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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漠(석 막)과 石幕(석 막)은? 또 어디에?
※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석 막(石 幕)”【함경도(咸鏡道) 부령(富寧) 땅이다.】이란 무엇인가? 지명(地名)인가? 아니면 특이지형(特異地形) 지대(地帶)을 일컫는 말인가? 한 번 따져보기로 하자.
○ 『석 막(石漠)이란 곧 사막(沙漠)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곧 대막(大漠)이다.』라는 것이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말하는 것이며, 다른 원전(原典)의 설명과 똑같다.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대막(大漠)은 곧 대 사막(大 沙漠)이다. (大 漠 卽 大 沙 漠)』라는 것을 확인(確認)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사기열전(史記列傳)에서 말하는, 『사막(沙幕)』이란 무슨 말일까? 역시 『사막(沙漠)』과 같이 사용(使用)되던 말이다. 【사기열전(史記列傳) / 소무(蘇武) : 《陵 起 舞 ,歌 曰 :「徑 萬 里 兮 度 ➡沙 幕 ,為 君 將 兮 奮 匈 奴。路 窮 絕 兮 矢 刃 摧 ,士 眾 滅 兮 名 已 隤 。老 母 已 死 ,雖 欲 報 恩 將 安 歸 !】
● 이는 곧 『사막(沙漠)이란 사막(沙幕)과 함께 쓰이는 말이며, 대막(大漠)은 또 대막(大幕)이며, 대막(大漠)은 또 석 막(石漠)이며, 또 석 막(石幕)으로도 사용(使用)되던 말이다.』라 할 수 있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는, 『대막(大漠)이란 대 사막(大沙漠)』을 말하는데, 『그 사막(沙漠)의 모래와 토질(土質)의 색깔에 따라, 백막(白漠). 흑막(黑漠). 석 막【石漠 = 석 적(石磧)】등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분(區分)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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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산서(山西) 편 / 석 막(石漠)
《石漠在塞北.自陰山而北,皆大漠也.其間有白漠,黑漠及石漠之分.白,黑二漠,以色為名,石漠以地皆石磧而名. : 석 막(石漠)은 새북(塞北)에 있다. 음산(陰山)의 북쪽은 모두 대 사막(大漠)인데, 그 사이에 백막(白漠), 흑막(黑漠)과 석 막(石漠)으로 구별하는데, 백막(白幕)과 흑막(黑漠)은 색깔로 인한 이름이며, 석 막(石漠)은 그 땅이 모두 ‘석 적(石磧)’으로 인한 이름이다. 中略.白漠蓋在黑漠西也.亦謂之大磧.四年,魏主西伐統萬,命其將陸俟督諸軍屯大磧以備柔然,即此.又宋泰始中,魏主宏追柔然至石磧,即石漠矣. : (중략). 백막(白漠)은 모두 흑막(黑漠)의 서쪽이다. 또한 칭하기를 대적(大磧)이다. 4년에, 위(魏)주(主)가 서쪽의 통만(統萬)을 벌할 시, 명을 받은 그 장수 육 사독의 여러 군대가 유연(柔然)에 대비하여 대적(大磧)에 주둔하였는데, 곧 이곳이다. 또 송(宋) 태시(泰始)중에, 위(魏)주(主) ‘굉(宏)’이 유연(柔然)을 쫓아 석 적(石磧)에 다다랐다. 곧 석 막(石幕)이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설명(說明)에 따르면 :
대막(大漠) 곧 대 사막(沙漠)지대는, 세 종류(種類)로 구분하는데, 곧 『백막(白漠). 흑막(黑漠). 석 막(石漠)』이다. 이 모두는 “대막(大漠)”지대에 있으며, 사막(沙漠)에 있는 모래나 땅의 색깔로 구별(區別)했다는 것이며, “석 적(石磧) 곧 석 막(石漠)은 자갈이 많은 사막(沙漠)지대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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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살펴보면 :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대 더 나아가 흑룡강(黑龍江)의 남북 양 쪽 모두 이러한 사막(沙漠)지대는 존재(存在)할 수 없는 땅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이지형(特異地形)지대는 어디에 존재(存在)하는 것일까?
곧 대륙(大陸)의 땅, 황하(黃河)의 서쪽 땅인 “하서(河西)”지방에 존재(存在)하며, 하서(河西)란 해서(海西)와 같은 말이며, 이곳에 있는 『고비사막(沙漠)으로부터 알타이산맥(山脈)을 넘어 신강 성(新疆省)지방(地方)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 이어진다.』바로 이곳이 “대막(大漠)지대”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근세기(近世期)에 이르는 동안 사막(沙漠)지대는, 동(東)쪽과 동남(東南)쪽으로 점진적(漸進的)으로 확장(擴張)되어 왔다는 것을 알자. 이것은 근세기(近世期)의 환경파괴(環境破壞)와 기후(氣候)변화(變化)로 가속(加速)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천(數千)년 전, 또는 수백(數百)년 전의 역사(歷史)이야기를 하면서, 오늘날의 사막(沙漠)분포도(分布圖)를 갖고 이야기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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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우리가 새롭게 인식(認識)할 것은 『사막(沙漠)은 사막(沙幕)』이며, 『대막(大漠)은 대막(大幕)』이다. 옛 역사서【歷史書 : 사기(史記)】에서 『막(漠)은 막(幕)과 같이 쓰였다.』는 점이다.
○ 그렇다면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석 막 (石 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그곳은 어디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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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 함경도(咸鏡道) 부령도호부(富寧 都護府)
【건치연혁】 본래 경성군(鏡城 郡)의 석 막(石幕) 지역이다.
【제영】 길이 오랑캐의 모래밭 하늘 끝 간 데로 들어간다. 박 맹지(朴 孟 智)의 시에, “길이 오랑캐의 모래밭 하늘 끝 간 데로 들어가는데, 남쪽과 북쪽으로 분주히 말달리는 것 언제나 끝나려는고. 10년 동안 글과 칼을 배운 뜻을 가지고, 전쟁에 격문을 쓰고 남는 여가를 이용하여, 원유 편(遠遊 篇)을 더 지어 보네.” 하였다.
【성지】 부거현성(富 居 縣 城) 둘레가 2천 7백 31척이다. ○ 현의 서쪽 산에는 옛 무덤이 만여 개가 있고 모두 석곽(石槨)인데, 어느 시기의 것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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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것은 “반도조선(半島朝鮮)”의 지형지리(地形地理)등을 기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함경도(咸鏡道) 부령(富寧)편이다.
반도(半島)와 북방삼성(北方三省)의 접경지역은, 두만강(頭滿江)과 압록강(鴨綠江)지대이며, 이 두 하천(河川)과 경계(境界)를 나누었다. 그렇다면 “반도(半島)접경(接境)지역과 그 이북(以北)지방인 요 녕 성(遼寧省)과 흑룡강 성(黑龍江省)지방이 사막(沙漠)지대(地帶)인가?
더하여 반도(半島)이북(以北) 지방은 “대 사막(大沙漠)지대(地帶)”지대로 들어가는 입구(入口)라는 뜻인데【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참조】, 그러면 요 녕 성(遼寧省)과 흑룡강 성(黑龍江省)지방은 “대 사막(大沙漠)”지대(地帶)인가?
더하여 “석 막(石幕)”인 이곳은, “석 막(石漠)지대(地帶)”로, 이곳의 서쪽지방에는, 만여(萬餘)기의 석곽(石槨)무덤이 전해오고 있다고 하는데, 그 잔재(殘在)는 지금 존재(存在)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모든 것이 “짝퉁”으로 만들어진 것이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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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수(眉 叟) 허목(許穆)선생 연보 제2권/ 연보(年譜) / 경신년(1680, 숙종6) 선생 86세
6월 집으로 돌아오다. 부처하자는 논계가 이미 정지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시를 지어 홍 남파(洪 南 坡)가 귀양살이하는 곳으로 부치다. 【 이때 홍 우 원(洪 宇 遠)은 일찍이 가인 괘(家人 卦)를 말한 것 때문에 명천(明 川)으로 귀양 가 있었는데, 선생이 꿈에 홍공과 더불어 광막한 들판에서 놀았다. 그래서 시를 지어 부쳐 주었는데 그 시에, 】
진시황이 점 좋아해 : 秦 皇 好 卜 筮 / 주역은 태우지 않았지 : 焚 書 不 及 易 / (중략) / 가 인 괘를 경계하다가 : 眷 眷 家 人 戒 / 마침내 북쪽으로 귀양 갔네 : 竟 至 窮 北 謫 / 돌살촉 나는 석 막 남쪽 : 石 砮 石 幕 南 / 읍루의 땅 대막에 잇닿았다 : 挹 婁 連 大 漠 / 곤궁해도 마음 둘 곳 있어 : 困 不 失 所 亨 / (중략) 라고 하였다.
● 이 문장(文章)을 보아도 “석 막(石幕)은 곧 석 막(石漠)”과 같다. 『읍루(挹婁)의 땅은 대막과 잇닿았다는 말은 “읍루의 땅과 대 사막(沙漠)은 연이어져 있다(連)”』라는 뜻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읍루(挹婁)는 곧 숙신(肅愼)으로 동북(東北)지대(地帶)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위의 조선(朝鮮)의 학자(學者)이며, 대신(大臣)을 역임한 분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읍루(挹婁)는 곧 대막과 잇닿아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이래서 사학(死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를 철저(徹底)하게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자(者)들이 꾸며 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위의 몇 가지 글만 가지고는 못 믿겠다.” 하신다면 또 아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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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조보감 제7권 / 세종 조 3 / 19년(정사, 1437)
태조(太祖)는 하늘이 내신 성무(聖 武)로 북방에서 일어나시어 대동(大東)을 소유한 다음,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동북으로는 두만강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공주(孔 州)ㆍ경성(鏡城)ㆍ길주(吉 州)ㆍ단천(端川)ㆍ북청(北靑)ㆍ홍원(洪 原)ㆍ함 주(咸州) 의 일곱 고을을 두었으니, 실로 동방이 개국한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성대한 왕업이었습니다. (중략). 그 뒤에 이 의론이 다시 제기되어 시끄러움이 계속되자, 이에 신으로 하여금 가서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석 막(石幕)에다 영 북 진(寧 北 鎭)을 더 설치하여 국경을 정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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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산시문집 제12권/ 서(序) / 부령도호부사(富寧都護府使)로 부임하는 이 종영(李 鍾 英)을 전송하는 서
백성을 다스리는 이는 네 가지 두려워할 것이 있으니,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위로는 대간(臺諫)을 두려워하고 더 위로는 조정을 두려워하고 더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목민관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상 대간과 조정뿐이고, 백성과 하늘은 때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략). 부령은 본디 북옥저(北沃沮)의 땅으로 한 무제(漢 武帝) 때에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하였고, 고구려 태무신왕(太 武 神 王)이 이를 취하여 자기 땅으로 삼았으며【富寧本北沃沮之地.漢武帝時屬玄蒐郡.高句麗太武神王取爲己地.】, (중략). 우리 조선 초기에는 태조께서 영토를 개척하여 공주(孔 州)ㆍ경성(鏡城) 등 7군을 두었는데, 부령은 경성군에 속하여 석 막(石幕)의 땅으로 일컬어졌다. 【我國之初.太祖拓地.置孔鏡等七郡.富寧屬鏡城郡.稱石幕之地】 (중략). 영릉(英陵 세종의 능, 즉 세종을 가리킴) 때에는 김종서(金宗瑞)가 ‘간 목 하’ 연변을 개척하여 비로소 석 막의 옛 땅에 영 북 진(寧 北 鎭)을 두었다. 【英陵之時.金宗瑞開拓河壖.始置寧北鎭於石幕故地】 (중략).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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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언 제30권 원집 잡 편 / 변새(邊塞)
태조 7년(1398), ‘알 목 하(斡木河)’는 사실상 이 나라 왕업(王業)의 기틀을 이룩한 곳이라 하여 ‘경원 부(慶源 府)’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여진(女眞)의 침략을 받았다. 태종(太宗) 9년(1409)에 부(府)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여진이 또다시 침략해 오므로 그곳 백성들을 경성(鏡城)으로 이주(移住)시켜 그 땅을 비워 두고 부(府)를 ‘부거(富 居)’로 옮겼으며, 석 막(石幕)에다 영 북 진(寧 北 鎭)을 증설하여 거기에서 ‘알 목 하’를 방어하였다. 뒤에 ‘동맹가첩목아(童 孟 哥 帖木兒)’가 이곳을 점거하였는데, ‘올 적 합(兀狄哈)’이 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太祖七年.斡木河.實國祖王跡所基.置慶源府.後爲女眞所侵.太宗九年.移府於蘇多老.明年.女眞復入寇.徙其民於鏡城.虛其地.又移府於富居.增置寧北鎭於石幕.以爲塞.斡木河.後爲童孟哥帖木兒所據.兀狄哈擊滅之.】 (중략). ‘알 목 하’는 두만강 남쪽의 오랑캐 말이며 ‘오 음 회(吾 音 會)’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회령 부(會寧府)’이다. 횟 가ㆍ백안수소ㆍ소다로는 옛 공주의 땅이며, 횟 가는 지금의 경원부인데 경원의 고적으로 소다로의 옛 영지(營 地)가 있다. 석 막과 부거는 옛 부령군(富 寧 郡)으로 석 막이라 부르며 지금의 부령부이다. 용성은 옛 경주(鏡 州)의 북쪽 경계였으며 영 북 진은 지금의 경성부(鏡城 府)이다.【斡木河.直豆滿江南.胡語斡木河.亦曰吾音會.今會寧府.會叱家,伯顏愁所,蘇多老.古孔州之地.而會叱家.今慶源府.慶源古跡.有蘇多老古營之地.石幕,富居.富寧古郡名.石幕.今富寧府.龍城.古鏡州北境.寧北鎭.今鏡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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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려실기술 제3권 / 세종 조 고사 본말(世宗祖故事本末) 육진(六鎭)의 개척
처음 고려 때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쫓고 성채(城砦)를 설치하여 ‘공 험 진’ 내 방어 소(公 險 鎭 內 防 禦 所)를 만들었으니 혹은 공주(孔 州) 곧 지금의 경흥(慶興)이다. 라하고 또는 광주(匡 州) 《여지 승 람(輿 地 勝 覽)》에는 뒷사람이 땅을 파다가 동인(銅印)을 얻었는데 그 인문(印文)에 광주방어지인(匡 州 防 禦 之 印)이라 하였다. 라 하였다. (중략).
○ 16년 (중략). 이해에 석 막(石幕) 옛 경성(鏡城)경계에 있으니 곧 지금의 부령 부(富 寧 府)이다. 영 북 진(寧 北 鎭)을 백안수소(伯 顔 愁 所) 곧 지금의 행영(行營)이니 종성(鍾城) 경계에 있다. 에 옮기고 종성군(鍾城 郡)이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알 목하(斡木河)가 서북으로 적의 요충 지대에 있고 또 알 타 리의 남은 종족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하여 특별히 성과 보루를 베풀고 영 북진 절제사(寧 北 鎭 節 制 使)로 하여금 겸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땅이 진(鎭)에서 거리가 멀어 성원(聲援)할 길이 너무 떨어졌으므로 이해 여름에 따로 알 목하(斡木河)에 진을 두고 회령 부(會寧府)라 이름 하였다.《여 지 승 람 합 록(輿 地 勝 覽 合 錄)》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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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중종실록 59권 22년 《신이 또 보면, 평안도(平 安 道)와 영안도(永 安 道) 지방은 사막(沙漠) 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인물(人物)이 쇠잔한데도 오히려 이엄(耳掩)을 만든 털과 몸을 따스하게 하는 모물(毛物)을 수없이 구색하여 끝없이 징 렴(徵 斂)하고 있습니다. : 臣 又 觀, 平 安, 永 安, 地 濱 沙 漠, 人 物 凋 殘, 猶 以 掩 耳 之 毛; 溫 身 之 物, 求 索 如 林; 徵 斂 無 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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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막(石漠)=석 막(石幕)에 대하여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와 조선사(朝鮮史)로 분류(分類)할 수 있는 (1) 부터 (7) 까지 대표적(代表的)인 것들을 알아보았다.
여기에서 중요(重要)한 것은, 『석 막(石漠)은 석 막(石幕)이며, 이는 곧 대막(大漠)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며, 이러한 특이지형(特異地形)이 존재(存在)하고 있는 곳은, 『대륙(大陸)의 고비사막(沙漠)으로부터 그 서쪽지방인 알타이산맥(山脈) 너머, 신강 성(新疆省)지방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이다.』라는 사실(事實)이다.
○ 결국 조선사(朝鮮史)에 등장(登場)하는 “석 막(石幕)”이란 말은 “대막(大漠)지대(地帶)”를 말하는 것이며, 『이곳은 함경도(咸鏡道) 부령(富寧)도호부(都護府) 및 회령(會寧)도호부(都護府) 주변(周邊)이며, 또한 그 이북(以北)지방은, 읍루(挹婁)의 땅이었으며, 이곳은 “대막(大漠)의 땅”이다.』라는 사실이다.
○ 이렇게 하나하나 조선사를 풀어나가는데, 특히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말하고 있는 곳은, 바로 “조선(朝鮮)의 지형지리(地形地理)를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2013년 05월 13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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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석막[石幕], 함경도의 부령[富寧]은, 조선 대신들의 기록과 조선사에 짧게 나타나는 기록들이 정확히 맞는 것입니다. 아직도 식민사관에 그 혜안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음을 , 탓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 현 카자흐스탄의 중북부지역으로 올라가면서, 조선사의 기록과 문집, 연행록들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과 유물, 지리, 지형, 지세, 환경 등 많은 부분이 존재하고 일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하북성, 유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랴. 이곳에는 반은 사막이요, 반은 초원의 환경이며, 석막 [石幕]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암석으로 된 산과 능선들이 아득한 대야에 우뚝,우뚝 산재하고 있습니다.
길이 오랑캐의 모래밭 하늘 길 끝간데로 들어가는데......... 박맹지의 시는 아주 적절한 표현 입니다. 그 누가 고구려, 발해를 지금의 동북 삼성에 있다고 하였는가 ? 조선사의 진실은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음을, 이제 그 진실의 깊은 잠을 깨우고, 광명의 밝은 길로 나아가야 할것입니다. 육도[六韜]에 이르기를, 근원이 깊으면 물이 흐르고 물이 흐르면 어[魚]류가 노는 것은 정[情]이다. 문무 선생님 항상 강건 하십시요.
정말 그런 곳이 실재한다고 하니 가슴이 뜁니다.
사실 현장답사라는 것을 하지 못한 저로써는, 여러 종류의 역사서를 보면서 그 공통점과 공통적 지리적 위치를 찾아내어, 이것을 조선사의 것과 비교를 해 보곤 합니다. 인접국과 종족, 인종, 방향, 지리적 위치등을 중요하게 보고 있거든요. 결국 조선의 서쪽과 서북 변방은 중앙아세아지방이며, 이곳에 그 유물유적이나 지리적 환경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며, 놀라운 일입니다. 역사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며, 다만 원전 기록을 어떻게 번역 해설하는냐일 것입니다. 그것은 지리적 위치와 인접국, 종족, 인종등과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지요.
<환국고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원전에 대한 번역과 해설은, 지리적 위치, 방향, 특이지형, 기후, 인접나라나 또는 종족등과 인종등과 함께 검토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구글어쓰로 보아도 고비 서쪽부터 카자흐스탄까지 거뮈튀튀한 바위와 자갈마당. 사막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사막과 자갈마당은 대해(大海)의 변두리에서 나탄는 지형이지요. 지금 북경성에 있는 인공호인 북해와 중남해의
원본인 어마어마하게 거대한(great=巨大)한 북해와 중.남해가 불과 몇 백년 전까지 실재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