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我 / 김성철 교수 교리 해설(1)
‘불교’라고 할 때 떠오르는 교리는 무엇일까? 삼매, 윤회, 해탈, 업, 과보 …. 이슬람교나 기독교와 같은 서양의 종교와 비교할 때에는 이런 가르침들이 불교의 특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 종교 안에서 보면 이는 불교에만 있는 교리가 아니다. 힌두교든 자이나교든 인도 종교는 거의 모두 삼매를 훈련하고, 해탈을 추구하며, 업과 과보의 이치를 가르치고, 윤회를 당연시한다. 이들은 인도 종교 전체가 공유하는 교리들이다. 불교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이런 교리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여타의 인도종교들과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인도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어떤 종교나 사상, 철학에서도 전혀 볼 수 없는 불교 특유의 가르침이 있다. 바로 무아(無我)의 가르침이다. 윤회와 해탈, 업과 과보, 번뇌와 수행에 대한 불교의 이론들은 모두 무아의 가르침과 얽혀 있다. 무아란 문자 그대로 “내가 없다.”는 뜻인데 산스끄리뜨 원어는 안아뜨만(anātman)으로 ‘안(an)’은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이고 ‘아뜨만(ātman)’은 ‘자아’ 또는 ‘실체’를 의미한다. 안아뜨만을 무아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다.”라는 의미에서 비아(非我) 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초기불전을 보면 무아를 가르칠 때 으레 등장하는 정형구가 있다. 우리의 심신을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생각(意)’의 여섯으로 나눈 후 그 어디에도 자아가 없다는 점을 역설하는 다음과 같은 경구다. “눈(眼)은 내가 아니다(非我). 눈과 별도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非異我). 눈 속에 내가 있거나 내 속에 눈이 있는 것이 아니다(不相在).” …… “몸(身)은 내가 아니다. 몸과 별도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몸속에 내가 있거나 내 속에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意)은 내가 아니다. 생각과 별도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속에 내가 있거나 내 속에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통찰이 완성되면 눈이나 귀, 코, 혀, 몸, 생각의 여섯 가지 가운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나’라든지 ‘나에게 속한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게 되고 번뇌가 사라져서 열반을 얻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이제 나의 삶은 모두 끝났다(我生已盡,아생기진). 고결하게 살았고(梵行已立,범행기립) 할 일을 마쳤으니(所作已作,소작기작) 다음 생을 받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아노라(自知不受後有,자지불수후유).” 이를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부른다.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자각’이다. ‘탐욕, 분노, 우치, 교만 등의 번뇌가 사라졌다는 자각’이다.
번뇌가 사라지면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세상에 맺힌 한(恨)이 모두 풀렸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도 세상에 대해서 미련이 없고 지적(知的)으로도 미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뇌의 뿌리를 모두 뽑아버린 수행자를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아라한은 죽은 후 적멸에 든다. 열반이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깨달음에 이르는 출발점이다. 무아는 도그마가 아니다. 사상이 아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얻어지는 조망이다. 누구나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생명의 진상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으며,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아야 “내가 존재한다.”거나 “자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니 단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다. 단 하나도 불변인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 그래서 ‘무아’인 것이다.
만일 자아가 있다면 내 몸 가운데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몸은 근육, 피부, 신경, 뼈, 위장, 간, 심장, 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현대과학의 발달로 이들 모든 장기와 기관들이 1년이 못 되어 완전히 쇄신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방사성동위원소로 표식을 한 음식물을 이용하여 추적해 보니 근육이나 피부는 한 달이면 완전히 바뀌고 ‘위장 벽’은 5일 정도, 뼈는 6개월이 지나면 새로 섭취한 음식물의 성분으로 대체된다고 한다. 흔히 뇌세포는 한 번 파괴되면 재생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대개는 그렇다. 그러나 이는 세포차원의 일이다. 원자와 분자 차원에서는 뇌 역시 계속 쇄신된다. 뇌가 완전히 대체되는 데 1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1년 전의 내 몸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내 몸은 1년 이내에 섭취한 음식물들이 변한 것이다. 1년 전의 내 손톱이나 머리칼이 모두 깎여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듯이 1년 전의 내 눈, 귀, 코, 혀, 몸, 심장, 창자, 뇌, 뼈, 근육, 피부 모두 노폐물로 변하여 모두 배출되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지어진 것은 모두 무상하다. 그 떤 것도 ‘영원한 나’일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몸이 내가 아니고, 몸 어디에도 내가 없다는 점이 확실하기에 몸과는 다르게 영혼과 같은 별도의 ‘진정한 나’가 존재한다 생각할 수 있다. 또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에 기억이 새겨지는 ‘불변의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세친(世親)이 저술한 <구사론>의 「파집아품(破執我品)」에서 논적은 ‘옛 일을 회상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면서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논적은 묻는다. “만일 자아는 없고 모든 것이 한 찰나만 존재한다면 예전에 경험했던 것을 회상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에 대해서 세친 (世親) 은 “회상이란 예전과 똑같은 조건 속에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다.”라고 대답한다. 불변의 자아가 있어서 자아에 새겨진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체험했던 것과 동일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기억’이라든지 ‘회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뿐이다. 과거의 기억을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 각인했다가 회상을 통해서 꺼내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고 나중에 그것을 회상하는 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기억도 무상하고 회상도 무상하다. 무상한 흐름 속에 일어나는 과정이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 그 어디를 뒤져봐도 불변의 자아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부단히 흘러가는 심신 현상의 흐름일 뿐이다. 이를 자각할 때 ‘내’가 증발하기에 나를 향해 당기는 마음인 탐욕이나, 나로부터 밀치는 마음인 분노 역시 사라진다. 구심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탐, 진, 치 삼독의 뿌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이다. 무아를 모르는 치심(癡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아를 이해할 때 명심할 점이 있다. 무아가 “내가 아예 없다.”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인 이쪽에서 체험되는 심신의 흐름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인 이쪽에서 일어나는 심신의 흐름을 ‘자상속(自相續)’이라고 부르고, ‘남’인 저쪽에서 일어나는 심신(心身)의 흐름을은 ‘타상속(他相續)’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보자. 갈대밭에 불이 났을 때 이곳저곳으로 불길이 이동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엄밀히 보면 매 순간 새로운 갈대를 태우며 불길이 번진다. 이때 “불길의 흐름이 아예 없다.”고 해도 옳지 않고 “이곳의 불길과 저곳의 불길이 동일하다.”고 해도 옳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매 순간 변화하는 심신의 흐름 속에 ‘불변 주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無我)인 것이지 그런 흐름조차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불길과 저 불길이 다르듯이 나의 심신의 흐름과 남의 심신의 흐름은 엄연히 다르다. ‘불변의 나’는 없지만 ‘자상속(自相續)의 흐름’은 있고, ‘불변의 남’은 없지만 ‘타상속(他相續)의 흐름’은 있다. 행위자는 없지만 행위는 있어서 제각각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윤회의 파노라마를 엮어낸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교수
월간 <불광> 2012년 1월호 / 불교, 쉽고 명쾌하고 행복하게
[출처] 無我 / 김성철 교수 교리 해설(1)|작성자 수처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