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티 순교성지
주소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5 교구 대구대교구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 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 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다. 그리하여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 산괴의 주령인 인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신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경신박해(1860)와 병인박해(1866-1873)
험악한 산중턱인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인근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 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서로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해서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1838년과 1839년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욱 깊은 산골인 인근의 이곳 한티에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가족들은 1860년 경신박해 때까지 이곳에 살다가 대구로 나가서 대구읍내 첫 신자 가정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교회 창설에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신자들이 한두 집 모여들어 움막을 짓고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적은 신자들이었으나 차츰 커져서 이미 1850년대 말경에는 본 부락뿐만 아니라 인근의 서촌과 한밤 및 원당의 외교인들까지 입교하게 되어 큰 신자촌이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전교활동이 한창 활발했던 경상도 지방의 신자촌들이 모두 포졸들에게 유린되었다. 이곳 한티 뿐 아니라 인근의 신나무골과 어골의 신자촌들의 신자들도 모두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골의 이재영 고스마 가정은 문중박해를 피해서 대구 부근의 새방골 죽전으로 피신을 했었다. 그러나 곧 몇 달 후에 박해가 수그러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1862년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박해 중에 김현상 요아킴 가정의 후손들이 대구로 나감으로 새로이 상주 구두실이 고향인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모든 신자들이 그 집에 모여서 주일미사를 보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조 가롤로 가정은 당시 세도가인 풍양 조씨 조대비의 친척으로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킨 장본인들이므로 그가 천주교를 믿자 문중에서는 그의 집을 불사르고 고향에서 쫓아내었다. 이때 조 가롤로 가정은 상촌과 황간 등지에서 3년간 전전 하다가 이곳 한티로 온 것이다. 1865년경에는 대구 날뫼에 살던 이 알로이시오 가정도 이곳으로 이사를 왔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신자촌들이 모두 유린되었고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순교를 했다.
이때 대구 읍내과 신나무골 등 인근의 신자들은 그해 부활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서 대구에 왔던 리델 신부로부터 박해의 소식을 듣자 문경 한실과 한티로 피난을 왔었다. 즉 한티에 살다가 대구로 이사를 간 김현상 요아킴의 후손들인 김응진 가롤로 가정과 몇 해 전에 대구로 이사를 온 서상돈 아우구스띠노 및 삼촌 서익순과 대구 부근의 노곡동에 살던 송씨 가정뿐 아니라 신나무골에 살았던 많은 신자가정들이 이곳 한티에 피난을 왔었다.
그해 봄에 대구에서 문경 한실로 이사를 갔던 서태순 가정이 포졸들에게 잡혀 상주진영으로 끌려갔었다. 그러나 부인 김데레사는 마침 감옥에서 해산을 하였으므로 풀려났고 서태순 베드로는 12월19일에 순교를 하였다. 그러자 한티에서 피난 중에 있던 그의 조카 서상돈 등 그의 형제와 친척들에 의해서 서태순 베드로의 시신을 한티로 가져와서 묻었다.
이듬해인 1867년에 박해가 조금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서태순의 형인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 본가로 돌아가다가 경포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듬해인 1868년에 절두산에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창호지로 얼굴을 가리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로 숨진 다음 한강물에 던져져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시신은 영영 찾지 못하였다.
한편 대원군의 부친인 남영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더욱 박해가 전국적으로 격화된 봄에 한티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공소회장 조 가롤로, 부인 최 발바라, 동생 조아기등 조씨 일가족들과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배교하는 사람들에게는 “너희들은 양민이다”하면서 놓아주고,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정식재판에 회부하지도 않고 당시 나라의 선참후계의 명령에 따라서 무지막지하게 그 자리에서 30여 명을 순교시켰다.
조용하던 한티 마을은 갑자기 피바다가 되었다. 더욱이 포졸들은 신자들을 압송하여 가다가 서울과 상주로 가는 가도인 동명원의 흑다리골에서도 많은 신자들을 죽였다고 한다. 다행이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졸들이 물러간 다음 이들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
이때 이들이 쓰던 묵주와 고상도 함께 묻었다고 한다. 한편 조가롤로 회장과 부인 최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아기의 시신도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이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여 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조가롤로 회장의 아들인 조영학 토마는 12세 가량의 어린 나이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는데 박해 후에 부친이 신앙을 이어받아서 공소책임자가 되고 다른 살아남은 박만수 요셉 가족들과 함께 공소재건에 앞장을 섰다. 그 무렵에 군위 치솔에서 김재윤 가정과 그의 친척인 김윤하 안드레아 가정이 이사를 오고 또한 신나무골에서 이사간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꼬 가정들이 이사를 왔으므로 다시 공소가 번창해졌다.
병인박해 10년 후인 1882-1883년 장차 대구본당의 첫 주임사제인 김보록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이때 공소신자의 수는39명으로, 고백성사자가 20명, 영성체자가 19명, 세례자가 3명, 혼배성사가 1쌍이었다.
그후 1885년 12월 대구본당이 설립되어 김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자 그는 자주 이곳이 와서 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이곳 공소신자들도 큰 축일날에는 밤중에 90리 길을 걸어 신나무골에 가서 미사를 참석하였다. 이렇게 해서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수가 80명 이상이나 되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공소회장인 조영학 토마 가정을 비롯해서 김재윤 후손의 김회장 및 조규성 프란치스꼬, 배순규 야고보의 가정의 후손들이 모두 살기가 불편한 이곳을 떠나 일본이나 만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하여 1960년 이후에는 마지막 한티공소 회장이었던 김태현 마르첼리노 회장 가정마저 떠나버리고 오직 동생 김복현 프란치스꼬 가정만이 현재 남아서 한티 마을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