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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을 보면서
2022년 12월 12일 / 행 3:1-10
행 3:1-10 /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 어느 날 오후 베드로와 요한은 3시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2)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였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하나가 실려 왔다. 그는 날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살았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 구걸하였다. 4)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눈여겨 보았다. 이윽고 베드로가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자 5) 그는 무엇을 얻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6)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8) 그는 걸어 보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9)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걸어 들어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10) 그가 바로 그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날마다 구걸하던 앉은뱅이인 것을 알자 너무도 놀라 말을 잃었다.
본문은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 기적을 베푼 사건이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구약의 율법의 전통을 따라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던 중이었다. 성전 미문 앞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장애인 하나가 기도하러 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인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하니 거지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볼 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는 발과 발목에 곧 힘을 얻고 일어나 뛰며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는 걸인과 이미 얻은 은혜를 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다.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눈은 언제나 무엇을 받을까 하여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눈은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은혜의 눈이다. 결국 받으려고 내민 손이 주려고 내민 손에 붙잡혔다. 앉은뱅이의 손은 유한한 물질을 구하는 손이요 베드로와 요한의 손은 영원한 생명을 주려는 손이다. 이것은 인간의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전도, 복음, 사랑이다. 전도는 무엇인가를 주려는 마음이요 손길이요 행동이다. 앉은뱅이에게는 돈이 전부요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물질이 결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본문에서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을 주는 전도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라고 하지 않다. ‘내게 있는 것을 주라’고 하셨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은 얼마 전까지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고, 섬김을 받으려고 다투었으며,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크리스천이 이렇게 변화가 되었으면 한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닮기 위해 힘쓰고, 기도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어져 갈 것이다.
1. 사랑을 주었다.
전도의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전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도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나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이웃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 때문에 전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보다 교인 숫자 채우기 위해서 전도하자고 하면 부정적인 반응부터 나타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 자신부터가 견실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래야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부터가 견실한 밀알이 되지 못하였는데, 전도해야 한다는 의무에 젖어 묻혀 있는 땅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베드로처럼 5천 명은커녕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전도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구걸하는 이에게 줄 은과 금은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 속에 꽉 차 있었다. 두 사도가 걸인을 돕고 싶은 생각이나 마음이 없었다면 성전 미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걸인을 외면하고 빨리 성전으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추측보다는 관심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발걸음이 걸인 앞에서 멈추었던 것은 예수님처럼,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 특히 자신들에게 가득 차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여 주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도는 필요를 채워 주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마음과 가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 수반되어야 진정한 사랑이다. 제사장이나 레의 사람처럼 측은하다는 생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사도 요한의 ‘자녀들이여, 사랑한다고 혀에 발린 말을 인제 그만두고 진정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줍시다.’(요일 3:18)라는 말처럼 이제는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본을 보일 때이다.
초대교회에는 구제부가 있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네 것 내 것이 없이 이웃 사랑을 실질적으로 실천하였다. 많은 성도가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기도 하였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 물질이나 돈이 없는 사람은 건강한 몸을 주신 주님 앞에 손과 발을 가지고 섬기면 된다. 나에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제물로 드렸고 가지고 있는 재능을 드리면 된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이 지옥의 영혼들이 너무 안타까우셨다. 단 한 명이라도 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천사를 지옥으로 보내셨다. 천사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 중 한 부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인,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좋은 일 한 게 있으면 하나라도 말해 보세요.” “하나도 없어요. 아, 참! 기억나는 게 있네요. 집에 찾아온 거지에게 양파 한 개를 준 적이 있어요.” 천사가 천국 기록 보관서에 가서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양파를 찾아 다시 지옥으로 갔다. “주님의 은혜로 부인이 천국에 갈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이 양파가 천국으로 데려다 줄 증거물이니 한쪽 끝을 단단히 잡고 가시죠.”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지옥의 무리가 우르르 달려들어 너도나도 부인에게 매달렸다. 매달린 사람들의 무게로 양파 껍질이 벗겨질까 두려웠던 부인은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못된 놈들아, 저리 가지 못해! 착한 일 하나 한 적 없는 너희는 지옥 불에서 고생해도 돼!”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잡고 있던 양파의 껍질이 홀라당 벗겨져 다시 지옥으로 떨어졌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이 다가온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늘 기억하고 거저 받았으니 겸손히 거저 주는 심정으로 이 세상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나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자. 마태복음 10:8에 보면 70인 전도대를 파송하면서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이 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가 시간도 거저 받았고, 물질도 거저 받았고, 재능도 거저 받았다. 건강도 거저 받았다. 거저 받은 사랑을 거저 주는 전도자가 되자.
2.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초대교회 성도들 전도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전도는 고상한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는 법을 전하는 것, 성공의 비결을 전수하는 것, 병 고치는 비법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이다. 그냥 말로만 하고 지식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이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이다. 전도는 원색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했다. 즉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그것을 주겠다는 것이다. 영어 성경에 보면 ‘What I have I give you’라고 했다. 베드로나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전부였다. 그랬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다. 바울은 빌립보서 1:21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했다. 이는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의 전부라고 믿고 고백하여 생활하는 사람이 그 예수님을 전하여 주는 것이 전도이다. 나의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흔히 고백하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이라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겠다고 말한다.
어느 날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 대장에게 “당신의 전도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능력을 배우고 싶다.”라고 묻자 그는 “내가 어느 날 런던의 빈민가를 보았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내가 저들에게 줄 금과 은은 없거니와 나의 전부인 그리스도를 전하여 주리라고 생각하던 순간부터 전도의 능력이 나타났다.”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뿐 아니라 나의 전부로 믿고 산다면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전도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유일한 희망이요 생 전부가 되어야 된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말하고 행동할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전부임을 고백하자. 그리고 그 예수님을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랑스럽게 전하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이웃과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이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도, 행복도, 명예도, 돈도 바꿀 수 없네’
3. 이에 먼저 할 일이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장애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비결이 있다.
1. 기도하였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 기도 시간이 되어 기도하려고 성전 미문으로 가던 중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원동력은 바로 기도다. 기도할 때 전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이 전도 대상자를 만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환자를 고쳐 주셨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도 병자가 낫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께서 명령하실 때 즉시 나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말씀했다.
특히 영적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전도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전도하는 사람도 기도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와 성도들은 지원사격인 기도를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먼저 기도로 무장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실패한다.
2. 직접 행동하는 믿음이다.
수많은 사람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거지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 아마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 사람의 운명이 기구하다느니, 저렇게 성전 미문에서 구걸을 한다고 비난도 했을 것이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어 동전 한 푼 두 푼을 던져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여 준 사람은 없었다. 기도하러 출입하는 그 많은 사람이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데, 있는 그 사람에게 전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 전도는 행동하는 것이다. 나중에, 다음에 시간이 나면 하고 핑계하면 영원히 전도하지 못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도 행동하자. 베드로와 요한처럼 가던 길을 멈추어 복음을 전하고 손을 내밀어 행동하는 믿음으로 실천하자.
고재봉 전도사 / 1963년 10월 새벽에 고재봉이라는 사람이 강원도 인제에서 당시 병기 대장이었던 이 중령의 집으로 쳐들어가 잠자던 가정부를 포함하여 일가족 다섯 명을 도끼로 내리쳐 죽이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온 나라가 경악했다. 사실 고재봉은 과거 병기대장인 박 중령과 원한이 있어서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지휘관이 바뀐 사실을 알지 못하여 이 중령의 가족이 피해자가 되었다. 이렇게 악독한 사람 고재봉에게 특별한 사건이 생겼다. 한 달 후 그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옥중에 있는데, 어떤 분이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고재봉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후, 그가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지, 교도소에 있던 죄수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때 그가 전도한 사람이 1천 8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재봉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총살형을 당하는 형장에서 힘차게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에게 복음을 전했다. 만일 그가 죽기 1년 전에라도 그에게 전도하여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그는 이렇게 흉악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4. 전도한 결과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앉은뱅이가 일어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인가? 전도를 받은 사람이 전도자가 되었다. 이런 일들은 교회 안에 많다. 전도를 받은 사람이 더 열심히 전도한다.
기적을 체험한 당사자는 얼마나 기쁘고 감격했겠는가? 평생 걷지 못하던 그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러나 그는 즉시 성전으로 들어가 자기의 체험한 기적을 담대하게 증거하였다. 사도행전 3장 전체가 일어난 앉은뱅이의 간증이요 전도이다.
단 12:3 / 그러나 하나님의 슬기를 간직한 이들과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이끈 자들은 하늘의 별들처럼 언제까지나 빛나리라.
이런 할머니가 있었다. 그분은 문맹인데다가 시각장애인이다. 그런 분이 어떻게 전도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분이 꼭 전도하고 싶어 궁리 끝에 이렇게 했다. 사람들이 자기를 불쌍히 여실 테니까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성경 읽어달라고 하자 ... 그리고 표시해 놓은 요한복음 3:16 읽어달라고 하자. 그리고 그 구절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 알면 그리스도인이니까 됐고, 모르면 죽 설명을 해주었다. 이런 식으로 전도했다고 한다. 이런 분도 했다면 우리 중에 못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국교회 부흥의 씨앗이 된 토마스 선교사 / 1863년 12월, 매서운 혹한이 몰아치는 어느 추운 겨울 날, 런던 대학을 졸업했던 한 젊은 선교사가 갓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중국 땅에 도착했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편만케 하고자 하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젊음의 정열과 인생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중국에 와서 중국 선교를 불태우려고 했던 이 젊은 선교사는 낯선 이국땅에 와서 선교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생의 가장 큰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지만, 그는 지프라는 곳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였던 윌리엄 알렉산더를 만나 선교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충전하였다. 가슴이 울먹거리며 눈시울이 뜨겁도록 선교에 대한 열망을 재충전 받았다. 선교지에 와서 아내를 잃은 것은 슬픔이 아니라 전도자의 영광이요, 선교사의 영광임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렇게 선교에 불붙는 소명감이 가득 차고 있을 때 마침내 그는 중국 선교보다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땅에 대한 선교의 비전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1865년 9월 4일 여러 권의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황해도 창린도에 와서 2개월 반 동안 사력을 다하여 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에는 충분한 조선말의 실력을 갖춘 그는 황해도 해안지역에 머물면서 여러 사람에게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했다. 바로 그가 누구인가? 1866년 평양의 대동강에서 순교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였다. 어느 정도 조선 선교에 자신감을 가졌던 토마스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북경대학에서 조선 선교를 물색하고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 그는 동지사 일행으로 중국에 온 개화파의 거두 평안감사 박규수를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조선 선교의 꿈을 이야기하며 속한 시일에 조선 선교사로 가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 중국어 성경 한 권을 선사했다. 이 성경은 훗날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과 김홍집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조선 선교를 불태우며 기회를 찾고 있었던 토마스는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배의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했다. 이 배에는 동양인 19명 서양인 5명이 승선했고 토마스는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승선했다.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토마스는 가끔 뭍에 내려 조선 사람들에게 가지고 온 중국성경을 건네주며 구두로 복음을 전했다. 이런 일을 예의주시하며 경계하였던 평양성의 관리들은 평양감사에게 계속해서 부정적인 보고만 하였다. 결국 박규수는 셔먼호를 불태우기로 결심을 했다.
마침 셔먼호가 양각도에 잠시 좌초당해 있을 때 군관들이 그 배의 솔가지와 유황을 뿌려 불을 질러 버렸다. 셔먼호에 불길이 휩싸이자 배에 탔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뭍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군관들은 그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 아름가지고 뭍으로 올라온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다. 그는 뭍으로 나와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이라는 군관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가지고 온 성경을 건네준다. 얼굴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높이 받들어 제발 성경을 받아만 주라고 권했다.
박춘권은 그들을 죽이려고 뽑았던 칼을 잠시 멈추었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의 최고의 예절과 모든 예의를 갖추어서 성경을 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박춘권이 성경을 받지 않자 토마스는 모래사장의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하나님께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자기는 칼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제발 이 사람들이 성경을 받고 예수님을 믿도록 기도했다.
“주여, 아내를 먼저 보낸 이 젊은 선교사도 아내가 갔던 천국으로 갈 때가 되었나 봅니다. 이 조선 땅에 복음을 편만케 하고 수많은 뭍 영혼을 구원시킨 후에 천국에 가려고 했는데 이제 저도 주님의 품으로 가려나 봅니다. 그러나 주님, 이 젊은 종이 이 땅의 복음을 전하러 왔사오니, 이 조선 땅의 구원의 복음인 성경을 전하러 왔사오니, 제발 가지고 온 성경만큼은 이들에게 전달하고 죽게 하옵소서. 이들이 지금은 모르고 저를 죽이려고 하오나 저들이 성경을 받고 돌아가 반드시 예수를 믿게 하시고 이 조선 땅에 구원의 불길과 부흥의 불길이 저 셔먼호의 불길처럼 치솟아 오르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주여, 간절히 부탁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주님 품에 가겠사오니 제발 저들이 이 성경을 받고 구원의 복음을 읽게만 하여 주옵소서.”
얼마 동안의 이런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난 토마스는 다시 얼굴을 땅에 대며 두 손으로 박춘권에게 성경만은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박춘권은 성경 받기를 거부하고 마침내, 칼로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만 26살의 젊은 선교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2년 6개월 후 그는 조선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내의 뒤를 이어 하늘나라로 갔다. 그것도 위대한 순교자가 되어서 말이다.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을 위한 순교란 언제 어디서나 교회의 씨앗이 된다.’ 과연 터툴리안의 말처럼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교회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조선 땅 전역에 치솟아 오른 부흥의 불길 / 토마스가 순교하던 바로 그날부터 교회의 씨앗은 움트기 시작했다. 젊은 선교사를 죽인 군관 박춘권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책이길래, 왜 그 젊은이는 죽어가면서도 나에게 건네주려고 했을까?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있길래, 왜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댄 채 두 손을 들고 이 책을 나에게 건네주려고 했던 말인가?” 그래서 그는 동료들 몰래 그 현장으로 가서 흩어진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박춘권은 그 성경을 읽다가 영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영수’란 말은 오늘날의 전도사와 장로 사이의 직분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성경을 읽고 조카 이영태에게 주어서 이영태가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런데 그의 조카 이영태는 훗날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레이놀즈의 조사가 되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한글 성경의 2/3을 번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토마스로부터 한문성경 3권을 건네받은 최치량은 성경이 금서라는 사실을 알고 겁이 나 평양의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건네주었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건네받고 질 좋은 종이로 만든 성경 종이로 자기 방을 도배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시 중국어 성경은 한지류로 만들어져서 종이의 질이 매우 좋았고 소위 이 책은 딱지본으로 제본되어 있었기 때문에 묶은 실을 풀기만 하면 낱장으로 풀려 일일이 종이를 찢을 필요가 없었다. 옛날에는 방이 작았기 때문에 성경 두 권이면 웬만한 집의 몇 개의 방을 도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박영식은 성경책을 다 풀어서 자기 집의 모든 방을 도배했다. 방바닥과 벽과 천정까지 성경으로 도배한 집을 한번 상상해 보시라 이 집이야말로 인류역사상 최초로 성경으로 도배한 말씀의 집이었을 것이다. 성경으로 방 전체를 도배한지라 방에 들어가면 사방에 보이는 것이 성경 말씀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는 것이 성경 말씀이었다. 어쩌면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던 박영식의 눈에 들어온 성경 구절은 이런 말씀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처음에는 무심코 읽다가도 자꾸자꾸 읽으면 죽음 이후에 영생이 있다는 사실,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심각한 고민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인생의 깊은 고민에 빠져 삶의 회의를 느끼며 근심에 빠져 있다가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을 때 이런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왔을 줄도 모른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그뿐일까? 그 옆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았을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한 좌우를 보니 이런 말씀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박영식은 도배가 된 성경 말씀을 읽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성경에서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죄는 어떻게 회개하며 예수를 어떻게 믿고 천국에 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박영식은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었으며 박영식에게 성경을 전해주었던 최치량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아니,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으로 도배를 했던 이 집이 평양에서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꼴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 널따리꼴 교회가 1907년 1월 14일 놀라운 성령의 불길이 임하였던 교회요, 평양 대부흥 운동의 원산지가 되었던 장대현교회의 전신이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는지? 그리고 이 장대현교회의 대부흥 운동으로 인하여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어 버렸고, 조선 땅 전역에 부흥의 불길을 치솟아 오르게 했던 역사를 일으켰다. 얼마나 놀라운가? 토마스의 순교가 장대현교회로 연결되었고 평양대부흥운동과 한국교회의 부흥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일찍이 터툴리안이 말한 대로 토마스의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요, 교회 부흥의 불길을 만드는 불씨가 되었다. 비록 26-27세의 젊은 선교사가 한국선교에 본격적으로 시작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태동과 성장과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토마스 선교사로 하여금 이런 결과를 낳게 하였을까? 토마스 선교사 안에서 무엇이 과연 선교의 불붙는 열정을 갖게 하였고 젊은 나이의 순교를 하면서까지 이런 불붙는 정열을 갖게 하였을까? 한마디로 토마스 선교사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불붙는 선교의 소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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