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유명한 어록이라고 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내로남불" 한 단어로 요약되는데,
타인의 잘못은 상대가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스트여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더 큰 민폐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어쩔 수 없던 것마냥 느끼는 이들이 지천에 널린 것 같다.
인간이 타고나기를 특출나게 악하고 역겨워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게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 모든 근원적 원인이 우리가 모두 "낳음 당한" 피해자여서라고 생각한다.
보통 "낳음 당함"이라는 표현은 물질적, 정서적 지원을 하지 못 한채 애를 낳기만 한
부모 밑에서 큰 이들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자조적인 표현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 어떠한 인간도 동의하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던가?
제아무리 부모가 아이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지원을 하더라도 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예전에는 피임도 어렵고 삶을 부여받음이 축복이라는 인식이 만연했지만,
이제는 인권과 "인간 존엄성"의 시대에 접어들었기에 인간은 "결핍 없는 삶"을 사는 게 아닌 이상,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되새김질하며 "상처받음"을 호소하는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이를 충족받지 못하는 인간은 몸이 늙어도 마치 아이와 같은 것이다.
[출처]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작성자 붉은실
이 시대는 참 아이러니한 시대인 것 같다.
"인간은 타고나기를 존엄하고 권리가 있다"
인간이 인류 역사상 가장 흔하며 인간 노동력이 가장 무가치한 시대에 우습지도 않은가?
현 시대의 인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두툼한 허리둘레를 자랑하지만 모두가 "마음의 상처"를 호소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하지만 가장 정신병자 또한 만연한 우스운 시대가 바로 인권시대다.
고대에는 "선"과 "악"이 매우 명확하게 구분되었지만, 점차 선악의 구분은 모호해지게 되었다.
"실은 이 녀석도 좋은 녀석이었어" 요즘에는 사연 없는 악역이 더욱 드물지 않던가?
사람들은 이를 가르켜 "캐릭터성이 더욱 입체적으로 변모했다"고 찬미하지만, 과연 그런가?
고대의 서사시를 보면, 사실 "영웅"이라는 인간들도 상당히 인격적으로 결함이 크지 않던가?
그럼에도 이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영웅 취급을 받는다.
서사시의 영웅들은 사실 현대의 기준에서는 선함으로 보기에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여인을 강간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들이 영웅으로 찬미됨은 고대의 기준이 현대와 달라서에 불과함일까?
아니면 결과가 모든 것의 증명이기에 이들은 초월적 업적으로서 면죄부를 얻은 것인가?
아니, 이들은 그 누구의 구원을 바라지 않았기에 인격적 결함과 별개로 영웅이 된 것이다.
내 인생 애니인 <데빌맨 크라이베이비>에서 나온 내용이다.
인간은 공포로 인해 광기에 빠지게 되며 무고한 이들을 마녀로 몰아세우게 된다.
그렇게 미키는 아키라가 구하러 오기 전에 갈갈이 산 채로 찢겨서 죽음을 맞이한다.
분노에 가득 찬 데빌맨 아키라가 그들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우리는 정말 이 여자가 악마인 줄로만 알았다고!"
악은 다른 이를 해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모든 필멸의 존재는 생을 유지하고자 다른 생명을 필연적으로 짓밟아야 하지 않던가?
아니, 악은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부정하고 회피함이다.
스스로를 "선량한 소시민"으로 여기며
"그래도 나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고 여김이야말로 가장 큰 위선이자 악인 것이다.
[출처]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작성자 붉은실
너무 극단적인 전재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현 시대는 피해자만 즐비하지만 그 누구도 죄인임을 고해성사하지 않는가?
가스라이터나 강력범죄자들조차 스스로를 "상처가 많은 슬픈 영혼"으로 여기고는 한다.
자신이 불우한 환경에서 결핍 속에 성장하였기에 자신은 이럴 수 밖에 없었다며 말이다.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조차 스스로를 가련하게 본다는 것이다.
현 시대를 "혐오의 시대"라고 일컫지 않던가?
우스운 게, "스탑럴커론"이 그토록 대중화된 현 시점에도 퐁퐁이 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과연 멍청해서 당하는 것에 불과함일까?
여초 커뮤니티에서 남혐을 하는 여성들은 "극악무도한 싸패"의 형상을 띄지 않기에 그렇다.
타인을 벌레마냥 조롱하는 혐오자들도 사실은 그 누구보다 자신을 가련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현 시대를 뒤덮은 혐오와 뻔뻔함은 사실 "자기연민"에서 비롯됨이다.
혐오를 한다는 이들을 살펴보면, "착한 나는 세상에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그렇기에 이들은 세상 중에서 가장 자신이 피해의식을 느끼는 집단을 혐오한다.
자신은 그저 정당한 "권리주장"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이들은 그 누구보다 뻔뻔하다.
사실, 혐오 자체가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래 공격성은 모든 생명체의 근본적인 본질이자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를 해하고 포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동물에게 공격성은 당연한 본성일 수 밖에 없다.
수소폭탄의 발명으로 인해 더 이상 "진정한 공격성"을 표출할 수 없게 된 인간이
"화합"과 "이념"의 이름으로 뒤틀린 공격성을 표출하니 모두가 역겨운 위선자가 된 것이다.
현 시대의 인간은 혐오를 한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혐오를 하지 않는다.
혐오자들은 사실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세운 나쁜 세상"과 "이럴 수 밖에 없던 가련한 나"에 도취한다.
그렇기에 혐오자들은 다들 하나같이 신념에 도취하며 자신의 정의를 울부짖다가,
더 이상 이러한 신념이 먹히지 않으면 나약한 형상을 취하는 것이다.
쎈 캐라는 인간들조차 "사실 내 속마음은 여리다"는 말들을 꼭 덧붙히지 않던가?
[출처]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작성자 붉은실
악의 본질은 뻔뻔함이다.
타인을 착취함이 악이 아니라, 착취하는 손에 묻은 피를 미화함이 바로 악인 것이다.
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자기연민이며,
"이 정도는 그래도 세상이 나를 수용해줘야 마땅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는 뻔뻔함이다.
애석하게도 모두가 존귀하고 특별해진 인권시대의 인간은 단체로 맛탱이가 가 버린 것이다.
애석하게도 세상은 이러한 "가련한 아기새"들을 못 보듬어서 안달이 나 있다.
똑같이 궁핍하고 빈곤한 환경에서 어려움을 마주하더라도
자살 충동을 호소하며 슬픔을 토로하는 이는 빵 한 쪼가리라도 적선받지만,
묵묵히 어떻게든 이겨내보려 하는 이들에게는 그 어떠한 자비도 주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우는 아이에게 떡 한 개 더 준다" 이야말로 현 시대의 법칙인 것이다.
"마음의 상처" 그놈의 마음의 상처 이야기 좀 그만들 하면 어디 덧이라도 나는가?
물론, 정말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은 충분히 통감한다.
심적 고통에 우열이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련한 아기새"의 자화상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스스로를 가련히 여기기에 현 시대의 인간의 평균값이 "쿠크다스 멘탈"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출처]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작성자 붉은실
"선량한 소시민"은 인지적 허구에 불과하다.
당신을 갈구던 기성시대 부장도, 양양에 남친 몰래 원나잇을 하는 여직원도,
배달 주문요청에 당당히 서비스를 요구하는 진상도 스스로를 "선량한 소시민"으로 여길 테니 말이다.
과연 당신은 온전히 선하고 고결한 존재가 맞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당신도 누군가의 삶에서는 빌런이 아니라는 말인가?
인간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죄를 마주함에서 추악함을 벗어남이다.
원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악하며, 생의 본질은 착취이니 말이다.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
아니, 우리는 가해자와 지배자의 눈빛을 자처함에서 역겨운 위선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위선보다 더욱 역겨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말한다: "선량한 소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