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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인테리어 스크랩 [건축사진] India 빛나는 도시 - 찬다가르
석공 추천 0 조회 115 11.03.30 12: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India 빛나는 도시 - 찬다가르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의 78년간의 생애를 전반기, 중반기, 하반기로 나누어 본다면 하반기에 해당하는 63세 이후에 는 27개의 작품이 있으며, 대부분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월간 인테리어 1998년 11월호 참조)르 꼬르뷔제 는 죽기 불과 한달 전까지도 이웃사람과의 대화에서 “아직도 내 머리 속에는 100년분의 계획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 로 작품에 대한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르 꼬르뷔제가 63세가 되든 1950년도는 참으로 중요한 한 해였다. 이때 그는 두가지의 의뢰을 받게 되는데 하나는 롱샹 (Ronchamp:1955년 6월 25일 봉헌식) 성당의 설계이며, 또 하나는 찬디가르(Chandigarh:인도 북부 펀잡주의 수도)의 도시계획이다.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는 다시 종교적인 분쟁으로 휩싸이게 된다. 간디는 힌두교와 이 슬람교의 화합을 외치며 전국을 누비고 다녔지만 1948년 1월 30일 과격한 힌두교도의 총탄에 죽게되고 결국 종교적인 문 제로 이슬람교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쉬가 인도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펀잡(Punjab)주는 파키스탄과 인도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당시의 펀잡주의 수도 라호르는 파키스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인도의 펀잡주는 새로운 주 수도를 찬다가르(Chandigarh:전쟁의 여신이 있는 성채 또는 요새라는 의미)로 정했다. 찬디가르의 도시계획은 네루 수상 의 미국 친구였던 건축가 알버트 메이어가 수립하였다. 그리고 예전에 르 꼬르뷔제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던 마튜 노비키(Matthew Novicki)가 책임 건축가로 초빙되었으나 마튜 노비키는 이집트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만다. 이때 펀잡주 토목기술주임 바르마(P. L. Varma)와 주 토목행정관 사판(P. N. Thapan) 두 사람이 파리의 르 꼬르뷔제의 대문을 노크했다. 두 사람은 르 꼬르뷔제에게 찬디가르의 책임건축가가 되어 주기를 간청했다. 르 꼬르뷔제는 이 제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첫째, 인도는 프랑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둘째, 설계비가 일에 비해서 형편없이 적었고 셋째, 만일 간청을 받아들여 책임건축가가 되어 계획을 수립한다 하더라도 몇 번 속은 다른 나라들의 예처럼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고 계획만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르 꼬르뷔제의 계획대로 지켜진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끈질긴 설득에 르 꼬르뷔제는 승낙을 했다. 사촌동생 피에르 잔느레도 참여시켰고 영국의 건축가 맥스웰 프라이(Maxwell Fry)와 그의 부인 제인 드로(Jane Drew)도 합류했다. 이제 르 꼬르뷔제는 「펀잡주 도시설계 고문」이란 직함으로 다음 해인 1951년 2월에 잔느레와 함께 인도로 갔다. 르 꼬르뷔제는 알버트 메이어가 이미 설계한 기본계획을 많이 따랐다. 행정구역을 만들 것. 시티센터를 도시 중심지에 설정할 것. 도시는 섹터(Sector)로 구획할 것 등이었다. 르 꼬르뷔제는 주거단지 섹터의 단위로 1200mx800m의 모듈러(Module)를 새로 삽입했다. 곡선으로 된 길은 직선으로 수정했고 도시를 바둑판 모양으로 정했다. 1섹터를 1200mx800m로 하는 개념은 이미 남미 콜럼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시도했던 것이었 다. 찬디가르의 도시는 행정구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주거지역으로 크게 분류하여 다음과 같이 배치했다. ㆍ행정구역 : 찬디가르 지형은 약간 경사져 있는데 언덕 제일 높은 넓은 대지를 행정구역으로 정하였다. ㆍ상업지역 : 도시의 가장 중심지에 설정 ㆍ공업지역 : 남동쪽 도시 외곽지대 ㆍ주거지역 : 각 섹타 내에 설정하여 국민학교, 의료센터, 서민들의 일반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소규모 시장 등을 배치하 였고 시티센터의 세로축을 따라 녹지공간을 조성하였다. 르 꼬르뷔제는 건설공사 중 식수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지하 80m 정도 땅을 파야 식수를 겨우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하 수위를 높이기 위하여 도시 동쪽에 흐르고 있는 꼬불꼬불한 강에 4km의 제방을 급히 건설하여 이 물을 수크나(Sukhna)호수로 끌어들였고 이곳을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시민의 휴식처로 만들었다. 르 꼬르뷔 제는 이 호수에 모터 모트를 사용하지 말 것과 아울러 호수 제방에 자동차와 자전거 등의 통행을 금지시킬 것을 시당국에 건의했다. 르 꼬르뷔제는 밤하늘의 별빛과 호수에 비치는 별빛을 감상할 수 있도록 조명을 낮게 설치하였다. 공사가 시작 된지 16년 만에 인구 150,000명이 거주할 수 있는 제 1기 공사는 끝이 났다. ‘빛나는 도시’ 찬디가르는 현재 47섹터로 구획되어져 있고, 각 섹터는 도로로 나뉘어져 있다. 섹터 1에는 행정부서와 수크나 호수가 있고 섹터 10에는 박물관, 미술 관, 미술대학 등 문화시설 및 교육시설이 있으며 섹터 16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장미정원이 있고 수천그루의 장미가 갖가지 색깔을 띄고 있는 시민의 휴식처가 있다. 찬디가르의 거리에 인도사람과 릭샤가 보이지 않는다면은 이곳은 마치 유럽의 어느 한 도시인 듯한 착각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지에 살고 있는 인도사람들은 찬디가르의 도시계획이 인도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인도인의 이야기를 몇 가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티센터의 도로와 녹지를 포함하여 넓이가 560m나 되고 인도(人道)도 40m 이상이나 되는 도로가 과연 이곳에 필 요한가. 둘째, 주거지역의 주택을 카스트 제도에 의한 계습별로 분류하여 차등을 두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신도시에서 과연 합 당한가. 셋째, 상업지구에 그 넓은 녹지대가 인도인의 정서에 맞는가. 이러한 것은 인도인의 속성과 전통을 감안하지 않은 도시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해답과 결론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자손들의 몫이 아닐까. 르 꼬르뷔제는 찬디가르 섹터 1지역에 고등법원, 주의회당, 펀잡주 청사와 함께 오픈 핸드(open- Hand) 조각품을 설계하 였고 섹터 10에는 박물관, 미술관, 미술대학 건물을, 섹터 12에는 건축대학을 설계하였다. 이 중 가장 먼저 완성된 건축은 고등법원이었다. 이것은 환상적인 아치형의 구조로 되어 있고 우산 모양의 거대한 지붕으로 덮여 있다. 입구 로비는 거대 한 콘크리트 사탑(斜塔)으로 구분되어 오른쪽은 브리즈 솔레이유(Brise-Soleil, 르 꼬르뷔제가 명명하여 제창한 것으로 단순한 블라인드가 아니라 건축의 요소로서 디자인된 차양을 의미한다)가 2개층 높이로 가려져 있다. 현관 바로 뒷 쪽의 램프는 윗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광장을 거쳐 현관을 통해서 바로 법정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특히 몇 개의 대법정 내부에는 르 꼬르뷔제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진 벽걸이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장식의 효과와 아울러 흡음(吸音)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우산모양의 지붕 밑에는 아랫쪽 광장과 멀리 떨어져 있는 히말리 야 기슭까지 볼 수 있는 테라스와 펜트하우스(Pent-House)가 준비되어 있다. 이것은 편잡주의 기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 여름의 찌는 듯한 폭염과 몬순기의 엄청난 폭우를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현지 기후조건을 감안한 설계로 써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표현되고 있다. 르 꼬르뷔제는 이 고등법원을 통해 인테리어 설계에도 뛰어난 혜안(慧眼)을 가졌 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고등법원의 파사드는 광장을 향하고 있는데, 그 광장은 의회와 주정부 청사까지 460m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있다. 이 광장은 기능적인 면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업무 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고등 법원과 의회, 주정부 청사 사이에 직선의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지도 않고 건물 뒤로 돌아서 가는 조그만 길이 하나 있을 뿐이다. 공사를 하다가 중단한 대지처럼 두 건물 사이는 삭막한데, 그렇지만 마주 본 건물 오른쪽에 생각보다 큰 오픈 핸 드 조각이 우뚝 서 있어서 그 삭막함을 다소 감소시키고 있다. 1956년 3월 19일 최초로 완성된 고등법원은 네루 수상이 참석한 가운데 화려한 중공식을 거행하였다. 주정부 청사(Secretariat, 1958)건물은 두 번째 세워졌다. 길이 254m, 높이 42m로 된 거대한 건물이 한 개 동(棟)으로 되어 있다. 르 꼬르뷔제는 1942년 알지에 해군지역에 계획했던 초고층계획인 타워형식의 계획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찬디가르의 토목행정관 사파(Thapar)는 계약서를 보이면서 여기에 명기된 ‘초고층 건물은 세우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보 이며 이 계획안을 거절했다. 이때 그 꼬르뷔제는 사임을 고려할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다음 회의 때는 일자형 길다 란 건물의 계획안을 제출하였다. 외부에서는 알아 볼 수 없지만 신축 포인트에 의해 파사드는 3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정부 청사의 건물은 6층∼8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 부분의 한 개 층은 2층 높이로 되어 있고 개구부는 3∼4 층의 높이로 전면과 후면 사이가 뚫려 있다. 이 건물은 르 꼬르뷔제가 주장해 왔던 5원칙 중 필로티에 얹혀 있지 않은 것 이 특징이다. 경사로는 주건물에 손잡이처럼 불거져 달려 있는데, 르 꼬르뷔제가 1920년대 이래 늘 추구하여 왔던 이 모티브는 조형적으로 강력한 메세지를 담고 있다. 벽면은 4m 크기의 금속 패널 2000개를 63개의 기둥 사이에 조립하여 설치함으로써 브리즈 솔레이유 효과를 연출하였고, 위치에 따라 환기를 위해 오픈된 곳도 만들었다. 맨 윗층의 카페테리아 에서 옥상을 내려다 보면 지금까지 르 꼬르뷔제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모든 형태의 모습이 집합되어 있고 캐피톨 지역 과 수크나 호수까지 조망할 수 있는 테라스로 연결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히말라야 산기슭도 바라다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모듈러의 비례척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한 부분의 돌출된 개성도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 는 요소로 처리한 것이 르 꼬르뷔제의 천재성이라 할 수 있다. 주의회당(Assembly Building, 1961)은 그 설계과정에서 설계변경을 두 번이나 했다. 르 꼬르뷔제가 1953년 6월 아메다바드 상공을 통과하여 착륙하기 직전 강가에 늘어선 「쿨 링타워」의 줄지어 선 거대한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상원 본회의장은 마치 여객선의 갑판을 뚫고 솟아 오른 굴뚝 과 같은 원통형으로 설계했고 하원은 4각 입방체 모습을 적용했다. 원통형의 위쪽에는 폭이 좁은 작은 배 또는 물소뿔을 연상케 하는 돌출 부분을, 아래쪽에는 조명실의 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부채모양을 장치했다. 이러한 것은 르 꼬르뷔제 가 델리에 있는 옛날 천문대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의 형태를 보고 감동을 받아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변형시켜 응용한 것이다. 파사드는 고등법원의 파사드에 화답하는 형체로 구상하였다. 거대한 빗물 홈통이 회의장 정면 환관 위에 걸려있는 모습이고 이것은 직각, 수직의 판자에 의해 지탱하도록 되어 있다. 판자에는 타원형 구멍이 불규칙하게 뚫려 있 는데 이러한 형태는 나중 미술관 설계 때도 적용된다. 오늘날 펀잡주에 소속되는 주는 3개로 나누어져 있다. 펀잡주, 하이아나주, 히미샬주이다. 찬디가르의 캐피톨은 3개 지방 정부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찬디가르는 현재 뉴델리 중앙정부의 직할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오픈 핸드 (open Hand:1955)는 약 16m의 크기로 만들어 철판으로 덮어 씌었다. 받침은 볼베아링으로 받쳐져 있고 풍향계처럼 바람 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 기념비는 인간이 자연과 마주 대하고 있음을 표현하려는 르 꼬르뷔제의 독특한 상징인 것이다. 르 꼬르뷔제가 처음으로 오픈 핸드를 구체화한 것은 1948년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해마다 늘어나는 나뭇가지의 성장을 「오픈 핸드」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1954년 11월 26일 네루 수상에게 보내는 한통의 편지에 르 꼬르뷔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이 손은 창출되는 부를 받기 위해 펼쳐져 있고 이것을 우리 국민과 다른 국민에게 분배하기 위하여 늘 펼쳐져 있습니다. 「오픈 핸드」는 기계문명의 제 2단계, 즉 조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드릴 것입니다.”찬디가르의 토목 기술주임 P.L. 바르마는 르 꼬르뷔제에게 편지를 썼다. “인도에는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남에게 봉사만 하는 최고선 (善)에 대한 굳은 신앙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신념으로 살고 있으며 또한 이 도시의 창조가 이것에 걸맞는 사람, 즉 당신 의 손 앞에 놓일 것이라는 기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철학은 「오픈 핸드」의 철학입니다. 찬디가르는 아마 도 그 사상의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이 오픈 핸드는 르 꼬르뷔제가 죽은(1965년)후 1986년에 완공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 롱샹성당 ]



[ 찬디가르시 박물관 ]



[ 광장에서 본 펀잡주 고등법원 ]



[ 주정부 청사의 램프. 손잡이같은 돌출부가 나와있다 ]



[ 주의회의 정면 ]



[ 주의회의 측면 ]



[ 주정부 청사에서 내려다 본 의회의 모습 ]



[ 미술대학의 내정 ]



[ 섹터10에 있는 미술대학 ]



[ 박물관 내부의 램프 ]



[ 박물관 내부의 전시장 ]



[ 건축대학 측면. 파도치는 듯한 지붕의 모습 ]



[ 건축대학 내정 ]



[ 건축대학 복도 ]



[ 요트클럽 ]



[ 요트클럽에서 본 수크나 호수 ]



[ 르 꼬르뷔제의 조각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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