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언니, 안갔지?
안갔어.
언니, 아직 거기 있지?
응.
언니, 지금도 달 떠 있어?
응.
언니,
응.
시방도 거기 있지?
안 갈게 걱정 마. 빨리 응가나 해.
알았어.
우리 언니
달맞이꽃. ㅡ 김용택 ㅡ
수구초심이라~
여우도 그렇다는데, 사람인 난 오죽했을까 동무들.
내가 뛰어놀던 山河, 어루만지고 다녔던 들판, 구불구불 골목길을 언젠가 기필코 걷고 싶었어.
특히, 학교 가던 길, 예배당 가던 길.
8월은 태양이 너무 잔인했던고로,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택했지.
내가 중2때 군산을 떠나 왔고, 부모님 고향이 예가 아니며, 이곳에 일가친척 아무도 없으니, 군산은 이미 예전에 타향이 되어 버렸어. 그러나, 늘 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군산. 이곳을 언젠가는 내가 샅샅이 이잡듯 뒤지고 가리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변해도 네번은 변했을 고향. 기억 저편 한가닥 추억의 실마리라도 잡히기를 고대하며, 더 이상 그리워만 하지 말고 떠나는 거야 과감히 결단을 내렸지.
나 김성혜는 한다면 한다 이거야 출발! go go!
채만식 문학관~이영춘 가옥~역사 박물관~옛날 세관~동국사~해망굴~월명공원 어쩌구 저쩌구...
여기까진 남편과 동행했지. 진짜 추억이 깃든 곳은 지금부터야. 디테일한 부분은 오히려 자기가 방해 될거라며 남편은 월명공원 밑에서 책보다 자다 하겠다고.. 실컷 음미하고 오랬지. 고마운지고.
아싸~ 자유의 몸으로 군산여중(지금은 여고)부터! 둥근 제일 국민학교, 중앙 여중, 백화수복인가 뭔가 술 만드는 공장 같은 게 있었는데, 없어졌지 뭐야. 자가용이 없던 시절, 대저택 앞에 까만 그랜져같은 자가용이 있던 집이 있었어. 차에서 부티나는 소녀들이 팝콘 튀어 나오듯 튀어 나오곤 했었지. 회색 담장이 꽤 길었던 집. 항상 지나 다니며 저 집은 뭐 하는 집일까 궁금했었어. 음~ 일본 지주 히로쓰가 살던 집이었고, 70년대엔 호남제분 사장이 살았다고 해. 그러니까 그 소녀들은 호남제분 사장님의 딸들이었던 거겠지. 담장은 붉은 빛으로 변했고, 지금 보니 그다지 길지도 않았어.
나의 모교 군산 여중. 키작은 소나무 행렬, 등나무, 배롱나무, 대숲이 여전했어. 거창고등학교라고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 학교 남자 기숙사(아들이 이 학교 다녔음)에서 보았던 괴기스런 나무들이 운동장에 즐비하더군.(그로테스크한 인상을 풍기는 그 나무 이름 아는 사람?) 옛날 교문(지금 교문말고) 옆으로 오르락 내리락 산길을 걷다 보면 해망동이 나오고, 뚝길이 나오며, 해성2구가 나왔었지. 하교길에 뚝길에 앉아 신춘화랑 삐리 엄청 뽑아 먹었었어. 그것만 먹었나? 어느날은 마미 로션을 몰래 가져와, 그 뚝길에 앉아 바다 쳐다 보며 로션 냄새에 취했지. 넘 냄새(레몬향)가 황홀해 입에 톡톡 털어 넣었는데, 왜 그케 맛이 없던지... 난 그때 냄새와 맛이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어. 옛 교문 옆으로 잠깐 걸어보니, 월명공원과 그 길이 지금은 연결되는듯 했어. 월명공원에서 한번씩 백일장 했던 기억도 나. 오경령이란 애가 내 옆에서 글을 썼는데, 원고지에 '확연'이란 단어를 썼어. 집에 와 사전 찾아 보고 그때 비로소 또 '확연'이란 단어를 확연히 깨우쳤지. 버스 타고 다닐 때가 물론 더 많았지만, 춘화랑 한번씩 우쨌든 그 먼길을 왜 그렇게 걸었는지 몰라. 그런데, 그 주변. 왜 그렇게 음산, 황량, 썰렁한 거야. 서글프게시리.
명산동이라~ 음... 신자네 집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걔네 집 문패에 '김한'이라 써 있었어.아버지가 외자 이름인 거지. 난 그때 저런 희한한 이름도 다 있구나 생각했지. 김내과란 병원도 있었어. 반갑게 저~기 보였지. 근데, 그 병원이 그 병원인가? 고명성이란 애가 아파서 거기 입원했었는데... 파리하게 누워있던 걔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 봤었는데... 나도 아파서 누워 봤으면.. 병문안도 받고, 학교도 안가고 얼마나 좋아... 그런데, 그 명성이가 몇년 전 자살을 했다 해서 얼마나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
이성당 맞은편 즈음에서 버스를 탈 때가 종종 있었지. 비행장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어느 미국 여자가 생각 나. 한여름에 아기를 품에 안았었지. 근데, 그 여자 上衣 뒤판이 어찌나 파격적으로 휙 파였는지 시뿌연 등판이 3분의2는 드러나 있었지. 얼래리 꼴래리... 그땐 촌스럽게 그케 생각했어.
세상에! 군일서점이 아직도 있었어. 거기서 얄개를 샀던 기억이... 그리고, 아저씨 몰래 책 좀 읽다, 다음 날 또 가서 좀 읽다, 며칠 뒤 또 가서 좀 읽다... 했었지.
반가워서 무작정 들어갔는데, 마침 또 소녀 때 많이 읽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눈에 뜨였어. 오메, 반가운 거. 반가운 거 천지다!! 그걸 하나 사갖고 나왔지.
경찰서가 이즈음 있었는데... 어디로 이사를 했는지 안보이고 주차장 같은 게 있었어.
군산의 명동이었던 영동을 걸었지. 가방 가게, 털실 가게, 양장점들이 있었어. 지금은 패션의 거리인 것 같아. 어머나 귀엽기도 하여라. 마치 부산 광복동 길처럼 오밀조밀 앙증맞기도 하여라.
개복동 교회를 가 봤지. 장전동 교회 다닐 때 여기로 성경 배우러 다녔던 기억이 있어. 한~참 꼭대기에 잡히지 않을듯 도도히 서 있던 교회였지. 지금은 전혀 그렇질 않았어. 넓었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어른이 되어 가보면 작게 보이는 이치 같은 거겠지.
아이고, 근데 이러다 날 새겠어. 그만 쓰고, 2탄은 다음에! 에고, 힘들다.
둘째날은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
내가 살았던 동네와 거기서 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을 고대로 걸어서 재연해 보는 거야.
아참, 해성2구를 들르기 전에 이른 아침 은적사를 방문했지.
소풍 자주 갔던 기억, 산 속의 허름한 절이었단 기억 땜에..
왠걸, 그 일대가 완전 도시화가 되어 은적사는 아무런 감흥을 일으켜 주지 않았어.
괜히 왔나? 아니야, 깨져야 할 환상은 빨빨리 깨져야 되는 거야. 은적사, 내 다시는 니 보러 안온다.
일부러 그 옛날 버스 노선을 생각하며, 이성당 앞쪽에서부터 도선장, 해망동, 원산북, 면사무소입구, 십자다리 이런 식으로 차를 몰게 했지. 춘화랑 삐리 뽑아 먹던 뚝길은 온데간데 없고, 넓은 도로가 뚫려 있었어. 외항교회로 개명한 장전동교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남편과 동네를 돌았지.
아우트라인 정도만 돌아주고, 여기저기서 사진 몇방 빵빵 터뜨려주고, 또 남편은 나에게 자유를 선사했어. 아싸~ 자유다! 난 오늘 육칠십년대로 돌아가, 시간여행을 하는 거다!
아! 장전동과 해성2구를 대여섯 바퀴 돌고, 돌고, 또 돌았나 봐. 걸으면서 내가 만약 영화감독이라면 이런 걸 소재로 영화 만들어도 되겠다 싶었어.
처음엔 많이 변해서 전혀 감이 안잡혔지. 차분히 눈감고 기억 속의 지도를 펼쳤어. 음~ 그래,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어. 공례네, 혜영이네, 인철네, 순애네, 하섭이네, 성수네 집까지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서글프게 우리 집부턴 도로로 편입이 돼 자취조차 없었어. 오씨아이란 회사가 턱 버티고 있었고, 서흥부락 이런 데가 다 없어진 것 같아. 우리 동네 앞부분과 장전동은 그래도 꽤 남아 있었어.
방앗간 앞에서 동네 애들이 전부 모여 두줄로 애향단별 등교를 했었지. 성수가 맨 앞에서 깃발 들고 걸었어. 이런 얘기 자식들에게 해주면, 신기해 하면서 전체주의 냄새가 난다고 해. 두줄로 걷다 보면, 어쩌다 한번씩 가운데 다리쯤에서 은산이라는 미친 총각이 냅다 우릴 향해 돌진해오곤 했었지. 우린 무서워 잡히지 않으려고 전속력으로 뛰었었는데, 지금도 그 공포, 불안이 생각 나. 달리기에 젬병인 난 죽을 힘을 다해 뛰는데 맘처럼 뛰어지진 않고, 무섬증은 온몸을 공포로 휩싸고.. 은산인 날 잡을듯 잡을듯 가까이 다가오고.. 땀 삐질삐질 흘리며 울며 달리던 공포.. 그 무렵 밤마다 나 엄청 가위 많이 눌렸어.
우리 집에서부터 예배당 가는 길을 드디어 고대로 걸어 봤어.
논과 논 사이의 오륙십 쎈치 폭의 좁다란 길들 알지? 잡초 무성한.
그런 길을 몇차례 구불구불 돌면, 실개천이 흐르는 돌다리가 하나 나오지.(성수는 알 거야)
어머머, 그 돌다리가 그 자리에 있는 거야. 난 비명을 질렀어. 너무 반갑고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어.
돌다리야, 실개천아, 좁디 좁은 길들아, 노란 벼들아. 내가 왔어. 성혜가 왔다구. 고마워. 이렇게 변치 않고 있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흑흑..
돌다리를 지나, 또 좁디 좁은 논길을 따라 걸으면, 드디어 연옥이네(현욱이 색시가 되었다 해서 놀랐음) 화장실이 나오지. 지금도 생각 나. 논길을 지나고 또 지나, 신발에 묻은 흙을 탁탁 털며, 연옥이네 화장실에 당도하면, 풍겨 나오던 그 구수한 변소 내음새.. 거길 지나치기만 하면 이제 드디어 예배당이야.
논길을 지나고 또 지나 연옥이네 화장실에 당도했는데.. 어머, 익숙한 그 내음새가.. 지금도 그 내음새가 고대로 향기를 뿜어대고 있는 거야. 또 한번 울컥 울음이 북받쳤어. 변소 냄새 너도 너무너무 고마워. 변치 않는 그 냄새로 날 반겨주고.. 너무너무 고마워.
예배당을 애인인 양 쓸어보고 만져보고 애무해보다가, 만감이 교차하는 나의 종교관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곤 거기서부터 학교가는 길을 또 재연했지.
개원동을 지나며 연님이네 집이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코맹맹이 소리하며 잘 웃던 연님이 생각이 났어. 미원동을 지나며 성격 좋던 형자와 미경이가 생각났고.
화장터를 지나, 아스팔트 길로 접어들며 문화동을 쳐다 보자니 그 동네에선 김갑부 선생님, 수현이, 기섭이, 기범이, 대규 이런 애들이 살았던 기억이 났어. 피아노 치고 혼자 터덜터덜 걸어오다 그 동넬 쳐다 보면, 빡빡머리 박대규가 집 툇마루에서 심심한지 뒹굴뒹굴 구르고 있었어. 걔가 그 동네 맨 앞집에 살아서 큰 길에서 직통으로 보이곤 했지. 또 이런 기억이 떠올랐어. 걸어가는 우리가 측은했던지 문창 애들을 한번씩 태워주던 버스 기사님이 있었지. 우리 운동회 때 고마운 아저씨상도 받았어. 그 버스 넘버가 5-933이었어. 아스팔트에 허구헌 날 써 있던 '김성혜 깔치는 누구누구' 이런 글귀도 생각났어. 근데, 왜 상대 남자애 이름은 생각이 안나는 지 몰라. 그 문구 볼 때마다 콱 죽고 싶었어. 자수해라! 쓴 사람. 누구야 앙?
학교 가는 길은 어른인 내가 지금 걸어도 꽤 멀더군. 어린 아이가 그 먼 길을 우째 다녔을까 싶었지. 그옛날엔 더 휑한 벌판이었을텐데.. 그래서 걷다가 심심하면 춘화랑 옥경이랑 플라타나스 열매를 가슴에 뽈록하게 집어넣고 으시대며 걸어보기도 하고, 한여름 아스팔트에서 일어나는 골탄을 신발 뒤축에 묻혀 돌맹이를 붙히고 또각또각 구둣소리내며 아가씨 흉낼 내기도 했었나 봐. 5월엔 아카시아 잎 하나씩 손가락으로 튕겨 떼어내는 놀이하며 걸었고, 코스모스 씨 받으며 걷던가, 엉겅퀴, 사루비아 꽃 따서 질겅질겅 씹거나 쪽쪽 단물 빨아 먹으며 걷던가, 볏집단에 고단한 몸 기대어 한참 바람을 피해보기도 하던가 그러면서 그 나른한 벌판을 견디고 걸었던 것 같아. 어떤 날은 가다 말고 흙바닥에 주저 앉아, 줄지어 기어 가는 개미떼 구경에 정신이 팔리기도 했었지.
해성교회에 다다르자, 선애네 집자리에 그대로 집이 있었어. 아직도 선애네 부모님이 살고 계실까. 선애네 부모님, 남동생 얼굴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선애네 마당에서 한번씩 놀았었거든. 선애 아버지가 통지표에 사흘에 한번씩 때리라고 통신문 써 보낸 걸 윤연희 쌤이 읽어준 것도 기억 나.
해성교회 안에 살았던 어떤 중학생 오빠도 생각 나. 홍삼봉 장로님 아들 해석이 오빠뻘 되었을 것 같아. 추측컨대 사찰 집사님 아들이 아니었을까 싶어. 어린 제레미 아이언스 아님 양조위 같은 분위기가 났어. 쉴새없이 우리 계집애들과 조잘대던 해석이 오빠하곤 분위기가 사뭇 달랐지. 내가 별별걸 다 기억한다 선애가 겨울에 입고 다니던 파랑색 반코트도 생각나고, 은동이가 입고 다니던 편물로 뜬 진곤색 아님 까만색 도꾸리도 생각 나.
대로변 말고 다른 쪽 교문 앞 논길을 따라 가면, 여정님이 거기 살았었어. 정님인 쪼그매도 목소린 크고 또렷했지. 어느 춘삼월 치마를 입고 등교하고 싶었어. 그런데 혼자 치마 입고 등교 하는 게 쪽 팔린다 생각했는지 난 정님일 꼬셔 내일 꼭 치마 입고 오기 약속을 했지. 그런데 고것이 고마 약속을 어기고 나 혼자 치말 입고 왔어. 챙피했지. 지금 생각함 초딩들은 별별걸 다 약속하고, 별별걸로 부끄럼을 타. 여정님, 작고 귀엽다고 내가 엄청 이뻐해 줬는데 기억하려나 몰라.
전화로 남편을 불러, 이제부턴 차로 미면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어. 거사리, 오미영이 살던 동네가 나왔어. 걔네 할아버지 회갑인가 진갑 잔치 때 윤연희쌤이 자기 대신 우리 반 애들 전부 데리고 가서 무슨 축가 불러주고 오라 했었던 기억이 나. 고경자도 이쯤에서 살지 않았을까 싶어.
고경자 언니가 그 당시 양장점엘 다녔지. 예쁜 짜투리천을 곧잘 갖다 주었어. 시대 와이셔츠 상자에 경자가 준 헝겊을 고이고이 모시고, 심심할 때면 한번씩 꺼내보며 흐뭇해 했지. 내 보물 1호였어. 지금도 눈에 선해. 보라색 바탕에 하얀 무늬가 있던 헝겊. 유난히 이뻐해주고 아꼈던 헝겊. 요새 보면 엄청 촌스러울 거야. 색깔에 대한 나의 예민함은 아마 시대 와이셔츠통속의 가지각색 헝겊 쪼가리들로부터 이미 싹을 티우고 있었는지 몰라. 남자애들은 구슬이나 딱지를 이렇게 신성시 했겠지?
바다같은 저수지가 하나 나오더군. 훗날 성수 왈 '거사리 방죽까지 수영하러 다녔다'고.
녀석, 도대체 얼마나 걸은 거야. 갸 마라톤의 기원이 아무래도 거기서부터인 것 같아. 그 저수지 경치 참 괜찮았어. 근데, 우울할 때 걸으면 안될 것 같아. 폭 빠지고 싶게 생겼어. 우리 여름 방학 끝나고 개학하면 심심찮게 물에 빠져 죽은 애들 하나씩 있지 않았었나? 김창옥쌤 아들도 익사 사고로 죽었지 아마. 그쌤의 딸 현숙인가 뭔가 걔는 무용을 잘 했던 것 같고.
그다음 옥봉이란 곳이 나오고, 비행장 입구가 나오고.. 그래, 우리 군여중 다닐 때 옥봉이란 곳에서 통학하던 애도 있었지. 이 일대엔 옥구, 옥산, 옥서, 옥봉 등 '옥'자 들어가는 지명이 많은 걸로 보아 땅이 비옥한 곳이었나 보다 혼자 추측하고 있어. 맞겠지? 에고, 배가 고파 무슨 부대 앞에선가 부대찌개 맛있게 냠냠 먹고 또 출발!
열대자를 한바퀴 돌고, 내초도 오식도를 돌고 싶었지. 오륙학년 때 이영식쌤이 반장들 모아서 오식도 학교를 방문했는데, 그때 끝없이 끝없이 모래 갯벌을 걸어 거길 갔던 기억이 있어. 왜 그렇게 그 당시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는지..
어머나, 내초도 오식도는 이제 섬이 아니었어. 무슨 산업단지처럼 되어 있었어, 내 상상을 완전 뒤엎어 버리는 가장 큰 반전이더군. 이제 보니 열대자를 통해, 물 빠질 때 내초도, 오식도로 걸어 들어갔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 봐. 새만금으로 차를 돌리며 생각했지.
나 이제 정말 소원 풀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