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폴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리고 김근태 의원에 대해 무얼 걱정하는지 잘 안다.
나도 한때 김근태 의원이 좀더 현실정치에 맞게 행동해야 함을 주창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지.
다시 말해 대의명분을 중요시하고 원칙을 지키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해서 성공할 확률이 적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시안적 사고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정외과를 나왔는데도 창피하게 아직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를 읽지 못해 정확히 그 책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다닐 때 읽어둘 것을 그랬지.
이제라도 기회가 되면 읽어 봐야겠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거기에 정치 기술이 담겨 있다면 내가 대학 1학년 때 배운 정치학 개론에 대충은 나왔으리라 본다.
그런데 그런 기술은 정치 학자들이나 씨부렁 거리는 것이다.
진짜 정치인은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아시아 권에 속하는 나라의 정치인은 내 생각에 오히려 삼국지를 읽고 덕치주의를 곱씹어 봄이 보다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있어 대의명분과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소인의 눈으로 보면 당장에 효과를 보지 못하니까 갑갑해 보이지만 그것이 보다 장기적인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이 김근태보다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이 당시의 대중적 인기를 끌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의 수준이 그러하다고 김근태가 자신에게도 맞지 않는 노무현식의 말과 행동을 했으면 정말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고 지금처럼 신당의 대표로 정치적 부상을 할 기회조차 없이 생명이 끊어졌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통합신당이 늦어진 이유를 민주당내 주도권 싸움으로 알고 있다. 김근태 의원의 단식은 정치적 쇼로 생각한다. 차라리 민주당 내에서 더러운 싸움을 하지 말고 처음부터 뛰쳐 나왔다면 흙탕물은 피했을 것이다.'라고?
물론 그럴 수 있지.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볼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남는 것은 명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신당 논의를 둘러싸고 시간이 지리하게 흐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고 내년 총선이 되면 지난 과거는 모두 한 순간에 지나가게 된 것일 뿐이야.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명분을 갖고 싸움을 하게 되어있다.
만약 신주류 강경파(우리는 그들을 맹동주의라고 부르지)가 초기 시도하려고 했던 것처럼 초장에 민주당을 박차고 나갔으면 아마 명분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가 없고 세력도 그나마 지금의 신당에 비해 택도 없이 왜소했을 것이다.
아직은 국민의 눈에 세력화는 국회의원의 수가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그리되었으면 신주류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개혁은 정말 물 건너 간 이야기가 되었을지 모르지.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었는지 생각해 보라.
원칙과 정의를 추구하되, 현실과 타협하라, 그리고 얄팍한 정치기술로 국민들을 속이라고?
의도는 알겠다만, 계속해서 원칙과 정의를 추구하면 비현실적으로 된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그리고 얄팍한 정치기술로 국민을 속이라는 말은 웃기는 소리지.
개별 개별 국민은 어리석기도 하고 지나치게 세속적이며 이기적일 수 있으나 다수 국민의 의견으로 가게 되면 항상 선택은 보다 다수을 위한 쪽이 승리하게 되어있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있다.
일시적으로는 다수 국민이 속아서 그릇된 판단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김근태는 간디와 네루의 길을 두고 이미 그 스스로 말했듯 네루의 길을 택했다.
정신적 지도자로의 길이 아닌 현실의 정치인의 길 말이다.
훌륭한 정치인은 현실을 도외시한 채 이상과 꿈을 좇는 사람이 아님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다만, 정치 소인배는 현실에 안주하지만 훌륭한 정치인은 현실을 바꾸어가고자 할 뿐이다.
현실을 모르고 어떻게 현실을 바꿀 것이며 이상이 없는데 어떤 방향으로 현실을 바꾸어가겠는가?
권력은 일단 잡고 보자는 얄팍한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나라도 불행해진다.
김근태가 그런 식의 인간이라면(아마도 그리하라고 해도 하지 못할 테지만) 내가 왜 그를 지도자로 내세워야 하나?
그 순간부터 그는 내가 지지하는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지.
내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그가 왕년에 내가 있던 민청련 의장이래서도 아니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 한자리 할까 해서도 아니다.
그나마 현재 한국 정치인 중에 그래도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집권을 하면 우리나라가 좀더 나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느낌으로 볼 때 그의 수준은 선진국 정치인들과 비교할 때 중상(中上)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가 들으면 섭섭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국정치에서는 최상이라고 나는 본다.
그래서 그가 변해서는 안된다.
그는 지금도 충분히 현실을 감안하여 정치적 행동을 취하고 있다.
(석고대죄니 단식과 같은 수순은 나도 정말 생각지 못한 의미있는 과정이었고, 정치기술적으로도 효과적인 것이었지. 남들이 정치 쇼라고 하더라도 그런 비판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쨌건 주장하는 바를 각인시키기에는 나름대로 훌륭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현실적으로 변하라고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질적 수준을 낮추라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길이다.
선진국의 중상 정도 상품 가치는 유지하고 그 정도의 정치적 서비스를 누릴 것인가 말 것인가는 국민이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상품의 가치를 잘 모르면 잘 아는 사람이나 물건을 팔 사람이 잘 알도록 노력할 일이지 어찌 잘 모르는 고객을 속이거나 물건의 질을 낮추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이냐?
김근태에 대한 장폴의 우려는 이미 우리 아버지나 우리 형이 나에게 했던 이야기들이다.
작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우리 아버지나 우리 형이 내가 김근태를 지지한다니까 대뜸 하는 말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양반들은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야 알간?
(물론, 나 때문에 계속 김대중 찍고 이번에는 노무현 찍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봐라 내 말대로 하니 어찌 되었건 그대로 이루어지잖아?)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당장 눈앞의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지 말고 보다 넓은 흐름을 읽어봐.
그리고 좀더 큰 세상을 봐.
그래도 내가 올린 글에 이렇게 반응을 보여줘서 고맙다 장폴아.
다른 친구들도 뭐라고 한 마디 좀 해 봐라.