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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의 생애와 조선 선교 배경
2023. 12. 2 토요일. 서울대교구청 3층 대회의실 14~18시
제1차 심포지엄 일정
개회사 구요비 주교(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제1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 탄생에서 선교사 임명까지
허보록 Philippe BLOT 신부(파리외방전교회 부지부장)
제2주제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제3주제
조선대목구 설립 전후의 중국 교회 상황
최병욱(강원대학교)
제4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 검토
조선교회 구성원들의 입장과 반응을 중심으로
방상근(교회사연구자)
제5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 여정과 선종, 유해 이장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종합 토론
좌장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역사와고문서전문가위원회 위원장)
토론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박광용(가톨릭대학교)
장정란(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폐회사 박선용 신부(시복시성위원회 부위원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초대 조선교구장
시복시성 기도문
모든 성인들의 덕행으로 찬미와 영광 받으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성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성인성녀들을 공경하여 그 표양을 본받게
하셨나이다.
조선 선교를 자청한 뒤 온갖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조선에 들어가 선교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온 삶을 봉헌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에 의지하여 청하오니
저희들이 거룩한 순교정신을 본받아
신망애 향주삼덕에 뿌리를 박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로 저희를 이 세상에서 보호하시며
저희의 마음속 지향을 들어 허락하심으로써
(잠깐 침묵 중에 기도의 지향을 아뢴다.)
당신 권능을 드러내시고 저희가 희망하는 대로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가 복자와 성인들 대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한국의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08. 7. 1.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인준
2023. 3. 23.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수정 승인
제1주제
허보록 Philippe BLOT 신부(파리외방전교회 부지부장)
1. 브뤼기에르 주교의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에 대한 초상
2. 브뤼기에르 주교의 탄생 : 날짜, 장소, 성당
3. 중등교육 과정
4.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수학
5. 카르카손 소신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6. 대신학교 교수 및 사제단 담당 사제로 재직
7.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 탄생에서 선교사 임명까지
―조선 천주교 선교사업의 창시자이자 제1대 교구장이며
갑사의 명의 주교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1792~1835) 주교―
다음은 카르카손(Carcassonne) 교구 페장(Pézens) 본당 주임 신부 요한 카미유 부르동클
(J.-Camille Bourdoncle) 신부가 엮은 조선 천주교 선교사업의 창시자이자 초대 대목구장이며 갑사 명의 주교인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의 일생을 엮은 전기1) 중 주교의 탄생부터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나기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1. 브뤼기에르 주교의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에 대한 초상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발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변들의 증언을 토대로 주교님을 서술해 보고자 한다.
∙ 주교는 평균 이상의 키를 가졌으며, 약간 연약한 체격과 금발 머리, 그리고 거무스름한 안색
을 지녔다.
∙ 그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푸른 눈은 특히 드물었고,
이로 인해 외국인임을 알 수 있게 되면서 생명의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더구나, 만약 그가
신부이며 선교사인 것이 밝혀진다면 그 나라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유혈 박해가 일어날 가능
성도 있었다.
∙ 주교는 중국의 기후에서 18개월 이상 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 내면적인 면에 있어서 그는 매우 총명했고, 큰 상식적인 틀을 지녔으며, 강한 열정을 타고났
다. 주교가 지닌 엄청난 에너지와 독립적인 성격에 대해 주교의 지도신부는 웃으며 다음과 같
이 말했다. “만약 그가 주교가 된다면 그의 사목 지침은 ‘사람들의 생각과 말에 상관없이 나
는 항상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가 될 것입니다.”
∙ 주교의 고행은 그의 기도 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로 떠나기 전, 마지막 해를 카르카손 신학교에서 빵과 물만 먹으며 보냈다.
∙ 주교는 그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큰 깨달음을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도직 중에도 금욕적인
삶을 이어가며, 믿는 이들과 비신자들에게 하늘의 은총과 축복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였다.
∙ 또한, 모든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고통과 위험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강
인한 희생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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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OURDONCLE J. Camille, Monseigneur Barythélemy Bruguière du diocèse de Carcassonne, 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 (1792-1935), Imp. Moderne de Chartres,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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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의 상징에 관한 추가 설명]
갑사 명의 주교 브뤼기에르 대주교의 문장 : 하늘색 배경에 빛나는 라틴 십자가 안에는 그리스도의 상징이 새겨져 있으며, 그 주변에 성모님의 머리글자와 배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아래에는 ‘ME’라는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ères)의 약자와 작은 십자가, 그리고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쳐라’는 뜻을 지닌 주교의 사목 표어 “Euntes docete omnes gentes”가 적혀
있다.
이상 :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라마지않는 순교에 마침내 이르러서 모든 영혼들과 특히 비
신자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
2. 브뤼기에르 주교의 탄생 : 날짜, 장소, 성당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 혁명이 격렬한 폭력시위로 번져가기 시작한 1792년 2월 12일에, 그가 성품성사를 받은 카르카손 교구의 레삭 도드(Raissac d’Aude)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카르카손 교구에서 존경받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성 에우랄리아 동정 순교자 축일이었다.
주교의 출생지는 레삭 도드로, 이는 나르본(Narbonne) 지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은 19세기 초에 약 280명의 주민이 살았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성당을 중심으
로 56채의 주택이 모여 있었다.
이 지역은 넓고 비옥한 평야 중앙에 자리해, 큰 나무들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이루어진 녹지로, 둥지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는 포도 농사가 번창하여, 밀과 포도의 풍부한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이 마을은 오드(Aude)강과 오르비외(Orbieu)강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아르(Jouarre) 개천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홍수가 가끔 발생하지만, 농업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전체 마을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 마을은 또한 대지 너머 검은 산까지 뻗은 광활한 지평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산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아시아의 산들을 떠올리도록 해주었으며, 그가 복음화를 꿈꾸었던 중국과 한국을 향하고 있었다. 브뤼기에르 가문의 집은 성당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교가 어린 시절부터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날때까지 바로 이 집에서 모든 휴가를 보냈다.
레삭 도드(Raissac d’Aude, 오드 지역의 레삭읍)는 매우 신심이 깊은 지역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고 있는 많은 성인을 교회에 배출해 내었다. 이 지역은 주교들인
Saint Paul Serge, Saint Rustique, Saint Théodard와 같은 성인들뿐만 아니라 시골의 사도인 Saint Jean-François Régis와 같은 예수회 사제도 냈다. 그뿐만 아니라 글라라회 수녀원과 퐁프루아드 (Fontfroide) 수도원 등 수도 공동체들도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르본 지역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주민들의 깊은 신앙을 증언하는 소성당, 성지, 그리고 성상들로 가득했다. 이러한 종교적 분위기와 함께 깊게 뿌리내린 그리스도교 신자 가족들의 모범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인성과 영성의 성장에 이바지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아버지인 프랑수아는 정직한 농부로서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노동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 선한 아버지였다. 주교의 어머니도 같은 지역 출신으로, 나이 마흔두 살에 열한 번째 자식인 주교를 낳았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어머니, 아직 열 자녀가 남았으니 열한 번째인 저를 선하신 주님께 바치시면 됩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부모님이 자신에게 지어준 이름이기도 바르톨로메오를 주보 성인으로 모신 레삭 도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바르톨로메오 성인은 토마스 성인과 함께 아시아의 복음화에 이바지한 열두 사도 중 한 분으로, 브뤼기에르 주교 또한 그로부터 먼 훗날인 18세기에 같은 방식으로 봉헌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주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봉사할 것을 제안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본당 사제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종교를 공부하고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덕행과 경건함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는 일찍이 영혼의 회개와 한국의 복음화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에, 그리고 그러한 나라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 어떻게 조선을 위해 그토록 헌신과 애정을 담아 일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영혼이었기에 그분이 당신의 거룩한 계획을 심어 넣었을 것이라고 그가 남긴 편지로 짐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 혁명 박해 기간 동안 고문을 견디어낸 사제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 앞에서 보여주었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해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이 나누던 이야기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그의 영혼을 불태웠고, 마음을 무장시켰으며,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겠다는 강한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험은 어린 바르톨로메오의 조숙한 미덕을 드러나게 하였다. 경건함과 순종, 그리고 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일찍이 무르익었으며, 강한 믿음과 의지에 불타는 활력은 특별히 두드러졌다. 나중에 그가 쓴 아래의 글에서 보듯이, 믿음이 없는 땅의 신자들을 위한 사도직에 대한 열망이 일찍이 그의 내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한국 선교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고 그때는 매우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당시 한국의 새 신도들이 사제가 없이 불쌍하게 버려진 상황에 대한 소식은 그들에게 가고자 하는 큰 열망을 제게 불러일으켰습니다.”
봉헌과 희생의 삶을 준비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족 안에서 찾았다. 혁명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시험받았던 그리스도교 신자 가족이자 들판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 가족인 대가족 중에 열한 번째로 태어난 그는, 나눔과 궁핍 그리고 많은 희생과 노력에 대한 의무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은 그의 가족을 향해 풍성하게 흘러넘쳤고, 특히 브뤼기에르 집안에 영웅적이고 거룩한 주교를 낳아 양성하는 은총을 주었다.
3. 중등교육 과정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등 교육을 받기 위해 충분한 나이가 되자 부모님은 그를 카르카손 소신학교로 보냈다. 소신학교에서 그는 자신의 경건한 믿음과 일에 대한 높은 헌신으로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모든 학업을 훌륭하게 마쳤다. 주교의 “대담한 솔직함”은 스승들 중 한 명이 나중에 회고하여 쓴 것처럼 독특한 특징으로 그들에게 남았다.
주교는 학업 기간 동안 소신학교에서 스승들과 동료 학생들 사이에 깊은 인상을 남겼기에 모두 그가 교사로서 소신학교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4.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수학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등 과정을 마친 후 사제직을 준비하기 위해 카르카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진지하게 과업을 시작했고, 남다른 열정과 인내를 가지고 사제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습득했다. 동료 신학생들 사이인 가까운 친구들만이 볼 수 있었던 주교의 “애덕”은 특별했고, 지도 신부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주교는 항상 단순하고 “겸손”한 자세를 지녔다. 일과 공부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집”이 있었으며, “완전함과 성덕”으로 향한 그의 열망은 컸다.
1812년에 삭발례를 받은 뒤, 이듬해에 카르카손 주교인 페르디낭 드 라 포르테 주교로부터 “수품식(소품)”을 받을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그러던 중,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이듬해, 21세의 나이에 “차부제”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는 그에게 큰 기쁨이자 하느님에게 완전한 헌신을 의미했다.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하느님에게 완전히 바친 그는 세속의 즐거움을 영원히 포기했다. 이 새로운 삶 앞에서 주교는 부모와 친구들에게 성무일도를 바칠 때마다, 그들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적은 편지를 썼다.
“차부제품”을 받은 날이 1814년 3월 26일이었고, 다음 해 6월 4일에는 카르카손 성당에서 “부제
품”을 받게 되었다. 방학이 되면 평소처럼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를 등한시하는 사람들을 때때로 발견한 그는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이들을 하느님의 길로 인도하고자 다시 데려오고 싶어 했다.
이러한 우려와 열망은 나중에 선교지에서 쓴 그의 편지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먼 나라에 사는
비신자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떠난 그는 많은 교우들의 영혼이 길을 잃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후에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슬픈 경험이었는지 편지를 통해 가족에게 말하게 된다.
5. 카르카손 소신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브뤼기에르 신부는 방학이 끝날 무렵, 1814년 새 학기가 시작될 때 주교에 의해 카르카손 소신학교의 3학년생들을 위한 교사로 임명되었다. 신학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사제직 받을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지만, 당시에는 사제가 부족해 교사로 임명되었던 것이었다.
주교는 신학교에서 5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의 마음을 끌어,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덕행을 실천하도록 학생들을 양성하고 성경 공부에 부지런히 힘쓰도록 훈련시켰다.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1815년 12월 23일에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서품식이 연기되었었지만, 교황의 특권으로 성탄절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23세 10개월이었다. 미래의 선교사,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가 되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똑같은 희생을 매일 각오했다. 그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 어디에서나 다스리시고 승리하실 수 있도록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라는 자신의 궁극적인 이상을 더욱 열정적으로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6. 대신학교 교수 및 사제단 담당 사제로 재직
가족과 함께 고향 성당에서 첫 미사의 기쁨을 나눈 후, 젊은 신부 브뤼기에르는 소신학교에서 수업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3년을 더 보낸 다음, 대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철학 의장을 맡았는데 그의 나이 고작 26세였고 사제 서품을 받은 지 겨우 4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재능과 헌신을 인정받아 1818년 7월 19일 교회로부터 명예 참사회(參事會, chanoine)2) 사제 칭호를 받았다. 밝은 미래가 이미 그 앞에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사도직에 대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부모에게 쓴 다음과 같은 편지에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알리실 때 우리는 그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주저함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프랑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기를 바라실 때 우리는 프랑스에서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선한 계획은 우리 자신의 뜻에 의해서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계획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한 (나라) 지방 전체에서 구원의 진리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민족들을 불행한 운명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기를 원하는 사제는 없습니다. 그런 사제가 있다면 그는 어떤 사제일까요?”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라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교구에 보장되어 있던 자신의 영예와 애착들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다. “하느님이 원하신다”는 확신 아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시아의 비신자들을 돕기 위해 떠날 것이라고 결심했다.
7.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이를 위해서는 카르카손 교구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며칠밖에 안된 드 상트 롬 가비(de
StRome-Gaby) 대주교의 승인이 필요했다. 드 상트 롬 가비 대주교는 그 전임자가 끊임없이 거절 했던 이 사안을 허락해 주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떠난 직후 대주교에게 이에 대한 깊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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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구 주교 또는 수도회 수도원장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된 위원으로 구성되는 교구 대표 기관으로, 사제 평의회 상임 위원 격으로 볼 수 있다. ―번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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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들을 개종시키겠다는 선교사업은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었기에, 그는 이 사명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자주 편지를 쓰곤 했다. 마지막 출발 시간이 다가오는 여름 방학이었다. 그는 부모를 속여 카르카손으로 가서 새로운 임명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속임수일 수 있었고, 정직하지 않아 보였지만, 효심을 다한 행동 이었다.
그는 가족에게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은 채 떠났다. 부모, 친구, 마을, 성당을 떠나면서 그들에게 이별의 비통함을 주고 싶지 않아 했던 그의 고뇌와 눈물을 상상할 수 있다. 가득한 애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주 편지를 썼다. “항상 제 소식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실제로 그는 고행과 시련이 극에 달할 때도 약속을 지켰으며, 죽기 한 달 전에도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어느 날 우리의 선교사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들의 힘든 희생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접하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선교사 아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눈물을 흘리며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부모보다 선하신 주님을 더 원했습니다. 그가 옳았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아들이 떠나서 겪었던 슬픔을 이제는 잊었다는 어머니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할 것에 대해 그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편지에서 매번 가족들의 영혼과 천국에서 다시 만날 희망을 이야기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카르카손에서 출발 준비로 분주했고, 주교이자 신학교 원장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후 외방전교회가 있는 파리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오랜 시간을 머물지 않았다. 그는 정기적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안에 있는 순교자의 홀을 찾아가 순교 성인들의 유물과 고문 도구들 앞에서 오랫동안 묵상했다. 그곳에서 힘과 용기를 얻었으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도 피를 흘리는 은혜를 얻도록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5개월 동안의 수련 기간을 마친 후, 주교는 지도자들로부터 선교 사명을 수행할 준비가 됐는지 평가받았다.
어디로 보내질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은 죽은 선교사들을 대신할 것이고 장상들의 뜻에 모든 결정을 맡기는 마음이었다. 출발 전날, 피정과 감동적인 작별 예식에 참여하고 난 뒤, 돌아올 거라는 희망 없이 부모, 친구, 그리고 프랑스에 이별을 알리고,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는 타국을 향해 떠났다.
1826년 2월 초에 파리를 떠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6년 2월 24일 보르도(Bordeaux)에서 아시아에 있는 마카오, 페낭으로 가는 에스페랑스호(l’Espérance)를 타고 시암(Siam)을 거쳐 중국-한국 국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1831년 9월 9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대목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즉시 조선으로 떠났다. 1834년 10월 8일, 동료 사제 모방(P. 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서만자(西灣子, Sivang)에 도착했고, 1835년 10월 7일에 달단(韃靼, Tartarie)의 서만자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주교는 1835년 10월 20일에 펠리구(Pie-lie-keou)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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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번역 : 민경아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김주영(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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