밖에 없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 곧, 영원 자존하신 주재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성도와 선지자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도다.
여기 거룩하심은 죄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심판자의 자격이 되는 것이다.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을 태웠다[계16:8~9].
이것은 계8:12절에 기록된 해의 재앙에서는 햇빛의 강도가 감해진 것을 말하고 여기서는 그 뜨거움의 온도가 가해지는 재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있는 것을 없게도 하시고 없는 것도 있게 하신다. 자연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 아래에서 사람에게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는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대하여 한번 진노하시면 자연계의 천태만상도 인생을 해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접의 재앙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인생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벌을 아무리 받아도 회개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므로 거듭나기 전에는 그의 가장 따뜻한 정과 아름다운 것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 인생 사악한 근성은 재앙을 받는 때에 특별히 드러난다. 이것은 무서운 하나님의 형벌이다.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매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의 혀를 깨물었고 그들은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았다[계16:10~11]. 이것은 문자적 의미대로 햇빛이 어두워지는 재앙을 가리킨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정치가 어두워지므로 그 백성이 그 어두운 정치에서 받는 고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종기의 고통에서 갑갑한 암흑을 당함으로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죄의 결과는 언제나 죽음보다 불행한 큰 고통을 영원히 가져다준다[계9:5~6].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다[계16:12~15]. 여섯째 나팔의 재앙에도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하여 큰 전쟁이 있었던 것처럼 여기 여섯째 대접 재앙에서도 유브라데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유브라데강은 옛적 이스라엘의 이상적 국경인데[창15:18] 열국의 왕이 거기를 넘어 온다 함은 적그리스도와 및 그 연방들이 하나님의 배성을 침략한다는 상징적 비유이다.
이 전쟁은 계17:12~14, 19:11~21에도 다시 설명하고 있다.
큰 강물이 마름같이 크고 놀라운 대사건이 일어 날 것이다.
곧 원방에서 국가들이 헤아릴 수 없는 대군으로 전쟁하게 될 사변을 가리킨다.
오늘 날의 과학적 수송은 강과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는 시대이다.
그날에는 개구리가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더럽히고 떠듦 같이 말세에 더럽고 요사스런 귀신들의 요란한 활동으로 돌아다니며 모든 왕들의 사상을 더럽게 할 것이다[계16:13].
그러므로 세상은 시끄럽고 평화롭지 못하며 성결하지 못하고 추악함으로 가득하게 된다. 이런 추악한 짓을 일삼는 국가는 요사스런 귀신의 충동을 받는 것이다. 그 귀신들의 목적은 항상 악하고 그 방법은 거짓되다[살후2:4]. 이와 같은 날이 도둑같이 주님께서 홀연히 뜻밖에 두렵고 놀라운 사태 가운데 재림하실 것이다. 그 놀라운 사태란 세계적 전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참 신자[광명한 자]에게는 구원을 알게 하는 심판의 뜻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암흑과 광명, 참 신과 거짓 신을 나타내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하는 동안에 어떤 신자들은 순교의 복된 기회를 얻고, 또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의 기이한 보호 밑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어둠의 권세가 천벌을 받아 망하는 것을 볼 것이요, 반면에 어떤 외식자들은 이때에 더욱 타락할 것이다.
이 때에 신자들이 복을 받는 길은 오직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는 자들이다[엡6:18,벧전4:7]. 깨는 것은 힘써 기도함이요, 옷을 지킴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죄함 받고 새로워진 신앙 인격을 지키는 것이다. 이 신앙의 인격을 지킴은 오직 믿음으로만 할 수 있다. 벌거벗고 다니는 것은 이 신앙을 버리고 방종하게 그 때의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 최후 전쟁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 아마겟돈이다[계16:16].
아미겟돈은 본래 므깃도 골짜기인데 이곳은 유대인들이 국가적 슬픔을 표시할 때에 국가 기관에서 시설하는 곳이다[슥12:11]. 이 명칭은 세상 끝 날에 하나님의 백성이 적그리스도 나라들을 이긴 전승지에 대한 상징적 명사가 될 만하다.
이같은 모든 재앙의 목적은 인생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재앙을 당할 때마다 자기의 죄를 찾아내도록 힘쓰고 또 회개함이 그의 살 길이다. 마귀는 삼킬 자를 찾아 사자같이 두루 다니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 기도해야 한다[벧전5:8, 시4:4, 마25:13, 26:41].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오다[계16:17~21].
이것은 성경이 말한 대로 사단의 근거지인 공중에 재앙을 내림이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 근거지 공중을 치시매 사단의 힘에 의존하던 땅 위의 모든 조직체들[예로 바벨론과 및 모든 이 세상 국가들의 도시들]이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곱째 천사 대접 재앙에 대한 계16:17~21절의 말씀은 계17장~19장에 있는 바벨론과 적그리스도 나라들의 멸망에 대한 말씀의 서론이다. 그리고 계17장의 말씀은 이때까지 앞에서 미리 조금씩 당기어 말씀한 짐승과 및 바벨론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말하고 있다.
계17장 1절에 많은 물은 열국을 상징하고, 큰 음녀는 대도시를 가리킨다. 계18:11~20절에서 보면 큰 음녀는 세계적으로 모든 상품을 수입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 세상과 및 거기 속한 것들의 총칭이다. 그러므로 큰 음녀는 하나님을 반역한 자이다. 이 큰 음녀에게는 적그리스도의 악한사상 때문에 큰 전쟁이 일어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세상과 거기 있는 것들[하나님을 배반하는 것들]이 아주 파괴 된다. 이 세상주의는 술과 같아서 인간을 유혹하고 또 거기 취한 자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깨달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다가 결국 이 세상주의는 장차 광야처럼 된다. 이 세상주의 특색은 사치하고 호화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배반케 하는 마력이요, 이 세상주의는 모든 사람을 유혹하는 금잔과 같다. 이것이 음녀의 본 모습이다. 이처럼 모든 인본주의 사상과 무신론 사상을 기초로 한 것은 그것들이 아무리 수려하고 선량하다 할지라도 그 모든 제도와 시설과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다. 그것들 가운데에 고상한 듯한 종교나 도덕도 그것이 진정한 신본주의의 것이 아닌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이 세상주의에 고착하게 하는 유력한 무기가 될 뿐이다.
그 음녀는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이것은 적그리스도 국가의 세상주의적인 사치와 호화로운 것으로 꾸미고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곧,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한 적그리스도 국가[짐승] 위에 만들어지고 세워진 큰 음녀인 것을 표시함이다. 이 짐승을 탄 큰 음녀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금잔을 가졌는데 그 금잔에는 가증한 것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였다. 그의 이마에는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불법의 비밀이요, 큰 바벨론이다.
이 음녀는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적그리스도와 다르게 비밀히 사람을 이 세상주의 마력으로서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 자로서 불법의 비밀이라 이름 하였다. 또 이 음녀를 큰 바벨론이라고 이름 한 것은 원래부터 모든 무신론과 배교 사상의 발원지로서 세워진 원천적인 세상주의 도시[바벨론]가 점점 확대되고 절정에 이른 것을 의미하여 큰 바벨론이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계17:8절에는 과거에 있었던 적그리스도가 앞으로 다시 나타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동일한 인물이 다시 살아서 나타난다 함이 아니고 동일한 악행을 행할 자가 나타나겠다는 의미이다. 그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데 곧, 사탄의 세력을 가지고 나타남을 가리킨다. 이날에 열 뿔의 열 왕들이 그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게 되는데 그 열나라는 적그리스도와 맹약하고 적그리스도를 맹주로 삼는다.
적그리스도 나라와 그의 맹방들은 싸움을 즐기는 나라들인데, 그 나라들이 복음을 반항하는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킨 결과 이 세상은 무너진다. 그러므로 그 맹방들은 뜻하지 않은 가운데 바벨론을 미워한 것 같이 되어버렸다. 이 같은 바벨론의 멸망은 계18장에서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적그리스도의 맹주인 열 나라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들의 소원대로 그 맹주인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적그리스도 국가의 권력 강화는 하나님 말씀대로 적그리스도 나라가 붕괴되고 천국이 실현되는 도중에 없을 수 없는 필요한 순서로서 그것은 천국이 속히 성취되는 징조이었다.
이처럼 적그리스도 나라는 유사 이래 쉬지 않고 계속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적대자를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 운동은 언제나 수난과 동행한다. 복음 운동이 완성되어 갈수록 적그리스도의 운동도 절정을 향하여 필경은 큰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완전한 멸망의 징조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런 압력 밑에서 오히려 주님 안에서 소망 가운데 즐거워 할 것이다.
그런데 아마겟돈 전쟁에서 이렇게 성도들이 승리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도들은 직접 싸우지 않았다. 단순히 택함을 받았고, 부름을 받았고, 주님을 믿음[진실함]의 세 가지 은혜로운 덕택으로 승리의 영광에 참예하였다. 이렇게 부르심과 택하심과 믿게 됨은 모두 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되고 인간의 자력으로 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다시금 큰 음녀의 이름 큰 바벨론은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펴보자.
바벨론을 거짓 종교, 또는 반 기독적인 이 세상 나라의 도시라고 한다. 이것을 또한 로마라고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거짓된 종교와 악한 정치를 포함한다.
예루살렘이 내세를 가리키는 것처럼 그와 대조하여 바벨론은 이 세상을 상징한다고 함이 적당하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제외하고 살려는 모든 인본주의의 설계와 문화와 종교는 다 바벨론이요, 바벨론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상의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하는 자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일이 많다. 이 세상 쾌락이 사람을 유혹한다.
이 세상의 먹는 것과 입는 것과 모든 수고가 다 헛된 것이어서 모두 것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항상 유혹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미6:14, 학1:6, 마24:38~39, 딤전5:6, 약5:5].
이 세상은 음녀처럼 사람들을 유혹하여 망하게 한다.
또한 이 세상은 모든 가증한 것으로써 사람들을 유혹한다[계17:5]. 그 가증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본주의일 것이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모든 것은 다 영적 음행에 속한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이 가증한 것은 인본주의의 철학, 종교, 예술, 문화, 정치, 교육 등이다.
창11:2~9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정신은 인본주의 의 표본이다. 그것은 순전히 인력 본위였고 그 목적이 인간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제외한 단결은 망하는데 이른다.
바벨론은 천국의 보물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 대신에 사모하고 구하고 매매하던 육체 본위의 상품을 자랑하고 열거한다. 그것은 귀금속, 의복재료, 가구류, 향속, 식료품, 가축, 인류인데 이 일곱 가지 사치품은 이 세상이 목표하고 찾는 것들이요, 이 세상의 영광을 자랑하는 물품들이다. 특히 이 세상주의는 사람들의 인권을 빼앗고 그들을 종으로 취급하며, 사람의 영혼을 상품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복음도 무시하는 것이다.
계18장에서 멸망한 바벨론의 끔찍하고 비참한 모습은 귀신의 처소요,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으로 영원히 황폐한 곳이 되었고, 지옥 같은 곳이 되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음행]로 모든 나라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멸망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영원히 황폐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여황처럼 자만하고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치한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세상주의가 이기주의를 위하여 재물을 과도히 저축하고 또 과도히 소비함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죄악은 그들이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죽인 죄악 때문이다[계18:24]. 이와 같은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왕과 상인들과 선원들과 선객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화, 화 있도다. 한 시간에 망하였다고 외치며 절규하였다.
그러나 계19장에서는 허다한 무리들이 이와 같은 바벨론 곧, 큰 음녀 같은 이 세상의 멸망에 대하여 기뻐하며 찬송 한다[계19:1~8]. 그리고 백마를 타시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계19:11~20:15]. 백마는 승리의 상징이다. 그리스도께서 종말적 재림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나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오신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화목하러 오시지 않고 땅위의 모든 거룩하지 않은 것을 대적하여 싸우러 오신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이행하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시는 진정한 구주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충성과 진실이시다[계19:11].
그리스도께서 초림 하여 증거 하신 말씀대로 세상 끝날에는 그의 말씀이 그들을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그 심판 날에 입을 열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그의 말씀을 전하였으나 그들이 듣고도 순종치 않았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그들은 아무른 핑계도 못하는 것이다[요12:48, 롬1:20].
계20장은 천년 시대와 최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이어서 계21:1~22장에서는 신천 신지와 새 예루살렘과 생명수와 천국의 생활의 상태인 무궁한 안식 세계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시고 끝으로 이때까지 받은 모든 계시에 대한 결론으로 이 계시록을 가르치라 세 차례 권면하신다. 아멘!
끝으로 계21장의 영원한 새 세계의 천국과 계22장의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상고[詳考]하고 말씀을 맺고자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성경이 보여 주는 영광의 세계 천국은 다른 종교들이 말하는 내세와는 천양지차로 전혀 다르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종교들의 내세관은 인간의 주관적 상상의 산물이니 만큼 곧이곧대로 말한 그대로 흐르고 온전히 육감적 색체가 흐른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은 천국을 묘사함에 있어서 오직 비유적 의미로서 천국의 객관적 성격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천국은 전적으로 사람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정해진 원칙 따라 된 것이어서 사람으로서는 내세의 영광을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천국을 말함에 있어서 주로 비유로만 말할 수 있을 뿐, 곧이곧대로 그 모습을 그대로를 형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영광의 내세는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으로도 도무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죄로 말미암아 “썩어짐의 종노릇”하기 때문이다[롬8:21].
따라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영광의 세계 천국에 대하여 이 세상 언어로는 바로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성경은 내세를 말할 때에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비유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믿도록 함에 있어서 그것을 직접 육안으로 보게 하지 않고 증거 하여 믿게 해 준다. 이제 우리는 천국의 말씀을 손에 들고 있다. 그것은 내세에 대한 큰 증거품이다. 그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이 성경과 비교할 수 있는 책은 이 세상에 없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다만 성경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뿐이다. 오직 성경 말씀만이 천국을 증거하고 천국의 실재와 내용을 말한다. 기독교의 내세인 천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새 세계의 전부에 충만하다. 그곳의 하나님 영광을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21:11]고 비유로 묘사하면서 내세의 영광을 객관적으로 실질을 보여 주고 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그 영광의 새 세계는 완전무결한 조직으로 되어있다.
계시록 21장에 기록된 대로 12지파의 이름을 쓴 문, 그리고 성의 성곽 12기초석, 그 기초석 위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있고, 그리고 12스다디온의 1000배가 되는 12000스다디온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를 가진 도성, 12규빗의 곱이 되는 144규빗의 성곽 등은 모두 완전한 조직을 의미하는 12라는 숫자로 일관하여 있다. 이처럼 내세의 구성과 조직은 완전무결하여 그 이상 더 좋을 것이 없을 정도요, 그리고 성곽의 기초석 위에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이것은 사도들의 전한 복음 진리로 말미암아 내세에 구원이 완전히 이루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
그 새 세계는 완전히 거룩하고 완전히 의로움으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이 세상처럼 성별 제도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그곳에는 어디서나 무엇이나 전혀 거룩하여 오직 하나님만 위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의 모든 존재와 행동은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되어 있다.
그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통치하신다.
모든 성도들이 그 통치대로 완전히 순종하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의가 그대로 나타난다.
이 새 세계에서는 다 거룩한 세계라서 거룩하지 못한 것이 참예할 수 없다[계21:27]. 아멘!
계시록의 마지막 22장은 계21장에 이어서 계속하여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마친다.
그리고 이때까지 받은 모든 계시에 대하여 결론을 말씀하시면서[계22:6~21], 계시록을 가르치라는 세 차례의 권면을 하신다.
첫째 권면은 이계시록의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니 그것을 전하고 지키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계시와 같이 주님께서 오시겠기 때문이다[계22:6~9].
둘째 권면은 계시록의 말씀을 인봉해 두지 말고 가르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다시 오실 시기가 임박하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강팍한 자에게 회개를 더 권면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게 내버려둘 정도로 심판이 가깝기 때문이다[계22:10~15]. 셋째는 역시 세계의 종말이 가까운 것을 보여 주심으로 계시록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영생의 은혜를 값없이 거저 주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영생은 사람의 힘으로는 마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계16~20].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하시는 말씀은 성경의 완전성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다.
계22:18~19절에서 “이 책”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오는데 이는 계시록 책과 함께 신구약 성경의 완전성을 가르친다.
그 이유는 신약은 구약의 성취로서의 하나님 말씀이고, 계시록은 성격상으로 그 신약의 마지막 책으로서 결론을 말씀하시면서 이 책[계시록]에 가감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진실로 성경의 기록은 완전하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질서와 하나님의 구속 운동을 깨달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성문 화 하지 않으면 죄인 된 인생이 그것을 파괴하며 또 잃어버린다. 이 성문화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완전할 것은 확실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으로 이 책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그러나 성경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에게는 열리지 않는다. 마음이 정결해야 깨닫고 순종해야 깨달아진다. 기도하며 사모해야 한다. 이 성경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할 말을 미리 다 해 놓았으니 세상 끝날 까지 우리는 이 책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알아야 한다.
주님은 성경 말씀을 하실 때에 어느 시대 사람에게나 말씀을 듣는 그들에게 재림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옛날 구약 시대 사람들은 주님의 초림을 기다렸고, 그것이 성취되었다.
신약의 사람들은 성취된 진리 주님의 재림을 내다본다.
신약 성경은 처음부터 신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지와 예수님이 이루신 완전한 구원이 얼마나 좋음을
아직 잘 모르는 까닭이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가 먼 나라에 떠나간 날부터 기다린다. 우리는 이제 생각하자. 죄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그리운가! 죽음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그리운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우실 무죄한 세상이 얼마나 그리운가!
이사야 11:6~9절을 읽어보라.
감동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목마름 같이 갈망해야 한다. 아 멘! 할렐루야!
솔 향
◈7인은 시작이요, 7나팔은 경고,알림이요, 7대접은 심판이다.
신약은 그리스도로 인을 땜이요[사복음서및 행전],서신서는 교회에 알리는 나팔소리요, 계시록은 최후의 심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27권의 신약시대 전체가 동시적 인과 나팔과 심판이 함께 진행되는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육신적으로는 두려우나 내 영혼은 환란 중에 기쁘하도다 감사로다.[계18:20,19: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