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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 2023 봄호 계간평]
단시조에 스며든 서정의 파노라마
유 준 호
(전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Ⅰ)
시조는 우리 민족 정서 속에 흐르는 전통적인 정한(情恨)을 예술적 자산으로 하는 세계 유일의 소절을 외형률로 하는 정형성을 띤 민족문학이다. 즉, 12소절 6구 45자 내외의 글자 수에 담아내는 문학이다. 시조의 특성은 자유시에는 행간에 사족이 많이 들어 있는 것과는 달리 행간에 압축의 독특한 맛이 있고, 멋이 있다.
시조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세기 초까지는 문학으로서의 시(詩)와 음악으로서의 창(唱)이 한 몸이었으나 20세기 와서는 이것이 분리되어 문학으로서의 시조로 자유시와 겨루는 현대시조가 되었다. 시조에서 1소절이라고 하는 것은 1모라(mora)로 한 소리마디 호흡이요, 의미상 독립체이다. 우리가 흔히 혼동하는 종장 둘째 구를 구성할 때 이 소리마디는 지켜져야 한다. 이것이 두 개의 소리마디가 되면 안 된다. 예로 황진이의 시조 ‘기나긴 밤을∼’과 같은 경우처럼 두 단어가 되더라도 주술관계나 수식관계로 자연스럽게 하나의 소리마디로 결합되어야 한다. 특히 단시조의 특징은 연시조에 비하여 그 압축성이 더 강하고 표현 의미가 더 깊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굳이 왜 단시조에 대한 말로 글을 여는가 하면 이번 현대시조 2023년 봄 호 작품들 가운데 유난히 단시조가 많이 등재 되어 있기에 이번 계간평은 그 대상 작품을 단시조로 하고 이를 살펴보려하기 때문이다. 시조의 맺음에는 종지형이 정형인데 요즘 명사나 명사형의 시어로 끝맺음하여 단절형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고, 미완(未完)으로 끝맺음하는 개방형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번에 대상으로 한 작품들은 그 맺음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아울러 살펴보려한다.
이빨 빠진 나무들이
치과 문을 두드려요.
하얀 가운 툴툴 털며
눈꽃 의사가 말해요.
새봄에
다시 오래요
임플란트 해준대요.
<강미숙, 겨울나무>
나무는 무엇을 먹고 살까. 봄에 가지 틈에서 피어난 잎은 햇빛도 바람도 먹으며 뿌리가 길어 올린 물과 영양분을 잘 버무려 소화하여 나무의 생장(生長)을 돕는다. 그런데 여름 한철 지나 잎들이 맥을 잃고 하나 둘 떨어져 버리면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허공에 흔들며 생장(生長)을 멈추고 칩거(蟄居)의 겨울을 준비한다. 이 시조는 이런 나무의 특성을 시조에 적용하여 쓴 의인적인 작품이다.
인간들은 이빨이 썩거나 빠지거나 이상(異狀) 징조가 보이면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한다. 나무도 그렇다는 전제하에 이 시조는 쓰였다. 이 나무는 여름철 젊은 날의 새파랗게 튼튼하던 이빨인 잎이 가을을 지나며 시들해지고 겨울에 들어서자 모두 떨어져 빠져버렸다. 그래서 나무가 치과 문을 두드리고 그 치료 방법을 묻고 있다. 겨울이기에 눈이 내려 온통 세상은 하얗다. 그런 자연을 시인은 치과의사로 환치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빨’은‘나뭇잎’을 은유한 말이고 ‘하얀 가운’은 ‘눈발 묻은 자연의 모습’이다. 그리고 ‘눈꽃 의사’는 ‘눈발을 꽃처럼 뒤집어쓴 자연’을 은유하여 표현한 시어이다.‘임플란트’는 인공이빨이니 여기서는 자연이 주는 새 이빨인 ‘새잎’이 되겠다. ‘눈꽃 의사’는 이 새 이빨인 새 잎을 만들어 줄 터이니 내년 봄에 다시 찾아오라고 하고 있다. 나무가 한해를 지내며 살아나가는 과정을 인간사인 치과 치료에 비유하여 가을을 겪고 눈발 휘날리는 계절에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겨울을 지내는 모습과 봄을 기다리는 모습을 작품에 담고 있다. 시상의 관점이 신선하다. 표현은 일상어로 되었지만 그 속에 담긴 자연의 섭리(攝理)와 천리(天理)가 깊다. 인간사나 자연이나 다 삶에는 때가 있어, 그 때를 맞춰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내가 살던 고향은
산이 높아 해가 한 뼘
문명의 이기에
빌딩 높아 해가 반 뼘
어쩌다
비집고 든 햇살
빈혈에 몸져눕다.
<구귀분, 겨울 햇살>
겨울은 날씨가 흐리고 추운 날이 많아‘한 뼘 햇살’도 그리운 계절이다. 그래서 겨울을 움츠림의 계절, 적멸(寂滅)의 백색(白色) 계절, 칩거(蟄居)의 계절이라고 한다.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었다. 겨울 햇살은 추위를 조금 녹이며 그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할뿐 추위를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한다. 여름 햇살은 그 열기(熱氣)의 위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겨울 햇살은 그 힘이 다 빠진 노인처럼 허약하다. 그러나 눈보라 몰아치는 햇살 없는 그 날보다는 소리 없이 비춰주는 햇살이 겨울을 조금은 포근하게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을 보면 시인의 고향은 두메산골이 아니라 도시 근처의 높은 산이 둘러쳐진 곳인 것 같다. 일상적인 고향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그리운 곳인데 여기는 조금은 선득한 곳인가 보다. 초장에서 고향의 지리적 요건을 표현하고 있는데 ‘산이 높아 해가 한 뼘’이라고 하여 높은 산 그림자에 햇살이 가려져 있어 겨우 한 뼘쯤의 햇살이 들었다 사라지는 곳임을 말하고 있다. 거기다 이곳은 중장에서 보듯이 요즘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아파트며 빌딩이 해를 더 가리어 한 뼘쯤 비치던 햇살마저‘반 뼘’쯤 되어 비치고 있는 곳이다. 산그늘, 빌딩 숲을 헤치고 비좁게 들어온 햇살은 지치고 지쳐 어질어질한 빈혈에 걸려 쓰러질 듯 스며들어 눕는다고 하여 자연의 혜택이 사라진 고향 산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문명은 자연을 훼손(毁損)하기에 시인은 탈문명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다.
산사(山寺)는 잠이 깊어
이승을 비켜서고
신심은 씨가 자라
종소리 살이 찌다
새벽에 홰를 치면서
산이 깨고 눈을 뜬다.
<김사균, 새벽 풍경>
고즈넉한 가운데 생동감이 넘치는 시조이다. 어둠 속에 고요히 잠겨 깊은 잠에 빠진 듯한 산사는 이승 저 편에 고고한 모습으로 세속의 모든 잡념을 버리고 공(空)의 세계에 든 듯하다. 그 때 탈속의 불심은 씨 속에서 싹이 트듯 발아(發芽)하여 자라면서 쇠북소리에 마음의 살을 찌우고 있다. 죽은 듯한 고요 속에 빠진 세상은 새벽에 홰를 치는 수탉처럼 홰를 치며 깨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눈을 뜬다. 고요 속에서 새 삶이 열리고 있다. 새벽은 지난 어제 일을 어둠 속에 다 털어버리고 밤새 망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마음으로 새날의 출발을 알리는 시점이다. 그러기에 새벽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다짐, 새로운 희망을 품고 오늘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한다. ‘홰를 치’는 것은 어둠 속에서 새날의 밝음을 여는 동작이다. 이 작품에서 ‘신심(信心)’은 불심과 동의어로 비움의 미학을 지닌 마음이고, ‘산’은 시적자아가 바라는 푸르고 건강한 세상을 비유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단잠을 불러오던 자장가도 늙어간다.
하품 내는 책이다가 알딸딸한 술이다가
약마저 떠나간 자리
의리 지키는 TV
<김선호, 불면의 진화>
잠 못 들고 뒤척이는 때에 잠이 오게 하는 처방전의 진화가 이 작품에 순차적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성장과 함께 이 불면의 모습도 진화하여 변하고, 그에 따른 처방도 달라지고 있다. 어릴 적에는 할머니, 어머니 품이나 팔에 안겨 토닥거리면 잠이 오던 자장가 소리가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면서는 효험이 없다. 세상의 잡다한 일에 시달리고 이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뒤척이는데 이때는 그 누구의 토닥거림도 소용이 없다. 밤을 뒤척이다가 책을 읽으니 안 오던 졸음이 찾아든다. 책 읽음이 잠이 오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도 오래 가지 못하여 복잡한 마음 달래려고 술을 마시니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지니 그 술김에 잠에 든다. 그런데 얼마 후는 이도 저도 해결책이 안 되어 수면제 약을 먹어야 잠이 왔다. 그래 약으로 잠을 청했는데 드디어 그마저 효험이 없어졌다. 잠은 오지 않아 고심하다가 TV을 시청하니 잠이 왔다. 그래서 TV를 시청하다가 잠에 든다. 아무래도 잠을 오게 하는 의리 있는 것은 TV인 것 같다고 하여 문명 이기의 이점을 말하며 잠을 오게 하는 최상의 수단임을 말하고 있다. 잠의 처방전도 인간의 생활환경과 삶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여 진화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즉, 잠을 청하는 수단이 자장가에서 책읽기로, 술 마시기로 갔다가 수면제 약이 되고, TV시청이 되고 있다. 이를 잠이 오는 수단의 진화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와 시조에 낯설기 표현이란 말이 심심찮게 들리는데 이는 일상적인 언어 의미와는 다르게 새로이 공감대를 일으키는 표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위 시조에서 ‘늙어간다,’같은 시어가 그것인 성싶다. ‘변해간다’는 뜻을 ‘늙어간다’로 하여 세월의 흐름을 포함하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자란다.’해도 이 시조에는 부합할 것 같다.
누른 돌 굴러가고
음지가 양지되니
어둠에 숨겨졌던
단단한 씨앗 하나
기지개
활짝 펴고서
땅속에서 솟는다.
<김선환, 인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만상(萬象)은 생멸(生滅)하는데 그 과정을 겪어나가는 데는 참음과 기다림이 필수 요건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주변 환경 조건이 성숙되어야 비로소 모든 생명체는 고고성(呱呱聲)을 지를 수 있다. 인간이 어머니 뱃속 어둠에 들앉아 때를 기다리며 자라 드디어 세상에 성체가 되어 나오듯이 모든 동식물은 마찬가지이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태어난 다음에 삶의 시작은 역경을 헤치고 이를 이겨나가는데서 출발한다. 그럼 이걸 이기는 힘은 무엇인가. 끈질기게 참고 기다리는데 있다. 일시의 어려움에 좌절하면 새 생명의 발돋움이나 밝은 내일은 없다. 이 작품은 한 톨 씨앗이 음달 땅에 떨어져 돌에 깔리고, 햇살이 들지 않아 새 생명에로의 도약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만히 엎드리어 기다리다 보니 무겁게 억눌러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던 돌덩어리가 봄을 맞아 어딘가로 굴러가고, 음지로만 있던 땅이 햇살이 들어 양지가 되니 땅속, 어둠속에 포근히 묻혀 한껏 웅크리고 있던 그 씨앗이 생명의 고동소리를 내며 싹터 올라 땅 위로 솟아 무언의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누운 돌’ ‘음지’는 역경을 비유적으로 보여준 시어이고, ‘기지개’는 삶의 활개를 펼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씨앗처럼 세상 만상의 생명은 다 어머니 품과 같은 우주의 포근한 존재인 어둠 속에서 출발한다. 그 모습이 이 작품에 차분하게 펼쳐져 있다.
가을 축제 뒷마당
관중 드문 무대에서
노을을 한 짐 지고
푸른 꿈을 꾸는 그대
생목의 울음소리로
자서전을 엮는다.
<김영애, 무명가수>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이후에는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꿈이 무엇인지는 처음에는 확연하지 않다. 막연하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내일을 기다리며 산다. 내일은 내가 바라는 그 무엇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사는데 가지는 꿈이요, 희망이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인생의 꿈은 하루아침에 성취되지도 형성되지도 않는다. 여기 ‘무명가수’는 ‘가수’란 꿈을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아직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 애초부터 가수인 이는 없다. 거의 모든 ‘유명가수’는 일정기간 무명의 시절을 겪으며 부단히 노력한 단계를 거치고 있다. ‘유명가수’가 청중의 전면에 선 우뚝한 존재라면 ‘무명가수’는 청중의 뒷전에 물러나 있지만 청중 앞에 나가고자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고달프고 때로는 서러운 존재로 늘 가슴에 눈물이 고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도 ‘축제 뒷마당’을 지키며 환한 햇살 대신 저물어가는 ‘노을’을 ‘한 짐 지고’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유명가수와 같은 존재가 되리라는 ‘푸른 꿈’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설익은 ‘생목의 울음소리’로 삶의 역정을 써나가고 있다. ‘뒷마당, 생목의 울음소리’란 말은 ‘무명가수’로서 서럽게 짊어진 운명을 보여주는 시어이다. 그 어둠을 헤치고 밝음 속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은근히 숨어 있는 작품이다.
화사한 얼굴 하며
천년의 미소하며
세월이야 스러져도
서라벌 달은 돋아
모란꽃
선덕여왕을
보는 듯이 선하다.
<김옥중, 얼굴 무늬 반쪽 수막새>
수막새는 기왓골 끝에 사용하는 것으로 거기엔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반원문(半圓), 귀면문(鬼面文), 만자문(卍字文), 인면문(人面文), 증판 연화문(重瓣蓮花文)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이 작품은 인면문(人面文)이 새겨진 수막새로 이는 신라 때 기와의 유물로‘신라의 미소’ ‘천년의 미소’로 불리기도 하는 수막새이다. 이 수막새는 손으로 빚은 유일한 얼굴무늬 수막새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첫수에서는 수막새에 새겨진 그 얼굴 모습의 해맑음과 거기서 풍기는 은은한 미소를 이 수막새의 별칭인 ‘천년의 미소’로 표현하였다. 이 수막새가 태어난 신라는 오랜 역사 속에 숨고 천사백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버렸지만 그 때에 돋던 달은 이제도 돋아나 수막새를 비추고 있으니 서라벌 달이 지금 또 떠있는 듯하고, 모란꽃을 향기가 없다고 했던 그 무렵의 선덕여왕을 여기서 다시 보는 듯 눈에 어려 선하다고 시인은 회고의 세월을 표현해 보이고 있다. 단시조의 대가답게 하나의 사물 속에서 스러진 세월을 되살펴보고 그 역사성을 캐내어 보여주고 있는 깔끔한 작품이다.
마흔에 첫아기 안고
보름달로 떠오른 딸
아기를 안고 웃으니
활짝 핀 백목련 나무
아기도 함께 웃으니
꽃비 계속 내리네.
<김우연, 꽃비>
환한 웃음이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작품이다. 어디 구겨진 틈이 없다. 그리고 시적 전개가 옆 사람과 이야기 나누듯 사근사근하다. 시집 간 딸이 마흔이 되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아기를 낳은 모양이다. 마흔이면 아기를 출산하기는 좀 늦은 때이다. 그 아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목마르게 기다리던 아기가 태어나니 딸은‘보름달’처럼 환하게 둥실한 모습으로 기쁨에 벅차 있다. 기다리던 귀여운 아기가 태어나니 딸은 마음이 보름달 되어 아기를 안고 기뻐서 웃으니 마치 백목련을 활짝 피운 백목련 나무 같다. 아기도 따라 함께 웃으니 화려하게 목련꽃잎이 피어 흩어지는 듯 황홀하다. 벅찬 마음에 젖어 들떠 있는 딸의 모습을 ‘활짝 핀 백목련’꽃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시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합천 해인사 기둥에 “원각도량하처(圓覺度量何處)”-‘깨달음의 도량, 즉 행복한 세상은 어디에 있는가?’글귀가 달려 있는데 그 답이 바로 이 시조에 담겨 있는 듯하다.
이제 너는, 내 마음 비춰주는 청동 거울
눈 주면 다가와서 미쁜 정 포개주고
살가운
이심전심을
눈빛으로 전하는
<김정희, 난에게>
난초는 고고한 선비의 정을 품고 있다고 한다. 요란스럽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더없이 그윽하여 사군자의 하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즉 군자의 기품을 보여주는 꽃이다. 그래 그런지 이 난은 기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물을 많이 주어도 안 되고, 토양도 사양토(沙壤土)에 적당한 햇빛이 들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하니 이 난을 기르는 시인의 정성을 알 만하다. 식물은 사람이 아끼는 만큼 자라 사람에게 보답한다고 한다. 이 작품은 ‘난’과 시인의 마음이 하나가 된 모습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난이 알아주고, 난의 마음은 내가 알아주는 그 눈빛을 서로 교환하고 있다. 초장에서 난을 청동거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귀한 존재라는 뜻과 마음을 비춰준다는 뜻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중장은 난이 시인에게 주는 고운 정을 표현하였고, 종장에서는 난과 시인이 심심상인(心心相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난과 시인은 말없이도 성령(聖靈)을 받아 서로의 마음을 눈빛으로도 아는 경지에 들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잡초의 길을 가는 건
잡초만이 아니다.
설자리 알지 못하면
꽃마저 잡초가 된다.
네가 선
이 많은 자리
있어야 할 자리인가.
<김희선, 있어야 할 자리>
우리가 흔히 듣는 말에 <분수(分數)를 지켜라>하는 말이 있다. 그럼 분수(分數)가 무엇인가.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나 사물을 잘 분별하는 슬기이다. 이 말은 자기 능력에 알맞게 행동하고 삶을 누리라는 경고의 말이다. 세상 만물은 다 자기가 설 자리가 있고, 살아갈 길이 있는데 이를 어기면 인생길, 삶의 길에 낭패(狼狽)를 보게 된다. 이를 경계하는 시조가 이 작품이다. 여기서 ‘잡초’는 멋대로 정제되지 않은 삶을 사는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즉 조신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누구나 엉망진창인 삶에 빠질 수 있음을 잡초를 통하여 초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중장에서는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는 다 따로 있는데 어디서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 모르면 아무리 마음을 닦은 사람이라도 잡초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네가 살아오고 살아가는데 있었던 숱한 네 처신이 네 분수에 알맞았는가를 되새겨보라고 종장에서 끝맺음하고 있다. 삶의 자세를 일깨우는 교학성이 아주 짙은 작품이다.
봄 오는 소리 들리는가.
귀가 밝아 좋구나.
어디서 먼저 오는지 그리움을 안고 서면
발끝엔
새싹들 호흡소리
들먹거리고 있네.
<박영교, 봄 오는 소리>
‘봄이 오는 소리’는 무엇일까. 봄은 올 때 무슨 소리를 동반하고 있는가. 사실 계절은 아무 소리 없이 왔다가 아무 소리 없이 가는 일을 반복한다. 이것은 물리적인 현상이고 시인은 마음으로 영혼으로 이를 듣고 보고 느낀다. 그래서 마음의 귀, 영혼의 ‘귀가 밝아 좋구나.’하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봄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봄의 소리’가 먼저 와 봄이 오는 것인지, 봄이 오니 ‘봄의 소리’가 따라오는 것인지는 불가해하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을 알고 싶은 애틋한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을 안고 이를 맞이하려 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 소리의 실체를 드디어 찾았다. ‘봄이 오는 소리’는 ‘새싹의 호흡소리’였던 것이다. 그 소리가 ‘들먹거리고’있으니 이게 봄이 오는 소리인 것이다. 즉 새싹이 봄의 전령이 되고 있다. 누구는 봄은 봄바람을 타고 온다고 하고, 또 누구는 그 전령은 개구리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누구 뭐래도 새 생명의 약동을 알리는 새싹이 그 역할의 주인공임을 이 시조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마음의 귀, 영혼의 귀로만 들림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만물의 숨소리, 만물의 본질을 마음과 영혼의 눈귀로 듣고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 시조는 깨우쳐주고 있다.
세월이 찾아와서
서럽게 굽어진 등
달과 별 마주하며
고단함 탄식하다
해님이
붉게 꽃 물든
저 하늘을 넘는다.
<신미경, 그 누구라도>
세월은 그냥 흐르는 시간이다. 능동적이 아니고 피동적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는 그 모습을 드러내고, 누구에게는 아예 비켜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세월을 하나의 능동적인 존재라도 된 듯이 ‘찾아와서’라고 하고 있다. 세월은 자연스럽게 흐르고 그 세월 따라‘서럽게 굽어진 등’을 지니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 작품은 전체가 의인화 되어 있는데 초장을 조금 곡진하게 표현한다면 ‘세월의 무게 눌려’하는 것이 더 명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장은 살아온 세월 속의 삶이 고단하고 어려워 내 삶의 세월은 왜 이리 모지냐고 한숨 섞인 독백을 하고 있다. 혹시 그 삶의 모습이 고단하지 않게 좀 해달라고 신명(神明)이 깃든 ‘달과 별’에 하소연하는 모습이다. 누구에게나 현재의 삶은 고달프나 지내놓고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고도 한다. 종장의 ‘해님’은 삶을 열어주는 존재이다. 활기찬 숨소리를 만들어주는 어버이 같은 존재가 ‘해님’이다. 그런데 세월과 세월이 쌓이다 보면 그‘해님’마저 지쳤는지 곱게 저녁놀을 만들며 서녘하늘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 누구도 세월이 지나면 이 해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예감을 표현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가고, 또 가는 것을 보고 이를 시화(詩化)한 작품이다. 이 시조는 종장이 ‘해님’이란 은유적 심상(心象)으로 시상을 환기하여 표현함으로써 단시조의 특성을 잘 살리고 있다.
곤냇골 곤냇골의 친구 집 찾아가니
아, 글쎄 라면 먹자네
순간 서녘하늘 번지는 허기
창가에 냄비 안치고 라면 끓길 기다린단 거라.
<오승철, 한여름 저녁놀에 라면 끓이러 간 친구>
‘곤냇골’ 그 이름이 고와 찾아봤더니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있는 세천 포구라고 되어 있다. ‘곤내’는 가는 내(細川)라 하나 물길이 가늘게 흐르는 마을이란 뜻으로 쓰인 말이다. 이 시조는 제목이 본문만큼이나 길다. 제목만 놓고 보아도 시적이다. 한여름이면 더위의 열기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때이다. 친구 집을 찾아간 때는 하루의 열기가 정점을 찍고 서녘바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저녁때이다. 이 때‘저녁놀’로 라면을 끓인다고 하고 있다. 이는 지상과 바다를 가스레인지 삼아 거기에 저녁놀을 불로 피워 라면을 끓이려고 한다. 그 상상의 스케일이 약간 과장되고 크다. 사실 이 시조 작품은 제목 하나로도 충분할 듯하다. 아름다운 삶과 풍경이 펼쳐지는 곤냇골 친구 집에 찾아간 시적자아가 시인이 된 듯하다. 그 라면 끓을지 안 끓을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서녘하늘에 번지는 저녁놀만큼이나 허기는 번지고 라면 끓는 일은 아득하기만 한 채 어둠이 찾아들 듯하다. 그러나 그 낭만은 바다의 물결처럼 넘실댈 듯하다. 일상적인 어투로 시조를 쓴 점이 인상적이다. 같이 발표한 「다 떠난 바다에 경례」도 일상적 어투의 대화체 시조로 정감을 자극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인 5월 19일에 오 시인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고 가셨다는 소식이 있어 안타깝다. 친구가 끓여 준다고 한 그 라면은 먹고 갔는지 아무래도 마음으로만 먹었을 성싶다.
너무나 당연하게
바라보는 우주의 신비
일상이 되어버린
매일 맞는 기적들
떠나야 비로소 아는
순간이란 보석들
<유자효, 시간1>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머무름 없는 연속적 흐름이다. 그 흐름은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다. 지금도 오고 간다. 누가 이 무형의 투명한 요물을 만들었을까. 아니, 어떻게 태어났을까. 이것의 흐름 속에 어제가 생겨나고, 오늘이 나타나고, 내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는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신(神)의 영역이며 우주가 지니고 있는 신비의 산물이다. 이 시간이 있음으로 하여 새로운 일상이 열리고 일상 속에서 뜻하지 않은 일도 생기고, 생각지도 못한 기적들이 일어나 삶을 새롭게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눈에 띄기도 하지만 눈에 띄지 않고 일어나 어느 시간이 흐르면 아! 그것이 언제 생겼나 하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그래서 시인이 시간은 아끼고 귀히 여기는‘보석’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순간’은 잡기가 어렵지만 흐른 다음의 남긴 자취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만물은 시간 속에 살다가 시간 속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일찍이 김천택도 고시조에서 촌음(寸陰)을 아껴 쓰라 했나 보다. 이 시조는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시간 속의 우주 섭리를 명료하게 표현하여 보여주고 있다.
경주 남산은 제일 큰 절
서라벌의 제일 높은 탑
그 절 마당 삼릉계곡
육존불 앞에 서면
비로소
이승과 저승이
한마당임을 알겠네.
<이동륜, 이승과 저승이>
일반적으로 경주를 불국토(佛國土)라고 부른다. 여기저기 불심(佛心)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웅장한 불국사를 비롯하여 석굴암 본존불 등 많은 돌부처들이 산재되어 있고, 수많은 절터들이 산굽이마다 있어 경주 전체가 하나의 불국(佛國)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이 작품은 금오산 기슭에서 내려뻗친 계곡과 산줄기로 이루어진 남산의 삼릉계곡에서의 모습과 거기서 느낀 감회를 표현한 시조이다. 삼릉계곡은 경주시 배동에 있는 계곡인데 여기엔 선각육존불이 근엄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주변이 모두 불국의 자취이고 부처의 모습이 들어서 있기에 없던 불심도 불길처럼 일어나게 하는 곳이다. 시인은 그 불교의 흔적을 보며 마음속 불심에 불을 당겨놓고 있었던 것 같다. 절터가 많이 남아 있는 남산을 하나의 커다란 절로 보고, 불심이 가득 모인 남산의 우뚝한 모습을 ‘탑’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남산의 모든 산기슭과 골짜기, 그 중에도 ‘삼릉계곡’을 ‘절
마당’으로 보고 여기에 새겨진 선각육존뷸 앞에 서서 불심에 감흥 되어 모든 마음의 짐, 속세의 잡념을 다 털어내고 되돌아 살펴보니 여기가 바로 ‘이승과 저승이’둘이 아닌 하나로 합치된 불국의 마당으로 무한(無限) 열락(悅樂)이 펼쳐지는 곳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 시인은 깊은 불심으로 무아경(無我境)에 들어선 듯하다.
어머니 심어두신
한 그루 키 자란 수국
오늘 아침 뜰 가에
꽃송이 활짝 피었오.
五月의 하늘 너머로
그려보는 어머니!
<이우영, 水菊開花·1-어머님을 그리며>
수국은 그 꽃송이가 떼로 몰려 탐스럽게 피는 꽃이다. 냉정, 무정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고, 이별과 삶의 아픔이 서린 전설을 가진 꽃으로 줄기가 1m 이상까지도 자란다. 이 작품은 시조 부제에 보이는 바와 같이 사모곡의 하나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우주이며 고향 하늘이고 생명의 근원지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그리운 존재이다. 그런 어머니가 왜 수국을 심었을까. 물론 자기도 즐기려 심었겠지만 아무래도 나 아닌 타인, 가족들에게 그 곱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즐기라고 정성껏 심으셨을 거다. 그런데 그 어머님은 지금 안 계시다. 아마도 하늘나라 부름을 받고 떠나가신 듯하다. 어머님에 대한 고마움과 그 정은 같이 살 때는 그 느낌의 절실함을 모르지만 떠나고 나면,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이 생수 솟듯 절실하다. 이 시인도 그런 것 같다. 뜰 가에 핀 수국 꽃송이를 보며 거기서 어머니의 체취를 느끼고 있다. 수국의 개화가 어머니 모습으로 오버 랩 되어 나타나고 있다. 오월의 하늘 아래 탐스레 핀 수국을 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선하다. 어머니! 하고 느낌표로 마침을 하였는데 이는 마음의 절실함의 표현이리라. 그런데 불러도 어머니의 ‘오냐!’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냥 무음의 메아리 속에 꽃송이만 부얼부얼 피어나고 있지 않을까. 초장과 종장을 명사로 끝맺음하여 ‘수국’을 ‘어머니’로 등가(等價) 은유하여 표현한 점이 돋보이는 시조이다.
탁자 위
찻잔 속에 동그란 달 떠올라
한 모금
마시려다 그 달이 깨질까봐
탁자에
그대로 두고
달 지기만
기다리네.
<이충용, 찻잔·2>
‘찻잔 속에 동그란 달 떠올라’한 것으로 보아 보름달인 듯한데 어느 계절에 뜬 달인지는 모르지만 왜 여유와 사유를 즐기며 마시는 찻잔에 떠올랐을까. 달빛 아래 고즈넉이 앉아 마음의 여유를 찾는 서정적인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강릉 경포대에는 달이 다섯 개 뜬다고 하는데 여기는 최소한도 둘은 떠서 어둠을 밀어내고 있을 것 같다. 찻잔에 뜬 달은 어쩌면 시인의 마음이 아닐까. 시인의 여유롭고 사색적인 마음이 달이 되어 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잔잔한 찻잔 속의 차를 마시려고 하면 그 찻물이 흔들려 시인의 마음이 깨질세라 차마 마시지 못하고 그냥 놓아두고 보기로 한 모양이다. 찻잔 속의 달이 지기만 기다리는데, 그 달이 지려면 아무래도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니 차를 마시지는 못하고 그냥 식을 것만 같다. 차를 못 마시는 안타까움과 찻잔을 앞에 놓고 자연을 완상하며 느끼는 낭만적 여유가 아주 시적이다. 기다림의 미학과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돋보이는 시조이다. 그런데 시조는 단락의 매듭을 가지고 이것이 서로 대립, 호응하며 이루어지는 문학이기에 보통의 경우라면 각장 앞뒤 구(句)는 한 단락을 이루어 표현하는데 초장과 중장에서 ‘탁자 위’와 ‘한 모금’은 왜 한 소절(小節)만을 떼어 줄 바꾸어 표현했을까. 무슨 시적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지극히
깊은 것은
푸른 잎 빛을 띄운다.
지극히
거룩한 것
소리도 들리잖아
하늘빛
푸르름에는
돌아간다. 구름도
<정수경, 푸른 하늘>
자연의 이치를 표현한 작품인데 이를 통하여 인간도 이와 같음을 보여준 것 같다. 자연 속에 펼쳐지는 모습을 깊이 성찰하여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푸른 하늘은 지극히 높고 아득하다. 이를 강물이나 호수는 깊을수록 그 푸름이 더하고, 깊을수록 고요하고 그윽하다. 하늘도 이와 같음을 표현하고 있다. 고요하고 그윽하기에 거룩하게 느껴진다. 때에 따라서는 빛도 소리도 없다. 이 세상의 부산스런 모습이 이곳엔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의 일과 천상의 일을 함께 표현하여 자연의 신이(神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이고 사는 하늘에는 분명히 있지만 함부로는 보고 듣지 못하는 신비가 있다. 종장에서 ‘하늘 빛 푸르름에는 돌아간다. 구름도’하였는데 이는 하늘빛 푸르름에는 깊음과 거룩함이 깃들여 있어 어느 무엇도 경건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그리 표현하였다고 본다. 여기서 ‘구름’은 잡다한 티끌이거나 허물이 있는 존재의 비유로 쓰인 말이라 하겠다. 깊고 그윽한 철학적 심안(心眼)으로 자연을 보고, 그 자연을 거룩한 존재로 표현한 시이다. 이 시조에서는 ‘지극히’란 사어가 푸른 하늘을 더욱 심오(深奧)하게 만들고 있다.
늙어가는 세월 따라
아내도 이젠 할머니
친구처럼 연인마냥
말 없어도 맘 통하고
어쩌다 곁에 없으면
불안해서 찾는다.
<정순량, 아내 엿보기>
아내는 하느님이 에덴동산에서 남편 아담을 위하여 이브로 하여금 아내로서 아담 곁에서 도우며 살라고 만든 것으로 남편과 아내 둘 사이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한다. 어느 수필가는 이 아내를 ‘호미’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호미, 그렇게 선뜻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다. 그냥 삶의 곁에 함께 있으며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없어선 안 될 존재이다. 젊을 때부터 늘 짝인 남편 곁에서 남편을 도우며 집안의 대소사를 호미로 풀을 매듯 정리하여 집안의 건강과 행복을 챙기는 어찌 보면 거룩한 성녀이다. 그러나 너나 나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을 끌고 가는 세월이 젊을 때는 젊은 듯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지나다 보니 세월도 낡아 늙어가고 안생도 함께 늙어간다. 남편도 아내도 비켜갈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세월의 길이다.
젊은 날엔 서로의 자란 환경, 성격이 달라 아무리 사랑으로 맺어졌다 하더라도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해야 의사소통이 되었는데 어느새 세월을 쌓고 쌓다 보니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인생도 늙어가고 그 마음도 숙성되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 몸짓만 보아도 그 뜻을 서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것이 인생인 것 같다. 시인도 이제 그 경지에 이르렀다. 이래서 부부를 일심동체라 하는가 보다. 그런데 같이 있으면 그렇게 뜻이 통하여 몰랐는데 아내가 보이지 않으면 반쪽만 남은 허전함으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꾸 찾게 된다. 부부는 나이가 들면 등 긁어 주는 존재라 하지 않던가. 부부 사이는 아주 하찮고 조그만 일도 아주 귀중한 일이 되고 있다. 나이 들면 더욱 그렇다. 시인은 아내를 친구이며 연인이라고 하여 연인 아내가 곁에 없으면 불안하다고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부부는 필수불가결의 존재임을 표현한 시조이다.
나무들 옷을 벗겨
혹독한 훈련인데
찬바람
눈 비 오면
저리는 가슴인가
대장의
호각소리가
들리는 듯하구나.
<채명호, 겨울 산>
이 작품의 시적자아는‘겨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겨울 추위’ ‘겨울바람’이다. 나무들은 겨울이 가까워지면 생장(生長)을 멈추고 잎을 하나 둘 떨구어 털어낸다. 그것은 추운 겨울을 나려면 영양분을 비축하여 아껴 써야 하는데 잎에 까지 영양분을 공급하다 보면 비축한 영양분이 고갈(枯渴)되어 나무가 둥치채로 말라죽을 수 있기에 모든 나무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하는 생리적 작용이다. 이를 이 시조의 초장에서는 겨울이 나무들‘옷을 벗겨’놓은 것으로 표현하였다. 시적 자아를 사람처럼 변이시켜 표현한 것이다. 시인은 한겨울에 겨울이 나무들을 나체로 만들어 모진 훈련을 시키는 어느 군대의 지휘관으로 환치하였다. 중장은 찬바람, 눈비에 산이 가슴을 저리고 있다고 하였다. 산기슭의 나무들이나 풀숲들이 겨울바람에 부르르 흔들리는 모습을 그리 표현한 것 같다. 종장은 이런 겨울 산의 모습을 보고 훈련을 시키는 대장이 호각을 불어대며 혹독한 훈련을 시키고 있은 듯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겨울’은 대장이고, ‘호각 소리’는 그 대장이 내는 소리로 칼바람 소리이다. 이 시조는 시어와 시구에 적절한 은유를 사용하여 겨울 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놓고 있다.
약해졌던 마음에
초록 근육 붙는다.
시간을 자른 단면
고였던 겨울 진액
한 접시
무쳐 나온 향
이 봄을 달래달래
<하미정, 달래>
달래는 봄철의 자영강장 나물로 알뿌리는 알싸하고 잎은 향긋한 부추과에 속하는 봄나물이다.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하는 우리나라 전통 동요 <맴맴>에도 등장하는 아주 정겨운 식물이다. 자연 상태에서 겨울을 지내고 봄이면 파릇파릇 잎이 올라오는데 잎은 베어서 무쳐먹고 뿌리도 함께 버무려 먹는데 봄의 잃은 입맛을 챙겨주는 나물무침의 자료이다. 새파란 달래 잎을 ‘초록 근육’이라고 은유하여 겨울 지나 잎이 파랗게 솟아 피어남을 초장에서 표현하고, 중장에서는 그 잎이 자라는 데는 봄이라는 시간이 걸리니 그 가시적인 달래로 자람을 시간이란 불가시적인 추상어로 표현하고 있다. 달래 잎 속에는 소화가 잘 되고 살균작용까지 하는‘알라신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를‘겨울 진액’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초장이 달래가 자람, 중장이 달래 채취 모습이라면 종장은 달래를 캐고 잘라 무친 달래나물의 맛과 향을 표현하였다. 종장 마지막 구 ‘달래달래’란 시어가 특히 눈길을 끈다. 이 말은 중의적인 시어로 시적 감흥을 리드미컬하게 해주고 있다.
Ⅲ)
시조는 정형의 미학을 지닌 문학으로 형식과 율격이 절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언어로 표현된다. 이 때 언어 즉 시어는 사회적 약속을 바탕에 두어야 한다. 이런 시어로 사유 깊은 감성을 끌어올려 쓰되 여기에는 비유가 동원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시조 창작의 일반론이다. 또한 한 수 한 수의 시조는 초, 중, 종장의 3단계에 맞춰 열고, 풀고, 맺는 과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때 시조의 생명은 종장이다. 시조, 그 중에도 단시조는 종장을 돌올(突兀)한 전환으로 시상의 절정을 이끌어내는 표현기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때 초장에서 중장으로 중장에서 종장으로 더욱 심화된 시상이 이어져 마치 계곡물이 굽이굽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시상이 흘러가야 한다. 2023년 현대시조 봄 호에 실린 단시조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대부분 작품이 노력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더러 한 두 편이 그 전환의 의미가 희미한 것도 있어 아쉬움을 자아냈다.
봄 호이지만 겨울 이미지가 많이 작품 속에 퍼져 있음도 특징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섭리와 이치에 시상 흐름의 중점을 두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조 작품이 현실에 바탕을 두고 그 현실을 표현하는 면에서도 현재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상을 시적 소재로 삼아 쓴 점은 아주 긍정적이었다. 시조의 맺음 방법도 위에서 살펴 본 스물 한 편 중 대부분 작품인 열일곱 편이 전통적인 종지형 맺음으로 하고 있고, 세 편이 단절형으로 썼고, 개방형을 택한 것은 한 편이었다. 개방형은 무한한 상상의 영역을 가지고 있어서 시작품에서 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시조에서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며, 표현의미를 강조하는 단절형도 요즘 심심찮게 보이는 추세이다. 끝으로 시조의 배행 문제인데 원래 시조는 장별 배행으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시조로 넘어오면서 특히 단시조에서 구별배행이 대세처럼 등장하여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단시조의 경우는 소절별 배행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들은 앞뒤에서 등가(等價)의 의미로 서로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