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화엄경에는 이사무애(理事無碍)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여(眞如)라는 진리의 세계에 대한 도리와 생멸하는 세속에서의 삶의 도리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며 원융무애하다는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로 믿음과 사랑의 진리를 추구하는 영적인 일을 理라 하면 교회헌법에 따라 여러 직분을 나누어 사무를 처리하는 등 살림살이를 事라고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理와 事도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원융해야만 공동체가 유지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성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理를 추구하다 보면 事를 소흘히 할 수도 있고 事에 치중하다 보면 理가 부족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럴지라도 청지기적 직분을 나누어 복음역사를 감당하는 공동체 구성원 한분 한분은 理와 事를 구분하지 않고 理를 추구하되 事처럼 하고 事를 처리하되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理로써 해야 아름다운 원융의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事는 담는 그릇이고 理는 담아지는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事를 소흘히 하여 그릇이 깨지면 공동체가 와해돼 理를 담을 수 없고 理를 소흘히 하면 담을 내용이 없으니 쓸모 없는 그릇이 되어 버려질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지극한 헌신은 理와 事가 원융하여 이루어 질 때 본인의 영적 성장이나 공동체의 성장을 더불어 이룰 수 없습니다. 청지기들 모두 理가 事를 돕고 事가 理를 돕는 헌신을 할 때 비로소 푯대를 향해 치우침 없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理와 事의 원융무애는 자기가 살아 있어 탐진치(貪嗔癡) 삼독에 물들어 있고서는 불가능 합니다. 理도 事도 모두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대로 추구하다 원하는 대로 안되면 화를 내고 원망하다 눈이 어두워져 理도 事도 모두 그르쳐 자신 뿐만 아니라 공동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독을 벗기 위한 자기부인과 십자가는 앎으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얼나로 솟나는 부단한 수행이 따라야 합니다. 이사무애의 길이 비록 힘들고 멀지라도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기어이 가야할 길입니다.
첫댓글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1-24).
저는 정의를 우선하고 싶습니다 ^^*
헷세드와 게브라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듯 정의 또한 사랑과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고 봅니다. 사랑이 결여된 정의가 폭력적일 수 있고 정의 없는 사랑은 익애 시킬 수 있으니까요.
生,亦我所欲也;義,亦我所欲也,二者不可得兼,舍生而取義者也。
생역이아소욕 의역이아소욕 이자불가득겸 사생이취의자야 (맹자 고자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