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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53권 / 기(記) / 외가 7대 조고비의 분묘를 개수한 기문〔外姓七世祖考妣墳塋改修記〕
계공랑(啓功郞) 이공려(李公礪)와 안인(安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합장한 쌍분(雙墳)이 안산(安山) 첨성촌(瞻星村)의 북쪽에 있는데, 이분들이 나의 6세 조고비이다. 그 왼쪽 언덕 위에 있는 무덤이 안인의 고비(考妣)인 창선대부(彰善大夫) 청연수(淸淵守) 이숙의(李淑義)와
신인(愼人) 언양 김씨(彦陽金氏)의 무덤이다. 청연공(淸淵公)의 고(考)는 창선대부 풍산부정(豐山副正) 이외(李畏)이고, 조(祖)는 명선대부(明善大夫) 수도정(守道正) 이덕생(李德生)으로 정종대왕(定宗大王)의 일곱째 아들이다. 국제(國制)에 왕자가 군에 봉해지면 품계가 1품인데 상왕(上王)이 겸손함을 고집하시어 특별히 강봉(降封)하여 정(正)이 되었다고 한다. 청연공의 외조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훈련원 판관 심철한(沈鐵漢)이다.
신인 언양 김씨의 고는 선무랑(宣務郞)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 김종(金淙)이고, 조는 형조 도관 정랑(刑曹都官正郞) 김계보(金季甫)이고, 증조는 통정대부 김약(金躍)이고, 고조는 광정대부(匡靖大夫) 목사 김상(金賞)이니, 시중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후예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폐주인 창왕(昌王) 1년(1389) 가을에 왜적이 함양(咸陽)을 쳐들어왔을 때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모(金某)가 패전하여 나라를 위하여 죽었다고 한다.
청연공은 아들이 없어 외손(外孫)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하였으므로 이곳에 장사 지낸 것이다.
신인 김씨는 본래 남원(南原) 고달리(古達里)에 살고 있었으며 부친인 통찬공과 모친 고령 신씨(高靈申氏)의 묘가 집 뒤에 있었다. 신씨는 부사 신송주(申松舟)의 딸이다. 계공공(啓功公)이 일찍 죽자 부인은 자신의 외가(外家)인 남원으로 돌아갔는데, 두 아들도 따라갔으니 첫째가 좌랑 이사언(李士彦)이고, 둘째가 바로 나의 5세조인 응교공(應敎公) 이사필(李士弼)이다. 뒤에 졸하여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좌랑의 아들 이우직(李友直)은 예조 판서를 지내고 명종ㆍ선조 연간의 명신이 되었다. 응교공의 아들은 첨정 이우인(李友仁)인데, 첨정공은 아들 넷을 두었다. 첫째는 교리이고, 둘째는 좌찬성이고, 셋째는 군수이고, 넷째는 예조 참판으로, 자손이 드디어 성대한 가문이 되었으니, 모두 안인(安人)이 가르치고 길러서 성립시킨 공이다. 족질인 이광환(李匡煥)이 집안의 고사(故事)를 많이 기억하고 있어서 내가 기록할 수 있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자 사토(莎土)가 무너지고 손상되었으며 향사(享祀)도 따라서 거행하지 않았는데, 갑술년(1754, 영조30) 3월 15일에 내가 종인(宗人)을 거느리고 분묘를 새로이 봉축(封築)하였다. 그 고하는 글에 이르기를, “외성(外姓) 7세손 여주(驪州) 이익(李瀷) 등이 감히 외성 7세 조고 모관부군(某官府君)과 7세 조비(祖妣) 모봉 모씨(某封某氏)의 묘에 분명히 아룁니다. 우리 6세 조비가 본친(本親)을 효성스럽게 받들어 뒷산에 묏자리를 잡았는데 제사를 오랫동안 빠뜨렸으며 봉분도 무너졌으니, 선조의 뜻을 추념하건대 두려운 마음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이제 절일(節日)로 인하여 분묘를 개수하고 묘전(墓田)을 조금 마련해서 한 해에 한 차례 경건하게 제사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역사(役事)를 시작하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집니다.” 하였다.
[주-D001] 국제(國制)에 …… 한다 : 종실(宗室) 품계에 따르면 왕의 아들 중 대군(大君)과 왕자군(王子君)은 품계가 없고 다음으로 군(君)은 품계가 1품이다. 대군을 승습한 적장자(嫡長子)는 종1품의 군을 받는다. 세자의 중자(衆子)이거나 대군을 승습한 적장손(嫡長孫)이거나 왕자군을 승습한 적장자는 정2품의 군을 받는다. 세자의 중손(衆孫)이거나 대군의 중자이거나 대군을 승습한 적장증손(嫡長曾孫)이거나 왕자군을 승습한 적장손일 경우 종2품의 군을 받는다. 도정(都正)과 정(正)은 정3품으로 세자의 중증손(衆曾孫), 대군의 중손, 왕자군의 중자, 왕자군을 승습한 적장증손 등이 받는 것이다. 《선원강요(璿源綱要)》에 따르면 정종(定宗)의 7자인 이덕생(李德生)은 수도군(守道君)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하여 상왕(上王)이 되었을 때 스스로 품계를 낮추고 자손들도 모두 그에 따라 당시 일시적으로 강봉(降封)되었던 듯하다. 《大典會通 吏典 宗親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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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姓七世祖考妣墳塋改修記
啓功郞諱公礪。安人全州李氏祔葬雙墳。在安山瞻星邨之北。瀷六世祖考妣也。其左岡上有墳。卽安人考妣彰善大夫淸淵守諱淑義。愼人彥陽金氏之塋。淸淵公考彰善大夫豐山副正諱畏。祖明善大夫守道正諱德生。定宗大王第七男。國制王子封君。階在一品。上王執謙。特降封爲正云。外祖靑松沈氏訓鍊判官鐵漢。愼人考宣務郞通禮門通贊淙。祖刑曹都官正郞季甫。曾祖通政躍。
高祖匡靖大夫牧使賞。卽侍中威烈公就礪之後。按麗史廢王昌元年秋。倭冦咸陽。晉州牧使金某戰敗。死於王事。
淸淵公無子。託後於外孫。故葬于此。金氏本居南原古達里。通贊及配高靈申氏之墓在於家後。申氏卽府使松舟之女。啓功公早歿。安人歸于其外氏南原鄕。二孤從焉。長佐郞士彥。次卽我五世祖應敎公也。後卒反于京第。佐郞之子友直官禮曹判書。爲宣明間名臣。應敎公子僉正。僉正公四子。長校理次左贊成次郡守次禮曹參判。子孫遂爲盛族大家。皆安人誨養成立之力。族姪孫匡煥多識家世故事。瀷得以志之。歲久莎土崩夷。享祀亦隨以不擧。甲戌三月十五日。瀷率宗人新其封築。其告詞云外姓七世孫驪州李瀷等。敢昭告于外姓七世祖考某官府君。七世祖妣某封某氏之墓。維我六世祖妣。孝奉本親。卜兆後麓。奠事久闕。封築亦頹。追念先志。罪懼難勝。今因節日。修改墳塋。約置墓田。歲一虔祀。役事伊始。冞增感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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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 전라도(全羅道) / 함평현(咸平縣)
【누정】 관정루(觀政樓) 정인지(鄭麟趾)의 기문에, “누관을 짓는 것이 정치하는 데에 무슨 관계가 있으랴마는 국가가 다스려지고 문란한 자취나 고을이 창성하고 쇠퇴한 유래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예전에 선양공(單襄公)이 진현(陳縣)을 지나다가 숙박할 곳이 없자 진이 앞으로 망할 것을 알았고, 공자가 포(蒲)에 들어가서 담과 집이 견고한 것을 보고 중유(仲由 자로(子路))의 선정을 알았다. 대체로 조정이 도리를 잃으면 정치와 법령이 가혹하고 아전이 용렬하고 백성이 원망하고 고을이 쇠락하고 피폐하게 되니, 어찌 누관이 설치되기를 바라겠는가. 반드시 조정이 맑고 밝아서 정사가 닦여진 뒤에야 수령의 자리에 인재를 얻어 백성이 편안하고 재물이 풍부해져서 여러 가지 피폐한 것이 모두 부흥하여 주군이 창성하고 정치가 날로 융성해지는 것이다.
우리 국가는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서 안팎이 태평한 지 50년이 넘었다. 여러 고을의 수령은 모두 그 선발하여 임명함을 잘하였다. 더욱 함평은 바다 곁에 있고 토지가 비옥하다. 바다 곁에 있으므로 경비가 해이하지 않고, 토지가 비옥하므로 백성이 많으니,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야 비로소 수령이 될 수 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김계보(金季甫)가 바로 그 사람이다.
부임한 지 1년 만에 아전에게 위엄이 행해지고 백성에게 은혜가 더해지고 칠사(七事)는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어서 일을 처결하고 사람에게 응접하는 것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었다. 이윽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누각과 연못은 다만 놀고 구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번거로운 걱정을 씻고 성정을 즐겁게 하여, 침울함을 물리치고 시원함을 맞아들일 수 있는 것인데, 이 고을에는 그것이 없으니, 어찌 사명(使命)을 존경하여 접대하는 데에 하나의 결함이 되지 않으랴.’ 하고, 곧 일이 없는 중들을 모아 재목을 벌채하고 기와를 굽고 객사 동쪽에 터를 잡아 계해년 정월에 일을 시작하여 몇 달이 지나서 낙성했다. 갑자년 여름에 단청하였는데,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았으며, 재물은 관가에서 나오지 않았고 역사는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는데, 발돋움한 듯이 높이 솟고, 새가 나는 듯이 펴졌으니, 고을 사람들이 보고 놀라며 신기하다고 하였다. 또 그 곁에 못을 파고 연을 심었는데 넓이가 두어 묘(畝)나 되니, 또한 한 누각의 좋은 경치이다. 아아, 김군이 정치할 줄 아는 사람이로다.
내가 상상하건대, 함평의 고을됨이 산세는 길게 잇달아 북에서 왔는데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고, 넓은 들이 멀리 뻗어 남쪽이 틔었고 내의 흐름이 물을 대기에 적당하고 멀리 바라보면 잇달은 봉우리와 겹친 산이 구름 연기 자욱한 안개 사이에 감추었다가 비치고 나왔다가 들어가고 하여, 가을달과 봄바람에 기상이 천만가지로 다르다. 예전에는 사람은 사람대로 경치는 경치대로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헌함과 기둥, 책상 앞에 다 모였다.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이면 누구든 그 쇄락한 정신과 넓직한 도량과 활달한 기상과 한가로운 흥취를, 굽어보고 우러러 보는 사이에서 얻지 않겠는가. 밭 갈고 짐승 치고 고기 잡고 나무하는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서로 이야기 하며 허리 구부리고, 끊임없이 오고 가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소 말이 흩어져 있는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일시의 즐거운 구경이다. 지금 지간원(知諫院) 모(牟)군이 내게 말하기를, ‘함평은 내 고향이요, 당신도 일찍이 구경하였는데, 기문과 시가 없을 수 없으니, 부디 나를 위해 지어 주십시오.’ 하며, 아울러 이름을 붙여 주기를 청하니, 내가 사양해도 안 되어 관정이란 두 글자로 편액하노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등림(登臨)이 반드시 놀고 구경하길 즐김이 아니요, 가는 말을 잠깐 쉬어 한가함을 빌리는 것일세. 긴 길은 북으로 가리역(嘉里驛)에 통하고, 뜬구름은 동으로 금성산(錦城山)에 잇닿았네. 남풍에 베개와 대자리는 속세를 벗어난 듯, 긴 여름날에 누각이 푸른 나무 사이에 있네. 석류꽃의 붉음이 한창이어서, 나그네길에 그런대로 다시 한바탕 웃음일세.” 하였다.
역락정(亦樂亭) 현의 동쪽 2리에 있는데, 현감 이계의(李繼義)가 세웠다.
『신증』 희우루(喜雨樓) 객헌(客軒) 동쪽에 있다.
樓亭
觀政樓。鄭麟趾記:“樓觀之作,其於爲政乎何與焉?然國家理亂之跡、州郡盛衰之由,於是乎可見矣。昔單襄公過陳縣,無施舍之所,而知陳之將亡;吾夫子入蒲,墻屋完固,而知仲由之善政。蓋朝廷失道,則政令苛暴,吏庸民咨,州郡凋弊,尙何望其樓觀之可設哉?必也朝廷淸明,政事修,然後守宰得人,民安物阜,百廢俱興,州郡盛而治道日以隆矣。國家明良相遇,中外昇平,踰五十年,列郡之宰,皆極其選。咸平負海而土地饒,負海故警備不轍,土地饒故人民多,必文武兼全之才始得爲宰,今則金君季甫,其人也。下車一年,威著於吏,惠加於民,七事爲諸郡最,處事應物,恢恢乎有餘裕矣。時則迺謀諸心曰:‘樓池非直遊玩而已也,可以滌煩慮怡性情,袪湮鬱而導淸曠。是縣則無之,豈不爲尊使命之一欠歟?’ 迺募遊手之髡,伐材陶瓦,相基於客舍之東,始功於癸亥之正月,歷數月而告訖。丹雘於甲子之夏,不侈不陋,財不出於官,役不及於民,峙焉如跂,翼然如飛,縣人見之,驚駭以爲神。又於旁鑿池種蓮,方可數畝,亦爲一樓之佳致。吁!金君其知爲政者哉!吾想夫咸平爲縣,山勢迤邐而北來,松篁蔚蒼;曠野紆餘而南豁,川流灌漑。遠望,則聯峯疊嶂隱映出沒於雲煙杳靄之間,秋月春風,氣象萬千。昔也人自人,景自景,今皆結攬於軒楹几案之前。登斯樓者,其灑落之懷、恢廓之量、浩然之氣、悠然之興,豈不有得於俯仰間哉?至於耕牧漁樵,謳歌相話,傴僂絡繹,禽鳥之翺翔、牛馬之布散,亦皆一時之樂觀也。今知諫院牟君謂予曰:‘咸平,吾鄕也。子嘗目之矣,不可無記與詩。幸爲吾下筆。’ 請幷加名,予辭不獲,以‘觀政’二字扁之。” ○成任詩:“登臨非是好遊觀,試憩征鞍暫借閑。長路北通嘉里驛,浮雲東接錦城山。薰風枕簟紅塵外,永日簷楹綠樹間。賴有榴花紅爛熳,客中聊復一開顔。”
亦樂亭。在縣東二里。縣監李繼義建。
〔新增〕 喜雨樓。在客軒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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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집(俛仰集) 송순(宋純)생년1493년(성종 24)몰년1582년(선조 15)자수초(守初)ㆍ성지(誠之)호면앙정(俛仰亭)ㆍ기촌(企村)본관신평(新平)시호숙정(肅定)
俛仰續集卷之二 / 行狀 / 金遊隱公行狀
金公諱季甫。彥陽人。太傅平章諡威烈就礪之八世孫。太傅平章諡翼戴佺之七世孫。曾祖。禮儀判書,彥陽君湧輝。屢將重兵有功。■祖。
純誠翼戴原從功臣,晉州牧使賞。倭寇晉州。屢捷戰亡。功烈顯著。
父。行綾城縣令。贈吏曹參判躍。外祖。開城尹慶州李彰路。文忠公益齋齊賢之子也。公平生之心。正直忠毅。不與貴顯交遊。宣德壬子。以學生登武科。歷事世宗,文宗,端宗。舊本云魯山朝 官至刑曺都官正郞。而世祖元年乙亥。作詩贈同朝諸賢。與冢婦之季父歸來申公末舟。解紱南來。申歸于淳昌。公歸于南原屯山下。癖於漁樵。聾於世事。而於淳子江上。因作小亭。自號遊隱翁。自額鰲戴者。亦有所況。鰲戴三山。而公戴三朝之義。遊斯隱斯。終老江湖。去神仙不遠之意也。公與申公最友善。携酒以詩。間日相從。歸來亭鰲戴亭。苟爲一代之勝地矣。公每當皓月良宵。登斯望北。長嚱感歎。已成恒規。忽於亭楣。特書一句曰。孤鶩影邊煙渚白。巨鰲頭上霽峯靑。此不辨神人之所題。而蓋喩公節義這氣象也。公之親侄瓘顯仕當朝。名列忠賢。而奉公本意。終不使出脚。人皆以此爲難。而隱行卓節。尤顯當世焉。且自寧越變後。不出門庭。廢衣冠絶滋味。因爲成疾。以終天年。嗚呼。公之忠義。至矣盡矣。後將有春秋之正議則如公忠義。豈可泯滅耶。配綾城具氏。府使爰立之女。生一男三女。男淙。通贊。女長適閔甫昌。次適金軸。次適吳宗夏。淙生一男一女。男召奭。生員。女適淸淵守淑義。召奭生一男二女。男譓。生員。女長適柳承坤。次適尹河。譓生三男一女。長守恭。次守儉。次守溫。女卽吾之冢婦也。余自秋城。轉向鰲戴亭。査兄譓略草遊隱公行狀。取其世系。示我請記。余素仰節義。又幸連楣。義不敢辭而記之。
[주-D001] 賞 : 저본에는 '甞'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사》 권45 공양왕 2년 4월 임인일 기사와 《태조실록》 2년 7월 22일 기사 등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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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5권 / 시(詩) / 정현로 항령 를 작별하다〔別鄭玄老 恒齡〕
묘년에 조정에 올라 관복 찬란하였고 / 年妙登廷煥芾珩
당시에 촉망 받아 세상이 다 놀랐었지 / 當時屬望世爭驚
만언의 봉사 올려 외로운 충정 드러냈고 / 萬言封奏孤忠見
한 장 탄핵 상소에 뭇사람들 발끈했지 / 一紙彈章衆怒生
재주를 고을에 가서 조금 시험해 봐야 했으며 / 才合少嘗歸下邑
부모 봉양에도 뜻을 두었기에 수령 자리 얻었도다 / 志存榮養得專城
현조께서 누대에 이름 붙인 뜻을 알려거든 / 倘知賢祖名樓意
관정루에 남기신 기문을 자세히 살펴야 하리라 / 觀政遺文且細評
[주-D001] 정현로(鄭玄老) : 정항령(鄭恒齡, 1710~1770)은 자가 현로, 본관은 하동이다. 정상기의 아들이다. 1743년(영조19)에 문과에 합격하고, 함평 현감, 정언, 집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지리학에 밝아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를 제작하였다. 《河東鄭氏文成公派譜, 河東鄭氏文成公派宗中, 2007》 정항령의 생년인 1710년(숙종36)이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경진년(1700)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1719년에 태어난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이 〈정현로의 간독 뒤에 제하다[題鄭玄老簡牘後]〉에서 “내가 정현로보다 9살이 적다.”라고 한 것을 근거로 족보의 생년 기록이 정확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1751년(영조27) 정항령이 함평 현감으로 부임할 때에 성호가 지어 준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앞의 정상기에게 지어 준 시와 같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주-D002] 만언(萬言)의 …… 드러냈고 : 1750년(영조26) 사헌부 지평의 관직에 있던 정항령이 장문(長文)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첫째 민역(民役)을 고르게 하고, 둘째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며, 셋째 무비(武備)를 정돈하고, 넷째 관로(官路)를 공정하게 하며, 다섯째 법령(法令)을 믿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이 상소에 채택할 만한 내용이 많다고 하여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英祖實錄 26年 3月 13日》[주-D003] 한 장 …… 발끈했지 : 정항령이 1750년 지평으로 재직할 때에 임금이 친히 거행했던 대보단(大報壇)의 제사에 많은 재신(宰臣)들이 불참하자, 그들의 파직을 청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英祖實錄 26年 3月 17日》[주-D004] 현조(賢祖)께서 …… 하리라 : 정현로의 선조인 정인지(鄭麟趾)가 함평현(咸平縣)의 관정루(觀政樓)에 이름을 처음 붙이고 기문(記文)을 남겼는데, 그 기문의 내용을 자세히 음미해 보고 고을을 잘 다스리라고 당부한 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6 全羅道 咸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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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遊隱公現夢曰 讀書不可眼讀 宜有心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