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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우주 백뱅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부모님이 나를 낳아 주시기 전에 내가 지니고 있는 참 본성”이란 뜻이다.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부모의 유전자와 상관없이 내가 지진 본성, 인간이 지니는 본성,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순수한 마음을 말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부모의 유전자에 의한 ‘본능(本能)’이라는 오염된 인자를 가지고 이 세장에 태어난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그런 본능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양, 귀에 들어오는 소리, 코로 들어오는 냄새, 입으로 들어오는 맛, 몸의 느낌으로 들어오는 촉감, 이들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인식하는데, 그 들어오는 것을 한 점의 가감도 없이, 전혀 선입견 없이 들어오는 그대로,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하게 인식하는 그 주인공을 말한다.
선불교에서는 이상형의 인간상을 ‘참사람’ ‘참나’ 혹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한다. 참사람은 번뇌라고는 조금도 없는, 전혀 때 묻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데, 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사람, 곧 부처님이 그런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자연인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유전자에 의한 본능(本能)이라는 때가 묻어서 나온다. 그러니 자연인이란 갓 태어난 어린아이조차도 때가 묻어있으니, 선불교에서 이상으로 생각하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참사람은 자연인으로 태어난 후, 수행 정진을 해서 해탈한 사람이라야 한다. 부처님이 그런 사람이다.
수행을 하지 않고, 자연인 상태에서는 부모로부터 갓 태어난 갓난아기조차 참사람일 수는 없다. 그런데 해탈한 참사람을 쉽게 볼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는 상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해탈하면 그런 상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참사람이 현실에서 구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자연인도 참선 수행을 통해 해탈하면, ― 성불하면, 참사람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함이 선불교가 지향하는 목표요, 이상이요, 선불교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선불교의 정체성이다.
그런 참사람이 지닌 본래면목에서는 그 어떤 차별과 구별이 없다. 그래서 본래면목은 법성(法性), 본성(本性),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선불교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시심마(是甚磨) ― ‘나’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나’의 참모습(본래면목)은 어떤 것인가를 묻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나’가 참으로 ‘나’이다. 시공간 이전, 육체라는 형상을 갖기 이전의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다.
‘나’라는 이 육체에는 이미 부모라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온갖 수작이 다 포함돼서 형성된 것이므로 그 이전의 ‘나’를 말한다.
애초에 이름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데 인간이 온갖 생각을 일으켜 이름이 없던 ‘그것’에 별의별 이름을 붙여 ‘그것’을 규정해버린다. ‘본래면목’이란 이런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이름이 있기 이전, ‘무엇이라’ 규정되기 이전, 천연 그대로의 ‘그것’이다. ‘그것’을 선문에서는 본심, 본성, 불심, 불성, 혹은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분소식(本分消息), 주인공(主人公),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도 한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은 현재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지를 나타낸 말인데, 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니고 있는 때 묻지 않은 성품, 어떠한 미혹도 번뇌도 없는 부처의 경지를 말한다.
천연 그대로여서 조금도 인위적인 조작이 섞이지 않는 진실한 모습, 그러니 본래면목이다.
그리고 본분소식(本分消息)이라 했을 때, 일반적으로 ‘소식’은 서로의 안부(安否)나 어떤 상황 따위를 알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문에서는 그와 다르게 쓰인다.
‘소식(消息)’이라는 말은 원래 호흡과 관련이 깊다. 식(息)이 그렇다. 내쉬는 숨, 날숨은 호(呼)다. 들이마시는 숨, 들숨은 흡(吸)이다. 내쉬면서 들이마시는 게 호흡(呼吸)이다. 이 한 차례의 호흡을 식(息)이라고 한다. 그리고 소(消)라는 글자는 사라짐을 뜻한다. 그래서 소멸(消滅)이라 하고, 음식을 소화(消化)한다고 한다.
둘을 합치면 소식(消息)이다. 원래의 뜻은 ‘사라짐과 생겨남’이다. ‘살아서 숨 쉬는 것과 죽어서 사라지는 것’, 즉 생(生)과 사(死)라는 뜻이다.
생과 사는 인간의 원초적 모습니다. 따라서 본분소식은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원초적 모습, 본래면목과 같은 말이다.
죽음은 육체란 형상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그러나 본래면목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거나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형상하고는 상관이 없는 ‘나’, 어떤 사건하고도 상관이 없는 ‘나’, 그 게 진짜 ‘나’이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라는 화두는 백장(百丈懷海, 749~814) 선사의 제자인 위산(潙山靈祐, 771~853) 선사가 사제 향엄(香嚴智閑, ?~898) 스님에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런데 향엄 스님은 이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그가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고, 그가 가지고 다니는 모든 책을 뒤져봤으나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향엄 스님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책을 불태워버린 후, 위산 선사를 다시 찾아가서 그에 대한 답을 가르쳐 줄 것을 몇 번이고 부탁했다. 그럼에도 위산 선사는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몹시 불친절하고 매몰차게 거절했다. 스스로 찾아보라고 한 것이다.
이후, 이 문제의 답을 찾다가 지친 향엄 스님은 이럴 바에는 차라리 환속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했다. 환속하기로 결심을 하고 마당에서 풀을 메다가 주은 기왓장 조각을 멀리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부딪치면서 '딱'하는 소리가 났다. 그 '딱'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확철대오 해서 그 문제가 해결이 됐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라는 화두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각(覺)은 ‘아(我)’가 사라질 때에만 가능하다. 즉, 개체적(個體的) 인식 이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개체를 ‘나(我)’라고 착각하는 순간 개체의식에 속아, 모든 것을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시비 분별하는 개체 의식구조 때문에 진리의 전체성을 바로 보지 못한다. 결국 무아가 돼야 전체를 볼 수 있으며, 우주와 하나가 되며, 진리와 하나가 되며, 생로병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은 부모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 이미 있었는데 누가 주고받을 수 있단 말인가.
지배하는 자도 없고 속박하는 자도 없다. 그러나 속된 인간은 오직 한 생각 일으켜서 스스로 온갖 시비장단 분별을 하고 업장을 짓고 그 안에 갇혀 세세생생을 윤회하느라 본래면목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을 찾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내던지고 무아(無我)로 흐르는 물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천하를 유행(遊行)하는 수행자를 일러 운수납자(雲水衲子)라 부른다.
남루한 누더기에 걸망 하나가 전 재산이어서 버리려 해도 버릴 것이 없고, 가지려 해도 가질 것이 없으며, 가고 싶어도 갈 곳도 없는, 오도(悟道)의 세계를 향한 지극히 고독한 나그네가 구도수행자다.
가령, 이렇게 도(道)를 구하는 구도수행자(求道修行者)가 산길을 가다가 사나운 짐승에 쫓겨 도망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나아 갈 곳이 없는 천 길 낭떠러지 벼랑에 이르렀다.
뒤로는 사나운 짐승이 다가오고 앞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 벼랑에 처해져 있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다. 자 이때를 당해 과연 어떻게 해서 살아 날 것인가?
상식과 지식의 범주로 분별로 해석하려 든다면 사구백비(四句百非)에 걸려들 뿐이다. 그러니 생생하게 살아있는 참다운 자기의 소리 한 마디를 일러라!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 진일보 할 곳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이 화두가 지닌 의미이다.
선(禪)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전혀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외면의 무엇에 이끌려 물결이 일게 되면 향상일로(向上一路)에서 벗어나고 만다. 문의 근원을 쫓아 일시에 문틀을 부셔야 한다.
즉, 안이든 밖이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사물에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된다고 중국 당나라 시대의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가 말했다. 선(禪)은 오직 경험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진정한 나의 소리, 나의 참모습, 나의 본래면목은 직접 경험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엄요삼촌설(噞搖三寸舌)에 불과할 뿐이다. 직접 경험한 것만이 절대적 본질요소인 견성(見性)이다.
선의 경험은 오직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향상일로(向上一路)에서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의 사생결단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허긴 이런 설명초자도 다 허망한 ‘귀신 굴’의 소리다.
※엄요삼촌설(噞搖三寸舌)---‘요망하게 움직이는 세 치 혀’라는 말임.
우리의 육신은 부모로부터 비롯됐다. 부모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찌 될까?
아마도 지⋅수⋅화⋅풍(地水火風-四大)이 모였다 흩어짐이라고 할까?
이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본래 없는 곳에서 왔지, 있는 곳에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 본래 마음에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다. 생로병사도 없다. 상주불멸로 여여하다. 인연 따라 경계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보인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가 행자 시절 지은 게송이 아래와 같았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역비대(明鏡亦非台) - 밝은 거울 역시 있을 수 없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일까.
오조 홍인(弘忍, 601~674) 선사는 벽에 붙은 이 탁월한 게송을 본 순간 혜능(慧能)의 것임을 직감하고, 새벽 3시에 그를 자기 방에 오게 해 가사와 발우를 전하면서 이제부터 혜능이 육조(六祖)임을 말해주고 남방으로 떠나도록 했다.
한편 다음날 뒤늦게 이 소식을 알게 된 수백 명의 제자들은 혜능을 쫓아와 전법의 지표인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했다. 혜능의 육조 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 중에 무인(武人) 출신의 혜명(慧明)이라는 행자가 발이 빨라 제일 먼저 쫓아와서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의발을 거기 내려놓으라고 소리쳤다. 이에 혜능은 진리는 무력으로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한 나머지 의발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몸을 피했다.
혜명이 달려와서 의발을 가지려했으나 의발이 바위에 붙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놀란 혜명은 마음을 고쳐먹고 절을 하면서 말했다.
“행자님, 저는 의발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행자께서는 저를 위해 법을 설해주옵소서.”라고 했다.
이에 나타난 혜능은 혜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도 생각 하지 말고 악도 생각 하지 말라 -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바로 이럴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참모습인가.”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선악이라는 상대적 인식을 초월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상대적 인식이란 모든 것을 시(是)와 비(非), 선(善)과 악(惡), 좌(左)와 우(右)라고 하는 것처럼 대립적으로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곧 어느 한쪽을 취하고 다른 한쪽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런 두 가지 대립에서 미혹(迷惑)이 생긴다고 본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이런 상대적인 인식을 초월해서 절대적인 인식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상대적 대립을 초월할 것을 강조하는 말이, 곧 ‘불사선 불사악’이다.
같은 말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혹은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이라는 말도 있다.
망상이나 분별심이 있기 때문에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한 자기, 즉 본래면목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망상이나 분별심으로 덮인 구름을 없애면 마음의 밝은 거울(明鐘)인 본래면목이 저절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상대적 인식을 없애는 ‘불사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에 투철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그렇게 할 때 '본래면목'은 그 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혜명은 이 말이 떨어지지 마자 홀연히 묵묵히 계합해서 크게 깨달아, 드디어 절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 차고 뜨거운지 아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오조 문하에서 30년을 공부했으나 오늘에야 비로소 과거의 잘못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비록 장군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오조 홍인 선사 밑에서 30여년 수행을 닦은 몸이라 앞뒤가 막힌 인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초 혜명은 가사와 발우를 탈취할 목적으로 달려왔으나 바위 위에 놓인 가사와 발우가 들리지 않자 두려운 마음에 양심이 되살아나서 법을 들으려는 마음으로 변했다.
이때 혜능이 말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은 의발을 뺏으려 했던 마음을 악이라 생각지 말고, 법을 들으려 한 마음을 선이라고도 생각지 말고, ― 방금 악과 선 사이에 오락가락한 마음을 떠나서, 전혀 물들지 않은 혜명의 본심이 뭐냐 하는 것이다. 곧 바로 혜명의 본심을 찌른 직지인심(直指人心)의 현장이다.
당사자 혜명이 뼈저리게 받아들일 정확하고 비수 같은 이 말이 후대 조사들 문답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꼼짝 못하고 혜명은 넙죽 절하며, 스스로 혜능의 제자가 돼, 진정한 불문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미생전도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하는 말을 빌어서 상대적 인식이나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지, 나를 낳아준 부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도 같은 말이다. 흔히 말하는 하늘과 땅이라는 말을 빌어서 일체 모든 의미의 상대적 인식이 생기기 이전의 절대적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설사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할지라도 사변적 이론에 그쳐버린다면 중생들의 삶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
아무리 정밀한 이론과 논리를 지닌 말이라 할지라도 우리 일상의 삶에 투영돼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데 활용되지 못한다면 사구(死句)가 되고 만다.
흔히 선구(禪句)는 칼에 비유된다. 올바르게 해석해서 바르게 활용하면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活人劍)이 되고, 그릇 해석해서 잘못 쓰게 되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도(殺人刀)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구는 야누수의 얼굴같이 양면을 지니고 있다.
혜능이 말한 이 말이 자신의 진면목을 참구하는데 쓰는 화두로써 끝나버린다면 중국 선불교의 가치를 반감시키는 동시에 혜능의 깊은 깨달음의 경지를 피상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다시 말하면, 머리만이 아니고 손발이 함께해야 하며 출세간만이 아니고 세간도 함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의 무대가 행동하는 현실이 될 때 온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곧 세간에 있으면서 세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래서 혜능은 선도 악도 생각지 아니하며 자재해서 걸림이 없는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말의 경허(鏡虛, 1849~1912) 선사 제자 중에서도 뛰어난 식견을 지녔기로 유명한 만공(滿空, 1871~1946) 선사가 있었다.
하루는 만공 선사께서 제자들을 향해 결제 법문을 하실 때의 일이다.
결제하는 장소인 법당에 어떤 어린이가 기웃하면서 아장아장 걸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만공 스님이 물었다.
“너 몇 살이냐?”
“다섯 살이에요.”
“다섯 살 전에는?”
“네 살.”
“네 살 전에는?”
“세 살.”
이렇게 묻다가 “한 살 전에는?” 하고 물으니까 어린이가 대답을 못했다.
갑자기 만공 스님께서, “이번 결제 법문은 이것으로 마치노라.” 하셨다. 그 답은 어린이가 아닌 제자들이 하라는 말이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바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공안을 던지신 것이다.
부모가 태어나기 전 나의 모습은?
부모님 없이 나 자신이 있을 수 있을까?
부모님이 안 계신다면 ‘나’는 아예 존재 자체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런 상식적인 과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 이전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불교에서의 본래면목은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 또는 진실한 모습이나 ‘참 나’, 인간 누구나 지니고 있는 불성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부모는 나를 낳으신 부모가 아니고 천지 즉 우주를 말한다.
우주가 생기기전부터, 즉 아무것도 없는 절대 무의 경지, 먼지도 없는 허공, 다시 말해서 시공도 유무와 생사도 없는 절대의 경지 ‘공(空)’을 말한다. 그런 곳에 있는 때 묻지 않은 참나가 본래면목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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