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곡집(月谷集) 오원(吳瑗)생년1700년(숙종 26)몰년1740년(영조 16)자백옥(伯玉)호월곡(月谷), 관물거사(觀物居士)본관해주(海州)시호문목(文穆)특기사항이재(李縡)의 문인. 남유용(南有容), 황경원(黃景源) 등과 교유
月谷集卷之五 / 詩 / 歷訪小岳樓主人李同福 渘○庚申
영조 | 16 | 1740 | 경신 | 乾隆 | 5 | 41 | 1월, 李德壽에 의해 文衡에 추천되다. ○ 2월, 강화 유수가 되어 연해 城墩을 순시하고 〈巡海日記〉를 남기다. ○ 4월, 홍문관 대제학, 한성부 우윤이 되다. ○ 5월, 공조 참의에 移拜되다. 都堂錄會圈에 참여하다. 동지의금부사가 되다. ○ 6월, 孝宗의 追上尊號玉冊文과 大殿의 上尊號玉冊文을 제진하다. ○ 10월 10일, 졸하다. 廣州 月谷에 장사 지내다. |
關防稱沁府。襟帶控王州。此日雙㫌節。平生一釣舟。恩難捐組紱。機不觸鳧鷗。春暮如澠酒。期君鎭海樓。樓在江都
월곡집 제5권 / 시(詩) / 소악루의 주인 이 동복 유 을 방문하다 ○경신년〔歷訪小岳樓主人李同福 渘○庚申〕
관방으로는 심도를 일컫나니 / 關防稱沁府
금대처럼 두른 산천이 제왕의 고을 수호하네 / 襟帶控王州
이 날 두 개의 깃발과 부절이 왔거니 / 此日雙旌節
평생 연모한 건 한 척의 낚싯배라네 / 平生一釣舟
임금님 은혜는 인끈을 버리기 어렵게 하고 / 恩難捐組紱
기심은 오리 갈매기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해 / 機不觸鳧鷗
저무는 봄날 민수처럼 많은 술로 / 春暮如澠酒
그대와 진해루에서 만나기를 기약하네 / 期君鎭海樓
누각이 강도(江都)에 있다.
[주-D001] 소악루의 주인 이동복(李同福) : 이유(李渘, 1675~1753)로, 호는 서암(恕庵)ㆍ석호(石湖)ㆍ소악루(小岳樓)이다. 장릉 참봉(莊陵參奉)ㆍ금부 도사(禁府都事)ㆍ감찰(監察) 등을 역임하였고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소악루는 이유(李渘)가 양천 현아(縣衙) 뒷산 기슭 강변 악양루(岳陽樓)에 재건한 누각이다. 당시 이 누각에 오르면 안산ㆍ인왕산ㆍ남산ㆍ관악산 등이 한눈에 보이고 탑산ㆍ선유봉 및 드넓은 한강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등 진경이 펼쳐져 당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알려져 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이 이곳 현령으로 있을 적에 그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서 당시의 경관을 볼 수 있다.[주-D002] 경신년 : 영조 16년(1740) 월곡의 나이 41세이다.[주-D003] 관방(關防) : 관문, 또는 국경 요새지를 말한다.[주-D004] 금대처럼 두른 산천 : 원문의 ‘襟帶’는 산천(山川)이 병풍처럼 주위를 에워싸 마치 옷깃이나 허리띠와 같다는 뜻으로 험악한 요새의 형세를 비유한 것이다.[주-D005] 두 …… 왔거니 : 당(唐)나라 때 절도사나 관찰사에게는 조정을 하직하는 날 쌍정(雙旌)과 쌍절(雙節)을 하사하였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百官志 4下》 오원이 강화 유수로 부임한 사실을 가리킨다.[주-D006] 기심(機心) : 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불순한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한다. 즉 이익을 위하여 교묘하게 꾀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바닷가에서 아무런 기심(機心)도 없이 갈매기와 벗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부친의 부탁을 받고 갈매기를 잡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자 갈매기들이 벌써 알아채고 그 사람 가까이 날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列子 黃帝》[주-D007] 민수처럼 많은 술 : 원문은 ‘澠酒’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2년〉에, 제(齊)나라 임금이 “술은 민수처럼 많고 고기는 언덕처럼 많다.[有酒如澠, 有肉如陵.]”고 말한 내용이 있다. 많은 양의 술이란 뜻이나, 주연(酒宴)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주-D008] 진해루(鎭海樓) : 1233년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의 동쪽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적북돈대부터 초지진까지 쌓은 강화 외성(江華外城)의 6개 문루(門樓) 중 하나로, 갑곶나루 옆에 위치하여 강화도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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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3권 / 시(詩)
처음에는 소악양루에서 자려고 했으나 농암을 지날 무렵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누각의 소재를 알지 못해서 멀리 지나가는 배를 향해 길을 물었다〔初欲投小岳陽而宿 過籠巖 蒼然已暝色矣 不知樓所在 問道遙船〕
안개가 물 삼켰다 토해 내는데 / 煙水互呑吐
해는 지고 강물 위의 길은 멀어라 / 日落江路長
건너편 고깃배의 불빛을 보고 / 隔火望漁艇
멀리서 악양루를 물어보누나 / 遙遙問岳陽
[주-D001] 소악양루(小岳陽樓) :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지낸 이유(李渘, 1675~1753)가 1737년(영조13)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에 지은 누각이라고 한다. 1994년 강서구 가양동에 복원되었다.[주-D002] 농암(籠巖) : 서강(西江)의 밤섬 근처에 있던 바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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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全羅道 同福縣
壇廟
書院。 在社稷壇下。 舍人崔山斗、監司林億齡、參判鄭逑、參議安邦俊竝享。 顯廟庚戌建。 肅廟戊辰賜額。
*書 : 《同福邑誌》 書院, 《同福縣邑誌》 書院, 《列邑院宇事蹟》, 本書 壇廟 敍述 套式 等에 根據할 때 앞에 書院名 “道源”이 빠진 듯하다.
公廨
客館。 肅廟庚子火燼。 今上丙辰, 縣監李渘重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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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로 문학기행 영월 왕방연 - 천만리 머나먼 길 / 이유 -자규삼첩
광야의 소리 ・ 2024. 5. 10. 2:51
영월 동강
천만리 머나먼 길에 / 왕방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안자이다.
저 물도 내 안 곳도다. 울어 밤길 예도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이별하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맘 같도다 울며 밤길 흐르네
• 고온 님: 고운 임.
• 여의옵고 : 이별하옵고.
• 안자이다: 앉습니다.
• 내 안 곳도다: 내 마음 같도다.
• 예도다: 흐르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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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유배지 청령포
자규삼첩(子規三疊) /이유
子規(자규)야 우지 마라 우려도 속절없다
울거든 너만 우지 날은 어이 울니는다
아마도 네 소리 드를 계면 가슴 아파 호노라
자규야 울지 마라, 울어도 속절없다.
울려거든 너만 울지 나는 어찌 울리느냐.
아마도 네 소리 들을 제면 가슴 아파 하노라.
어엿븐 넷 님군을 심각하고 겹노 우니
호놀이 시계거든 너 어이 우러시리
날 업슨 霜天雪月(상천 설월)에는 눌노 후여 울니던다
가엾은 옛 임금을 생각하고 그리 우나
하늘이 시켰어도 네 어이 울겠느냐.
나 없는 차가운 달밤에는 누가 울게 하겠는가.
*상천 설원: 서리 내린 밤하늘과 눈 내리는 달밤
不如歸不如歸(불여귀 붙여귀)니 도라갈만 못한거는
어엿분 우리 님군 무스일로 못 가신고
至今(지금)에 梅竹樓(매죽루) 든 빗치 어제론 듯하여라
돌아가지 못하여도 돌아갈 만 하겠거늘
가엾은 우리 임금 무슨 일로 못 가셨나.
지금의 매죽루 달빛이 어제인 듯하여라.
• 불여귀 : 소쩍새의 물음소리를 음차
* 매죽루: 영월에 있는 누각
[출처] 열차로 문학기행 영월 왕방연 - 천만리 머나먼 길 / 이유 -자규삼첩|작성자 광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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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신 이유(李渘)
이유(李渘.1675.숙종 1∼1753.영조 29)
조선 숙종 때 문신. 자(字)는 중구(仲久), 호(號)는 소와(笑窩)ㆍ석호(石湖)ㆍ소악루(小岳樓). 선성군의 9대손이며 준도의 5대손이고 명운의 증손자이자 희안(希顔)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에 생원(生員)이 되고 세마익위수(洗馬翊衛率)에 연거푸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32년(영조 8) 백씨 강(?)의 말을 듣고 장릉(莊陵) 참봉(參奉)에 나아갔으며 금부도사(禁府都事)ㆍ감찰(監察) 등을 역임(歷任)하였다. 1734년(영조 10)에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제수받았고 1737년(영조 13)에 관직(官職)에서 물러나자 그 곳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공은 문장(文章)으로 세상(世上)에 이름이 났고 성리학(性理學)은 한층 더 조예(造詣)가 깊었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함께 토론(討論)하여 인간(人間)과 동물(動物)의 심성(心性)이 서로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에 대한 논변(論辯)을 벌였다.
파릉(巴陵)은 중국(中國) 사람들이 말하는 소악양(小岳陽)인데 공이 그 곳 악양루(岳陽樓) 제도를 그대로 모방해 현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누각(樓閣)을 만들어 이름을 ‘소악루(小岳樓)'라고 칭하고 그 속에서 시주(詩酒)와 금가(琴歌)로 한가하게 지냈다. 그간에도 회헌(悔軒) 조관빈(趙觀彬: 1691∼1757), 포암(圃巖) 윤봉조(尹鳳朝: 1680∼1761),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등과 가끔 서로 만나 시(詩)를 읊었다. 시조 <자규삼첩(子規三疊)> 3수가 전한다.
【저서】<소와문집(笑窩文集)>(10권)
[출처] 조선 문신 이유(李渘)|작성자 재봉틀의 국어방
이유 : 시조 <자규야 우지 마라>
자규야 우지 마라
【시조】- 이유(李渘)
자규야 우지 말아 울어도 속절없다.
울거든 너만 우지 날은 어이 울리는다.
암아도 네 솔의 들을깨면 가슴 알파 하노라.
【어구 풀이】
<자규> : 소쩍새의 다른 이름
<솔의> : 소리
【현대어 풀이】
두견새야 울지 말아라, 아무리 울어도 도리 없다.
울려거든 너 혼자 울지 나는 왜 울리느냐?
네 소리를 들으면 옛날 자규시를 읊으며 슬퍼한 단종 임금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프구나.
【감상】
이 시조는 <자규삼첩(子規三疊)>이라는 연시조 중의 하나이다. 작가는 이 시조를 짓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종이 귀양와 있던 영월의 청냉포를 지날 때 자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옛날에 어린 임금이 이곳의 매죽루에 올라서 자규시를 읊었던 일을 생각하고 지었다.”
작가는 영월 땅을 지나면서 불행했던 단종을 생각하고 그가 지었다는 자규시도 읊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흘러간 일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며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자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심히 우는 새소리지만 작가는 자규도 자기와 같이 단종을 추모해 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울어도 속절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울려거든 너나 울지 왜 나까지 울리느냐라고 하여 자기가 울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결국 이 시조는 단종을 생각하는 애도의 정을 자규에 감정 이입하여 노래한 것이다.
이유 : 시조 <불여귀 불여귀 하니>
불여귀 불여귀 하니
【시조】- 이유(李渘)
불여귀(不如歸) 불여귀(不如歸) 하니 돌아감만 못하거든
어엿분 우리 임금 무슨 일로 못 가신고.
지금의 매죽루(梅竹樓) 달빛이 어제런 듯하여라.
【어구 풀이】
<불여귀(不如歸)> : 두견새의 울음소리. ‘불여귀’라고 들린다고 한다. 글자대로의 뜻은 ‘돌아감만 못하다’이다.
<어엿분> : 가엾은, 가련한.
<매죽루> : 강원도 영월에 있는 누각으로 단종이 자규시를 지었다는 곳이다.
【현대어 풀이】
돌아감만 못하다, 돌아감만 못하다 하니 돌아감만 못하거든
가엾은 우리 단종 임금은 무슨 까닭에 못 돌아가시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셨는가?
지금의 매죽루의 달빛을 보니 지난 일이 새로워진다.
【감상】
영월 땅에 유배되어 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사(賜死)된 단종의 넋을 위로하여 지은 시조이다. 특히 작가가 서 있는 매죽루는 그 옛날 어린 임금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바장이다가 마침 자규의 울음소리를 듣고 단장곡인 자규시를 읊은 곳이다. 그래서 작가는 마치 그 때의 일을 다시 보는 듯 솟아나는 비감을 감출 길이 없어 이 시조를 지은 것이다.
자규는 불여귀 불여귀하고 우는데 임금님께서 왜 돌아가지 못하였는가? 자규의 울음소리를 불여귀라고 적는데, 그것을 단종에게 궁중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일러주는 말로 풀이한 것이 이 시조의 애절함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지금도 영월 땅 어디에서는 어디에서는 ‘불여귀, 불여귀’ 하고 자규가 울고 있을 것만 같다. <자규삼첩(子規三疊)> 3수 중의 한 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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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규삼첩Ja-gyu-sam-cheop , 子規三疊
조선후기 |
이유(李渘) |
1732년경 |
시조 |
작품 |
문학/고전시가 |
요약 1732년경에 이유(李渘, 1675∼1753)가 지은 시조.
내용
3대 시조집인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실려 전한다. 총 3장의 연시조인데 작자가 장릉 참봉이던 57세 때, 영월 땅을 지나면서 불행했던 단종을 생각하고 지었다. 『해동가요』의 관련 기록을 보면, “옛날 단종대왕이 영월 매죽루(梅竹樓)에 있을 적에 자규사(子規詞)를 지었는데, 비록 여항(閭巷)의 아녀자들도 들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왕손인데 적막한 묘사(廟祠)를 지키면서 청령포(淸泠浦)를 지날 때면 눈물지었다. 게다가 여기서 자규의 울음을 들었음에랴. 그래서 이 노래를 지어서 슬퍼하고 이름하여 ‘자규삼첩(子規三疊)’이라 한다.”라 창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
1장은 매죽루(梅竹樓)에 서서 무심히 우는 소쩍새의 울음 소리에 귀양 온 어린 단종의 슬픈 운명을 떠올리며, 2장은 소쩍새의 애절한 울음에, 불쌍한 임금을 생각하며 우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늘이 시켜서 운 것이라며 자신의 감회를 토로한다. 3장은 슬픔을 배가시키는 두견새에 대한 호소다. 자규의 울음소리에 이입되어 어린 임금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담았다. 왕손인 이유는 12살의 어린 나이로 비명에 죽어야 했던 단종에 대한 남다른 연군의 정(戀君之情)을 쉬운 우리말을 구사하여 절절한 시어로 잘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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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