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무덤성당과 "성당안의 예수님 무덤" - 예루살렘, 골고타-
이하: 성지설명
그 무덤의 주인은 당시 유다 최고의회의 의원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었다(마르 15,43; 루가 23,50). 그는 예수님을 몰래 따르던 자였고(마태 27,57; 요한 29,38), 동료 니고데모와 함께(요한 19,39)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였다(마태 27,58-60; 마르 15,46; 요한 19,38-40).
예수님의 무덤은 커다란 석문으로 굳게 닫혀졌고, 경비병은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마태 27,62-66). 그러나 안식일 다음 날 무덤에 가서 봤더니 굳게 닫혀진 석문은 열려 있었고, 그 무덤 안은 텅 비어 있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마르 16,1-8; 마태 28,1-10; 루가 24,1-12; 요한 20,1-10).
골고타는 예수님 당시에 성벽 밖의 불모지였고, 주로 무덤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의 원래 모습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골고타 언덕은 깎여지고 메꾸어져(135년) 그 위에 로마 신전과 쥬피터와 비너스 상이 세워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는 324년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왔고, 쥬피터와 비너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황제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후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신전은 헐리고, 예수님의 무덤이 발굴하여 기념 성전을 세웠다.
그 후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기념성전은 파손되었고, 629년 보수되었지만 1009년 카이로 출신 칼리프 엘 하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것은 십자군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십자군에 의해 성전은 보수 및 개조되어(1149-1180년) 오늘날 성전의 모체가 되었으며 이후 예수님 부활성당에서 무덤성당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1545년 지진으로 인해 종탑을 비롯하여 상당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고, 1917년과 1728년 두 차례에 걸쳐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으나 1808년 화재로 인해 많은 부분이 타버렸다. 이때 유럽은 나폴레옹의 전쟁시기라 라틴교회는 성전을 보수하기 위한 여건이 좋지 않았던 반면, 그리이스 정교회 측에서는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고 오스만 터키의 외교정책을 힘입어 성전을 보수하고 보수한 부분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 당시가 성전의 소유권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 후 1834년 지진으로 성전은 다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라틴교회와 정교회가 공동으로 성전을 보수하였으나 1927년 지진으로 다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다. 그 후 1959년 라틴,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합의하여 1961년부터 재건 및 보수가 되었다.
그 무덤의 주인은 당시 유다 최고의회의 의원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었다(마르 15,43; 루가 23,50). 그는 예수님을 몰래 따르던 자였고(마태 27,57; 요한 29,38), 동료 니고데모와 함께(요한 19,39)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였다(마태 27,58-60; 마르 15,46; 요한 19,38-40).
예수님의 무덤은 커다란 석문으로 굳게 닫혀졌고, 경비병은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마태 27,62-66). 그러나 안식일 다음 날 무덤에 가서 봤더니 굳게 닫혀진 석문은 열려 있었고, 그 무덤 안은 텅 비어 있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마르 16,1-8; 마태 28,1-10; 루가 24,1-12; 요한 20,1-10).
골고타는 예수님 당시에 성벽 밖의 불모지였고, 주로 무덤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의 원래 모습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골고타 언덕은 깎여지고 메꾸어져(135년) 그 위에 로마 신전과 쥬피터와 비너스 상이 세워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는 324년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왔고, 쥬피터와 비너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황제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후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신전은 헐리고, 예수님의 무덤이 발굴하여 기념 성전을 세웠다.
그 후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기념성전은 파손되었고, 629년 보수되었지만 1009년 카이로 출신 칼리프 엘 하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것은 십자군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십자군에 의해 성전은 보수 및 개조되어(1149-1180년) 오늘날 성전의 모체가 되었으며 이후 예수님 부활성당에서 무덤성당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1545년 지진으로 인해 종탑을 비롯하여 상당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고, 1917년과 1728년 두 차례에 걸쳐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으나 1808년 화재로 인해 많은 부분이 타버렸다. 이때 유럽은 나폴레옹의 전쟁시기라 라틴교회는 성전을 보수하기 위한 여건이 좋지 않았던 반면, 그리이스 정교회 측에서는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고 오스만 터키의 외교정책을 힘입어 성전을 보수하고 보수한 부분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 당시가 성전의 소유권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 후 1834년 지진으로 성전은 다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라틴교회와 정교회가 공동으로 성전을 보수하였으나 1927년 지진으로 다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다. 그 후 1959년 라틴,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합의하여 1961년부터 재건 및 보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