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합격하고도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뒤,
나는 다시 집에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논밭에 나가 일을 거들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해 오고, 들판을 돌아다니며 소 꼴을 베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흙을 밟고 풀 냄새를 맡으며 지내는 것이 그 무렵 내 일상이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이웃에 사는 친구 친구가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는 다음 해에 다시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남원초등학교에 다니시는
삼촌의 도움으로 남원국민학교에 재입학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께서 나에게도 말씀하셨다.
"너도 다시 학교에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
이미 국민학교에서 배운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중학교에 합격까지 했던 내가 다시 국민학교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간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는 조금 싱거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나도 친구와 함께 남원국민학교에 다시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다녀보니 공부에는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았다.
이미 배웠던 내용이었고, 머릿속에는 공부보다 들판에서 뛰놀던 기억이 더 가득했다.
학교에 가기 싫은 날이면 친구와 함께 보리밭 옆에 세워 놓은 새 원두막으로 숨어들었다.
원두막에 누워 있으면 따뜻한 볕이 지붕 사이로 스며들고,
바람이 불 때마다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우리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원두막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낄낄거리곤 했다.
그 시절의 농촌은 우리에게 학교보다 더 넓은 놀이터였다.
친구는 특히 장난기가 많았다.
어느 날은 내가 가져간 도시락을 장난삼아 흐르는 논물에 담가 버렸다.
밥이 물에 젖어 물밥이 되어버렸는데도 친구는 깔깔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친구가 웃는 모습을 보니 결국 같이 웃고 말았다.
그 시절에는 그것마저도 추억이었다.
여름이면 장대비가 쏟아지고 들판 곳곳에 웅덩이가 생겼다.
비가 그친 뒤 물이 가득 고인 큰 웅덩이를 보면 우리는 학교에 갈 생각보다 물속에 뛰어들 생각부터 했다.
몇 시간이고 물속에서 헤엄치고 장난치며 놀았다.
그러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정신을 차리고 소 꼴을 베어 집으로 돌아갔다.
학교와 들판, 공부와 장난, 어머니의 밭일과 아버지의 농사일이 그렇게 뒤섞여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었다.
친구와 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보리밭에 숨어 이야기를 나누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보리가 출렁거렸고,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갑자기 철길 쪽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갔다.
그곳에는 지나가는 열차에 치여 쓰러진 한 여자가 있었다.
몸에는 여러 군데 심한 상처가 나 있었고, 손목도 잘려 있었다.
어린 우리에게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 보리밭에서 웃고 떠들던 세상이 한순간에 멈춰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어린 나에게,
철길 옆에 누워 있던 그 여자의 모습은 오랫동안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그날 보리밭의 푸른 냄새와 바람 소리,
멀리서 울리던 기차의 기적소리,
그리고 철길 옆에 쓰러져 있던 사람의 모습이 한 장면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도 삶의 아픔과 죽음은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또 한 번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퍼부었다.
우리는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관악 묘 부근에서 철길 아래로 흐르는 물이 무섭게 불어나 있었다.
그때 자전거에 과자를 싣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갑자기 넘어졌다.
자전거에 실려 있던 과자들이 물속으로 쏟아져 떠내려갔다.
우리는 정신없이 물을 따라가며 떠내려오는 과자를 주웠다.
그리고 한 봉지를 열어 입에 넣어 보았다.
그 과자가 얼마나 달고 맛있었던지 모른다.
비에 젖은 들판, 세차게 흐르는 물, 철길 아래를 지나가던 사람들,
그리고 물에 떠내려오던 과자,
가난했던 어린 내게 그 과자 하나의 단맛은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학교생활에서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기성회비였다.
나는 여전히 학교에 내야 할 기성회비를 제때 마련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돈이 없다는 것은 학교를 다시 다닌다고 해서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또다시 기성회비를 걱정해야 했다.
그런데 친구는 달랐다.
친구네 집은 우리 집보다 형편이 나았다.
기성회비를 낼 때가 되면 친구는 아무런 걱정 없이 돈을 내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았다.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내는데,
나는 그 돈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어린 마음에도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를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함께 원두막에서 놀고,
물웅덩이에서 목욕하고,
논물에 도시락을 담그며 웃었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돈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 처지가 서럽기도 했다.
친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몇 푼의 돈이
나에게는 학교를 다닐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큰 벽이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와 함께 남원국민학교에서 다시 공부했다.
학교에 가기 싫어 원두막에서 땡땡이를 치기도 했고,
들판에서 하루 종일 장난치며 놀기도 했다.
때로는 가난 때문에 마음이 무너졌고,
때로는 친구가 부러워 속으로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날이 지나고 우리는 다시 공부를 마쳤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참 이상한 시절이었다.
가난해서 서럽고, 학교가 싫어서 도망치고,
들판에서는 한없이 자유로웠다.
보리밭에서는 웃었고, 원두막에서는 낮잠을 잤으며,
물웅덩이에서는 세상 걱정 없이 뛰어놀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나는 왜 돈이 없을까' 하는 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가난인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친구가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했을 때 느껴지는 서러움,
학교에서 돈 이야기가 나올 때 작아지는 마음,
어머니에게 또 돈을 달라고 할 수 없었던 미안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보리밭의 바람과 기차의 기적소리,
소 꼴을 베던 풀 냄새와 논물의 차가움, 친구와 함께 웃었던 장난,
그리고 가난 때문에 남몰래 삼켰던 눈물 속에서 흘러갔다.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그때 참 많이 울었지만 또 참 많이 웃었다.
가난은 나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 갔지만,
그 가난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뛰놀았던 들판과 보리밭,
그리고 끝내 공부를 놓지 않았던 마음까지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