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곱 클리닉
창 42:29-38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절 둘째주일이다. 주현절은 빛을 주제로 한다. 빛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 빛은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찾고, 그 은총을 품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대로 빛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빛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톨레레게’를 시작한지 오늘로 18일 째다. 어느 새 창세기를 마치고 출애굽기로 들어섰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좋음’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에 공감하였는가? 그리고 죽음과 죄, 불의와 노예의식으로부터 자신을 탈출시킬 나의 출애굽을 계획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내게 주신 말씀을 품는 일은 내 삶에 적용하고, 나를 새롭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한 마디로 ‘내 삶을 고치소서’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삶을 고치고, 개선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는다. 우리 주변에 갱년기 클리닉, 우울증 클리닉, 금연 클리닉, 모발 클리닉, 치매예방 클리닉 등 무슨 무슨 클리닉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클리닉은 문제에 대한 진단, 치료 및 예방을 종합적으로 돕고 있다고 한다. 건강만이 아니다. 부부관계 개선을 위해, 분노조절장애개선을 위해, 행복한 삶을 위한 클리닉도 있다.
이런저런 이름의 클리닉이 많다는 것은 상처가 많은 사회, 불안한 사회라는 반증이다. 스스로 해결할 자체능력을 상실한 채 이모저모 한 전문가 의견을 들어야 한다. 특히 자기 인생의 행복을 스스로 연출할 능력을 잃고 산다는 것은 이미 커다란 위기 증세다. 심리학이 점점 인기를 누리는 까닭이다.
오늘 설교 제목은 ‘야곱 클리닉’이다. 우리가 창세기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야곱의 비중이 참 크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생 클리닉을 열어도 될 만큼 인생살이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다.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사기 문제, 사춘기 딸로 인한 속상함, 자식 편애 때문에 오는 가정 위기, 비정규직 이민노동자로서 안 겪어 본 일이 없다. 특히 자녀의 미래, 부부갈등, 상속문제, 갈등과 화해, 재산형성에 있어 야곱은 할 말이 많다.
그러니 인생에서 잘 안 풀리는 문제가 있다면 야곱에게 물어보라. 인생에 상처가 많은 야곱은 해법도 많다. 그는 자기 자신이 허물이 많은 사람이어서 우리의 아픔을 다 들어주고, 허물조차 이해해 줄 것 같다. 무엇보다 야곱의 장기는 ‘하나님과 관계’를 풀어 가는데 있어 특별한 진지함이다. 과연 허물이 많고, 인간적 약점 투성이인 그가 어떻게 창세기가 제시하는 모범적인 인간형의 모델이 되었을까?
1)
야곱은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해가 빠른 영리한 아우요, 억척스레 일해 온 아버지 세대이며, 근심 많은 노인이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13년 후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특히 경제정책에 뛰어났다. 애굽을 비롯해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대기근이 계속되었지만, 애굽만큼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다.
야곱의 대가족이 살던 가나안 땅에도 지독한 가뭄이 지속되었다. 이제 야곱의 아들들 10명은 곡식을 구하러 이웃 나라 애굽을 찾아간다. 거기서 총리가 된 요셉을 20여년 만에 마주치지만, 요셉은 형들 앞에서 자기를 감추고, 형들이 여전히 악한지 어떤지 그 속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 곤경에 빠뜨린다. 형들에게 정탐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막내 베냐민을 데려와 진실을 증명하기 까지, 둘째 형 시므온을 볼모로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곡식을 구해 집으로 돌아온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애굽에서 일어났던 일을 구구절절 말씀드렸다. 야곱은 자기 가족에게 닥친 시험 앞에서 펄쩍 뛴다. 야곱은 자기 가족이 겪을 시련을 생각하며 탄식한다. 야곱의 근심은 모든 아버지의 근심이요, 인간의 염려를 대표하고 있다. 우리는 야곱의 탄식을 통해 좌절한 사람의 보편적인 특징을 알 수 있다.
첫 번 째 특징은 원망이다.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
원망은 좌절심리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특징이다. 원망에는 자기반성이 없다. ‘너희가, 너희 때문에..’ 모두 남에게 탓을 돌리고, 심지어 제 운명과 팔자 그리고 하나님까지 탓하게 마련이다.
두 번 째 특징은 최악을 상상하는 것이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36).
그의 마음속에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도 미리 가정하여 절망한다. 생각해 보라. 설령 요셉이 죽었다고 치더라도 20년도 지난 일이고, 지금 시므온은 죽은 것은 아니라 감옥에 있으며, 아직 베냐민도 여전히 아버지 곁에 있다.
대개의 근심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한다. 신앙이 늘 최선을 가정한다면, 반대로 불신앙은 늘 나쁜 결과를 가정한다.
세 번 째 특징은 고집을 부린다.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38).
마음이 강퍅해 진다. 문제해결의 길을 찾기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과도 마찰한다. 남을 피곤하게 한다. 불협화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긴장을 가져온다. 결국 큰일을 가로 막는다.
인생전문가 야곱 역시 자신이 위기에 닥치자, 그 역시 혼란을 겪는다. 아직 신앙으로 극복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아직 기도하지 않은 야곱에게는, 아직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한 야곱은 그 자신 안에서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좌절한 야곱이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원망, 최악상상, 고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것들이다. 원망은 전염성이 강하다. 불신이 전염성이 훨씬 강하다. 인생의 승부사와 같은 야곱도 자식의 문제 앞에서는 자주 무너진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이렇듯 사람이 눈앞이 캄캄해 지면, 믿음의 길을 잃어버리면, 말이나 행동이 부정적이다. 사실을 왜곡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그들은 보이는 현상만을 바라볼 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무신경하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제 복을 제 입으로 까먹고 살아간다. 그들은 입만 열면 ‘재수 없다, 팔자가 사납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다가오는 복까지 다 달아나게 마련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도 재수타령, 팔자타령이라면 문제가 아닌가? 그런 사람은 야곱 클리닉 원장님을 만나보라.
2)
창세기 42장이 근심 많은 야곱에 대해 말한다면, 43장에서 야곱이 달라진다. 야곱에게 있어서 불신, 원망, 고집은 일시적이었다. 역시 그의 신앙의 연륜이, 인생의 경륜이 묻어나는 대처를 한다.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아들들의 애굽 방문을 돕는다. 인생전문가인 야곱은 자신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처음에 늙은 아버지 야곱은 몹시 두려웠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36).
이러다가 막내 베냐민을 친형 요셉처럼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고집을 부린 것이다.
그러나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애굽에서 양식을 구입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정탐꾼의 누명도 벗을 수 없고, 그렇다면 볼모로 잡힌 둘째 시므온도 풀어내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의 고민이 깊어 간다. 아버지의 역정도 높아 갔다.
그런데 문제가 풀린 열쇠가 있었다. 평생 그렇게 말썽 많은 형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나선 것이다. 큰 아들 르우벤이 장담한다.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37).
넷째 아들 유다가 호소하였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43:9).
요셉을 죽이고, 그 꿈을 무산시키려던 형들이 달라졌다. 이젠 막내 베냐민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 드디어 형들의 의지가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야곱의 원망과 근심은 조금씩 희망과 의지로 바뀌었다.
야곱 클리닉의 해법을 보라. 아들들의 설득에 산전수전 다 겪어온 야곱은 마음을 비웠다. 마지막 순간 늙은 야곱이 붙잡고, 기댄 것은 역시 하나님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과연 나는 내 문제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가? 하나님께 해결책을 구하는가? 기다릴 줄 아는 법을 배웠는가? 내가 마지막까지 기댈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든든한가?
야곱의 결론은 늘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결과 야곱은 문제를 축복으로 바꾸어 가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버지 이삭처럼 복의 전달자였다. 평생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자신의 삶의 자리를 바꾸었던 것이다.
야곱을 보라. 처음부터 위대한 족장이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보통사람 이하로 이기적인 행동, 염치없는 처신, 비뚤어진 인간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부터 하나님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그래서 생생한 현실을 비껴가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불확실한 미래의 조건 속에서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며 그 손길을 의지하며 살았다.
그래서 야곱을 가리켜 은혜의 사람(33장)이요, 축복의 사람(48-49장)이라고 부른다.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를 뜻한다. 겉모습의 변화는 문제의 해결점이 되지 못한다. 자기 암시나 구호만 빈발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해결은 겉이 아닌 속, 마음이 거듭 나는 진정한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은 곧 희망의 사람이다.
3)
마침내 아들 덕에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은 왕궁에서 애굽 왕 바로를 만난다. 그는 바로 앞에서도 당당하다. 바로와 만났을 때, 또 물러나며 축복을 하던 사람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47:7).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47:10).
그는 한마디로 축복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야곱의 축복’이란 복음성가를 잘 알고 있다.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익은 열매처럼..”
창세기의 결론 부분은 야곱의 축복이야기로 가득하다.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와 삶의 꼴이 너무나 닮았기에 위로를 준다. 탄식하는 야곱은 축복하는 야곱으로, 원망의 사람 야곱은 희망의 사람 야곱으로 바뀌었다.
오늘 야곱 클리닉을 말하는 이유는 성경적 마인드를 품으라는 의미다. 성경적 마인드는 믿음이다. 믿음의 사람은 좌절 속에서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앞일을 미리 알아내는 지혜가 아니다. 예언(預言)은 예금하듯 말씀을 맡아 두고, 관리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희망을 말하는 것은 믿는 사람이 지닌 말씀의 능력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천기를 누설할만한 지혜는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맡겨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시고, 알아주시고, 인도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희망적이다. 믿음은 언제나 긍정적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원망에서 희망으로 제 삶을 변화시킬 줄 아닌 용기있는 사람이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성경에서 배우라. ‘톨레레게’에 투자하시오. 성경은 구구절절 희망의 책이며, 하나님께 마음을 투자한 사람들의 약속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품은 우리 모두 그런 희망의 사람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